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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인준 신부 강론

11월 23일 연중 제33주간 목요일 “네 눈에는 그것이 감추어져 있다.” 정인준 파트리치오 신부

작성자stellakang|작성시간23.11.24|조회수36 목록 댓글 2

연중 제33주간 목요일

 

제1독서

<우리는 우리 조상들의 계약을 따를 것이오.>
▥ 마카베오기 상권의 말씀입니다. 2,15-29
그 무렵 15 배교를 강요하는 임금의 관리들이 모데인에서도 제물을 바치게 하려고 그 성읍으로 갔다. 16 이스라엘에서 많은 사람이 그 관리들 편에 가담하였지만 마타티아스와 그 아들들은 한데 뭉쳤다.
17 그러자 임금의 관리들이 마타티아스에게 말하였다. “당신은 이 성읍의 지도자일 뿐만 아니라 존경을 받는 큰사람이며 아들들과 형제들에게도 지지를 받고 있소. 18 모든 민족들과 유다 사람들과 예루살렘에 남은 자들처럼, 당신도 앞장서서 왕명을 따르시오. 그러면 당신과 당신 아들들은 임금님의 벗이 될 뿐만 아니라, 은과 금과 많은 선물로 부귀를 누릴 것이오.”
19 그러나 마타티아스는 큰 소리로 대답하였다. “임금의 왕국에 사는 모든 민족들이 그에게 복종하여, 저마다 자기 조상들의 종교를 버리고 그의 명령을 따르기로 결정했다 하더라도, 20 나와 내 아들들과 형제들은 우리 조상들의 계약을 따를 것이오.
21 우리가 율법과 규정을 저버리는 일은 결코 있을 수 없소. 22 우리는 임금의 말을 따르지도 않고 우리의 종교에서 오른쪽으로도 왼쪽으로도 벗어나지 않겠소.”
23 그가 이 말을 마쳤을 때, 어떤 유다 남자가 나오더니 모든 이가 보는 앞에서 왕명에 따라 모데인 제단 위에서 희생 제물을 바치려고 하였다.
24 그것을 본 마타티아스는 열정이 타오르고 심장이 떨리고 의분이 치밀어 올랐다. 그는 달려가 제단 위에서 그자를 쳐 죽였다.
25 그때에 그는 제물을 바치라고 강요하는 임금의 신하도 죽이고 제단도 헐어 버렸다. 26 이렇게 그는 전에 피느하스가 살루의 아들 지므리에게 한 것처럼, 율법에 대한 열정을 드러냈다.
27 그러고 나서 마타티아스는 그 성읍에서 “율법에 대한 열정이 뜨겁고 계약을 지지하는 이는 모두 나를 따라나서시오.” 하고 큰 소리로 외쳤다. 28 그리고 그와 그의 아들들은 가지고 있던 모든 것을 성읍에 남겨 둔 채 산으로 달아났다.
29 그때에 정의와 공정을 추구하는 많은 이들이 광야로 내려가서 거기에 자리를 잡았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음

<너도 평화를 가져다주는 것이 무엇인지 알았더라면 ……!>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9,41-44
그때에 41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가까이 이르시어 그 도성을 보고 우시며 42 말씀하셨다.
“오늘 너도 평화를 가져다주는 것이 무엇인지 알았더라면 ……! 그러나 지금 네 눈에는 그것이 감추어져 있다.
43 그때가 너에게 닥쳐올 것이다. 그러면 너의 원수들이 네 둘레에 공격 축대를 쌓은 다음, 너를 에워싸고 사방에서 조여들 것이다. 44 그리하여 너와 네 안에 있는 자녀들을 땅바닥에 내동댕이치고, 네 안에 돌 하나도 다른 돌 위에 남아 있지 않게 만들어 버릴 것이다. 하느님께서 너를 찾아오신 때를 네가 알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네 눈에는 그것이 감추어져 있다.”

 

안티오코스 에피파네스 통치자는 유대인들의 종교를 말살하는 정책을 펼칩니다.

 

그러나 뜻 있는 유대인들은 통치자의 뜻을 거슬러 일어납니다.

 

그러한 사람 중에 하나인 마타티아스가 박해자를 거슬러 “임금의 왕국에 사는 모든 민족들이

그에게 복종하여, 저마다 자기 조상들의 종교를 버리고 그의 명령을 따르기로 결정했다 하더라도,

나와 내 아들들과 형제들은 우리 조상들의 계약을 따를 것이오.”(1마카 2,19-20)라는 말과 함께

유다인들의 마음을 모읍니다.

 

그리고 그는 왕명에 따라 모데인 제단에서 이교도의 제사를 바치려는 유다인 남자를

죽이며 그이 아들들과 산으로 몸을 피합니다.

