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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웅열 신부 강론

죄인이 성인 되는 교회 /김웅열 토마스 아퀴나스

작성자하늘호수♡마리아|작성시간23.07.26|조회수141 목록 댓글 4

◼마태오 13,24-30
 
+찬미 예수님
주님의 이름으로 평화를 빕니다.
오늘 오신 분들은 멀리 경남방 신자들이시죠.
부산, 진주, 함안, 또 김해, 양산, 울산, 사천 등, 얼핏 어제 와서 주무신 분들도 있다고 들었어요.
워낙 거리가 머니까, 또 아침에 떠나신 분들도 일찍 떠나셨을 겁니다.
경상도 말도 ‘욕봤습니다.’
그런데 여기 왜 오셨나요?
‘하느님이 불러주시어 왔다’
이제는 자동으로 나오네요.
그런데 이것은 들어서는 아는데, 문제는 정말 마음으로 그렇게 느끼느냐가 중요한 거죠.
이 사제관은 은퇴한 사제가 사는 사제관이지만 어떤 개인 사제관의 의미는 이미 벗어났어요.
왜냐하면 이 사제관 안에는 성인들의 유해가 85분이 계세요.
이 경당에 63분의 유해와 십자가 보목 조각이 두 점이 모셔져 있고요.
그리고 내 서재에 열두 사도의 유해를 비롯하여 23점의 유해가 모셔져 있고 또 가장 큰 십자가 보목이 한 점 있습니다.
그래서 여기는 제가 혼자 살기에는 참 어려운 집이에요.
어느 때는 옷도 편하게 입지 못할 때도 있어요.
여기가 공식적인 성지는 분명히 아닙니다.
그렇지만 전 세계에 이렇게 많은 성인 유해가 모셔진 곳은 없을 겁니다.
은퇴하기 전에는 감곡, 배티, 서운동 성당 매 첫 토요일 은총의 밤 때 몇 분씩 제대 앞에 모셨었죠.
그리고 3부에 제가 치유 성가 불러드리고 안수하면서 십자가 보목을 빰에 대드렸었습니다.
참 아름다웠던 시간이었는데 코로나가 터지고 난 다음부터 끊어져서
마지막 은퇴 성당인 서운동 성당에서 참 서운하게 끝났습니다.
어떤 분들은 어떻게 그렇게 많은 성인 유해를 모실 수 있었는지, 성인 뼈 모으는 것이 취미냐고 물으시기도 합니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사제 생활 40년 동안 한 점 한 점 성인들의 유해가 오신 것에는 다 사연이 있죠.
그런데 저는 아직도 왜 이분들이 한국 땅에 있는 이 김 신부한테 이렇게 같이 살자고 저렇게 떠나지 않으시는지 이유를 잘 몰라요.
제가 배티 성지 있을 때 박물관도 지었습니다.
그 박물관을 지을 때 사실은 성인 유해 전시관도 같이 지으려 했어요.
그런데 그 당시 주교님은 저와 생각이 좀 다르셨던 것 같아요.
최양업 신부님의 성지에 왜 다른 성인들의 유해를 왜 모셔야 하느냐 하셨죠.
나는 수많은 성인 성녀들이 울타리를 쳐서 기도해주면 얼마나 빨리 최양업 신부님이 시복 시성 이루어질까가 생각했죠.
그리고 83분의 성인 성녀의 세례명을 가진 분들도 전국과 전세계에서 경배하러 올 것이다.
그러면 그것 하나만으로도 배티 성지는 세계적인 성지로 발돋움할 것이다.
이것이 제 마인드였어요.
결국 성인 유해관을 짓지 못하면서 내가 몸담은 청주교구는 이 성인 유해가 머물 장소가
아니구나 생각했고, 지금도 계속 찾고 있습니다.
내가 영영 살면 계속 모시고 있겠지만,
언젠가 저도 세상을 떠날 텐데 그전에 이분을 편하게 모셔줄 건물이나 수도원이 있으면 좋겠습니다.
성인 유해가 제 개인 소유가 아니죠.
정말 모든 신자가 와서 기도할 수 있는 장소만 준비된다면 언제라도 저분들은 떠나실 수 있다고 봅니다.
그래서 여기는 은퇴한 사제의 개인 사저가 아닙니다.
그리고 여러분들이 여기 오는 과정은 다 각자가 다르고 외관상으로 볼 때는 여러분들이 온 것처럼 보이고,
또 신청해서 왔으니 자기 선택이죠.
아까 여러분들 제가 어떻게 오셨습니까 했을 때 아주 쉽게 대답하셨죠.
그냥 아는 것이 아니라 ‘정말 오늘은 주님이 불러서 오셨구나. 감히 이 거룩한 곳에 올 자격이 없는 나지만
오늘 복음에 나오는 것처럼 어찌 보면 밀보다는 가라지처럼 산 적이 많은 나지만 주님이 이 죄인을 불러주셨구나.’
이 생각으로부터 이 미사는 시작이 돼야 해요.
 
