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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인준 신부 강론

2023년 11월 20일 연중 제33주간 월요일 “다시 보아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작성자stellakang|작성시간23.11.21|조회수33 목록 댓글 2

연중 제33주간 월요일 

제1독서

<크나큰 진노가 이스라엘 위에 내렸다.>
▥ 마카베오기 상권의 말씀입니다.1,10-15.41-43.54-57.62-64
그 무렵 10 죄의 뿌리가 나왔는데,
그가 안티오코스 임금의 아들로서 로마에 인질로 잡혀갔던
안티오코스 에피파네스이다. 그는 그리스 왕국 백삼십칠년에 임금이 되었다.
11 그 무렵에 이스라엘에서 변절자들이 생겨 많은 이들을 이러한 말로 꾀었다.
“자, 가서 우리 주변의 민족들과 계약을 맺읍시다.
그들을 멀리하고 지내는 동안에 우리는 재난만 숱하게 당했을 뿐이오.”
12 이 말이 마음에 들어, 13 백성 가운데 몇 사람이 임금에게 기꺼이 나아가자,
그는 그들에게 이민족들의 규정을 따라도 좋다는 허락을 내렸다.
14 그리하여 그들은 이민족들의 풍습에 따라 예루살렘에 경기장을 세우고,
15 할례 받은 흔적을 없애고 거룩한 계약을 저버렸다.
이렇게 그들은 이민족들과 한통속이 되어 악을 저지르는 데에 열중하였다.
41 임금은 온 왕국에 칙령을 내려, 모두 한 백성이 되고
42 자기 민족만의 고유한 관습을 버리게 하였다.
이민족들은 모두 임금의 말을 받아들였다.
43 이스라엘에서도 많은 이들이 임금의 종교를 좋아하여,
우상들에게 희생 제물을 바치고 안식일을 더럽혔다.
54 백사십오년 키슬레우 달 열닷샛날,
안티오코스는 번제 제단 위에 황폐를 부르는 혐오스러운 것을 세웠다.
이어서 사람들이 주변의 유다 성읍들에 제단을 세우고,
55 집 대문이나 거리에서 향을 피웠다.
56 율법서는 발견되는 대로 찢어 불태워 버렸다.
57 계약의 책을 가지고 있다가 들키거나 율법을 따르는 이는
누구든지 왕명에 따라 사형에 처하였다.
62 그러나 이스라엘에는 부정한 것을 먹지 않기로 굳게 결심한 이들도 많았다.
63 그들은 음식으로 더럽혀지거나 거룩한 계약을 모독하느니
차라리 죽기로 작정하였다. 그리고 그렇게 죽어 갔다.
64 크나큰 진노가 이스라엘 위에 내린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음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 주님,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18,35-43
35 예수님께서 예리코에 가까이 이르셨을 때의 일이다.
어떤 눈먼 이가 길가에 앉아 구걸하고 있다가,
36 군중이 지나가는 소리를 듣고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37 사람들이 그에게 “나자렛 사람 예수님께서 지나가신다.” 하고 알려 주자,
38 그가 “예수님,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하고 부르짖었다.
39 앞서 가던 이들이 그에게 잠자코 있으라고 꾸짖었지만,
그는 더욱 큰 소리로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하고 외쳤다.
40 예수님께서 걸음을 멈추시고 그를 데려오라고 분부하셨다.
그가 가까이 다가오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물으셨다.
41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
그가 “주님,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 하였다.
42 예수님께서 그에게 “다시 보아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하고 이르시니,
43 그가 즉시 다시 보게 되었다. 그는 하느님을 찬양하며 예수님을 따랐다.
군중도 모두 그것을 보고 하느님께 찬미를 드렸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2023년 11월 20일 연중 제33주간 월요일

 

♧♣ “다시 보아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

 

마카베오 저자는 유다인들의 종교를 철저하게 박해하던 안티오코스 에피파네스가 로마 역사에

등장하는 배경을 말하고 있습니다.1)

 

이스라엘 백성들도 한결같이 하느님 법에 충실하지 못했기 때문에 유다의 종교를 떠나는 변절자들이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그들은 백성을 선동해서 이스라엘 백성의 신앙을 흔들어 놓습니다. 저자는 이런 상황을 기술하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이민족들의 풍습에 따라 예루살렘에 경기장을 세우고,

할례 받은 흔적을 없애고 거룩한 계약을 저버렸다.

