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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웅열 신부 강론

[구약 묵상 시리즈 제22강] 요셉 이야기 3/김웅열 토마스 아퀴나스신부

작성자하늘호수♡마리아|작성시간24.03.30|조회수125 목록 댓글 3

+ 찬미 예수님

주님의 이름으로 평화를 빕니다.

평안들 하셨습니까?

 

오늘은 요셉의 이야기 셋째 날이면서 요셉의 이야기를 끝내는 날입니다.

지난 시간에는 꽤 중요한 이야기, 성적 유혹을 이기는 방법, 또 대처하는 방법을 알려드렸습니다.

성적 자극을 받는 것 자체는 자연스러울 수 있지만, 그것을 즐기거나 또 나 자신을 방임해서는 안 된다는 얘기를 드렸습니다.

첫 번째 무기로 확실히 자기 의사를 밝혀야 한다고 그랬습니다.

누군가가 나를 유혹하려고 할 때, ‘싫습니다.’라고 하는 의사 표시가 대단히 중요합니다.

그리고 두 번째 무기는 그 유혹자로부터 멀리 있는 겁니다.

불에 가까이 가면 갈수록 우리는 불에 델 확률이 더 커지죠.

세 번째는 도망치는 거라고 그랬고요.

이 세 가지의 비책이 다 있다 하여도, 네 번째 비책인 하느님을 경외하는 마음, 하느님에 대한 두려운 마음이 없으면

결국에는 무너지고 만다는 이야기를 드렸습니다.

 

아울러서 그 보디발의 약한 모습을 우리들이 봅니다.

집에 돌아오니 아내가 울면서 요셉의 옷을 들고 요셉이 자기를 겁탈했다고 하니 보디발은 아주 머리끝까지 화가 났죠.

보디발의 성품으로 봤을 때는 옥에 가두기 전에 먼저 어떻게 된 일인지 아내가 하는 이야기가 정말로 맞는 건지

요셉과 먼저 한번 대화를 나눠봤어야 했을 겁니다.

그렇지만 보디발은 전혀 요셉의 이야기는 듣지 않고 옥에다 가둡니다.

이것이 바로 보디발의 한계에요.

또한 우리들의 한계가 아닌가 생각이 듭니다.

 

아무튼 참 억울하게 감옥에 들어가게 된 요셉의 심정은 어떠했을 것 같습니까?

그 당시 이집트 고관집에는 전부 개인 감옥이 있었습니다.

보디발의 집에도 역시 옥이 있었습니다.

보디발은 이집트 왕 파라오의 경위 대장이었기에 아마 그 감옥은 왕의 죄수를 가둬두는 곳이었을 것이라고 짐작됩니다.

그때 시대에는 당연히 공정한 재판 같은 것은 없었을 겁니다.

신하들 가운데서도 뭔가 뜻이 맞지 않으면 함부로 감옥에 가두었을 것 같습니다.

만일에 내가 요셉이었다면 정말 입이 아프도록 그 보디발의 처를 저주했을 것 같습니다.

‘나는 아무 잘못이 없다. 그 여자가 나를 유혹하려 했다’라고 아마 고래고래 소리 지르며 보디발에게 사정했을 겁니다.

성서를 자세히 보면 확실히 그 여자의 행동은 아주 계획적이었던 걸로 보입니다.

그러길래 그렇게 악질적이고 못되고 철저하게 요셉을 망가뜨리지 않았을까?

요셉에게 아무리 애원해도 거절당하니 보복으로 요셉을 옥에 처넣으려 그의 옷을 붙들고 늘어졌는지도 모르겠다는 뜻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정직한 자가 바보 취급을 당하는 전형적인 사건입니다.

의로운 자에게는 번민이 많다고 성경에도 기록되어 있지만, 참으로 요셉이 그녀가 소원하는 대로 그녀와 동침했다면

옥살이는 하지 않았을 겁니다.

 

그러면 요셉은 과연 옥중에서 자기가 정직하게 살았던 것을 후회하지는 않았을까?

요셉의 마음속으로 좀 들어가 보고 싶습니다.

성서 창세기 39장 21절 이하에는 이렇게 나옵니다.