저는 사실 은퇴하면서 고민이 많았어요.
무슨 고민이냐?
은퇴하기 전에도 저는 많은 일을 하고 살았습니다.
그래서 은퇴 후에는 깊은 수도원으로 들어갈 생각도 했었어요.
스위스에 있는 봉쇄 수도원도 연락을 취해보았죠.
인연을 끊고 죽을 때까지 봉쇄 수도원에서 이제는 내 영혼 구령을 위해서 기도하면서 마지막 삶을 살고 싶다.
그래서 그 길을 가야 하는가 또 아니면 다시 계속 신자들을 만나야 하느냐 그 고민을 한참을 했었습니다.
그러다가 내린 결론이 주님이 나한테 주신 직무는 숨이 끊어질 때까지 신자들에게 말씀을 선포해야 한다는 확답을 받았죠.
지금은 예약이 다 되어 있어 언제라도 가면 수도자들과 똑같이 1년을 살 수 있어요.
그때는 혼자 기도하고 올 겁니다.
나이 더 먹기 전에 그리고 몸 건강이 더 나빠지기 전에 해야 하는데, 그래서 마음이 복잡할 때도 있어요.
이렇게 정원 공사하면서 내가 영원히 여기서 살 것도 아니고, 가만히 있어도 누가 뭐라 하지도 않는데
왜 생고생을 하는가 하는 어둠이 올 때가 있어요.
그러면 예전에 성지 개발할 때도 그랬지만 똑같은 생각으로 그 어두운 구름을 몰아냈어요.
그 바람은 무슨 바람이냐신자들의 행복이에요.
그래 ‘신자들이 해피하면 영적으로 해피하면’ 그게 목적이다.
어느 성당 어느 성지 가든지 간에 일을 벌여놓습니다.
그 일은 내가 즐기려고 하는 것이 아니죠.
교우들이 세상 밖에서 얼마나 많은 상처를 받고 살아요.
그렇지만 내가 치유 받을 수 있는 장소, 차에서 내리면서부터 치유가 되는 그런 장소를 만드는 것이
나한테 주어진 사명이 아니겠는가.
물론 말씀으로도 치유해야 하지만 그런 장소도 필요하죠.
그래서 아마 성지에서도 힘든 고비 고비를 신자들의 해피 스피리트(happy spirit), 영적인 행복 때문에 넘기는 것 같아요.
나도 사람이기 때문에 힘들 때 있고 도망치고 싶을 때도 있죠.
도망친다고 누가 뭐라고 안 그래요.
여러분들 일주일에 네 번 유튜브 방송하는 것 쉬울 것 같아요, 어려울 것 같아요? 어려워요.
지난 대림 시기부터는 못 했던 월 목 토를 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전에는 화 수금을 했어요.
일요일은 항상 있었고, 그러니 이번에는 토 일 월 삼일을 연속으로 해야 해요.
이것이 쉬운 일이 아니죠.
준비하면서 ‘주님이 이것 알고 계실까, 이렇게 애쓰는 것 그래도 알고 계시겠지.’
그리고 예수님의 삼대 유언이 무엇인지 혹시 기억나세요?
온 세상에 뭐 하라고요? 복음을 선포하기 첫 번째.
두 번째 유언은 이 세상 사람들이 하나가 되게 해주십시오, 사랑으로.
마지막 세 번째 이게 중요하죠. 내 살과 내 피를 먹고 마셔라.
이것이 예수님의 3대 유언이기 때문에 우리 신자들은 이 세 가지를 지켜야만 하죠.
부모가 세상 떠나면서 자식한테 ‘그래 내 마지막 부탁이다.’ 하면 자식은 어떻게든지 지키려고 애를 쓰죠.
못 지키면 내가 이게 불효자라고 생각하죠.
 
