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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웅열 신부 강론

노아의 방주 이야기 1 /김웅열 토마스 아퀴나스신부

작성자하늘호수♡마리아|작성시간24.02.03|조회수115 목록 댓글 4

+ 찬미 예수님

주님의 이름으로 평화를 빕니다.

그동안 안녕하셨습니까?

지난 한 주일은 제가 휴가차 비웠기에 강의가 없었죠.

오늘부터 두 번에 걸쳐 노아의 방주 이야기를 해드리고자 합니다.

 

노아의 방주 이야기를 떠올리면 어릴 적 국민학교 시절, 주일학교에서 교리를 가르치던 수녀님이 생각이 납니다.

그 수녀님은 우리 어머니만큼 이뻤던 것 같아요.

수녀님은 창세기의 여러 이야기도 들려주셨는데, 제가 꼬치꼬치 질문하다가 혼이 난 적도 많이 있었죠.

예를 들면 아담과 하와 그리고 그 아들 카인과 아벨, 이렇게 네 사람밖에 없었는데 카인이 결혼했다고 나오죠.

그래서 이 여자는 갑자기 어디서 나타난 거냐 했더니 수녀님 얼굴이 빨개지시더니

그런 것은 묻는 것이 아니라며 꿀밤을 주신 적이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성경이 참 재밌구나' 하고 느끼게 된 것은 그 수녀님 덕분이었던 것 같아요.

어린 시절 수녀님이든 아니면 부모님께 종교 교육, 또 성서에 대한 가르침을 받는 것이

한평생 그 사람에게 참 큰 영향을 끼친다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그러려면 부모가 일단 성경을 알아야겠죠.

성서를 알아야만 아이들에게 성경을 재미나게 이야기식으로 해줄 수가 있습니다.

그 아이는 죽을 때까지 부모가 알려준 것을 가지고 삽니다.

물론 나중에 거기 살이 붙겠지만 기초적인 지식은 부모에게서 받고 주일학교 교리에서 배운다고 저는 확신합니다.

이렇듯 주일학교 선생의 임무가 아주 중요한 것이기에 저는 본당 신부 할 때마다 주일학교 선생들을 참 귀하게 여겼습니다.

그리고 주일학교 선생들에 대한 교육도 철저히 했죠.

사람이 없어서 아무 청년이나 데려다 쓰고 그러는 일은 없었습니다.

요즘 보면 젊은이가 없다 보니 주로 엄마 교사들이 많이 있죠.

어쩌면 청년들보다는 그래도 조금이라도 더 살고 자식을 키워본 주부 교사들이 더 잘하는 때도 있다고 봅니다.

지금도 기억나는 것이 어느 날 교리  수녀님이 잡지 한 권을 들고 오셨는데 그 잡지에 있던 삽화 하나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참 긴 세월이 지났는데도 그때 그 그림이 잊히질 않아요.

그 삽화는 이쁜 아기가 작은 배에 타고 있는 그림이었습니다.

저는 그때 노아의 방주 교리를 배우고 있었던 때라 이 아기가 타고 있는 이 작은 배가 노아의 상자 배라고 생각했었죠.

'상자 배'의 ‘상자’라고 하는 말도 귤 상자나 사과 상자 정도의 크기로 저는 생각했던 겁니다.

사실 그 그림은 노아의 방주가 아니라 아기 모세를 상자에 태워 강에 띄워 보내는 것이었습니다.

아기 모세가 타고 있던 상자를 제가 노아의 방주로 착각했던 겁니다.

성경에 나오는 노아의 방주 크기는 길이가 137m, 폭이 22.8m, 높이가 13.7m나 되었으니 대략 3층 높이 정도가 됩니다.

 

노아의 방주 이야기는 6장부터 9장까지 이어지고 이것을 하나하나 상세하게 보면 좋겠지만

너무나 길어지기에 요점만 두 번에 걸쳐 이야기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여러분들 구약 성서 이야기 쭉 들으시면서 어떤 것을 느끼셨습니까?

