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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웅열 신부 강론

겸손은 모든 미덕의 어머니/김웅열 토마스 아퀴나스

작성자하늘호수♡마리아|작성시간23.07.13|조회수126 목록 댓글 5

■ 마태오 11,25-30

+찬미 예수님

주님의 이름으로 평화를 빕니다.

오늘 미사 오신 분들은 전라방 우리 느티나무 가족입니다.

아마 여기 오늘 온다고 잠을 설치신 분들 있고 마음이 부산하셨을 텐데,

아까 말씀드린 대로 내가 선택해서 온 길이 아니라 주님이 초대해주셔 오신 거죠.

 

이 ‘초대’라는 것은 오늘 복음의 주제와도 일맥상통합니다.

초대. 여러분들 사시면서 누구 초대받아 본 적도 있고 또 누구를 초대해본 적도 있을 겁니다.

어느 쪽이 더 부담스러우십니까?

그런데 초대할 때 마음 편하게 초대할 수 있는 사람이 있기도 하지만, 굉장히 조심스럽게 신경이 많이 쓰이는 초대도 있죠.

허물없이 아는 사람 그리고 그냥 편하게 아랫사람일 때는 별 부담이 안 돼요.

‘와서 밥 한 끼 먹어.’

하지만 어른을 초대할 때는 어때요? 정말 신경이 쓰이죠.

점검하고 또 점검하죠.

특히 여러분 중 본당 신부님 자기 집에서 식사 대접해보신 분 한번 손들어보세요.

여긴 4분이나, 높은 확률이네요.

저는 일단 전라도분들의 DNA는 음식을 기본적으로 잘하는 걸로 알고 있어요.

제가 광주신학교 나왔고, 전라도 음식을 10년 먹었단 말이에요.

참 맛있게 잘 먹었어.

본당 신부를 자기 집에서 식사하게 대접해보고 싶지 않은 신자는 없을 거예요.

그런데 모시고 싶어도 여건이 잘 안 맞는 거예요.

또 막상 대접하려면 굉장히 어려운 일처럼 생각이 되기 때문에 포기해버리는 수가 종종 있어요.

내가 2005년에서 2010년까지 감곡성당 본당 신부였었죠.

떠날 무렵에 본당 신자들한테 되게 심각하게 얘기했어요.

당신들 너무한 거 아니냐. 여기 5년 동안 기를 써서 빚 갚아주고 성지 개발했는데,

어떻게 나한테 밥 한 끼 먹자는 신자들이 한 명도 없냐?

딱 한 번은 있었어. 본당 총회장 양반 집.

그래서 좀 서운하다 그랬어요. 그랬더니 미사 끝나고 본당 총회장이 쫓아왔어요.

신부님께 죄송한데, 신자들이 신부님 모시는 것 생각도 못 한다고.

왜? 신부님은 전 세계구야.

전 세계를 다니시는 분이라 분명히 미식가일 거다, 시골 아줌마가 차려준 음식은 분명히 안 드실 거다.

다들 그렇게 생각한대요.

아니 웃기는 거지, 입에 맞는지 안 맞는지는 물어봐야지 왜 미리 판단하고 상상해요?

사실 저는 이제 외모와는 다르게 되게 음식이 촌스러워요.

그냥 간만 맞으면 일 년 열두 달 김치찌개 하나만 가지고 밥 먹어.

된장 맛있으면 그것 하나로 밥 먹어요.

난 단순하거든.

그 얘기를 하고 내가 두 달 후에 감곡을 떠났는데 정말 두 달 동안 많이 기대했어.

그래서 달력에다가 오늘은 누구 표시하면서 하루 두 끼는 나가서 먹겠구나! 기대했죠.

그런데 단 한 사람도 초대하는 사람이 없었어요.

그래서 감곡 신자들 생각하면 그것이 서운한 거예요.

여러분들도 알아들으라는 얘기예요.

지금 딴 나라 얘기하듯이 멀뚱멀뚱 쳐다볼 게 아니라 순서를 짜란 말이에요.