이렇게 그들은 이민족들과 한통속이 되어 악을 저지르는 데에 열중하였다.”(1마카 1,14-15)

 

안티오코스는 번제 제단 위에 황폐를 부르는 혐오스러운 것을 세우고 율법서를 발견되는 대로 태웁니다.

 

그럴수록 백성들 가운데에서 많은 이들이 부정한 것을 먹지 않으며 차라리 죽음을 선택한 이들이 많아집니다.

 

지조를 갖고 자신의 신앙을 지킨다는 것은 사실 힘든 것이고 사람은 누구나 고통과 위험 앞에

타협하거나 도피하려는 심성을 갖고 있기는 매 한가지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예리코에 가끼이 이르셨을 때, 눈먼 사람 하나가 길가에 앉아 구걸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군중이 지나가는 소리를 듣고 무슨일이냐고 묻습니다. 사람들이

그에게 “나자렛 사람 예수님께서 지나가신다.”하고 알려 줍니다.

 

그러자 그는 즉시 "예수님,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하고 부르짖습니다.

 

사람들이 그에게 조용히 잠자코 있으라고 나무라지만 그는 더욱 큰 소리로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하고 외칩니다.2)

 

예수님께서 걸음을 멈추시고 그를 데려오라고 분부하십니다. 

 

그가 가까이 다가오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물으십니다.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루카 18,41)

 

그가 구분께 “주님,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라고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다시 보아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라고 말씀하시니 그가 즉시 보게 됩니다.

 

그는 하느님을 찬양하며 예수님을 따릅니다. 군중도 모두 그것을 보고 하느님께 찬미를 드립니다.

 

에리코의 소경은 예수님께 부르짖는 것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소리 지르는 그를 나무라는 사람들은 윤리적으로는 꽤 점잖은 사람으로 보일 것입니다.

 

감히 주님 앞에 ‘감히 어디라고 그렇게 소리를 지르면 쓰겠느냐?’는 말하자면 엘리트의 신앙인의

모습이지만 소외된 이의 고통을 알 턱이 없습니다.

 

우리도 잘못된 신앙의 길로 접어들면 마찬가지입니다.

 

----------

 1) 셀레우스 제국을 다스렸던 안티오코스 4세 에피파네스(기원전 215-164)는 마카베오 형제들의 반란을 진압하는 데에 온 힘을 기울였다. 그는 정치적 수완으로 유다의 종교를 핵심인물인 대사제들을 자신의 친세력으로 바꾸기까지 하였다. 그는 이집트의 프톨레미 왕조와 가까운 오니아스(Onias)3세 대사제 대신 자신의 지지자 야손(Jason) 대사제로 그리고 후대에는 메넬라우스(Menlaus) 대사제로 바꾸면서 친 헬레니즘 문화에 보급에 온 힘을 쏟았던 것이다.

 

 2) 예수님께서 만난 소경은 물리적으로 앞을 못 보는 소경이다. 그런데 우리는 소경이 아니고 어디에서나 무엇이든 잘 보며 살고 있다. 주님께서 고쳐주신 이는 소경인데 비해 우리는 사실 ‘눈뜬장님.’이다. 우리의 마음이 욕심과 이기심, 그리고 들뜬 명예심으로 가득 차 있다면 우리는 사실 내 이웃이나 사물을 제대로 보지 못해서 비록 육체적으로는 소경이 아니라 해도 사실은 마음으로 소경이 된 것이다.

 


 

“다시 보아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마카베오 저자는 이스라엘의 종교를 박해하는 통치자에 대해서 이렇게 기술하고 있습니다.

 

“그 무렵 죄의 뿌리가 나왔는데, 그가 안티오코스 임금의 아들로서 로마에 인질로 잡혀갔던

안티오코스 에피파네스이다. 그는 그리스 왕국 백삼십칠 년에 임금이 되었다.”(1마카 1,10)

 

에피파네스는 안티오쿠스 3세(B.C. 242~187년)의 셋째 아들로서 셀류쿠스 왕가의

 8대 왕에 오릅니다.

 

그의 부친이 기원전 190년에 카르타고의 장군, 한니발과 연합하여 로마를 대항하는 전투 끝에

패하여 그의 아들 안티오코스를 볼모로 내주었기 때문에 로마에서 14년 동안 살아야 했습니다.

