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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웅열 신부 강론

이기적인 기도. 이타적인 기도/김웅열 토마스 아퀴나스

작성자하늘호수♡마리아|작성시간23.07.02|조회수173 목록 댓글 4
◼마태오 18,19-22
+찬미 예수님
주님의 이름으로 평화를 빕니다.
늘 묻는 말 ‘여기 어떻게 오셨습니까?’
그러면 정답은 ‘주님이 불러주셔서 왔습니다.’
불러주셨으니까 뭔가 하실 말이 있겠죠.
하실 말은 사제의 입을 통해서 아니면 여러분의 양심을 통해서 하실 겁니다.
또 주실 게 있을 거예요. 뭘 주실 거냐?
예수님이 공생활 시작하시면서 했던 첫 번째가 무엇입니까?
광야에서 누구랑 싸웠죠? 마귀, 악마랑 싸웠죠.
예수님이 하신 첫 번째 공적인 일은 구마입니다.
그다음에 신자들 만나면서 치유를 시작하셨어요.
구마와 치유가 이루어져야만 그 바탕에 하느님 말씀이 들어가기 때문에 그래요.
마귀 들려 있거나 너무 몸이 아프면 아무리 좋은 얘기를 해도 쉽게 와닿질 않아요.
그래서 예수님이 하신 일은 구마와 치유 그리고 말씀 선포죠.
그래서 오늘 여러분들한테 주실 선물은 주님께서 분명히 치유의 은사를 내려줄 거예요.
또 어둠이 있는 사람들은 구마의 은사까지 같이 받으실 겁니다. 아멘
그래서 여러분들이 여기서 떠날 때까지 항상 마음 자세는 ‘이 땅을 밟을 자격도 없는 난데 주님께서 나를 불러주셨다.’이고,
그 바탕에 주님의 축복이 내려가는 거죠.
이게 겸손한 마음이에요. 예수님 마음이죠.
그런 마음으로 머물다 가시면 참 좋을 것 같습니다.
 
어떤 부부가 정말 금실 좋게 잘 살다 부인이 병들어 죽었어요.
남자는 그냥 무덤에 가서 그냥 매일같이 울었어.
그리고 거기다 비석에다가 뭘 뭐라고 써냈느냐?
얼마나 그 마음이 아팠으면 ‘내 인생의 등불은 꺼졌다.’
그리고는 무덤 앞에 가서 헤어나지를 못하니 본당 신부님이 불러서 친구하라고 어느 자매를 소개했나 봐요.
한 일 년 지나고 난 다음에 친구처럼 지내다 정분이 난 거야.
그리고 신부님이 혼배성사를 주는데 형제가 끔찍한 거죠.
정말 와이프 세상 떠날 때는 ‘나는 앞으로 너만 생각하며 살 거야. 딴 여자 쳐다보지도 않을 거야.’
그랬는데 일 년 만에 이쁜 색시가 나타났으니.
신부님께 고민을 이야기했어요.
제가 비석에 ‘내 인생의 등불은 꺼졌다.’라고 적었어요.
그랬더니 신부님이 귀에 소곤소곤 이야기하니, 신랑이 신이 나서 나갔어요.
그리곤 돌 새기는 사람을 데리고 가서 비석 밑에 뭔가 새겼어요.
‘내 인생의 등불은 꺼졌도다. 그러나 또 새로운 등불이 켜졌다.’
자기 편할 대로죠.
 
오늘 복음의 핵심은 기도와 용서예요.
기도와 용서는 떼려야 뗄 수가 없어요.
기도하지 않으면 용서할 재간이 없거든요.
또 용서하려면 또 기도해야 해요.
 
인간은 참 변덕스러운 거 아시죠?
그리고 인간이 하는 기도 역시 아주 변덕스럽게 기도할 때가 되게 많아요.
오늘 예수님이 하신 기도 ‘둘이나 셋이 내 이름으로 모이는 곳에 내가 함께하겠노라.’
 
