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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웅열 신부 강론

주님의 거룩한 변모 축일/김웅열 토마스 아퀴나스

작성자하늘호수♡마리아|작성시간23.08.09|조회수97 목록 댓글 4

◼마태오 17,1-9

+ 찬미 예수님

주님의 이름으로 평화를 빕니다.

오늘은 주님의 거룩한 변모 축일입니다.

아름답게 변화되는 것, 또 영적으로 변화되는 것은 우리 인간들의 특히 우리 신앙인들에게는 분명히 목표입니다.

성모님의 말씀대로 지금은 분명히 환난의 시대입니다.

환난의 시대에 별의별 일들이 다 일어나고 있지요.

한국도 세계에서 가장 안전한 나라라고 소문이 나 있었지만, 요 며칠 사이에 벌어진 일을 보면 참 말문이 막힙니다.

글쎄요, 이 무더위 때문에 사람들이 이렇게 난폭하게 표현하는 건지, 그건 아닐 겁니다.

어제 강론에 어느 젊은 형제가 걱정하는 마음을 긴 댓글로 써주셨는데 전적으로 동감합니다.

누구 한 사람의 잘못은 아닌 것 같고요, 어찌 보면 국민 회개 운동을 해야 하는 상황입니다.

저도 많은 강론의 핵심의 주제는 바로 ‘회개’인데,

알아들으시는 분은 알아듣지만, 정작 들어야 할 사람들은 듣지 못하기 때문에 문제가 되겠지요.

참 마음이 많이 아픕니다.

또 억울하게 다치신 분들 빨리 쾌유하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젊은 사람들이 그렇게 묻지마 폭력을, 또 테러하는 세상이 됐다고 하는 것이 참 많이 가슴이 아프죠.

너의 잘못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나의 잘못이다.’ 하는 마음으로 살아야만 이 아픔은 좀 치유가 될 것 같습니다.

그리고 또 그런 짓을 한 사람들도 어찌 보면 심한 환자들입니다.

또 잠재적인 환자들도 왜 없겠습니까?

그리고 그런 환자들이 많을 때는 사회가 불안하고 두려움을 느끼게 되겠죠.

 

오늘 복음은 마태오복음을 읽었지만, 사실은 루카 복음에도 나오고 마르코 복음에도 나옵니다.

예수님께서 타볼 산에 오르셔서 모세와 엘리야를 만나서 이야기를 나눕니다.

그런데 루카 복음에는 좀 더 디테일하게,

또 어찌 보면 이 사도들의 약점으로 잡혀질 수도 있는 얘기지만 진솔하게 그대로 나옵니다.

‘깊은 잠에 빠졌다가 깨어나고 난 다음에 이런이런 얘기를 하더라’ 하는 그런 식으로 나오죠.

아무튼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은 루카 복음에서 보면 깊은 잠에 빠져서 예수님이 그렇게 아름답게 변화되는 것

또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님과 대화를 나누는 장면을 목격하지 못합니다.

왜 잠이 들었을까? 그 중요한 순간에.

모세가 어떤 예언자입니까? 또 엘리야가 또 어떤 예언자입니까? 또 예수님이 어떤 분이십니까?

그 세 분이 모여 대화하는 것 자체가 역사적인 것인데 도대체 얼마나 졸렸기에,

또 혼자만이 아니라 세 명이 모두 깊은 잠에 빠졌다가 깨어났다고 루카 복음은 표현하고 있을까?

정말 깊은 잠에 빠졌던 것일까?

아니면 오늘 복음에 나오는 것처럼 세 분이 얘기하는 것을 보고 ‘베드로가 나서서 예수님께 말하였다.

‘여기에 지냈으면 좋겠습니다.’’가 사실인가?

저는 성경 공부를 연구하며 여러 가지 주석서를 보았지만 정확한 답을 찾아내지 못했습니다.

아무리 성서학자라 하더라도 그 당시 그 자리에 있었던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정확하게 알 수는 없겠죠.

아무튼 루카 복음의 표현이 맞는 건지, 마태복음의 표현이 맞는 건지, 세 제자가 정말 잠이 들어 있었던 건지

아니면 눈 동그랗게 뜨고 예수님이 만나는 장면을 보고 있었던 건지 정확한 답이 나오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깨어 있었든지 깊은 잠에 빠졌든지 어느 쪽에 포커스를 맞추느냐에 따라서

우리들이 얻는 영적 효과는 분명히 있는 것 같습니다.

