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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상선 신부 강론

[스크랩] 3월 2일 사순 제2주간 토요일 <"그러니 즐기고 기뻐해야 한다." > 작은형제회 오 바오로 신부님

작성자stellakang|작성시간24.03.02|조회수144 목록 댓글 3

사순 제2주간 토요일

제1독서

<저희의 모든 죄악을 바다 깊은 곳으로 던져 주십시오.>
▥ 미카 예언서의 말씀입니다.7,14-15.18-20
주님, 14 과수원 한가운데 숲속에 홀로 살아가는 당신 백성을,
당신 소유의 양 떼를 당신의 지팡이로 보살펴 주십시오.
옛날처럼 바산과 길앗에서 그들을 보살펴 주십시오.
15 당신께서 이집트 땅에서 나오실 때처럼 저희에게 놀라운 일들을 보여 주십시오.
18 당신의 소유인 남은 자들, 그들의 허물을 용서해 주시고
죄를 못 본 체해 주시는 당신 같으신 하느님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분은 분노를 영원히 품지 않으시고 오히려 기꺼이 자애를 베푸시는 분이시다.
19 그분께서는 다시 우리를 가엾이 여기시고 우리의 허물들을 모르는 체해 주시리라.
당신께서 저희의 모든 죄악을 바다 깊은 곳으로 던져 주십시오.
20 먼 옛날 당신께서 저희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대로
야곱을 성실히 대하시고 아브라함에게 자애를 베풀어 주십시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음

<너의 아우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15,1-3.11ㄴ-32
그때에 1 세리들과 죄인들이 모두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가까이 모여들고 있었다.
2 그러자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이, “저 사람은 죄인들을 받아들이고
또 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군.” 하고 투덜거렸다.
3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 비유를 말씀하셨다.
11 “어떤 사람에게 아들이 둘 있었다.
12 그런데 작은아들이,
‘아버지, 재산 가운데에서 저에게 돌아올 몫을 주십시오.’ 하고
아버지에게 말하였다.
그래서 아버지는 아들들에게 가산을 나누어 주었다.
13 며칠 뒤에 작은아들은 자기 것을 모두 챙겨서 먼 고장으로 떠났다.
그러고는 그곳에서 방종한 생활을 하며 자기 재산을 허비하였다.
14 모든 것을 탕진하였을 즈음 그 고장에 심한 기근이 들어,
그가 곤궁에 허덕이기 시작하였다.
15 그래서 그 고장 주민을 찾아가서 매달렸다.
그 주민은 그를 자기 소유의 들로 보내어 돼지를 치게 하였다.
16 그는 돼지들이 먹는 열매 꼬투리로라도 배를 채우기를 간절히 바랐지만,
아무도 주지 않았다.
17 그제야 제정신이 든 그는 이렇게 말하였다.
‘내 아버지의 그 많은 품팔이꾼들은 먹을 것이 남아도는데,
나는 여기에서 굶어 죽는구나.
18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렇게 말씀드려야지.
′아버지, 제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
19 저는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습니다.
저를 아버지의 품팔이꾼 가운데 하나로 삼아 주십시오.′’
20 그리하여 그는 일어나 아버지에게로 갔다.
그가 아직도 멀리 떨어져 있을 때에
아버지가 그를 보고 가엾은 마음이 들었다.
그리고 달려가 아들의 목을 껴안고 입을 맞추었다.
21 아들이 아버지에게 말하였다.
‘아버지, 제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
저는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습니다.’
22 그러나 아버지는 종들에게 일렀다.
‘어서 가장 좋은 옷을 가져다 입히고
손에 반지를 끼우고 발에 신발을 신겨 주어라.
23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아라. 먹고 즐기자.
24 나의 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도로 찾았다.’
그리하여 그들은 즐거운 잔치를 벌이기 시작하였다.
25 그때에 큰아들은 들에 나가 있었다.
그가 집에 가까이 이르러
노래하며 춤추는 소리를 들었다.
26 그래서 하인 하나를 불러 무슨 일이냐고 묻자,
27 하인이 그에게 말하였다. ‘아우님이 오셨습니다.
아우님이 몸성히 돌아오셨다고 하여
아버님이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습니다.’
28 큰아들은 화가 나서 들어가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 아버지가 나와 그를 타이르자,
29 그가 아버지에게 대답하였다.
‘보십시오, 저는 여러 해 동안 종처럼 아버지를 섬기며
아버지의 명을 한 번도 어기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저에게 아버지는 친구들과 즐기라고
염소 한 마리 주신 적이 없습니다.
30 그런데 창녀들과 어울려 아버지의 가산을 들어먹은 저 아들이 오니까,
살진 송아지를 잡아 주시는군요.’
31 그러자 아버지가 그에게 일렀다.
‘얘야, 너는 늘 나와 함께 있고 내 것이 다 네 것이다.
32 너의 저 아우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되찾았다.
그러니 즐기고 기뻐해야 한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세리와 죄인들을 가까이 하시는 예수님에 대해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이 투덜대자 예수님께서 되찾은 양, 되찾은 은전, 그리고 오늘 복음에 나오는 되찾은 아들, 세 가지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유산을 미리 챙겨 떠난 뒤 방종하게 살던 둘째 아들이 모든 것을 탕진하고 굶주림에 시달리다 일꾼으로라도 써 달랄 요량에 집으로 향합니다.