우리는 세례받기 전부터 지금까지 ‘기도’에 대한 얘기 많이 들었을 거예요.
여러분은 대자, 대녀가 ‘기도 어떻게 해야 하는 거예요?’ 하면 뭐라고 이렇게 설명해 주세요?
기도에 관하여 쓴 책만 해도 아마 하늘과 땅을 채우고도 남을 거예요.
성인 성녀들도 다 기도에 관한 얘기를 많이 하셨어요.
그만큼 물고기가 물을 떠나서는 살 수 없듯이 우리 믿는 자들이 기도를 안 하고서는 신앙생활을 한다고 할 수 없죠.
그건 종교인이에요.
사제도 기도 안 하면 신자들이 눈치채거든요.
우리 신부님 얼굴이 왜 저렇지?
강론에도 기도가 안 들어가는 강론은 그냥 읽는 거예요.
남의 것 베껴서 읽는 것 신자들이 너무 잘 알죠
단 5분을 강론하더라도 기도한 신부님이 하는 강론은 그 5분으로도 많은 변화를 일으켜요.
아무튼 기도가 정말 중요한데 오늘 예수님이 하신 얘기를 제가 몇 가지로 나누면 이겁니다.
첫 번째 기도는 절대 이기적이 돼서는 안 된다.’
이기적인 기도는 절대 응답받을 수가 없다 이겁니다.
아까 우리 기도가 되게 변덕스럽다고 그랬죠?
기도는 우리 자신만을 생각해서 자기에게 필요한 것만을 구해선 안 된다는 얘깁니다.
흔히 우리가 자신의 성공을 위해 기도하면 반대로 필연적으로 다른 사람의 실패로 전개가 되는 경우가 많아요.
예를 들어볼게요.
월드컵 축구대회를 하는데 프랑스와 브라질이 붙었어.
프랑스도 가톨릭 국가고 브라질도 가톨릭 국가예요.
양나라 성당에서 모든 신부님이 우승하게 해달라고 기도하고, 9일 기도 들어갔어요.
이러면, 아~ 하느님이 헷갈리는 거야
이게 도대체 어느 쪽을 기도를 들어주면 한쪽은 실패야.
그죠? 그러니까 이런 건 굉장히 이기적인 기도라는 거예요.
그래서 능력 있는 기도, 힘 있는 기도는 이기적인 요소가 완전히 제거되어야 해요.
이것이 예수님이 하신 첫 번째 이야기 ‘이타적인 기도를 해야 한다.’
 
제가 늘 그러죠, 우리 집 울타리를 뛰어넘는 기도 해라.
솔직히 이제껏 했던 기도의 99%는 여러분 집 울타리 안이죠.
내 새끼, 나 자신, 나와 같은 피와 살이 섞인 사람들, 내 집 울타리 안에 있는 사람들을 위한 기도였지.
TV를 보다가 우크라이나에서 애들이 막 피를 흘려요.
그것을 보고 우리 연민은 느껴요. 그리고 ‘쯧쯧’
아이고 ‘쯧쯧’은 강아지 부르는 거예요.
그것은 기도가 아니죠.
그걸 보면 바로 TV 앞에 무릎 꿇고 ‘주님 좀 가서 살려주세요. 도와주세요.’
그 절실한 기도는 하늘로 올라가서 예수님이 어떤 방법으로든지 그 아이 살릴 거예요.
그것이 살아있는 기도, 이타적인 기도예요.
 
성숙하지 않은 신앙인은 죽을 때까지 자기 핏줄만을 위해 기도해요.
내 새끼를 위해 기도할 것이 아니라, 내 새끼보다 더 힘든 아이들, 소년원에 있는 아이들, 불량 아이들,
이런 아이들을 위해 기도하면, 내 자식을 위한 기도는 그 안에 다 포함돼 있어.
‘나 여기 아파요.’ 이렇게 안 해도 다른 사람 아픈 것 기도하면 내 아픈 것까지 다 포함돼 있어.
이것이 바로 예수님이 원하시는 이타적인 기도예요.
성숙한 신앙인의 기도는 내 집 울타리를 뛰어넘어서 햇살처럼 번져 나가야 해요.
이제 오늘 이 순간부터 여러분들 나로만 집중되는 기도 마시고 이타적인 기도하세요.
주님이 원하시는 기도가 그 기도예요.
그 기도를 하면 놀랍게도 나 자신을 위한 기도는 안 해도 돼.
주님이 보시기에 ‘아이고 세상에, 자기도 지금 사면초가인데, 지 살려달라는 말을 한마디도 안 하고
자기보다 더 어려운 사람을 위해 기도하고 있구나.’
여러분이 하느님이라도 당연히 그런 사람 축복 줘요.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마음이지.
그래서 오늘 예수님 첫 번째 이기적인 기도는 안 된다. 이기적인 기도 응답받을 수가 없다.
힘 있고 능력 있는 기도는 이기적인 것이 완전히 배제된 기도 그게 성숙한 기도라는 거예요.
 
