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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상선 신부 강론

[스크랩] 2월 23일 사순 제1주간 금요일<"돌아섬"이 곧 회개의 시작입니다.>작은형제회 오 상선 바오로 신부

작성자stellakang|작성시간24.02.23|조회수148 목록 댓글 4

사순 제1주간 금요일

 

제1독서

<내가 정말 기뻐하는 것이 악인의 죽음이겠느냐? 악인이 자기가 걸어온 길을 버리고 돌아서서 사는 것이 아니겠느냐?>
▥ 에제키엘 예언서의 말씀입니다.18,21-28
주 하느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21 “악인도 자기가 저지른 모든 죄를 버리고 돌아서서,
나의 모든 규정을 준수하고 공정과 정의를 실천하면,
죽지 않고 반드시 살 것이다.
22 그가 저지른 모든 죄악은 더 이상 기억되지 않고,
자기가 실천한 정의 때문에 살 것이다.
23 내가 정말 기뻐하는 것이 악인의 죽음이겠느냐? 주 하느님의 말이다.
악인이 자기가 걸어온 길을 버리고 돌아서서 사는 것이 아니겠느냐?
24 그러나 의인이 자기 정의를 버리고 돌아서서 불의를 저지르고,
악인이 저지르는 온갖 역겨운 짓을 따라 하면, 살 수 있겠느냐?
그가 실천한 모든 정의는 기억되지 않은 채,
자기가 저지른 배신과 자기가 지은 죄 때문에 죽을 것이다.
25 그런데 너희는, ‘주님의 길은 공평하지 않다.’고 말한다.
이스라엘 집안아, 들어 보아라. 내 길이 공평하지 않다는 말이냐?
오히려 너희의 길이 공평하지 않은 것 아니냐?
26 의인이 자기 정의를 버리고 돌아서서 불의를 저지르면,
그것 때문에 죽을 것이다. 자기가 저지른 불의 때문에 죽는 것이다.
27 그러나 악인이라도 자기가 저지른 죄악을 버리고 돌아서서
공정과 정의를 실천하면, 그는 자기 목숨을 살릴 것이다.
28 자기가 저지른 모든 죄악을 생각하고 그 죄악에서 돌아서면,
그는 죽지 않고 반드시 살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음

<물러가 먼저 그 형제와 화해하여라.>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5,20ㄴ-26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20 “너희의 의로움이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
결코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21 ‘살인해서는 안 된다. 살인한 자는 재판에 넘겨진다.’고
옛사람들에게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22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자기 형제에게 성을 내는 자는 누구나 재판에 넘겨질 것이다.
그리고 자기 형제에게 ‘바보!’라고 하는 자는 최고 의회에 넘겨지고,
‘멍청이!’라고 하는 자는 불붙는 지옥에 넘겨질 것이다.
23 그러므로 네가 제단에 예물을 바치려고 하다가,
거기에서 형제가 너에게 원망을 품고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24 예물을 거기 제단 앞에 놓아두고 물러가 먼저 그 형제와 화해하여라.
그런 다음에 돌아와서 예물을 바쳐라.
25 너를 고소한 자와 함께 법정으로 가는 도중에 얼른 타협하여라.
그러지 않으면 고소한 자가 너를 재판관에게 넘기고
재판관은 너를 형리에게 넘겨, 네가 감옥에 갇힐 것이다.
26 내가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네가 마지막 한 닢까지 갚기 전에는 결코 거기에서 나오지 못할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살인과 같이 인간으로서 정말, 정말, 정말 절대로 해서는 안되는 반인륜적 범죄행위를 최악의 선으로 그어 놓고, 그것을 어기지 않으면 의인이고 어기면 죄인이라 가르쳤습니다. 그리고 이를 어길 경우에는 응분의 벌이 주어지는 게 정의라고 여겼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너희의 의로움이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 안 된다."(마태 5,20)고 하시며 '형제에게 성 내는 것, 바보라 하는 것, 멍청이라 하는 것'까지도 주의하라고 하십니다. 물론 율법에는 그런 행위에 대한 규제나 징벌이 들어있지 않습니다.