구약 성서, 특별히 창세기에 나오는 이야기들은 얼핏 보면 무슨 말도 안 되는 얘기 같지만, 많은 보물이 묻혀 있습니다.

그리고 또 그 보물은 예수 그리스도와 연결이 됩니다.

그래서 제가 얘기했죠. '구약 안에 신약이 숨어져 있고 또 신약으로 구약이 완성된다.'

구약의 창세기 편을 묵상하다 보면 예수님이 하셨던 이야기와 연결이 됩니다.

이런 것을 여러분이 느끼셨어야만 하고, 또 저는 그런 방향으로 강의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아무튼 노아의 이야기는 장은 여러 장이지만 하나하나 다 얘기 드리지 못합니다.

그리고 전에도 얘기 드렸지만, 신학적이고 성서학적인 어려운 접근이 아니라

그야말로 이야기를 통하여 저자가 얘기하고자 하는 핵심과 우리들이 살아가야 할 방향을 여러분들과 같이 묵상하고

또 여러분들이 생각하는 기회를 드리고자 ‘이야기’라는 제목으로 강의하고 있습니다.

 

여러분들 기억하시겠죠?

카인과 아벨 이야기 마지막, 홍수 이전 족장들 계보가 나옵니다.

누구는 몇 살을 살다가 몇 살에 죽었다.

그런데 그중에 특별히 우리 눈에 들어오고 우리들이 지나쳐서는 안 될 사람이 바로 '에녹'이라고 그랬습니다.

'에녹은 하느님과 함께 살다가 사라졌다. 하느님께서 데려가신 것이다.'

다시 말하면 하느님과 함께 승천했다는 얘기죠.

비록 그의 이야기는 한 줄밖에 나오지 않지만, 얼마나 아름답고 훌륭하게 살았길래 하느님과 같이 승천하셨을까?

그리고 그 이후에 많은 사람이 나오지만, 에녹의 아름다운 모습대로 살아가는 사람은 유일하게 노아 한 사람뿐이었습니다.

그 외에는 전부 어둠 속에 살고 있었겠죠.

 

카인이 죄를 저지르고 또 하와와 아담이 죄를 범했을 때 하느님이 슬퍼하셨지만 그래도 인간 만든 것을 후회하지는 않으셨는데,

이 노아의 방주 시대에 하느님은 슬픈 정도를 지나쳐서 인간 만든 것을 후회하셨다는 말이 나옵니다.

야훼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퍼지고 또 사람의 마음과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을 향할 뿐임을 아시고

근심하고 한탄하시면서, 사람으로부터 시작해서 모든 짐승과 새까지 땅 위에서 쓸어버리려는 무서운 계획을 세우십니다.

그런데 그중에 딱 한 사람이 눈에 띄었던 겁니다.

‘노아’라고 하는 인물이었죠.

 

노아는 의인이고 하느님의 마음에 들었던 유일한 사람이었던 겁니다.

하느님은 노아에게 명령을 내립니다.

‘가족과 모든 생물의 암수 한 쌍씩만 그 생명을 보존하게 되리라’

그리고 노아에게 3층짜리의 큰 상자 배를 만들어 그의 가족과 모든 생물 한 쌍씩을 그 배 안에 피신시키도록 명하십니다.

6장 13절에서 14절에 ‘하느님께서는 노아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세상은 이제 막판에 이르렀다.

땅 위는 그야말로 무법천지가 되었다. 그래서 나는 저것들을 땅에서 다 쓸어버리기로 하였다.

너는 전나무로 배 한 척을 만들어라. 배 안에 방을 여러 칸 만들고 안과 밖을 역청으로 칠하여라.’’

그래서 노아는 하느님이 명하신 대로 순종합니다.

오랜 시간 큰 배를 짓고 명하신 대로 가족과 모든 동물의 종류 한 쌍씩을 배에 넣습니다.