저는 잠이 들었다는 쪽에 포커스를 맞추어 보았습니다.

루카 복음사가는 그냥 잠깐 조는 것이 아니라 깊은 잠에 빠졌다가 깨어났다고 표현합니다.

‘베드로와 그의 동료들이 깊은 잠에 빠졌다가 깨어나서

예수님과 또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모습과 같이 서 있는 사람들을 보았다’라고 합니다.

바로 그분들이 누구라고요?

모세와 엘리야였다.

 

그래서 오늘 복음의 주제는 깊은 잠입니다.

우리는 인생에 있어서 우리의 정신과 마음이 졸고 있기에 잠에 빠져 있기에 많은 것을 놓치는 경우가 많지요.

우리의 정신을 우리의 마음을 쉽사리 졸게 하는 것이 분명히 몇 가지가 있습니다.

첫 번째는 편견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자기 기준으로만 모든 것을 판단하는 편견으로 너무나도 자기 생각에 집착해서 마음을 닫아버리는 수가 있습니다.

사람마다 살아온 환경, 배운 것, 또 어떤 인성의 차이에 따라서 가지고 있는 잣대에 차이가 생깁니다.

같은 30cm 자라 하더라도 어떤 사람은 정확히 30cm에 가깝지만 어떤 사람은 모자라기도 하고 또 길기도 합니다.

아무튼 눈금이 정확지 않은 이 잣대를 가지고 또 눈금이 정확지 않은 추를 가지고 하느님을 판단하고 또 주변을 판단합니다.

사람들을 판단합니다.

어설픈 잣대죠.

마태복음 7장 1~2절에 ‘남을 심판하지 마라. 그래야 너희도 심판받지 않는다.

너희가 심판하는 그대로 너희도 심판받고, 너희가 되질하는 바로 그 되로 너희도 받을 것이다.’라고 나옵니다.

남을 심판하는 대로 하느님의 심판을 받을 것이고 남을 저울질하는 대로 저울질을 당할 것이라는 말이죠.

 

우리들이 영적으로 성숙하는데 우리를 졸게 만드는 이 어두운 밤 중 하나가 바로 자기 판단, 자기 편견이라는 겁니다.

주변에 보면 남에 대해서 절대로 좋은 얘기 안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대상이 사제건 수녀건 교우건 간에 항상 어떻게 해서든지 나쁜 얘기, 부정적인 얘기를 갖고 그 사람을 평가합니다.

이런 사람은 가까이하면 안 됩니다.

이런 사람을 가까이하면 놀랍게도 물듭니다.

‘악의 연대성, 어둠의 연대성’이라고 하는 것은 참 신비스럽습니다.

그래서 오죽하면 옛날 어느 성인의 어머니는 자식의 교육 때문에 이사를 세 번 갔다 하죠?

아무튼 예수님을 못 보게 하는 영적인 잠 거룩하게 변모하신 예수님을 못 보게 했던 영적인 잠은

그 첫 번째가 편견이라고 저는 생각이 됩니다.

이 편견이 많은 사람은 늘 쉽게 판단합니다.

그리고 이 판단은 교만이라고 하는 어둠으로 자라납니다.

 

두 번째로는 저는 영적인 잠을 정신적인 혼수상태라고 얘기하고 싶습니다.

아예 복잡한 것은 생각 자체를 안 하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플라톤이 얘기하기를 ‘고뇌하지 않고 또 음미하지 아니한 삶은 살 가치가 없다.’ 했습니다.

모든 것을 포기해버리고 그야말로 혼수상태가 되어 너무나 무기력하게

현재 내가 고민하고 해결해야 할 문제를 절대 직면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냥 될 대로 되라 입니다.

어쩌면 이번에 일어난 여러 가지 젊은 사람들의 흉기 난동 사건도 분석해보면 분명히 맑고 깨끗한 정신은 아니었을 겁니다.

혼수상태, 영적인 뇌사에 빠진 사람이라고 생각이 됩니다.

그러한 영적인 혼수상태의 시작에는 분명히 역사가 있을 겁니다.