제가 익산을 못 가, 군산을 못 가, 광주를 못 가겠어요.

나 가지고 있는 것은 시간밖에 없어요.

아셨죠? (웃음)

 

오늘 주님은 우리를 당신 집에 초대하셨습니다.

예수님 뭐라고 하셨어요?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지고 허덕이는 사람은 다 나에게 오거라. 내가 편히 쉬게 하리라’

이것이 주님의 초대예요.

편히 쉬게 하리라고 하는 말을 다른 말로 하면은 내가 너희를 치유시키리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초대받아서 치유의 미사에 오신 거죠.

예수님의 초대는 분명히 세속의 초대와는 전혀 성격이 다르겠죠.

평화의 초대입니다.

술타령이나 춤이나 근사한 음식이 있는 초대가 아니죠.

괴로워하는 자와 같이 괴로워하시고, 슬퍼하는 자와 같이 울어주고,

또 아픈 사람을 위로하기 위해 포근하게 감싸주는 그런 평화의 초대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은 세상의 초대와 당신의 초대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점 두 가지를 얘기하고 계세요.

첫 번째는 뭐냐?

대부분 세상 사람들은 자기보다 부자나 권력 있는 사람들을 초대하기를 선호해요.

그들을 초대해서 무언가 이득을 얻고자 하는 경향이 없지 않아 있다 이거예요.

틀린 말 아니죠?

조금 대접하고 몇 곱절 얻어보고자 하는 이기심의 초대일 때도 상당히 많다는 거예요.

초대를 통하여 대차대조표를 만든다는 얘기죠.

그렇지만 주님이 우리를 초대할 때는 우리에게서 뭘 얻고자 초대하는 게 아니고 주시고자 초대하시죠.

그래서 부자보다는 가난한 자를 초대하세요.

성경에도 권력자보다는 약한 자와 무거운 짐에 억눌려 있는 사람들을 예수님은 늘 초대하셨어요.

예수님은 부잣집에 가신 적 없어요. 그렇죠? 정말 가난하고 힘든 집에 머무르셨죠

그리고 두 번째로 주님의 초대와 세상의 초대와 다른 건 뭐냐?

세상 사람들은 보통 초대할 때 내 마음에 드는 자, 내가 좋아하는 자,

나한테 잘해주었던 자 그리고 친척이나 친지나 가까운 자, 내 지인들을 주로 초대합니다.

그렇지만 주님은 사람을 가려서 초대하지 않으신다는 거예요.

모든 사람을 초대하시며 당신의 도움을 애타게 기다리고 당신을 지극히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초대되기를 그분은 간절히 바라고 계시죠.

 

이것이 주님의 초대 성격 두 가지입니다.

첫째 얻고자 초대하는 것이 아니라 주시고자 초대하신다.

둘째 사람 가려가면서 초대하는 것이 아니라 모두를 다 초대한다.

이것이 세상 사람들의 초대와 주님의 초대 차이점이에요.

 

그러면 답은 나왔지만 이러한 주님의 초대에 응할 자격이 있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일까?

어린이와 같은 겸손한 마음을 가진 사람, 겸손과 온유한 마음을 가진 사람.

그래서 오늘 복음 서두에서는 뭐라고 합니까?

‘지혜롭고 슬기롭다는 사람들에게는 숨기시고, 철부지들에게 드러내 보이시니 감사합니다.’

주님의 초대에 응할 자격이 있는 사람은 이렇게 순진무구한 어린아이 같은 마음을 가진 사람이죠.

여기서 철부지는 철이 없다는 뜻이 아니죠. 순진하다 깨끗하다는 의미에요.

지혜롭고 슬기롭다는 사람들에게는 숨기신다고 그랬어요.

다시 말하면은 지적인 교만에 빠진 자는 주님의 초대에 응할 수가 없어요.

그리고 응했다 하더라도 안 가요.

예수님 시대에 많이 배우고 소위 지도자라고 하는 사람들은 바리사이, 율법학자들이죠.