 

피해 달아난 산에서 자리를 잡은 그 일행들이 박해자를 대항하는 민족 전쟁을 일으킵니다.

 

하느님의 사랑이 표현되는 율법에 대한 열정이 그들을 하나로 묶어주는 힘이 되는 것입니다.

 

물론 하느님에 대한 사랑이 후대에 율법준수로 나타나서 율법주의자들이 되었지만 그 당시

그들의 마음에는 하느님을 향한 열정이며 하느님께 대한 충실과 사랑으로 여겼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복음서에 보면 예루살렘 성을 바라보시며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요한복음(11,35)에서 예수님께서 또한 죽은 친구 라자로의 무덤 앞에서 또한 눈물을

흘리십니다.

 

라자로를 위한 눈물은 다분히 그에 대한 사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루살렘 도성을 바라보며 우신 것은 다른 의미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아버지로부터 이 세상에 파견되어 오신 주님께서는 그들에게 사랑을 갖고 말씀을

선포하기도 하고 병자를 치유하기도 하시며 당신의 마음을 전하십니다.

 

그런데 요한 복음 서두에서 밝히셨듯이 주님께서는 그들에게 버림을 받으십니다.

 

본문은 이 사실을 이렇게 전하고 있습니다. “그분께서 세상에 계셨고 세상이 그분을 통하여

생겨났지만 세상은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였다.”(요한 1,10-11)

 

주님을 가장 반기고 받아들일 사람들은 성경에 정통하다는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앞장서서 가장 격렬하게 주님을 배타적으로 대하고 결국 그분을 죽음에

부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장차 다가올 예루살렘의 멸망을 예견하시며 슬퍼하십니다.

 

그래서 그 도성을 바라보시며 눈물을 흐리시며 말씀하십니다.

 

“오늘 너도 평화를 가져다주는 것이 무엇인지 알았더라면 ……! 그러나 지금 네 눈에는

그것이 감추어져 있다.”(루카 19,42)

 

하느님께서는 백성들에게 ‘질투의 하느님’(탈출 20,5; 신명 5,9)이심을 명심하고 하십니다.

 

백성들을 사랑하시는 하느님이시지만 구원의 역사에 이스라엘 백성이 성실한 것만은 아닙니다.

 

이방인의 신에게 혼을 빼앗기고 우상숭배에 빠지기도 합니다. 하느님께서 그들을 나무라십니다.

 

사랑에서 제일 고통스러운 것은 인간사회에서 마찬가지로 ‘받아들여지지 않고 상대의 등을

보는 것’입니다. 인간을 창조하신 하느님께서는 또한 인간을 참으로 사랑하십니다.

 

등을 보이는 인간에게 ‘질투하시는 하느님’께서는 징벌의 으름장을 놓기도 하시지만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라는 말이 있듯 하느님께서는 그러한 인간을 기다리시며 자비의

마음을 보이십니다.

 

하느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도 인간을 사랑하시고 무엇보다 동족인 이스라엘의 배탁적인

모습에도 기다리시는 모습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자신들의 심장처럼 여기는 예루살렘의 멸망을 내다보시며 비통한 마음을

눈물로 내비치십니다. 

 

“때가 너에게 닥쳐올 것이다. 그러면 너의 원수들이 네 둘레에 공격 축대를 쌓은 다음,

너를 에워싸고 사방에서 조여들 것이다. 그리하여 너와 네 안에 있는 자녀들을 땅바닥에

내동댕이치고, 네 안에 돌 하나도 다른 돌 위에 남아 있지 않게 만들어 버릴 것이다.”

(루카 19,43-44)

 

‘사랑은 목숨보다 강하다’는 말대로 주님께서는 등을 돌린 사람들을 위해 당신 생명을

내어 놓습니다.

 

사람도 사랑을 위해 목숨을 바칠 때가 많습니다. 돌아오지 않는 연인을 평생을 가슴에

품고 사는 사람이 있는가하면 부모의 마음을 향해 주먹질을 하는 자식에게 자신의 가슴을

내어 놓습니다.

 

이 세상은 살벌하고 이기적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사랑이 있기에 이 세상은 사막의

오아시스를 두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장차 이루어질 예루살렘의 멸망을 바라보시며 말씀하십니다.

 

“하느님께서 너를 찾아오신 때를 네가 알지 못하였기 때문이다.”(44절)

 

출처: 구름 흘러가는 원문보기   ▶ 정인준 파트리치오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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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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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조나단 | 작성시간 23.11.24 아멘 신부님 stellakang 님 고맙습니다.
  • 작성자발아래 | 작성시간 23.11.24 아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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