세상에 복음을 선포하는 것, 그것은 평신도건 사제건 마찬가지예요.
그 의무는 다 있어요. 의무에서 거룩한 책무예요.
저는 숨이 끊어질 때까지 복음 선포해야 해요, 힘이 들어도.
그리고 신자들이 하나가 되게 여러 가지 이벤트도 많이 만들어 주어야 해요.
그리고 매일같이 주님의 성체 성혈을 축성하면서 나한테 기도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 지향을 두고
미사 때마다 하느님께 그분들을 봉헌해야 하죠.
그래서 이 세 가지의 직무를 계속 해야 해요.
 
교회가 참 머리를 잘 썼다고 느끼는 것이, 그전에는 은퇴 신부들에게 원로 사목자라는 말을 안 썼어요. 그냥 은퇴 신부였죠.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사목자라는 말을 끝까지 붙여, 은퇴해도 사목하라는 말이죠.
그러다 보니까 아파트에서 그냥 온종일 혼자 있는 은퇴 신부들은 괜히 죄의식을 가져요.
그런데 내가 너무 부럽대요.
김 신부는 은퇴해서 더 바쁜 거 아니냐는 거죠.
은퇴 후 3개월까지는 전화도 오고 전 회장도 식사도 하자 했는데, 3개월 지나니 아무도 안 온대요.
혹시 여러분 주변에 은퇴하신 신부님 계시면 잘 챙기세요.
본당 신부님, 세례 준 신부님, 병원에 계신 신부님도 은퇴하신 분 있을 거 아니야 그렇죠?
특히 오늘 주일은 노인들, 나이 드신 은퇴한 신부님들도 생각하는 날이죠.
 
오늘 여러분들은 저를 만나서 미사 드리는 것이 아마 첫 번째 목적이었겠죠.
그렇지만 이 자리에는 김 신부가 감히 신발 끈도 풀어드릴 수 없을 정도로 거룩한 성인 성녀들, 프란치스코 성인, 클라라 성녀,
아우스틴 성인부터 4 복음사가, 아네스 성녀, 마리아 고레티, 바오로 사도, 베드로 사도의 유해까지 전부 다 모셔져 있어요.
그렇기에 여러분들은 내용적으로는 성지에 와 계신 것으로 생각해도 된다는 얘기죠.
그러면, 주님이 부르셨으니까 하실 말이 있겠죠?
하실 말은 사제 입을 통해서 하실 거예요.
그리고 이따 음악 치유 시간에도 음악을 통해서도 문을 두드릴 거예요.
또 주실 것도 있을 거예요, 불렀으니까.
무엇을 주실까요?
치유의 은혜, 구마의 은혜, 그리고 믿음의 은혜를 세 가지 선물을 주실 거라는 겁니다.
그런 마음으로 우리들이 이 장소에 머뭅시다.
나는 여러분들 이 자리에 처음 앉았을 때 얼굴 모습을 다 훑어봤어요.
그리고 지금 내가 얘기하기 시작한 지 한 10분이 넘었는데 조금씩 조금씩 여러분 얼굴이 변화되는 걸 봐요.
그리고 주님이 저에게 주신 선물 중 하나는 신자들의 아픔을 저는 느껴요.
영이 아프든지, 몸뚱아리가 아프든지 간에.
제가 말했죠.
저는 피정 때 말로 강론하지만 계속 치유 기도를 보내고 있다.
그래서 사제를 통해서 분명히 치유시킬 것이고, 더 나아가서 성체를 통해서 완전한 치유와 구마가 분명히 이루어질 겁니다.
아멘
그래서 여러분들을 오늘 불러주셨다는 것을 명심하도록 하십시오.
 