그리고 7일 후에 폭우가 쏟아져 홍수가 나고 무려 40일을 폭우가 쏟아지지요.

물은 150일 동안 땅 위에 계속 불어났습니다.

이렇게 해서 배에 들어갔던 노아의 여덟 식구와 동물 이외에는 다 죽게 됩니다.

이것이 대충의 줄거리입니다.

 

저는 이야기를 처음 읽었을 때 ‘노아’라고 하는 인간 참 못됐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동물 한 쌍씩 넣을 수 있었다면, 이웃 사람들을 전부 살릴 수 있지 않았을까?

여러분들 그런 생각 안 드십니까?

아무튼 저는 처음에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모든 사람이 죽어가는 것을 무시한 노아가 아무리 의인이라 하더라도 비정한 인간임에는 틀림없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던 거죠.

예를 들면 이런 것과 비슷한 것이 아닐까요? 한번 생각이 듭니다.

큰 호화 여객선이 침몰합니다. 구명정이 내려집니다.

그 여객선 안 일등석 특등실에는 부자들이 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저 밑에 지하에는 하층민이 타고 있었습니다.

아마 구조선 보트에 타는 것도 분명히 순서대로 탔을 겁니다.

돈이 있고 힘 있는 사람부터, 또 그 부자들의 여러 가지 물건들을 구명보트에 실었을 겁니다.

어떤 사람이 헤엄을 쳐서 보트에 타게 해달라고 했을 때, 부자가 자기 물건을 포기 못 하고 그 사람을 태우지 못해서,

그 사람이 결국에 바다에 빠져 죽었다고 생각합시다.

그때 우리는 그 사람한테 욕을 합니다.

‘몹시 나쁜 놈이네. 사람을 태워야지, 물건이 뭐가 소중하다고 어떻게 저럴 수가 있을까?’

지금 이런 예화에서 나오는 것처럼 저도 처음에는 노아를 그렇게 생각했던 겁니다.

동물들 한 쌍씩이면 어마어마한 건데,

그리고 3층짜리 배에 가득 동물들인데 사람은 노아의 가족 8명뿐, 얼마 차지하질 않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동물들을 살리려고 사람들이 물에 빠져 죽는 것을 방치했을까?

노아가 참 이기적이라는 생각을 아주 강하게 했던 겁니다.

저의 이런 노아에 대한 시선은 아마도 제가 중학교 때 노아의 방주를 읽으면서 들었던,

이성적이기보다는 굉장히 감성적인 생각이었던 것이었습니다.

나중에 신학교에서 성경을 공부하고, 또 제 나름대로 어릴 때 갖고 있었던 노아에 대한 편견을 다시 묵상하고,

‘노아가 왜 그럴 수밖에 없었을까?’를 여러 가지 방법으로 묵상하면서 노아에 관한 생각은 분명히 예전과는 전혀 달라졌습니다.

 

성경에는 노아를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죠.

창세기 6장 9절.

‘노아의 이야기는 이러하다. 그 당시에 노아만큼 올바르고 흠 없는 사람이 없었다. 그는 하느님을 모시고 사는 사람이었다.’

하느님과 동행하는 사람이었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11절과 12절

‘그야말로 무법천지가 되어 있었다. 하느님 보시기에 세상은 속속들이 썩어, 사람들이 하는 일이 땅 위에 냄새를 피우고 있었다.’

그래서 하느님은 죄악에 가득 찬 인간들의 세계를 보시고 세상 사람들을 멸하시려고 합니다.

그러나 유일하게 노아와 그 가족만은 살리려 하신 것은

노아라고 하는 인간이 상상도 할 수 없이 신앙이 돈독한 사람이었기 때문이었던 겁니다.

 

‘노아와 가족들을 살리려고 하셨다’라는 이 대목에서 또 한 가지 의문이 저는 떠오릅니다.