모두 다 지적인 교만으로 머리끝에서 발가락까지 꽉 차 있던 사람들이었어요.

이 교만 자체가 그들에게는 스스로가 큰 짐이었어요.

그렇지만 체면 때문에 그 교만을 내려놓을 수가 없는 거예요.

권위 있게 보여야 하고, 멋있게 보여야 하고, 늘 기도하는 것처럼 다른 사람들에게 인정받아야 하는 시기였죠.

이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은 지적인 교만에 빠져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의 초대에 응하지 않았던 겁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내일 월요일 복음에, 혹시 월요일 복음 읽어보신 분 계십니까?

지금 뒤지지 말고요, 바로 답이 나왔다면 내 주머니에 묵주 주려 했어요.

 

내일 복음에는 두 가지 기적이 일어나죠.

회당장이 와서 예수님께 엎드려 절하며, ‘제 딸이 방금 죽었습니다.

그러나 가셔서 아이에게 손을 얹으시면 살아날 것입니다.’ 합니다.

회당장은 그 마을에 최고 원로예요.

그런 그가 나그네 방랑 스승인 예수님 앞에 와서 엎드려서 절했대요.

그러면서 제 딸이 죽었습니다. 제 딸 좀 살려달라고 그래요.

그래서 예수님이 그 딸 살리러 가는 중에 또 어떤 사건이 있었느냐?

십이 년 동안 하혈하던 여자가 뒤에 와서 예수님 옷자락을 잡아요.

치유되죠.

그래서 그 여인 때문에 회당장 집으로 가는 시간이 늦춰졌어요.

그래도 예수님은 가시죠.

갔더니 초상이 나 북도 치고 꽹과리도 치고 있었죠.

예수님께서 시끄러우니 모두 나가라 하시고, 시체로 누워있는 소녀의 손을 잡고 일으켜요.

‘탈리타 쿰, 일어나거라.’

내일 복음은 치유 사화와 소생 사화가 같이 일어나는 굉장히 드라마틱한 복음이에요.

그런데 내일 복음에 나오는 회당장 외에는 대부분의 율법교사와 바리사이인들은 문어처럼 머리만 커요.

지적 교만 영적인 교만이 가득 차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의 초대에 응할 수가 없었죠.

물론 예수님이 설교할 때 그 자리에는 있었던 율법교사도 있었지만 간 목적은 뭐예요?

꼬투리 잡으려고, 뭔가 꼬투리를 잡아서 ‘죽여야 해. 우리한테 도전하는 사람이야.’

신성 모독죄를 동향 파악하러 간 거예요.

 

어떤 성인이 그러셨어요.

‘하느님 말씀의 정착지는 머리가 아니라 가슴이다.’

우리를 천국으로 못 가게 하는 삼대 불감증이 있다고 내가 참 많이 얘기했는데 뭐죠?

첫 번째 은총의 불감증, 두 번째 죄의 불감증, 세 번째 말씀의 불감증.

 

은총의 불감증 환자들은 뭐냐? 은총 찾아 삼만리!

은총은 찾아 헤매 돌아다녀서 얻는 게 아니라,

이미 와 있는 은총을 겸손하게 발견하고 고백하고 감사하고 마지막에 봉헌까지 이르러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여러분 집에서 하느님의 은총을 발견 못 하면, 이 세상에 있는 피정 다 하고 돌아다녀도 은총 못 받아요.

피정 가서 얻는 은총은 뭐냐?

세상에~ 내 식구가 은총 덩어리였구나.

내 와이프가 은총 덩어리였고 내 남편이 은총이었구나.

저 사람 때문에 내가 기도할 수 있고, 아픈 내 가족 때문에 내가 하느님 앞에 무릎 꿇을 수 있었구나.

그래서 은총은 찾아 헤매는 것이 아닙니다.

내 역사 안에, 고통스러운 역사도 있고 힘든 역사도 있지만,

그 역사 안에 나와 함께 현존하셨던 예수님을 느끼는 것이 바로 은총입니다.