두 번째로는, 우리의 기도가 비이기적일 때 응답받는다고 했죠,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응답은 우리가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당신의 지혜와 당신의 사랑 안에서 보실 때
가장 선하다고 생각되는 걸 주신다는 거예요.
쉽게 말하면은 내가 ‘이거 주세요’한다 해서 똑같은 것이 손에 들어오지는 않는다는 말이죠.
내가 원하는 그 모양으로 주시지 않을 수도 있다는 거예요.
예를 들어, 이가 다 썩은 아이가 사탕 달라고 사탕 줄 엄마는 없어요.
당장 주면 애는 좋아하지만, 자꾸 먹이다 보면 얘가 나중에 더 고통을 당해.
그러면 엄마는 그것 안 주고 다른 것을 줘요.
달라는 대로 주었을 때 해가 될 것으로 생각되면 저 위에 계신 분은 다른 모양으로 주신다는 거예요.
 
이것이 두 번째 오늘 예수님이 하시고자 하는 얘기예요.
너희들의 기도가 이기적이 아닐 때 내가 분명히 응답을 줄 거야.
그렇지만 저희가 원하는 모양으로 안 내려갈 수도 있어.
그렇다고 해서 내가 응답 안 주는 것이 아니란다.
 
여러분들 저녁에 온 식구들이 잠자리 든 모습을 보면 ‘주님, 오늘 제 기도 들어주셨군요.’ 하며 감사 기도 나오잖아요.
아침에 집 나가서 죽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 줄 알아요?
교통사고로, 심장마비로, 화장실에서 일어나다가 그냥 미끄러져서 뇌진탕으로도, 정말 죽는 이유도 수도 없어요.
사람이 사는 것과 죽음은 정말 가까워요.
정말 잠깐 사이에 삶에서 죽음으로 넘어가요.
하루하루 사는 것이 우린 기적이야.
 
내가 늘 얘기하죠.
아침에 눈 뜨면 제일 첫 기도가 뭐 하라고 그랬어요?
잡소리와 잡생각이 내 귀와 의식을 지배하기 전에 눈이 떠지면 누운 채로 제일 먼저 내 몸에 축성하라고 그랬죠.
그러면서 같이 따라오는 기도가 ‘주님 살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조그만 땅덩어리에서도 하룻밤 사이에 죽는 사람도 수백 명이래요.
그리고‘ 주님 오늘 하루 제 생애 마지막으로 알고 열심히 살겠습니다.’
이것이 우리 신앙인들이 아침에 눈 뜨면서 바치는 첫 번째 기도예요.
그 첫 단추 기도를 잘못 채우면 종일 이기적인 기도를 할 수밖에 없어.
그래서 내가 원하는 모양으로 원하는 때에 손에 쥐어지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주님은 반드시 그 기도가 이타적인 기도라고 생각이 드실 때는 어떤 모양으로든지 응답을 주신다는 거 믿도록 하십시오.
 
세 번째로 오늘 예수님은 정말 중요한 얘기를 하셨죠.
이 기도 때문에 오늘 남북 화해를 위한 주일이 만들어진 거예요.
둘 셋이 내 이름으로 모이는 곳에 내가 함께 있겠다.’
내 이름으로 모이는 곳에 항상 그들 가운데 내가 있겠노라.
 