그분께서는 물리적으로 타인의 목숨을 앗아가는 살인뿐 아니라, 모독이나 모욕, 과도한 분노처럼 사람 사이에 오가는 (도를 넘는) 갈등의 표현에 대해서도 이웃을 해치는 죄, 인격 살인의 범주에 포함시키십니다. 의로움은 법적으로 깨끗한가의 문제를 넘어서 다른 사람에게 얼마나 모욕과 상처를 주는가의 문제일 수 있다는 것이 예수님의 생각입니다.

그렇다면 벗님 여러분은 참으로 의인인가요? 사실 우리 대부분은 십계명이나 교회법, 국법을 명시적으로 어기며 살지는 않습니다. 아니, 대부분은 무슨 법이 있는지조차도 잘 모릅니다. 그러니 우리는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기준에 따르면 의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기준에 따르면, 나와 다르다는 이유로, 내 맘에 들지 않는다는 이유로, 나의 뜻을 이루는데 도움이 되지 않고 방해가 된다는 이유로 다른 이웃을 내치고 모욕하고 무시하고 빨리 없어지기를 내심 바란다면, 그런 심보가 더 큰 죄요 악이 됩니다.

인간 사이에 다툼이 전혀 없을 수는 없다는 걸 예수님도 잘 아실 겁니다. 하지만 진정 형제를 사랑한다면, 아무리 작은 상처나 아픔이라도 그것이 야기될 수도 있는 순간에 한 박자 멈추고 당신의 가르침을 떠올리기를 바라시는 것 같습니다. 물론 어느 한 쪽이 아니라 서로의 존엄과 평화를 위해서입니다.

"너에게 원한을 품고 있는 ... 그 형제와 먼저 화해하여라. 그런 다음에 돌아와서 예물을 바쳐라"(마태 5,23-24).

형제에게 잘못을 저질렀을 때, 몸과 마음의 상처를 입은 상대에게 진심으로 사과하고 용서를 빌기보다, 속죄예물을 바치거나 죄에 대한 보상을 충분히 함으로써 법적으로 해결하고 끝인 경우도 있을 수 있습니다. 돈과 예물로 율법이 요구하는 응당의 대가를 치렀으니, 스스로 의로워졌다고 생각할 수도 있고요. 소위 면피했다고 손을 씻는 짓이지요.

 

마음 깊이 '미안해'라고 하지는 않고 돈이나 선물 등으로 떼우려는 우리의 모습은 없는지 한번 돌아봐야 하겠습니다. ㅍ 이에 예수님께서는, 먼저 가서 상처 입은 그 형제에게 용서를 받음으로써 그의 마음을 얻고, 그러고 나서 하느님께 예물을 바쳐 그분의 마음도 얻으라고 하시는 것 같습니다. 당사자들이 서로 주고받아야 할 용서와 화해의 장에서 상대를 소외시키고 건너뛰어 버리는 교만을 범하지 않도록 가르쳐 주십니다.

에제키엘 예언자가 전하는 주님의 말씀에는 "돌아서서"라는 단어가 여러 차례 나옵니다. 성서에서 돌아선다는 표현은 '회개한다'는 또다른 표현입니다. 한마디로 방향을 전환한다는 뜻이지요. 그런데 돌아선다고 다 같은 게 아니라, 악인이 선으로 돌아설 때와 의인이 악행으로 돌아설 때가 다릅니다. 회개와 그에 따른 축복은 전자에만 해당됩니다.

"악인도 죄를 버리고 돌아서서 정의와 공정을 실천하면 죽지 않고 반드시 살 것이다"(에제 18,21). "의인이 자기 정의를 버리고 돌아서서 불의를 저지르면 그것 때문에 죽을 것이다"(에제 18,26).