오늘 복음을 묵상합시다.
제가 질문을 좀 많이 하는 거 아시죠?
질문을 해서 너무너무 기가 막히게 답을 잘하는 사람은 주머니에 있는 묵주도 막 줘요.
자, 인류 역사상 인류가 하늘에다 하는 질문 중에서 제일 첫 번째가 뭔지 아세요?
통계가 나온 게 있어.
하늘에다 대고 삿대질하면서 하는 질문 첫 번째.
답을 못하시니 내가 알려드릴게요.
당신이 있다면 왜 악한 놈들을 가만히 내버려 둬?’
오늘 밀과 가라지 이야기가 나오죠.
왜 악을 내버려 두냐 이겁니다.
신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주장이 뭔 줄 압니까?
물론 우리 신자들도 가끔 그런 생각을 가질 때가 있기도 해요.
‘하느님이 있다면 세상에 못된 놈들, 악인들을 왜 그대로 놔두시는가, 악이 제거되지 않는 것을 보아서 신은 없다.’
이것이 무신론자들의 주장이에요.
선한 사람들은 뼈 빠지게 고생하고 남의 눈에서 눈물 흘리게 했던 못된 사람은 어떻게 잘 살게 내버려 두냐 이거죠.
하느님이 정말 있다면 그놈들 벌줘야 하지 않느냐 이거지.
이 질문은 2천 년 동안 계속, 그리고 예수님 전에도 있었어요.
그러다가 예수님이 오늘 이 복음을 통해서 기가 막힌 답을 주신 거예요.
그래서 현재의 우리는 이미 2천 년 전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오늘 복음에서 들었어요.
 
오늘 가라지라고 나오죠?
어느 미친 농부가 밀 씨를 뿌리면서 잡초 씨도 같이 뿌리겠어요, 정신병자죠.
분명히 밀 씨만 뿌렸어요.
그런데 희한하게 잡초가 올라오죠.
이 가라지는 다 자라 누렇게 되기까지 밀과 구별하기 정말 힘들어요.
잔디와 잔디밭의 잡초처럼 비슷해요.
잡초가 잔디랑 비스무리하게 진화해요.
차이는 잔디는 뿌리가 옆으로 퍼져 있어 하나 뽑으면 주욱 뽑히는데 잡초는 그냥 뽑혀.
그런데 생긴 것은 똑같아요.
자꾸 비슷하게 진화해요.
악은 진화해요자꾸 진화해요.
그래서 유대 땅에 있는 이 가라지는 누렇게 되기 전에는 구별이 매우 힘들기에 일찌감치 가라지를 뽑으려 하다가는
아까운 밀까지 뽑아버릴 위험성이 충분히 있었겠죠.
그리고 이삭이 패여 구분이 가능할 때가 되어도 뿌리가 서로 엉켜 있기에 함께 뽑힐 수가 있었던 거예요.
처음에 싹이 올라올 때는 밀 싹인지 가라지 싹인지 정말 구분이 안 돼요.
그런데 농부는 오랜 경험을 통해서 기다리는 거예요.
그러다가 줄기가 올라오면서 조금 표시가 나겠죠.
어리석은 농부는 뽑으려고 하지만, 경험이 많은 농부들은 안 뽑아요.
왜? 땅 밑으로 알아요.
이 가라지 뿌리가 밀 뿌리를 칭칭 감고 있죠.
나 뽑아봐. 나 혼자 안 죽어. 저놈 끌고 나갈 거야.
오랜 농부는 그런 경험이 있기에 줄기가 올라와서 가라지 줄기와 밀 줄기가 표시가 나도 내버려 둬요.
확 뽑아버리면 뭐까지 뽑혀요? 그렇지. 밀.
그러다가 이제 누렇게 익어 밀도 뽑아야 할 때가 되면 인정사정없이 뽑아요.
땅바닥에 뿌리가 엉겨 있지만, 그냥 쫙쫙 찢죠.
그리고 오늘 복음에 뭐라고 그래요?
가라지는 따로 태워버리고 밀은 곳간에다가 차곡차곡 쌓는다.
 