둘 셋부터가 우리는 공동체라고 얘기를 해요.
둘 셋이 모이는 곳, 어디가 떠올라요? 교회가 떠오르죠.
교회는 여럿이 모여있는 공동체에요.
반 모임, 레지오, 성서 공부, 꾸르실료 등등.
미사 봉헌할 때만이 아니고, 반 모임 할 때, 레지오 할 때, 성서 공부할 때도 역시 예수님의 이름으로 모여야만
그 안에 주님이 함께하신다는 얘기죠.
예수님은 숫자에 지배되는 분이 아닙니다.
아무리 적은 수가 모이더라도 믿는 사람들이 모이는 곳에는 어디나 그분은 함께 계신다는 얘기입니다.
또 둘 셋이 모이는 게 뭐 있어요? 가정이죠.
가정생활에서도 이 기도는 적용이 됩니다.
둘 셋은 아버지와 어머니, 자녀를 말하는 것이죠.
예수님께서도 모든 가정에 눈에 보이지 않는 손님으로 계신다는 것 여러분들 아시죠?
천주교 신자 집에는 대개가 천주교 교우의 문패가 십자가로 붙어 있습니다.
문을 열고 들어가면 십자가 고상이 거실에 있고, 방마다 책상 위에 있든 벽에 있든 항상 걸려 있어요.
하지만 방마다 프랑스제 십자가가 걸려 있다고 해서 거기가 성가정은 아닌 거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를 해야 합니다.
아침저녁 기도를 같이하는 것이 가장 좋은데 매일이 안 된다면, 최소한 일주일에 한 번 주말만이라도
식구들이 같이 모여서 저녁 기도라도 한번 바쳐야 하지 않는가.
‘우리 집안은 각자 각자 알아서 잘해요.’ 그것도 좋아.
혼자 하는 기도도 중요하지만, 주님이 더 좋아하시는 것은 둘이나 셋이 함께하는 공동체 기도를 좋아하신단 말이에요.
그것이 바로 식구들 부모와 자식이 같이 모여 하는 기도.
구교 신자들은 온 식구들이 모여서 저녁에 만과 바치지 않으면 잠잘 수가 없었어요.
또 으레 그런 줄 알아요.
내가 사제 생활 40년 동안 힘들고 어려울 때마다도 기도를 놓치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신학교에서 배운 훈련이 아니에요.
신학교 들어가기 전에 우리 부모님께 배운 거예요.
그게 그대로 남아 있는 거예요.
사제의 인성과 사제의 기도하는 모습은 이미 부모한테 물려받고 들어가는 거예요.
신부 될 때 갑자기 인성이 바뀌는 것도 아니고, 사랑 많은 부모 밑에서 자란 사람이 나중에 신부가 돼도 사랑이 많아.
차가운 부모 밑에서 자란 사람이 신부가 되어도 역시 차가워요.
물질에 찌든 부모 밑에서 자란 사람이 신부가 되면 나도 모르게 돈 욕심을 갖게 돼요.
그래서 신학교를 추천하는 본당 신부는 그런 부분을 많이 봐야 해요.
제 기억으로 내가 두 사람을 신학교에 안 보낸 적이 있어요.
사람 하나만 보면 참 똑똑해. 그런데 그 부모를 보면 못 보내겠어.
왜냐면 그 상처가 분명히 그 아이에게 들어가 있어.
지금 겉으로 다 포장하고 살지만 언젠가는 드러날 수밖에 없어.
부모가 너무 엉터리로 사는 사람들이었죠.
내가 신학교 보내지 않은 학생은 나를 원망했었대요.
자기 신부 될 운명인데 왜 막았냐고.
그런데 다른 교구 가서도 또 안 됐어요.
어둠이 드러나는 거죠.
다른 학생들과 어울리지 못하고 혼자만 있고, 결국 신학교 2학년 때 잘렸어요.
 
신학교에선 그것이 제일 중요해요.
아무리 기도 열심히 해도 볼 찰 때 같이 차야 하고 등산할 때 같이 가야 해요.
 
가정 공동체와 또 교회 여러 공동체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모이긴 모였는데,
문제는 그 안에 예수님이 안 계신 공동체가 있어요, 없어요? 너무나 많죠.
모두 예수님의 이름으로 만들어진 공동체인데도 불구하고 어느 가정은 백 프로 냉담자고,
어느 레지오 팀은 열 명인데 서로 미워하는 사람들이 많아서 나중에 숫자가 줄어들어.
그 안에는 예수님이 안 계신 거죠.
그래서 이름으로만 모이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그 안에 예수님이 계셔야 합니다.
 