‘노아는 의인인데 노아의 가족들도 노아만큼 의인이었기 때문에 살렸을까?’

글쎄요. 그건 아니라고 봅니다.

노아 덕분에 가족들이 덤으로 구원의 상징인 노아의 방주 안에 들어갔던 겁니다.

이 대목을 읽으면 저는 키 작은 자캐오 이야기가 떠오릅니다.

자캐오는 세관장으로 돈은 흘러넘치게 많았지만, 매국노라고 손가락질당하던 사람이었습니다.

온몸은 비단으로 칭칭 감고 있었지만, 마음속에 뻥 뚫려 있는 공허함은 메꿀 수 없었죠.

그러던 어느 날 죄인을 사랑한다는 예수님이 자기 동네에 온다고 하여 예수님을 보러 갔지만,

키가 워낙 작았기 때문에 예수님이 계신 곳으로 뚫고 들어갈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했습니까?

앞질러 달려가서 돌무화과나무 위에 올라갔죠.

자캐오는 그 당시에 기관장입니다.

기관장이 비단옷을 벗어버리고 속옷 차림으로 나무 위를 뻘뻘 기어오르는 모습을 상상해 보십시오.

자캐오는 그 순간 모든 것을 다 포기한 겁니다.

‘예수님을 볼 수만 있다면! 저분과 눈길만 마주칠 수 있다면!’

간절한 마음으로 돌무화과나무 가지에 다리를 얹고 예수님 지나가기를 기다렸죠.

예수님이 지나가면서 뭐라 그러십니까?

기절초풍할 얘기를 하시죠.

언제 예수님이 자캐오를 봤다고 ‘자캐오야 내려오너라. 내가 오늘 네 집에 머물겠다.’

예수님이 이름을 불러준 겁니다.

자캐오는 그 순간 아마 수만 볼트 영적인 벼락에 맞은 듯 감전됐을 겁니다.

그래서 자캐오는 예수님을 집에 모셨고 사람들은 예수님이 죄인의 집에 들어가는 걸 보고 뒤에서 웅성거립니다.

들어가서 자캐오는 먼저 포기 선언을 하지요.

‘내가 가진 것에 절반을 내놓고 또 내가 다른 사람에게 손해를 끼쳤다면 네 곱절로 갚겠다.’

다시 말하면은 재산을 다 포기하겠다고 선언합니다.

그 대답을 듣고 난 다음 예수님의 입에서 나온 말이 뭡니까?

‘자캐오야 오늘 너는 구원받았다’가 아니라 ‘오늘 네 집에 구원이 있으리라.’

자캐오 한 사람 때문에 가족이 같이 구원받은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의인이었던 노아 한 사람 때문에, 그 가족들이 오늘 방주로 들어가게 된 겁니다.

여러분 집에 냉담자가 바글거린다 해도, 여러분 혼자 정말 깨어서 하느님의 종으로 올곧게 살려고 애쓴다면

하느님은 여러분 집안을 엄하게 심판하시지 않을 겁니다.

그리고 열심히 사는 당신을 보고 여러분 가족들의 흔들리는 신앙을 분명히 바로 잡아줄 것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로 든 의문이 있다면은 이겁니다.

만일 하느님이 지금 이 현재의 세계를 한탄하시면서

-지금은 노아 시대 때보다 더 무법천지입니다. 동의하시죠? 말세입니다. 환난의 시대입니다.-

전 인류를 멸망시키려고 생각하시다 잠깐 멈추시고, ‘저 인간 하나만은 내가 멸할 수 없군’하고 생각하신다면 누가 선택될까?

‘바로 그 사람이 나다.’ 이렇게 생각되는 사람이 과연 누가 있을까?

좀 더 양보해서 온 세계에서 백 명, 천 명, 만 명이라 해도 과연 나 자신이 그 일원으로 뽑힐 수 있겠다고

단언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있겠는가?

저도 사실 자신 없습니다.

노아는 뭐라고 그랬어요?