‘야훼께서는 요셉을 돌보셨다. 그에게 한결같은 사랑을 쏟으시고 은총을 베푸시어 간수장의 눈에 들게 해주셨다.

그리하여 간수장은 감옥에 있는 모든 죄수를 요셉의 손에 맡겨 무슨 일이고 마음대로 하게 하였다.

간수장은 요셉에게 모든 일을 맡겨놓고는 일절 간섭하지 않았다.

야훼께서 그를 돌보시어 그가 하기만 하면 무엇이든지 잘되게 해주셨던 것이다.’

요셉은 감옥에 있었어도 모든 것을 맡겨놓는 그런 중요한 존재가 되었던 겁니다.

 

혹시 요셉이 ‘나는 죄 없는 사람이다. 저 보디발놈 제 여편네가 감옥에 집어넣을 것이지’ 하고 욕설을 퍼부었었다면,

과연 간수장들의 신임을 얻을 수 있었을까?

요셉의 겸손한 침묵이 사람들을 감동시킨 것입니다.

집 안에 있는 감옥이었기 때문에 대개는 보디발의 아내의 성품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요셉이 참 억울하게 들어왔다는 것도 알고 있었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셉은 자기 주인을 원망하지 않았기 때문에, 간수장은 요셉의 인품을 보고,

보디발이 요셉에게 살림을 맡겼듯이 감옥의 모든 일을 요셉에게 맡깁니다.

참 재미있죠?

우리가 알다시피 요셉은 형들의 미움을 받아 멀고도 먼 타향에 팔려 오게 되었었습니다.

하지만 그 외로움으로 인해서 자포자기하지 않고 묵묵히 일하여 보디발에게 사랑받고 신뢰를 받아서

그야말로 집안 살림을 전부 맡아 하는 위치까지 오르게 되었던 거였죠.

요셉에게 있어서 보디발이야말로 타향살이에 가장 의지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자기를 인정하고 사랑하고 중하게 여겨주는 보디발보다 더 그의 위로가 되는 사람은 없었던 겁니다.

그러나 하필이면 믿었던 보디발의 아내에게 이런 치명적인 상처를 받으리라고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을 겁니다.

보디발의 아내 때문에 보디발의 신뢰도, 보디발에 대한 사랑도 일시에 잃어버렸죠.

그리고 옥에 갇히게 되는 미움을 사게 되는 겁니다.

사실 요셉의 처지처럼 억울한 일이 세상에 또 어디 있겠습니까?

더구나 요셉 자신은 무엇 하나 보디발을 배신할 만한 죄는 전혀 짓지 않고 살고 있었었죠.

그렇지만 요셉은 이 깊은 고독에 빠져서도 마음만큼은 하느님을 향하고 또 하느님 앞에 늘 서 있었던 겁니다.

하느님을 향하면 맑고 밝은 마음이 생깁니다.

요셉은 하느님 앞에 보디발 처의 일로 인해서 좌절하지 않았습니다.

요셉은 자기의 정직함을 알아주시는 하느님이 계신다는 것, 이것만으로도 만족할 수 있었던 거죠.

그는 결코 정직한 자가 바보 취급을 당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던 겁니다.

 

요셉의 신앙은 참 대단합니다.

하느님을 믿고 있는 자는 근시안적으로 사물을 보질 않습니다.

‘아, 어리석었다. 손해 봤다.’ 이렇게 쉽사리 아우성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올바른 일을 하였다는 그 이상의 이득은 없기 때문이죠.

로마서 8장 28절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는 모든 일이 서로 작용해서 좋은 결과를 이룬다’라는 말씀처럼

‘야훼이레’가 될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느님을 믿는 자는 성급하게 결론을 내리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들이 일의 결과라고 생각하는 것이 실은 일의 시작일 때가 있기 때문이고,

실패라고 생각했던 것이 성공일 때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억울한 누명을 쓰고 투옥되어도 요셉은 절대 절망하지 않았던 겁니다.

‘이젠 마지막이다.’ 이렇게 자신을 내던지지 않았습니다.

사실 요셉만큼 산전수전을 겪은 사람이 성경에는 많지 않습니다.