어떻게 인류 질문에 대해 주님께서 이렇게 답을 속 시원히 하실 수 있었을까?
예수님은 당시의 풍습, 농사짓는 방법을 통해서 인류가 물어왔던 제일 큰 의문에 대해서 오늘 설명하고 계세요.
세상에는 밀, 다시 말하면 선만 있는 것이 아니라 가라지, 악도 함께 있다는 얘기죠.
의인만 있는 것이 아니라 악인도 같이 있다는 얘기죠.
추수꾼인 하느님께서는 최후 심판 때 모든 악을 없애버리시는 분이심을 오늘 가르쳐주고 계십니다.
당장에 이 세상에서 악인을 처벌하시길 희망하는 사람들에게는 뭐라고 그럽니까?
참고 기다릴 것을 권고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악인인지 선인인지의 판단은 너희가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한다고 하셨어요.
29절에 뭐가 나옵니까?
‘가만두어라. 가라지를 뽑다가 밀까지 뽑으면 어떻게 하겠느냐?’
연약한 밀 하나하나를 소중히 여기시는 하느님의 모습을 우리는 알 수가 있습니다.
 
여러분들 생각해보세요.
우리들이 원하는 것처럼 우리가 죄를 지을 때마다 그 자리에서 하느님이 벌을 주신다면 지금 여러분 중 몸 성한 사람 없어요.
남 얘기할 때마다 이가 하나씩 뽑혔다면 지금 다 틀니하고 있을 겁니다.
그죠?
주일 빠질 때마다 발가락이 하나씩 부러졌다면 지금 발가락 다 부러져 있을 거예요.
내가 죄를 지을 때마다 즉결 심판을 안 받는다고 해서 주님이 연세가 많아서 우리를 못 보는 게 아니죠.
네 놈이 지금은 가라지처럼 살아도 너도 회개하면은 밀이 될 수 있는 거야.’
 
식물 세계에서는 가라지가 밀이 될 확률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0 프로야.
백 년, 천 년이 지나도 식물 세계에서는 가라지는 가라지로 태어나 가라지로 죽어요.
그러나 영적인 세계에서는 가라지가 밀이 될 수 있어요. 그렇죠?
 
가톨릭교회는 어떤 교회예요?
처음부터 밀이 들어와서 밀로 살다 죽는 교회가 아니에요.
죄인이 의인이 되는 교회죠.
 
수많은 성인 성녀들, 하다못해 프란치스코 성인도 어릴 때부터 복사하고 예비 신학교 다니고 그랬던 사람이에요?
아니죠. 부잣집에 개망나니였죠.
그런데 클라라가 문둥이 굴에 가서 빵을 주는 것을 보고 충격받죠.
왜? 좋아했거든요.
그것을 보고 사람이 바뀐 거예요.
그래서 수도원을 만들어서 청빈의 삶을 살며 기울어져 가는 중세 교회를 일으키셨죠.
 
바울로 사도는 어떤 사람이에요?
처음부터 사도였어요? 뭐 하던 사람이야?
그리스도 신자를 잡아 죽이던 사람이에요.
원로원에서 자격을 받아 그리스도 신자들 잡아 죽이던 사람.
첫 번째 순교자인 스테파노 부제가 죽을 때 그때 옆에 있었죠.
돌로 쳐죽일 때 흐뭇하게 미소 지었던 사람이에요.
‘내가 오늘 큰일 했구나!’
그런데 언제 바뀌었죠?
다마스쿠스에 천주교인들이 모여 있다는 얘기를 듣고 다마스쿠스로 가는 길에 고갯길에서 빛이 쏟아진 거예요.
말이 놀라고 그 위에서 떨어져 눈이 멀었죠.
사람들 손을 잡고 마을로 가 하나니아스에게 안수와 세례를 받고 먼눈이 뜨이죠.
그러면서 그리스도 신자들을 처참하게 잡아 죽이는데 앞장섰던 사울이라고 하는 인간은 없어지고 뭐로 바뀌어요?
바오로가 된 거예요.
가라지가 밀이 된 거죠.
천주교는 죄인이 회개하는 교회지 의인이 들어와서 의인으로 죽는 교회가 아니죠.
예수님도 세 번 넘어졌는데 여러분들이 뭐라고 안 넘어지려고 기를 써.
넘어지는 건 죄가 아니에요.
넘어졌다가도 안 일어나는 것이 더 큰 죄죠.
 