과연 돌아서는 행위 자체가 아니라, 무엇을 향해 돌아서는지 그 방향성이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고 보면 하느님은 기억력이 별로이신 것 같습니다. 아니, 나약한 인간을 위해 일부러 당신 기억의 능력을 잠재우신 것 같습니다.

죄인인 우리의 허물을 등 뒤로 던져버리시고 기억에서조차 지워버리시니, 돌아서기만 하면 그 덕에 죄인인 우리가 다시 일어서고 돌아오고 빛을 받아 웃을 수 있는 것입니다만, 배신한 의인의 경우라면 사정이 좀 다릅니다. 그가 실천했던 정의는 기억되지 않을 거라고, 예전에 행했던 정의 때문에 봐주지는 않으시겠다고, 곧 '지금'의 너를 보겠다고 하십니다.

복음의 예수님께서 화해와 타협을 말씀하시는 것도 같은 맥락입니다. 성급하고 자기 조절 능력이 부족하며 자기 위주로 사고하는 우리가 사람 사이에 부대끼고 살면서 아무 갈등 없이 지내기는 어렵습니다만, 이미 입힌 상처에 대해 진심으로 겸손하게 용서를 청하고 사랑과 위로의 말, 행위로 치유해 줄 수는 있습니다.

물론 이때는 해를 입혔던 사람만 애써야 하는 건 아닙니다. 피해를 당한 형제 역시, 과거를 잊어주시는 '선택적 기억 장애'를 가지신 하느님처럼 지난 일을 잊어주어야 합니다. 어렵더라도 노력해야 합니다. '과거'의 미웠던 형제가 아니라 '지금' 진정성을 가지고 손을 내미는 형제만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래야 화해가 일어나고, 하느님께서 즐겨 받으실 흠 없는 예물을 함께 바칠 수 있습니다.

이렇듯 예수님의 가르침은 율법의 한계를 확장시킵니다. 살인만, 간음만, 도둑질만 하지 않는 것으로 의로움을 획득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의 요구에 섬세하게 응해야 하고, 최소한의 악을 피하며 살기보다 최대한의 선을 행하며 사는 삶이니까요.

그렇다면 예수님의 가르침이 율법보다 무겁고 어려운가요? 그렇지 않을 것 같습니다. 예수님의 법은 성령의 법, 사랑의 법이기에 문자에 묶여 있지 않고 이미 우리 마음에 새겨져 있습니다. 물과 성령으로 세례를 받은 우리는 사랑의 법을 지키기 위해 더 이상 누구에게 묻거나 판례를 뒤질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 안의 사랑이, 마음이, 양심이 잣대가 되어주고 믿음이 등대가 되어주기에 그렇습니다.

사랑하는 벗님 여러분, 오늘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호소하십니다. "내가 잘 못한 게 뭐가 있어. 나는 열심히 기도시간 지켰고 나름대로 법과 원칙에 따라 최선을 다했어. 그러니 문제없어. 그렇게 살지 않는 사람 내가 좀 미워하고 짜증내고 화를 좀 낸 것은 당연한 것이야."라고 생각말고, "아, 그래 나의 말 한마디, 냉정한 눈빛 하나가 저 벗의 마음을 저렇게 아프게 만들 수도 있겠구나" 생각하며 마음을 좀 고쳐 먹으라고. 제발 돌아서라고. 제발 회개하라고. 그게 진정 네가 살길이라고. 그게 진정 네가 의인이 되는 길이라고.


▶ 작은형제회 오 상선 바오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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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아참 | 작성시간 24.02.23 나의 말 한마디, 냉정한 눈빛 하나가 저 벗의 마음을 저렇게 아프게 만들 수도 있겠구나
  • 작성자조나단 | 작성시간 24.02.23 아멘 신부님 stellakang 님 고맙습니다.
  • 작성자바람의노래 | 작성시간 24.02.23 아멘 감사합니다!
  • 작성자발아래 | 작성시간 24.02.23 아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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