‘하느님과 동행했다. 하느님을 모시고 사는 사람이었다. 올바르고 흠 없는 사람이었다.’

사제이지만 주님 보시기에 저도 얼마나 약점이 많은지 모릅니다.

어떨 때는 위선의 옷을 더덕더덕 입을 때도 많고요.

사제라고 하는 것이 큰 짐이 되어 솔직하지 못하게 살게 했을 때도 참 많았고요.

그래서 저는 노아가 될 자신이 없습니다.

 

‘온 세상을 멸하더라도 내가 저 인간 하나만큼 내가 살려야 되겠다.’ 하실 때, ‘그 사람이 바로 나입니다.’,

‘나는 당당히 노아의 방주 안에 들어갈 자격이 있는 사람입니다.’ 이렇게 얘기할 사람이 얼마나 되겠느냐는 겁니다.

교황님도 이런 질문 받으시면, 교황님은 정말 워낙 겸손한 분이시기 때문에 아마 저와 비슷한 답을 했을 겁니다.

교황님은 겸손하시기에 그 얘기를 하겠지만,

저는 겸손하기 때문이 아니라 실제로 들어갈 자격이 없다고 생각할 때가 많기에 그 얘기를 하는 겁니다.

지극히 드물겠죠.

 

노아의 시대가 정확히 어떠한 시대였는지 저는 잘 모릅니다.

그러나 하느님이 명하신 높이 13.7m, 길이 137m, 폭 22.8m라고 하는 크기의 배는 그 당시에는 존재하지도 않았던 배였을 겁니다.

그 시대에는 그런 규모의 배는 구경도 할 수가 없었던 어마어마하게 큰 구조물이었을 겁니다.

당시 원시적인 기술로 이렇게 큰 배를 만들라고 하느님께 명령받았다면, 도대체 어떤 대답을 할 수 있을까?

‘나는 도저히 그런 배를 만들 수가 없습니다.’ ‘내게는 짐이 너무 무겁습니다.’

‘배를 만드는 일이 내 전문 직업이 아닙니다.’

이런 식으로 배를 만들라는 하느님의 명령에 어떻게 해서든지 거부했을 거라 생각됩니다.

겸손한 듯한 말로 그 책임을 피하려고 할 것이 분명합니다.

더군다나 그 배는 지금 곧 바다에 띄워서 사용할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필경 아무리 비가 많이 쏟아져도 절대로 홍수가 날 것 같지도 않은 육지에 그 배를 만들라고 했습니다.

해변도 아닌 육지에서 본 일도 없는 그 큰 배를 만든다는 것은 당시로는 미친 짓입니다.

이렇게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는 미친 짓을 하라고 하느님은 명령하시죠.

‘전나무로 지어라. 그리고 역청으로 그 안팎을 칠하라’라고 명합니다.

막대한 전나무가 분명히 필요했을 겁니다. 굉장한 비용이 들었을 겁니다.

전나무를 자르고 깎고 만들고 하는 노아 가족들의 노고만 생각해도 엄청난 일입니다.

창세기 영화에 노아 동네 사람들이 노아 일가가 땀범벅이 되어 일하는 모습을 비웃는 장면이 나옵니다.

‘저놈들  가족이 미쳤네. 하늘이 쨍쨍한데 무슨 비가 와. 그리고 왜 육지에 배는 만들어? 배를 만들려면 바닷가에 만들어야지.’

내가 그 당시에 노아와 그 가족들이 하는 모습을 봤다면 나도 분명히 비웃었을 겁니다.

 

여기서 오늘 강론의 결론이 나옵니다.

하느님 말씀에 순종해 사는 모습은 어떤 때는 사람들에게는 이상하게 보이고 바보스럽게 보이기도 한다는 겁니다.

바로 여기에서 제가 늘 얘기하는 바보의 영성이 나옵니다.

