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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상선 신부 강론

[스크랩] 12월 23일<정성스럽게, 그리고 충실하게 주님을 맞으려 애쓰는 이들>작은형제회 오 바오로 신부

작성자stellakang|작성시간23.12.23|조회수142 목록 댓글 2

12월 23일

 

제1독서

<주님의 날이 오기 전에 내가 너희에게 엘리야 예언자를 보내리라.>
▥ 말라키 예언서의 말씀입니다. 3,1-4.23-24
주 하느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1 “보라, 내가 나의 사자를 보내니 그가 내 앞에서 길을 닦으리라.
너희가 찾던 주님, 그가 홀연히 자기 성전으로 오리라.
너희가 좋아하는 계약의 사자
보라, 그가 온다.
─ 만군의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
2 그가 오는 날을 누가 견디어 내며
그가 나타날 때에 누가 버티고 서 있을 수 있겠느냐?
그는 제련사의 불 같고 염색공의 잿물 같으리라.
3 그는 은 제련사와 정련사처럼 앉아 레위의 자손들을 깨끗하게 하고
그들을 금과 은처럼 정련하여 주님에게 의로운 제물을 바치게 하리라.
4 그러면 유다와 예루살렘의 제물이 옛날처럼, 지난날처럼 주님 마음에 들리라.
23 보라, 주님의 크고 두려운 날이 오기 전에
내가 너희에게 엘리야 예언자를 보내리라.
24 그가 부모의 마음을 자녀에게 돌리고 자녀의 마음을 부모에게 돌리리라.
그래야 내가 와서 이 땅을 파멸로 내리치지 않으리라.”
주님의 말씀입니다.

 

복음

<세례자 요한의 탄생>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57-66
57 엘리사벳은 해산달이 차서 아들을 낳았다.
58 이웃과 친척들은 주님께서 엘리사벳에게 큰 자비를 베푸셨다는 것을 듣고,
그와 함께 기뻐하였다.
59 여드레째 되는 날, 그들은 아기의 할례식에 갔다가
아버지의 이름을 따서 아기를 즈카르야라고 부르려 하였다.
60 그러나 아기 어머니는 “안 됩니다. 요한이라고 불러야 합니다.” 하고 말하였다.
61 그들은 “당신의 친척 가운데에는 그런 이름을 가진 이가 없습니다.” 하며,
62 그 아버지에게 아기의 이름을 무엇이라 하겠느냐고 손짓으로 물었다.
63 즈카르야는 글 쓰는 판을 달라고 하여 ‘그의 이름은 요한’이라고 썼다.
그러자 모두 놀라워하였다.
64 그때에 즈카르야는 즉시 입이 열리고 혀가 풀려
말을 하기 시작하면서 하느님을 찬미하였다.
65 그리하여 이웃이 모두 두려움에 휩싸였다.
그리고 이 모든 일이 유다의 온 산악 지방에서 화제가 되었다.
66 소문을 들은 이들은 모두 그것을 마음에 새기며,
“이 아기가 대체 무엇이 될 것인가?” 하고 말하였다.
정녕 주님의 손길이 그를 보살피고 계셨던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우리 모두 주님의 오심을 기다리며 몸과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오늘 미사의 말씀 안에서도 정성스럽게, 그리고 충실하게 주님을 맞으려 애쓰는 이들을 만납니다.

"안 됩니다. 요한이라고 불러야 합니다"(루카 1,60).

출산한지 열흘도 채 안 된 늙은 산모가 외칩니다. 이웃과 친척들이 부친이나 친척의 이름을 따서 아기 이름을 짓는 풍습에 따라 아기를 "즈카르야"라 부르려 하는데 아기 어머니가 적극적으로 이를 거부한 것입니다.

"네 아내 엘리사벳이 너에게 아들을 낳아 줄 터이니 그 이름을 요한이라고 하여라"(루카 1,13).

엘리사벳은 즈카르야에게 나타났던 천사의 이 전언을 가슴에 새기고 또 새겼을 것입니다. 이는 인간 풍습이나 관례, 취향이나 선호도로 뒤집을 수 없는 하느님의 뜻입니다. 재차 확인을 요구받은 즈카르야마저 "그의 이름은 요한"(루카 1,63)이라고 쓰자 이웃과 친척들이 물러나지요.