어린 나이의 구덩이에 파묻혀 죽을 뻔도 했고요, 또 무슨 물건처럼 인신매매돼서 노예로 팔리기도 했고요.

아무튼 수많은 고비 고비마다 요셉은 한 번도 절망해 본 적이 없다는 얘기입니다.

우리가 배워야 할 부분이지요.

하느님을 믿는 자에게는 끝은 없는 겁니다.

죽음도 끝이 아닙니다. 절망도 아니지요.

죽음 앞에서도 하느님 나라를 바라보며 죽는 것이 바로 신앙인입니다.

 

그런 말이 있습니다.

‘일을 내던지는 인간은 책임자가 될 자격이 없다.’.

무슨 뜻인지 여러분들 이해되십니까?

저는 그 얘기를 들었을 때 정말 그렇다고 심각하게 생각한 적이 있었습니다.

맡겨진 일을 내던져서는 확실히 책임자로서는 실격입니다.

일이 어려워지면 금세 포기하거나 저 사람은 안 된다 이 사람은 안 된다.

책임 있는 사람의 행동은 아닙니다.

여기서 던져버린다는 것은 포기한다는 말이고 포기한다는 것은 절망하는 일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책임자’는 아무리 쓰라린 일도 아무리 싫은 인간도 받아들일 수 있어야만 합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 안에 우리들이 살아가야 할 모습이죠.

그런데 이 ‘책임자’라는 것은 꼭 어느 단체의 우두머리를 말하는 것은 아닐 겁니다.

가정주부는 주부로서 책임이 있고, 어머니로서 책임이 있죠.

가정을 내던지거나, 키우기가 귀찮다고 아이를 버린다면 책임을 포기하는 겁니다.

요즘 참 말세긴 말세라는 걸 느껴집니다.

철딱서니가 없는 것을 지나쳐 천벌 받을 부모들이 많습니다.

아이를 낳아 버리는 것이 아니라, 아예 죽이는 악마 같은 짓을 하는 애미들도 많이 있습니다.

우리들은 인간으로서 책임이 지워져 있기에 그 책임을 내던진다면 당연히 올바르게 살아갈 수 없습니다.

‘나 같은 것 어떻게 돼도 좋다, 나 같은 것 죽어도 좋다’고 자기를 내던지는 그런 절망적인 언사는

고난과 투쟁을 기피하는 무책임한 인간의 언사일 겁니다.

 

이야기가 좀 다소 벗어났지만, 요셉은 옥중에서도 이전과 다름없는 삶을 살았습니다.

사실 옥에서나 또는 포로수용소에서도 사람답게 살아간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죠.

그런데 요셉은 집사로 있을 때나 다름없이 성실하고 표리부동하게 그리고 사람들을 진정으로 사랑하며 살았던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길래 그는 옥중에서도 간수들이 옥의 제반 사물을 요셉에게 맡기게 되었을 겁니다.

그래서 이 요셉이야말로 참 신앙의 사람이라고 힘주어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들의 롤모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요셉은 노예로 팔려서 이집트 땅에 왔음에도 불구하고, 노예 신분임에도 불구하고 모든 것을 맡게 됩니다.

그리고 자유인 이상의 자유로움을 느낍니다.

그리고 지금은 다시 죄수의 몸으로 옥중에 제반 사물을 맡게 되니,

그는 옥중에 있어도 그전과 같이 자유로운 마음을 갖고 있었던 겁니다.

성경에 유명한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진리, 곧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가 우리를 자유롭게 하신다는 그 성구는 정말 진리 중의 진리입니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는 이 말씀은 인간으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을 자유롭게 할 수 있는 힘이 부여되었다는 

말씀과 뜻이 통합니다.

미운 사람을 미워하지 않는 자유, 어떠한 사람이라도 용납하는 자유, 올바른 일을 하는 자유, 유혹을 물리칠 자유,

이러한 자유를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부여하신 겁니다.

즉 죄에서 자유롭게 해주신 겁니다.

요셉의 생활 태도를 통해서 우리들이 배울 수 있는 것은 이것입니다.

‘인간은 하느님과 함께 있는 한 자유롭다.’

인간은 절망적인 상태에 빠졌을 때 그가 어떤 인간이냐 하는 것이 드러나게 됩니다.