여러분, 선과 악은 확연히 구분되는 것이 아니라는 거 아시죠?
여러분들 마음속에도 선과 악이 같이 공존하죠.
피정하고 집에 가서 여러분 얼굴 보면 하얀 얼굴이 보여요.
하다못해 유튜브 강론을 듣고도 행복하다 하면서 여러분의 얼굴을 보면 얼굴이 예뻐 보일 거예요.
그런데 남편과 한바탕 싸우든지, 아이와 한바탕 싸우든지, 레지오 단원과 또 한바탕 싸우든지
상처받은 얼굴로 거울을 보면 내 안에 어둠이 들어와 있는 것이 보이잖아요.
그렇죠? 얼굴은 내 마음의 창이에요.
눈은 더욱더 그래요.
아기들의 눈을 보면 얼마나 이뻐요.
그런데 그 이뻤던 눈이 커가면서 썩은 동태처럼 자꾸 변해가요.
흐리멍덩해지고 맑은 기라고는 점점 없어져요.
포악한 살인범들 눈 보면 무서워요.
눈에서 정말 불이 나요. 눈만 봐도 사람을 죽일 것 같아요.
살기라고 하지 않습니까?
 
오늘 예수님은 영적인 악은 바로 잡을 수 있고 선으로 바뀔 수 있음을 아시기 때문에
초보 농부처럼 성급한 판단이나 단죄보다는 인내를 요구하고 계십니다.
내 가까운 옆에 가라지 같은 놈이 있어 하는 것마다 정말 못된 짓만 해.
있을 수 있죠?
나쁜 놈, 죽일 놈, 지옥에 갈 놈, 저놈 지나가다가 비행기 타이어 안 떨어지나 하며 오만 저주를 다 해.
그런 놈이라 하더라도 나보다 나은 성인이 될 수 있다는 거예요.
그리스도 신자들 잡아 죽이던 그 사울이 어떻게 사도 이름을 붙일 수가 있냐 이거예요.
 
그리스도 제자들은 그리스도 신자들은 미운 사람 나쁜 사람 사회악 세상의 악 이런 것들이 내 곁에 있다고 해서
조급해하고 비관적으로 절망적으로 살기보다는 오히려 어떻게 살아야 해요?
겨자씨와 누룩의 역할을 하면 되는 거예요.
저놈이 나한테 어둡게 한다고 나도 같이 어둡게 하면 더 큰 어둠이 만들어져요.
어둠을 이기는 건 뭐밖에 없어요?
악을 이기는 건 뭐밖에 없어요?
악을 이기는 것은 악이 아니라 선이에요.
여러분들, 낮이 길어지면 밤이 짧아지고 또 밤이 길어지면 낮이 짧아져요,
어떤 신자들은 포커스를 밤에만 맞춰요.
‘죄 지면 안 돼, 죄 지면 안 돼, 죄 지면 안 돼.’
이건 밤에만 포커스를 맞추고 사는 것이죠.
그런 신자들은 늘 세심증에 빠져요.
그쪽에 포커스를 맞추지 말고 ‘그래 내가 누룩의 역할을 하자.’
좋은 쪽, 선한 것만 하다 보면 자동으로 죄지을 시간이 없어져요.
하지만 죄에 대한 강박 관념에 사로잡혀 있다 보면 자꾸 내 안의 어둠이 점점 커지면서 빛이 들어올 시간이 점점 줄어들어요.
 
내가 사제로 볼 때 되게 열심히 해요.
그런데 어두운 열심한 사람이 있어요.
열심히 하긴 참 열심히 해.
그런데 대화하다 보면 굉장히 부정적인 말투를 많이 써요.
왜 저럴까?
하다못해 어저께 내가 이 의자를 새로 놨어요.
다리 쪼그리고 앉아 맨날 쥐가 났죠.
내 강론이 오 분에 끝나면 문제가 없는데, 시동 걸리면 피정 같으니.
너무 힘들어하길래 쿠팡에서 의자를 사서, 나사 12개씩 조이고 밑에 테이프까지 붙여 혼자 다 조립했죠.
자리 정리하면서 신자들이 좋아하겠다고 생각하는데 이런 생각도 드는 거예요.
이왕 사는 것 뒤에 허리 받침대 있는 것 사시지 졸다가 자빠지면 어떻게 하나 생각하는 인간도 있겠지?
하지만 ‘신부님 그전에 되게 불편했는데 너무 좋아요.’ 하는 분도 있겠죠.
이렇게 똑같은 것을 보고도 항상 부정적으로 걱정거리를 생각하는 사람이 있죠.
 