은총 불감증 걸린 사람은 가장 가까운 데서 은총을 못 찾아요.

그래서 그냥 자극적이고 감각적인 곳만 찾아다녀요.

 

두 번째 죄 불감증 환자가 있다고 그랬죠.

자기는 죄지은 적 없대요.

운동장에 줄 세워놓고 이쪽은 죄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 저쪽은 본인이 죄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서라 하면,

죄의 불감증 환자는 당당하게 의인 쪽 줄에 딱 서요.

지금 이 자리에도 미사 드리는 신부를 비롯해 다 죄 덩어리 인간들만 있죠.

본인이 죄 없다고 생각하시는 분들은 그냥 집에 가세요.

그렇게 거룩하신 분은 여기 있을 필요가 없어요.

여기에는 저 성인분들, 그리고 예수님만 의인이에요.

죄의 불감증 환자들은 늘 손가락이 남을 향하죠

자기가 지은 죄는 늘 변호해요. 그리고 합리화를 시켜요.

다른 사람이 지은 죄는 그냥 칼을 잡고 후벼 파내죠.

우리는 반대가 되어야 하죠.

자기 자신이 지은 죄에 대해서는 준엄한 검사가 되어야 하고, 다른 사람이 지은 죄는 변호사 노릇을 해야 합니다.

‘저 사람이 저렇게 하기까지 어떤 과정이 있을 거다. 저 사람의 어두운 모습은 뭔가 뿌리가 있을 거다.’

그것을 이해하려고 애쓰다 보면 그 사람한테 측은지심이 들고 쉽게 용서할 수 있어요.

 

세 번째 불감증은 말씀의 불감증 환자.

말씀의 불감증 환자들은 알기는 되게 많이 알아요.

성서 공부도 많이 하고 안 다녀본 피정 없고 세미나 다 해.

그리고 실제로 얘기해 보면 아주 유식해요. 성경도 많이 알고.

그런데 문제는 뭐냐? 머리에만 들어가 있어.

그 지식이, 내가 배우고 들은 그 지식이 겸손의 재료가 되지 않고 교만의 재료가 돼.

그래서 오히려 안 들은 것만 못해.

그리고 가슴은 마른 사막처럼 쫙쫙 갈라져 있어요.

 

이렇게 영적 교만으로 가득 차서 하느님에 대한 지식이 머리에만 있는 사람들은 특징이 있어요.

늘 사람들을 판단해요.

눈 뜨면서부터 내 주변 사람, 가족에서부터 본당 신부까지 하루에도 수십 번 판단해요.

차 타고 가면서 지나가는 사람 보고도 판단해.

 

성인이 뭐라고 그랬다고요?

하느님의 말씀에 정착지는 머리가 아니라 가슴이다.

거기에 내가 한 마디 덧붙인다면은 ‘가슴으로 느낀 것을 열매를 맺어야죠.’

느낌으로 끝나서는 안 됩니다. 열매를 맺어라.

내가 항상 피정 끝에 마지막 하는 얘기가

‘오늘 수많은 얘기를 들으셨을 겁니다. 하지만 그것 다 열매 맺을 생각하지 말고 한 가지만 정하세요.

저것만큼은 내가 열매를 맺자. 그러면 이렇게 피정 갈 때마다 말씀 들을 때마다 한 가지씩 열매 맺고 애를 쓰면

우리 죽을 때 성인 돼서 죽을 거고. 악습으로부터 우리는 해방될 수 있을 겁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머리로만 아는 자들, 행동이 따르지 않는 자들은 다 지적인 교만에 빠진 자들이죠.

 

복음을 영접해 드리는 것은 교만이 아니라 겸손입니다.

겸손한 사람에게만 복음이 살아서 움직여요.

어떤 사람이 솔로몬만큼이나 지혜롭다고 할지라도, 그의 순진성이 어린아이와 같지 않다면 그는 신앙인이 아닌 거죠.

데레사 성녀는 그런 얘기를 하셨어요.

‘겸손은 모든 미덕의 어머니이며 교만은 모든 악덕의 뿌리다.’