성경에 보면 ‘간수장이 요셉에게 모든 일을 맡겨놓고는 일절 간섭하지 않았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정도로 요셉은 간수에게 상의하지 않고도 마음대로 처리하게 되는 위치까지 오른 겁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이 옥의 죄수들은 왕의 죄수들입니다.

한마디로 왕에게 죄를 범한 사람들이죠. 당연히 정치범들이 대부분이었을 거라 추측됩니다.

 

성경에 보면 얼마 후 왕의 술을 맡은 시종장과 떡 굽는 시종장이 들어오게 됩니다.

두 사람은 왕을 독살하려고 했다는 의혹을 받고 투옥되었습니다.

며칠 지나서 두 사람은 꿈을 꾸게 되었죠. 꿈이 사나우면 마음에 걸립니다.

우울하게 있는 두 사람에게 요셉은 어째서 근심이 가득 차 있냐며 친절하게 말을 건넵니다.

그래서 이 두 사람은 요셉에게 꿈 이야기를 하지 요셉은 그 꿈을 해석해 줍니다.

어떤 꿈을 어떻게 풀었다는 것을 지금 얘기하면 재미있겠지만. 생략하겠습니다.

대신 창세기 40장을 꼭 읽어봐 주시기를 원합니다.

 

결국에 요셉의 해몽대로 떡 굽는 시종장은 3일 후에 사형되고, 술을 맡은 시종장은 의혹이 풀려서 복직됩니다.

그 시종장에게 요셉은 간절하게 부탁하죠.

40장 14절에 이렇게 나옵니다.

‘당신이 잘되시는 날 나를 생각해 주십시오. 나에게 친절을 좀 베풀어 주셔야 하겠습니다.

나는 억울하게 히브리 사람들의 땅에서 유괴되어 온 사람입니다.

나는 여기서도 이런 구덩이에 들어올 만한 일을 한 일이 없습니다.’

‘당연히 그러지. 당신같이 훌륭한 사람이 옥에 갇혀 있다니, 내가 꼭, 바로 파라오에게 말해서 당신을 구출하겠소.’

아마 이렇게 시종장은 약속했을 겁니다.

그렇지만 시종장은 출옥하자마자 요셉을 싹 잊어버리고 2년의 세월이 흘렀으니, 참 야속한 사람입니다.

우리 옛말에 ‘남이 아픈 것은 3년을 참는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내가 아픈 것은 단 5분을 못 참지만, 다른 사람이 아플 때는 3년을 참아준다는 얘기입니다.

참 가슴에 쏙 와닿는 얘기입니다.

자기가 옥살이할 때 한시라도 빨리 그곳에서 나오길 원했을 터인데, 막상 나오니깐 요셉의 간절한 부탁을 잊어버립니다.

더구나 요셉이 불안하였던 그 꿈을 해석해 주었고, 그것이 현실이 돼서 본인이 살아났음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하지만 요셉을 도와주지 않았던 이 무정한 시종장의 일은 아무래도 남의 일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왜냐하면 우리도 받은 은혜를 곧바로 잊어버리죠.

괴로울 때 도와주셨던 분들, 외롭게 병상에 있을 때 위로해 주셨던 분을 건강해지면 깨끗이 잊어버립니다.

한 인간이 지금 이 자리에 이렇게 서 있다는 것은, 지금까지 많은 사람의 은혜를 헤아릴 수 없이 받았다는 하나의 증거입니다.

그 많은 사람의 은혜를 말끔히 망각하고, 내가 잘났다는 듯이 큰소리치며 살고 있는 것이 바로 우리들의 모습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면 2년 동안 버려진 채 감옥에 갇혀 있던 요셉은 어떠한 삶을 가졌을까요?

참 대단합니다.

그 2년 동안에도 요셉은 변하질 않습니다.

오로지 하느님만을 신뢰하고 살았습니다.

감옥에서 2년 동안 요셉 인생에 있어서 많은 사람에게 배신당합니다.

이러한 배신을 통하여 요셉의 마음에 점점 더 굳어지는 것은 뭐였습니까?

가슴속에 사람을 두지 않고 하느님을 두고 사는 믿음이 깊어졌다는 겁니다.