어린 시절부터 부모에게 받은 상처라든지, 또는 학교에서 받은 상처, 어떤 열등감 등,

이런 것들이 그 사람을 혼수상태에 빠지게 합니다.

그래서 현재 내가 나에게 어떤 문제가 있는지, 또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지를 볼 수 없게 만들지요.

 

우리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제가 가끔 얘기하지만, 뇌사 상태에 빠져서 미사 하시는 분들 종종 있죠.

한 시간 동안 몸뚱아리는 성당 안에 앉아 있지만 딴 데 가있다 옵니다.

한 시간 내내 묵주는 들고 있지만 뇌사 상태에 빠져서 기도하고 있는, 그야말로 유체 이탈 식의 기도를 하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신자들도 사제들을 볼 때, ‘정말 우리 신부님은 전례문 하나하나를 정성을 다하고

또 강론 준비를 정말 정성을 다하시는구나’하는 것을 압니다.

그러나 ‘신부님 오늘 그냥 해치우듯 미사를 드리시는 것 같다. 생각은 딴 곳에 가 계신 것 같다, 강론 준비 전혀 안 했구나.’

하는 것도 신자들은 눈치챕니다.

그 위치가 어디에 있건 간에 정말 정신 차리지 않으면 영적인 뇌사 상태에 빠지게 됩니다.

 

저는 우리들을 깊은 잠에 빠지게 하는 세 번째 원인을 무관심이라고 표현합니다.

이 무관심이라고 하는 잠에 빠지기 시작하면 무책임한 인간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자기가 관심 가지고 사는 것은 극히 제한되어 있죠.

그 외의 것은 아무런 관계가 없습니다.

 

사람을 비유할 때 거미처럼 사는 사람, 개미처럼 사는 사람, 벌처럼 사는 사람이 있다 합니다

거미처럼 사는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거미는 자기 꽁무니에서 씨를 뽑아 곤충이 날아들기를 기다립니다.

그리고 그 끈적끈적한 거미줄에 걸리면 쫓아가서 칭칭 감고 침을 박아서 진을 다 빼먹습니다.

다시 말하면 거미 같은 사람은 목적을 위해서는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분명히 있습니다.

 

또 개미처럼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고 그러죠.

개미는 보면 정말 부지런합니다.

뭐가 그렇게 바쁜지 뭐가 그렇게 할 일이 많은지 정말 쉬지 않고 일합니다.

그렇지만 개미의 가장 큰 약점은 뭐냐? 주변에 대한 무관심입니다.

주변에 보면 정말 자기 일은 성실하게 합니다.

열심히 사는데 주변을 돌아다보질 않습니다.

아마 이 개미 같은 모습의 사람들이 현대 인간형이 아니겠는가.

전부 다 에고이스트들이 있죠.

‘나 남한테 해 끼치지 않을 거니까 너도 내 일에 간섭하지 말아라.’ 이겁니다.

 

그러나 벌 같이 살아가는 인간은 자기 삶에도 충실하면서

그래도 가끔은 아니면 더 자주 나보다 더 힘들어하는 사람에게 관심을 가지는 사람들입니다.

그래도 세상에는 거미나 개미처럼 사는 사람만 있는 것이 아니라 벌처럼 살아가는 사람들도 의외로 주변에 많기에 희망이 있습니다.

그리고 벌처럼 살아가는 사람들이 점점 더 많이 늘어나는 세상이 돼야 할 겁니다.

 

아까 뉴스를 보니까 차를 몰고 그냥 인도로 돌진해 60대 할머니를 쳤죠.

할머니가 공중으로 붕 떴다 땅에 떨어졌을 때 간호사를 꿈꾸는 학생이 쫓아가 심폐소생술을 하고 옷을 벗어서 머리를 올리고

기도를 확보하고 구조사가 올 때까지 끝까지 심폐소생술을 해서 죽었던 심장이 다시 살아나게 했다 하네요. 영웅이지요.

또 백화점 안에서 칼에 찔린 사람들 지혈하고 다른 친구는 그 사람이 다시 와서 해코지 못 하게 지키며 소방관에게 연락했죠.

고등학생들이지만은 용감한 사람들입니다.

벌과 같은 마음의 소유자들입니다.

그런 젊은이들이 참 많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야 이 나라는 희망이 있습니다.