그런 말 있잖아요.
좋은 포도주를 먹는데 반을 먹고 어떤 사람은 ‘세상에! 내가 반이나 먹었어.’
어떤 사람 ‘세상에! 아직도 반이나 남았어.’
똑같은 거예요.
짚신 장수, 너무 유명한 이야기 아시잖아요.
딸 둘을 뒀는데 하나는 우산 장수한테 시집보내고, 작은딸은 짚신 장수한테 시집보냈죠.
비 오기만 하면 엄마는 울기 시작해.
누구 생각하고? ‘아이고 큰일 났네. 짚신 못 팔아서 우리 큰딸 어떻게.’
그런데 아버지는 비만 오면 춤을 춰.
누구 생각하고? ‘아이고 이제 우산 팔아서 호박죽이라도 끓여 먹겠구나.’
이 아버지와 어머니한테 똑같이 비가 오고 똑같이 해가 떴지만, 엄마는 늘 징징징.
엄마는 징징거리다 세상 끝나죠. 절망 주의자, 회의론자.
아버지는 희망론자야. 그리고 미래 지향 주의자에게요.
 
예수님께서 오병이어의 기적을 행할 때 제자들에게 어디 먹을 것이 없느냐 물었죠.
그때 다른 제자들은 ‘왜 나한테 시키세요’ 했죠.
그런데 안드레아만 ‘내가 나가서 찾아볼게요. 주님이 알아서 하시겠죠.’
그래서 아이가 가지고 있는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오고,
오천 명을 먹이고도 열두 광주리가 남는 기적이 일어나죠.
열두 제자도 이제껏 수많은 기적을 봤는데도 불구하고 코앞에서 직무가 나한테 떨어지면 ‘저 못해요.’합니다.
예수님은 돌멩이 가지고도 빵 만드실 수 있는 분이죠.
열두 제자도 인성이 다른 거예요.
 
그러면 여러분들은 짚신 장수 비유에서 엄마와 아빠 쪽에서 누굴 선택해야 해요?
아버지 쪽. 아이고 아는 건 선생이야!
그런데 왜 맨날 징징거리고 삽니까?
 
밀가루 반죽이 부풀어 오를 때까지 계속 그 속에 들어가서 없어지는 누룩처럼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교회라는 커다란 나뭇가지로 자라나 그 가지에 선인과 악인 모두 회개시켜서 깃들 수 있도록
우리는 그 역할을 하고 살아야 하죠.
선인과 악인의 판별은 마지막 때 누가 한다고요?
그렇죠. 예수님.
우리는 아무에게도, 그 누구에게도 돌을 던질 수가 없다는 얘기예요.
 
나 자신이 가라지같이 살고 있다 해도 얼마든지 밀이 될 수 있다는 희망이 있다는 거죠.
주위에 가라지 같은 사람이 있다 해도 심판해서는 안 되고, 그를 위해 기도해주어야 합니다.
영적인 세계에서는 가라지가 밀이되는 것은 얼마든지 가능한 이야기입니다.
그리스도 교회는 죄인들의 교회지 처음부터 밀이 모여 생긴 교회가 아닙니다.
12사도들도 보세요. 변변했던 분이 어디 있어요?
그렇지만 모자람에도 불구하고 가라지처럼 살았던 그들을 사도로 쓰셨죠.
그렇다면 매일 성체를 모시는 우리야말로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주님을 첫 자리에 놓고 산다면 절대 가라지가 될 수 없어요.
묵주 잡고 기도하며 살면 흔들리다가도 자리 잡을 수 있음을 명심하도록 합시다.
아멘
 
2023년 연중 제16주일 (7/23) 김웅열(느티나무)신부님 강론

출처http://cafe.daum.net/thomas0714 (주님의 느티나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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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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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안나쌤 | 작성시간 23.07.26 아멘!
  • 작성자바람의노래 | 작성시간 23.07.26 아멘~감사합니다
  • 작성자발아래 | 작성시간 23.07.26 아멘. 감사합니다.
  • 작성자충주 헬레나 | 작성시간 23.08.02 아멘 ~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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