하느님 중심으로 우리의 신앙이 커갈 때 우리들은 그전에 살았던 것을 부끄러워합니다.

내가 사람에게 많이 의지하고 살았던 것, 사람을 믿었던 것에 대한 후회가 커집니다.

요셉은 분명 자기를 빼내달라고 시종장에게 부탁했던 것을 하느님 앞에 부끄러워했을 겁니다.

신앙의 사람은 하느님에게만 의지해야 합니다.

사람을 믿는 존재가 아니기 때문에 우리는 하느님을 믿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럼에도 하느님보다 사람을 더 믿고 기대고, 또 그 기대에 어긋났을 때는 배반당했다고 투덜거리고

‘속았다. 다시는 사람을 안 믿는다’라고 하면서 또 역시 사람을 믿고 상처받습니다.

 

요셉은 참 많은 사람에게 배반당하고 상처 입었습니다.

그럴 때마다 요셉은 어두워지는 쪽으로 기울어진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느님 중심으로 요셉의 삶은 더 굳건하게 바뀌어 갔던 겁니다.

요셉은 참 대단한 사람입니다.

시종장에게 잊히고 있는 2년 동안 요셉은 더욱더 하느님만을 신뢰해야 할 것을 깨닫습니다.

그래서 그 2년은 암흑의 시기가 아니라 요셉을 성장시키는 소중한 기간이 됩니다.

어둠이 깊다고 하는 것은 바로 뒤에 빛이 있기 때문입니다.

빛이 강하면 강할수록 어둠은 짙습니다.

내가 짙은 어둠 한가운데에 있다는 얘기는 다른 어느 때보다도 빛이 강하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요셉은 그 2년, 그 컴컴한 감옥 생활을 빛을 바라보면서 살았던 거죠.

이렇게 요셉은 그 2년 동안에 많이 성숙해집니다.

 

성경은 계속 전하고 있습니다. 2년 후에 파라오 왕은 묘한 꿈을 꿉니다.

아름답고 살찐 일곱 암소를 흉악하고 삐쩍 마르는 소가 먹어버린 꿈과

그리고 마른 이삭이 무성하고 튼실한 일곱 이삭을 삼키는 꿈을 하룻저녁에 꾸게 됩니다.

꿈을 꾼 왕의 마음은 당연히 뒤숭숭했겠죠. 대체 이게 무슨 징조일까?

그래서 이집트 왕은 박사들을 모두 불러 모읍니다.

해몽을 잘한다는 사람들 다 불러 모읍니다.

그렇지만 누구 하나 해석할 수 있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왕은 번민합니다.

바로 그때 시종장은 요셉을 생각해 냅니다.

그리고 왕에게 옥의 요셉이 자기의 꿈을 정확하게 해석했던 이를 고하죠.

그래서 파라오는 곧 요셉을 옥에서 불러내어 묻습니다.

‘내가 들으니 너는 꿈 이야기를 듣기만 하면 푼다고 하더라.’

이렇게 물으니, 요셉이 뭐라고 대답합니까?

‘저에게 무슨 그런 힘이 있겠습니까? 폐하께 복된 말씀을 일러주실 이는 하느님뿐이십니다.’

어쩌면 이렇게 겸손하고 아름다운 대답을 할 수 있었을까?

요셉은 하느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그리고 파라오 왕의 꿈을 해몽하죠.

이집트 땅에 일곱 해 동안 큰 풍년이 있겠고, 또 그 후 일곱 해 동안 큰 흉년이 온다는 꿈이라고

공손하게 파라오에게 설명합니다.

파라오는 해몽을 듣고 난 다음에 이렇게 얘기합니다.

‘우리가 이처럼 신통력을 지닌 사람을 어디서 찾겠느냐? 하느님께서 너에게 이 모든 것을 알려주셨으니,

너만큼 슬기롭고 지혜로운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

이렇게 신하들에게 찬탄하면서 말하고, 요셉에게는 ‘너를 이집트 온 땅의 총리로 임명하겠다.’ 하면서

왕의 반지를 빼서 요셉의 손에 끼워줍니다.

이 반지에는 왕의 인장이 새겨져 있습니다.

그러면서 왕은 요셉에게 그런 얘기를 하죠.