자 지금 기도에 대해 중요한 것 세 가지를 얘기했어요.
첫 번째, 이기적이 되어서는 안 된다.
두 번째, 비이기적인 기도를 하더라도 내가 원하는 것의 응답을 그대로 기대하지 마라.
하느님께서 하느님이 원하시는 응답을 주실 것이다.
세 번째, 둘이나 셋이 모이는 곳에 내가 함께하겠다고 하셨으니,
항상 우리는 둘 셋이 모일 때 그 자리에 주님이 계심을 믿어야 합니다.
 
오늘 강론의 핵심이 기도와 또 뭐라고 그랬어요? 용서.
그 용서 얘기는 어디서 나온 거예요?
오늘 베드로 사도가 갑자기 생뚱맞게, 베드로 사도는 생뚱맞은 적이 많아요, 갑자기 예수한테 질문해요.
‘누가 나한테 잘못하면 몇 번 용서해야 합니까? 일곱 번이면 되겠습니까?’
베드로는 칭찬받으려고 그랬던 거야.
왜? 유대인들에게 완전한 숫자는 삼이야.
일곱이면은 완전한 숫자 두 개를 합치고 하나를 더 더한 거죠.
그러면 예수님이 ‘그래 일곱 번 용서하면 돼.’ 할 줄 알았더니 뭐라 하세요?
일흔일곱 번을 용서하라 하시죠.
그 얘기는 결국 무한히 용서하라는 얘기에요.
아까 얘기했죠, 예수님은 숫자에 구애받는 분이 아니라고.
그 일흔일곱 번이라는 것이, 그러면 일흔여덟 번째부터 죽여요?
그 뜻이 아니죠?
기도를 통하여 인내심을 가져서 무한히 용서하라는 뜻이야.
예수님 무한이 용서하시는 것 보여주고 돌아가셨잖아요.
창으로 옆구리를 쑤셔대는 대도 ‘에잇틴, 식스틴’ 하며 욕 안 했잖아요.
얼마나 아프고, 얼마나 저주하고 싶겠어요.
살아있는 사람의 옆구리를 쇳덩어리를 가지고 창자를 후비는데.
그런데 ‘아버지 저자들은 자기가 하는 걸 모르고 있습니다. 용서하십시오.’ 하셨죠.
 
우리가 기도하려 할 때 기도를 막는 큰 장애물 중 하나가 뭐냐용서 못 하는 거예요.
용서 못 할 때는 기도가 안 돼요. 여러분들 체험하시잖아요.
그렇죠? 미움이 있을 때 기도됩니까? 그것은 해치우는 거죠, 마지 못해.
기도 안 돼요.
신약성서의 일괄되게 흐르고 있는 교훈은 뭐냐하느님에게 용서받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을 용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내가 하느님에게 용서받기 위해서는 나에게 상처 준 사람을 먼저 용서해야 한다.
그래서 제물을 드리려 할 때 너랑 웬수 진 사람이 생각나거든 제물 그대로 놔두고 화해하고 난 다음에 제물을 바쳐라, 하죠.
 
여러분들 기억하십니까?
유튜브 열심히 들으신 분들은 기억할 텐데 구약이나 신약이나 흐르고 있는
하느님께서 기쁘게 받으시는 제물이 되려면 세 가지 조건이 있어야 한다고 그랬죠.
세 가지 맞히면 내가 쓰던 묵주 드릴게요.
첫 번째 뭐예요?
묵주 주려고 준비했는데 굳었네.
첫 번째바치는 제물에 흠집이 없어야 하고,
두 번째바치는 제물이 살아 있어야 하고,
세 번째 제물을 들고 직접 제단 앞에 나가야 한다.
 
첫 번째 살아있는 재물이어야 한다.
구약의 그 제사장들은 죽은 비둘기, 죽은 염소 안 받았어요.
살아있는 제물이라는 것은 신약적인 의미로 여기면 ‘살아있는 기도’ ‘살아있는 순명’입니다.
죽은 기도할 때가 얼마나 많아요, 그리고 마지못해서 하는 죽은 순명할 때가 얼마나 많아요.
눈치 보면서 하는 봉사가 아니라 살아있는 봉사, 살아있는 봉헌.
그것이 하느님이 받아들인 제물의 첫 번째 조건이에요.
종일 묵주 들고 있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 한 단을 바쳐도 살아있는 기도를 해야지요.
 