이름에는 그 사람의 소명이 담겨 있습니다. 그를 창조하신 하느님께서 그에게 원하시는 바가 이름 안에 녹아듭니다. 이 존재의 호칭이 무수히 불리워지고 언급되면서 그 이름의 의미역시 그 존재 안에 더 깊이 각인되고, 그는 자신의 존재적 정체성과 목적성을 더 깊이 살아가게 되지요.

요한에게 주어진 이름을 지키려는 즈카르야와 엘리사벳의 노력은 구원 역사 안에서 이 아기에게 배정된 하느님의 계획을 어느 하나도 소홀히 하지 않겠다는 정성과 충직함에서 나온 것입니다. 이 숙제까지 마치고 나자 비로소 즈카르야의 혀가 풀립니다. 의심으로 묶였던 것이 믿음의 증언으로 제 구실을 되찾은 것이지요.

"이 아기가 대체 무엇이 될 것인가?"(루카 1,66)

두려움에 휩싸인 이웃들을 통해 아기의 소문이 퍼져 나가면서 사람들이 의문을 가집니다. 이런 놀라운 일이 정치적 사회적 종교적으로 어려운 시기를 지내고 있는 민중에게 일말의 희망이 될 수도 있겠지요. 사람들 마음 안에 떠오른 이 질문의 답은 제1독서 안에 있습니다.

"보라. 주님의 크고 두려운 날이 오기 전에 내가 너희에게 엘리야 예언자를 보내리라"(말라 3,23).

말라키 예언서 저자는, 주님의 날을 맞이하기 전에 세상을 준비시킬 "엘리야 예언자"의 존재를 이야기합니다. 오늘의 아기, 세례자 요한이 바로 그 "엘리야 예언자"입니다. 아기의 이 역할과 정체성은 자기 자신이나 가족을 위한 것이 아니라 온 이스라엘, 나아가 온 인류를 위한 것이기에, 주님의 뜻을 경외하는 이들을 통해 반드시 지켜져야 했지요.

살다보면 희생도 해야 하고 물러나 주는 편이 서로를 위해 더 좋을 때도 있습니다만, 결코 양보할 수 없는 것이 분명히 있지요. 그것이 하느님의 뜻, 말씀의 완성과 관계된다면 더더욱 지켜내야 할 것입니다.

"너희가 찾던 주님 그가 홀연히 자기 성전으로 오리라"(말라 3,1).

주님께서 당신 성전으로 오실 것입니다. 그 성전은 이스라엘이고 예루살렘이기도 합니다만, 지금은 바로 성탄을 기다리는 우리의 영혼이 될 것입니다.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충실히 제 역할을 다한 선조들처럼 우리도 그분의 오심을 위해 정성과 사랑으로 성전을 가꾸어야겠지요.

"보라 내가 문 앞에 서서 문을 두드리고 있다. 누구든지 내 목소리를 듣고 문을 열면 나는 그의 집에 들어가 그와 함께 먹고 그 사람도 나와 함께 먹으리라"(영성체송).

주님께서 문 앞에 다다라 문을 두드리고 계십니다. 성탄이 거의 임박했습니다. 그런데 오시는 주님과 우리와의 만남은 우리에게 달려 있습니다. 그분은 꼭 오실 것이니 우리 편에서 스스로를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겸손과 가난으로 오시어 조심스레 문을 두드리시는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고 영혼의 문을 활짝 열지 않는다면, 구중궁궐 안에서, 거룩한 수도원 안에서, 교회 안에서 온갖 전례와 행사와 이벤트 한가운데 있더라도 성탄의 기쁨은 우리 것이 되지 못합니다. 그러니 잠시 멈추고 숨을 고릅시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건 뛰어난 성과나 고액의 헌금, 모두를 만족시킬 재주보다는 가난한 그분이 마음껏 편히 머무르실 수 있는 소박하고 정성스런 우리 마음의 구유입니다. 초라해도 좋고 빈한해도 좋습니다. 우리 영혼의 구유를 값지게 해 주실 분은 거기에 누우실 아기 예수님이시니까요.


▶ 작은형제회 오 바오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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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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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조나단 | 작성시간 23.12.23 아멘 신부님 stellakang 님 고맙습니다.
  • 작성자발아래 | 작성시간 23.12.23 아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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