‘내가 너보다 높다는 것은 이 자리에 앉아 있다는 것뿐이다. 내가 너를 이집트 온 땅의 통치자로 세운다.’

이 정도로 파라오는 요셉에게 큰 권력을 맡깁니다.

참 신기합니다.

놀랍게도 이번에는 이집트 전국이 요셉에게 맡겨진 겁니다.

모든 일이 상호작용해서 선한 결과를 맺게 된다는 성경의 말씀대로,

사실무근의 죄로 투옥된 일도 시종장에게 2년 동안 잊힌 것도 결국 요셉에게나 이집트에나 유익한 일이 되고 만 겁니다.

감옥에서 요셉은 인간을 알게 됐습니다.

그리고 세상을 훤하게 보게 되는 아마 혜안이 열렸을 겁니다.

그래서 겨우 30세로 일국의 재상이 됩니다.

요셉은 30세라고는 믿어지지 않는 훌륭한 정치를 합니다.

 

그가 해몽한 대로 7년의 풍년 뒤에 7년의 기근이 엄습합니다.

기근은 이집트만이 아니라 주변 국가에도 엄습했죠.

그래서 그의 부모 형제들이 있는 가나안도 기근의 고통을 받고 있었습니다.

그를 팔아넘겼던 형들이 양식을 사려고 이집트 땅에 옵니다.

이집트에서는 기근에 대비해서 대량의 곡식이 7년 전부터 저장되어 있었던 겁니다.

양식을 사러 오는 이들 중에 바로 요셉의 형제들이 같이 옵니다.

여기에서 형제들과 요셉이 재회하게 되는데, 형제들은 설마하니 이집트의 재상이

언젠가 자기들이 팔아버린 요셉이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합니다.

그리고 놀랍게도, 어린 시절에 꿈을 꿨다고 그랬었죠.

그것 때문에 결국에는 형들에게 미움을 받았지만 어떻게 됩니까?

그 꿈이 이루어집니다.

소년 시절에 꿈을 꾼 것처럼 형들이 땅에 엎드려 요셉에게 절을 올립니다.

창세기 42장 이하 47장까지의 재회의 기사는 너무나 재미가 있기에 단숨에 읽게 됩니다.

그리고 성경을 읽다 보면 요셉이 얼마나 큰 사람인지,

요셉의 너그러운 관용과 육친애에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것은 오직 저 하나만이 아닐 거라고 생각이 됩니다.

그래서 이곳은 여러분들 각자가 자기 눈으로 꼭 읽어주시기를 바라기에 거기에 대한 해석은 제가 양보하기로 하겠습니다.

 

요셉의 이야기만큼 아름다운 이야기는 성서중 없습니다.

그러나 이런 요셉도 젊은 시절에는 팔려버리도록 미움을 받았다는 것은

우리 평범한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뜻깊은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느님은 그 요셉을 이같이 훌륭한 인간으로 새롭게 만들어 주신 겁니다.

그래서 요셉의 라이프 스토리는 우리에게 많은 메시지를 주고 있습니다.

사실은 요셉의 이야기는 1, 2, 3편으로는 끝내기가 어려울 정도로 많은 아름다운 이야기가 있고,

또 전해드릴 교훈이 있었지만, 시간 관계상 3편으로 끝내겠습니다.

제가 아까 말씀드렸던 대로 특히 창세기 42장에서 47장까지 혈육들과의 재회는 꼭 읽어주시길 바랍니다.

 

다음 시간에는 ‘율법 십계명’에 대한 것을 한번 짚고 넘어가겠습니다.

 

여러분들 영원에 영원을 더하여 사랑합니다.

 

+전능하신 천주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서는 이 말씀을 듣는 모든 이들에게 강복하소서.

아멘.

 

청주교구 원로 사목자 김웅열(느티나무신부님

출처: http://cafe.daum.net/thomas0714 (주님의 느티나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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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댓글 리스트
  • 작성자발아래 | 작성시간 24.03.31 아멘. 감사합니다.
  • 작성자1만두 | 작성시간 24.03.31 신부님, 감사드립니다. 아멘.
  • 작성자바람의노래 | 작성시간 24.04.06 아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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