 

안티오코스는 그리스 식의 이름 ‘에피파네스"(Ephipanes)’이름을 붙여 자신을 안티오코스 에피파네라고 이름을 붙였던 것입니다.

 

그는 왕우에 오르자마자 이집트의 프톨레미의 노선이던 오니아스(Onias) 3세를 몰아내고

자신의 지지자 야손(Jason)을 대자제직에 앉힙니다.

 

그러나 다시 유대인의 결속을 반대하는 목적으로 야손(Jason)을 몰아내고 베냐민 지파의

메넬라우스(Menelaus)를 대사제로 올려놓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그리스 종교를 내세우며 유대교 말살정책을 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예루살렘을 점령해서 약탈하고 유대인들의 율법준수를 금하며 종교적인

축절과 번제와 제사, 할례법도 금지시켰던 것입니다. 뿐만아니라 그는 율법서를 붙태우고

돼지고기를 먹도록 강요했던 것입니다.

 

마카베오 저자는 에피파네스의 박해정책에 대해서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할례 받은 흔적을 없애고 거룩한 계약을 저버렸다. 이렇게 그들은 이민족들과 한통속이 되어

악을 저지르는 데에 열중하였다. 임금은 온 왕국에 칙령을 내려, 모두 한 백성이 되고 자기

민족만의 고유한 관습을 버리게 하였다.”(1마카 1,15.41-42)

 

사람은 다 자신의 위치에서 사물과 세상 이치를 판단할 때가 많습니다.

 

그것이 사람이 가지고 있는 한계라 할 수 있지요. 예수님께서 예리코에 가까이 이르셨을 때

길 가에서 구걸하는 눈먼 이를 지나치십니다.

 

그 눈 먼 사람은 사람들에게 무슨 일인지를 물어 봅니다. 사람들이 “나자렛 사람 예수님께서

지나가신다.”(루카 18,37)라고 일러 주지요.

 

그는 머뭇거릴 것도 없이 바로 “예수님,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38.39절)이라고 있는 힘을 다해 두 차례나 부르짖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걸음을 멈추시고 그를 데려 오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그에게 무엇을 원하는지

물어보십니다. 그가 눈을 뜨게 해달라고 청합니다.

 

그의 말을 들으신 예수님께서 그를 향하여 “다시 보아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42절)이라고 말씀하시며 그의 눈을 뜨게 해 주십니다.

 

그는 하느님을 찬양하며 주님을 따릅니다. 처음부터 이 광경을 목격한 군중을 모두 하느님께

찬미를 드립니다.

 

사람들은 모두 자기 위주라는 것이 오랫동안 그 거리를 지나면서 구걸하는 눈먼 그 사람의

입장을 헤아리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무관심한 사람들에게는 한 구걸하는 사람이 그 자리에 있는 것 뿐이지요. 그러나 그 눈먼

사람의 입장은 다릅니다.

 

그는 사람들이 몰랐던 서러움과 함께 예수님께 전적으로 매달리는 것입니다. 성경 본문

어디에도 그가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들었다는 이야기는 없습니다.

 

그러나 본문 전후를 보면 그는 분명히 예수님에 대해 풍문으로 들었고 마음 깊숙이

그분을 뵙고 싶어 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설레임과 함께 주님께 부르짖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풍문으로 들었던 그분은

나의 이 서러움과 이 고통을 이해해주고 자신의 눈을 뜨게 해 주리라고 확신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있는 힘을 다해 주님을 불렀고 주님께서는 그의 바람대로 눈을 치유해주신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율법준수가 의인의 조건이고 내세를 위한 준비라고 보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말씀 선포 뿐 아닐가 사랑의 실천을 통해서 구원을 펴신 것입니다.

 

암흑의 세계에 갇혀 있었고 사람들의 무관심과 함께 소외의 삶을 살았던 한 소경이 주님을

온전히 믿고 눈을 뜨게 됩니다. 주님께서 그에게 구원을 펴신 것입니다.

 

출처: 구름 흘러가는 원문보기   ▶ 정인준 파트리치오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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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댓글 리스트
  • 작성자발아래 | 작성시간 23.11.21 아멘. 감사합니다.
  • 작성자조나단 | 작성시간 23.11.21 아멘 신부님 stellakang 님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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