 

지금까지 우리를 깊은 잠에 빠지게 하는 것 세 가지 얘기해 드렸습니다.

첫 번째는 편견 두 번째는 정신적인 혼수상태 세 번째는 무관심.

 

또 반대로 살면서 졸다가도 우리의 눈을 번쩍 뜨게 하는 것들도 있습니다.

뭐겠습니까? 여러분들 짐작하십니까?

제 생각에 첫 번째로는 고통입니다.

슬픔을 느껴보지 못하고 고통을 느껴보지 못하면 신앙인이 될 수 없습니다.

또 예술가가 될 수 없다고도 합니다.

고통과 슬픔은 반드시 고독을 가져오고 고독을 통해서 하느님을 만나기도 하고 또 예술의 경지에 오르기도 합니다.

가수들의 노래도 사연이 많은 가수의 노래는 호소력이 있다고 그러죠.

또 신부님들의 강론도 산전수전을 많이 겪은 신부님들의 강론은 분명히 힘이 있습니다.

그 고통의 세월을 지나오면서도 하느님을 놓치지 않았던 사제의 모습을 보고 신자들은 감동받습니다.

그래서 정신이 번쩍 나게 합니다.

‘내가 당하는 고통, 이건 고통도 아니었구나!’

아무튼 고통은 신비한 겁니다.

 

두 번째로 우리의 눈을 뜨게 하는 것은 결핍감입니다.

항상 충만하다고 생각하는 사람, 부족함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 항상 선하다고 생각하는 사람, 항상 정의롭다고 생각하는 사람,

항상 지혜롭다고 생각하는 사람, 이런 사람은 누구에게 도움을 청할 필요도 없고 하느님에게 용서 청할 필요도 없습니다.

결핍감이 없는 사람은 결코 하느님의 사랑을 못 느낍니다.

그러기에 용서를 못 받습니다.

그 충만함은 하느님과 인간 사이를 단절시켜 버립니다.

만족감이죠.

‘뭐, 이 정도 신앙 생활하면 되지.’

그냥 취미 생활로 바뀝니다.

늘 자기만족입니다.

이러한 자기만족은 자기보다 늘 못한 사람과 비교하면서 자기 만족감을 채웁니다.

주일미사 안 나가는 남편과 자기를 비교해 보면 남편보다는 훨씬 더 의인으로 생각합니다.

입만 열면 남 흉보는 어느 자매와 입이 무거운 나를 비교하며 내가 훨씬 더 선한 사람 쪽에 속해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자기만족에 빠질 때는 하느님이 필요 없습니다.

그래서 늘 부족하다고 하는 결핍감은 잠든 우리의 영혼을 깨웁니다.

 

선하면 선할수록 죄의식도 커집니다.

바오로 사도는 디모테오 전서 1장 15절에서 ‘나는 죄인의 괴수’라고 그랬습니다.

프란치스코 성인은 ‘나보다 더 가련하고 비참한 죄인은 없다’라고 그랬습니다.

그래서 죄 중에서 가장 큰 죄는 죄의식이 없는 겁니다.

그렇지만 늘 부족하다고 느끼는 결핍 의식은 하느님의 용서에 이르는 길입니다.

 

지금 이 시대는 깨어나야 할 시대라고 생각이 됩니다.

우리를 깊은 잠에 빠지게 하는 어둠으로부터 우리는 깨어나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 민족들이 남에게 손가락질할 것이 아니라 내 탓이라고 가슴을 치면서 민족 회개 운동을 해야 하는 시기입니다.

주님나로 하여금 언제나 당신을 향하여 깨어 있게 하소서 하는 기도로 하루를 시작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들 영원에 영원을 더하여 사랑합니다.

 

+전능하신 천주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서는 이 강론을 듣는 모든 이들에게 축복하소서.

아멘.

 

2023년 주님의 거룩한 변모 축일 (8/6) 김웅열(느티나무)신부님 강론

출처http://cafe.daum.net/thomas0714 (주님의 느티나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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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댓글 리스트
  • 작성자창수선화 | 작성시간 23.08.10 아멘! 감사합니다~ ❤️
  • 작성자안나쌤 | 작성시간 23.08.10 아멘!
  • 작성자바람의노래 | 작성시간 23.08.10 아멘 감사합니다!
  • 작성자발아래 | 작성시간 23.08.10 아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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