두 번째는 뭐라 그랬어요? 바치는 재물에 흠이 나 있으면 안 된다.
구약의 제사장들은 비둘기 깃털이 빠져 있으면 퇴짜, 염소 뿔에 금이 가 있으면 퇴짜, 발톱이 부러지면 퇴짜,
온전한 재물이 아니다 이거예요.
신약적인 의미로 흠집이 나 있으면 안 된다는 것을 어떻게 받아들이면 되나?
우리가 죄를 지으면 우리 영혼에 기스가 나요.
죄의식이라고 하는 금이 가요.
그래서 사제들은 이 흠집 제거하기 위해 늘 미사 전에 어디가 들어가 기다리고 계세요?
죄를 지어서 영혼에 남아 있는 흠집, 흉터를 제거하고 하느님 앞에 온전히 나아가게 하려고
전 세계의 모든 사제는 고백소에서 기다리는 거예요.
 
마지막 세 번째 뭐라 그랬죠? 제물을 들고 직접 제단 앞에 가야 합니다.
냉담 중인 남편이 꼴에 양심은 있어서 주일마다 성당 나가는 아내에게 ‘나 대신 헌금 넣어줘.’
그 헌금 하느님 안 받는다 이거예요.
백만 원을 주면서 나 대신 헌금통에 넣어달라고 그래요.
하느님 안 받아요.
물론 난 받아. 돈 주는데 왜 안 받아. 그런데 저분을 안 받아요.
본인이 직접 들고 정성스럽게 제단 앞에 나와야 해요.
 
그래서 사람은 용서받기 위해서 용서해야 한다는 거예요.
자기 이웃을 용서하지 않고서 하느님의 용서를 기대할 수 없다는 얘기죠.
하느님의 용서와 사람의 용서는 나란히 평행해요.
용서의 삶을 살아 사는 사람들에게 하느님에게 향하는 기도는 막힘이 없을 거예요.
고속도로처럼 쫙쫙 우리 기도는 올라가요.
 
그래서 여러분들 늘 명심하세요.
내가 하는 기도가 살아있는 기도인가?
내가 봉헌하고 있는 이 봉헌이 사심이 있고 흠집이 있는 봉헌은 아닌가?
또 세 번째는 내 몸뚱아리는 주님 앞에 갔는데
유체 이탈 현상이 생겨서 1시간 미사 내내 내 영혼은 딴 데서 돌아다니다 강론 끝나면 다시 쏙 들어와.
유체 이탈, 의학용으로 뇌사 상태.
이것은 몸뚱아리는 앞에 나가 있어도 본인이 나가 있는 것이 아니에요.
살과 뼈만 앉아 있는 거예요.
정신이 예수님 앞으로 나가 있어야 해요.
 
오늘 주님께서 중요한 얘기 하셨어요.
물론 주님의 기도도 예수님이 가르쳐준 기도죠.
사실은 주님의 기도 내용을 보면 내가 지금 했던 얘기가 다 들어가 있어요.
 
우리의 기도가 주님께서 보시기에 아름다운 기도인지 자꾸 점검해야 합니다.
나도 모르게 이기적인 기도로 흘러갈 때가 있어요.
나도 모르게 죽은 기도를 하는 자신을 발견할 때가 있어요.
저는 화살기도를 굉장히 많이 해요. 그것이 습관이 돼 있어요.
뉴스를 보다가 정말 불쌍한 장면을 보면 잠깐 눈 감고 기도드립니다.
‘성모님, 도와주세요.’
그러면 나 대신에 착한 사마리아 사람이 그 사람 도와줄 거예요.
그런 기도가 바로 이타적인 기도요. 주님이 원하시는 기도라는 거 명심하도록 합시다.
 
2023년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기도의 날 (6/25) 김웅열(느티나무)신부님 강론
출처http://cafe.daum.net/thomas0714 (주님의 느티나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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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별향기 | 작성시간 23.07.03 아멘 감사합니다 💕
  • 작성자창수선화 | 작성시간 23.07.03 아멘! 감사합니다 ~❤
  • 작성자바람의노래 | 작성시간 23.07.03 아멘. 감사합니다.
  • 작성자발아래 | 작성시간 23.07.03 아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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