하느님 말씀에 순명해야 할 때 이것을 순명해야 하나 고민도 되고,

또 하느님에게 순명하는 사람들 보면 우리보다 더 잘 사는 것 같지도 않고, 그런데 순명합니다.

 

저는 사제 서품받을 때 순명 서약을 했습니다.

주교님에게 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에게 한 겁니다.

그런데 저는 하느님의 가르침은 주교님을 통해서 온다고 믿기 때문에,

사제생활 동안 어찌 보면 말도 안 되는 순명을 요구하셨을 때도 저는 무조건 ‘네’ 했습니다.

교구에 있는 동료 신부님들이 가끔 제게 누구보다도 성격이 강하고 누구한테도 순명하기를 싫어할 것 같은 성격인데도

주교님에게 순명해 오지로 가는 걸 보면 참 신기하다고 합니다.

저는 농담 반 진담 반 ‘나는 앞으로 계속 순명할 거다.’ 합니다.

왜냐? 이제껏 순명한 것이 아까워서.

주교님이 나에게 얘기하는 것이 이해할 수 없어도 저는 일단 순명했습니다.

 

순명은 이성적으로 따지고 합리적으로 저울에 재보고 난 다음에 ‘네’ 하는 것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에게 가나안 땅으로 가라고 했을 때 그것은 쉬운 얘기 아니었습니다.

모든 것을 버리고 떠났습니다.

그 늙은 나이에 얻은 이삭을 내놓으라고 했을 때 번제물로 바치라고 했을 때, 정말 번제물로 바쳐 찔러 죽이려고 그랬던 겁니다.

그것이 어디 합리적인 생각입니까?

 

그렇지만 저는 체험을 통해서 압니다.

하느님에게 순명하면 기적이 일어난다는 것을 압니다.

교우들이 가끔 묻습니다.

‘신부님 순명은 어디까지 해야 하는 겁니까? 무조건 다 순명해야 하는 겁니까?’

이론적으로는 순명은 분명히 나눠집니다.

지성적인 순명이 있고 노예적인 순명이 있습니다.

그러면 노예적인 순명과 지성적인 순명의 그 경계가 어디까지냐?

이것은 분별이 필요합니다.

내가 스스로 만들어 낸 고통인지 하느님이 허락하신 고통인지를 아는 것 역시 분별이 필요하듯이,

 

노아는 하느님과 함께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 당시로는 말도 안 되는 명령을 하느님에게 들었어도 기를 쓰고 완수해 냅니다.

주변 사람들의 조소와 멸시를 받으면서도 3층짜리 어마어마하게 큰 나무배를 만들어 냅니다.

말도 안 되는 것을 명령하신 겁니다.

그 배 만들려고 했을 때 얼마나 힘들었겠습니까?

당시에는 없는 그런 엄청난 배를 만들어야 했던 겁니다.

그것도 바닷가에서가 아니라 육지에서, 그러니 얼마나 사람들의 손가락질을 받았겠습니까?

 

하느님께 순명하는 자는 세상의 조소와 조롱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어리석은 자라고 하는 소리를 들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에게 순명하는 자는 하늘의 책에 기록될 것이오,

그 순명하는 사람을 통해서 하느님은 놀라운 역사를 하신다고 하는 것을 명심하도록 합시다.

 

오늘 강의는 여기까지입니다.

 

여러분들 영원에 영원을 더하여 사랑합니다.

+전능하신 천주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서는 이 말씀을 듣는 모든 이들에게 강복하소서.

아멘.

 

청주교구 원로 사목자 김웅열(느티나무신부님

출처http://cafe.daum.net/thomas0714 (주님의 느티나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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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댓글 리스트
  • 작성자아스피린 | 작성시간 24.02.03 아멘~~
  • 작성자1만두 | 작성시간 24.02.03 신부님, 감사드립니다. 아멘.
  • 작성자바람의노래 | 작성시간 24.02.04 아멘 감사합니다!
  • 작성자발아래 | 작성시간 24.02.04 아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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