 

인류의 첫 조상의 교만 뭐였습니까?

하느님과 똑같아지려고 하는 거였죠.

‘그 과일 먹으면 눈이 밝아진다.’

인류 첫 조상이 지은 죄는 교만의 죄예요.

첫 조상의 교만은 세상의 죽음을 가져왔죠.

천사의 교만을 악마로 변화돼서 영원한 불 속에서 벌을 받게 되었던 겁니다.

 

따라서 우리가 교만할 때 틀림없이 악마를 닮아가고 있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그런 상태가 되면 주님의 집에 초대되기는커녕, 끝내는 지옥 불의 벌을 면치 못하게 될 겁니다.

겸손한 자의 멍에는 가볍고 짐도 가볍게 느껴집니다.

 

소아마비가 걸린 동생을 6년 동안을 업고 다닌 형이 있었어요.

10리 시골길을 땀을 흘리면서 두 다리를 못 쓰는 동생을 업고 다녔죠.

동생도 조금씩 자라서 6학년이 되어 형은 동생이 무거워 허리가 꼬부라져도 업고 다녔죠.

사람들이 기특하다 하면서 물도 주면서 좀 쉬었다 가라 하시고, 지게도 빌려주는 분도 계셨죠.

그러면서 학교도 다니지 않았지만 오로지 동생을 위해서 사는 형에게 물었어요.

‘힘들지 않냐?’

그랬더니 그 형 하는 말, 길게도 얘기 안 했대요.

‘안 힘들어요. 내가 사랑하는 동생이잖아요.’

사랑으로 지고 사랑으로 운반하는 짐은 언제나 가벼워요.

하지만 솜털처럼 가벼운 무게도 억지로 지는 짐은 천근만근의 무게로 우리를 짓누를 거예요.

사랑으로 지는 짐은 가벼워요.

그래서 예수님 내가 주는 멍에는 가볍다고 그랬잖아요.

 

오늘 이곳에 초대받은 여러분들도 주님이 주실 선물 잘 챙겨 어떤 일이 있어도 마귀와 타협하시면 안 됩니다.

입에서는 너무 달지만, 마귀가 준 그 사탕을 먹으면 죽는다. 뱉자.

또 아무리 입에서 소태처럼 써도 하느님이 주신 선물이면 꾹 참고 삼키자.

결국에는 그런 사람이 승리해요.

그런 사람이 인격자고 그런 사람이 참다운 신앙인이죠.

신앙은 쉽게 하는 게 아니에요.

신앙은 취미 생활이 아니잖아요.

세례는 받았지만 죽을 때까지 취미 생활로 사는 사람들이 많죠.

그런 사람들 우리는 종교인이라고 불러요.

그러나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예수님 가르침을 지키려는 게 얼마나 힘들어요.

그렇지만 영생을 보면서 정말 열매를 맺으려고 애쓰는 사람을 우리 신앙인이라고 불러요.

지금 우리 교회에는 종교인들만 득실득실하지 신앙인 찾아보기가 힘들어요.

얼마나 냉담자들이 많아요.

성당마다 50%가 뭐야, 60%까지 육박했어요.

냉담자들이 코로나 터지니까 더 신났죠.

핑계가 없었는데 다 냉담하는 거예요.

 

여러분, 신앙인으로 살아가도록 애씁시다. 아멘.

 

♣2023년 연중 제14주일 (7/09) 김웅열(느티나무)신부님 강론

출처: http://cafe.daum.net/thomas0714 (주님의 느티나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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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댓글 리스트
  • 작성자귀임 마리아 | 작성시간 23.07.13 🙏🏼아멘~ 감사합니다🥰
  • 작성자별향기 | 작성시간 23.07.14 아멘 감사합니다
  • 작성자창수선화 | 작성시간 23.07.14 아멘! 감사합니다 ~❤
  • 작성자바람의노래 | 작성시간 23.07.14 아멘~감사 합니다
  • 작성자발아래 | 작성시간 23.07.14 아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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