"아버지가 그를 보고 가엾은 마음이 들었다. 그리고 달려가 아들의 목을 껴안고 입을 맞추었다."(루카 15,20)

아버지의 이 행동에는 많은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우선, 제 몸에서 난 소생의 부재 시기 동안 절절히 쌓였던 그리움과, 죽었는지 살았는지도 몰랐던 불안감이 단번에 풀린 반가움이었을 것이고, 제 몸같이 사랑하던 아들을 다시 끌어안고 어루만지고 쓰다듬고 입맞추면서 또 다른 자기 생명을 확인하는 사랑이었을 것입니다.

고생했을 것이 뻔한 아들의 몰골에 안쓰러운 마음이 왈칵 쏟아져 서둘러 환영과 위로의 진심을 전한 것이고, 또 돌아가신 뒤의 유산이라면 모를까, 멀쩡히 살아 계신 아버지에게 제 몫을 졸라 길을 떠났던 소문이 이미 지역에 파다하게 퍼졌을 터라 이렇게 아버지 편에서 먼저 화해와 용서의 제스추어를 하지 않으면 이웃들이 그를 어떻게 대할지 모를 일이기에 미리 선수를 친 것 같기도 합니다.

이 비유 속의 아버지는 하느님을 담고 있지요. 그렇다면 하느님께서 죄악에 지쳐 당신 품으로 돌아오는 우리를 맞이하실 때 위에 나열한 이유들을 따져서 달려나오시는 걸까요? 돌아온 죄인에 대한 하느님의 심경을 굳이 인간의 이해 반경 안에서 설명하자니 그렇다는 것일 뿐, 실상 하느님은 자동반사적으로, 무조건반사적으로 저 모든 이유를 다 담아 저렇게 행동하실 수밖에 없는 분이시기에 얼른 뛰어나와 얼싸안고 입맞추시는 것입니다.

오늘 이 복음에서 만난 아버지 하느님이 애처로울 정도로 얼마나 여리고 약하신지요. 그분은 상대를 추궁과 신문으로 몰아세우지 않으십니다. 혹 주눅들까봐 오히려 어떤 질문도 삼가면서 다른 이들에게 "내가 잃었다가 도로 찾았다."(루카 15,24)고 반복합니다.

그분에게는 둘째 아들이 무절제한 욕망에 휩싸여 당신에게 저지른 일도, 이미 큰 아들은 들어 알고 있는 "창녀들과 어울려 가산을 들어먹은"(루카 15,30) 방종에 대해서도, 돌아올 마음을 먹었을 정도의 고생에 대해서도, 묻지도 따지지도 않으십니다.

"끝까지 캐묻지 않으시고 끝끝내 화를 품지 않으시네. 우리를 죄대로 다루지 않으시고 우리 잘못대로 갚지 않으시는"(화답송) 하느님의 모습입니다. 하느님께서 용서하실 때에는 우리의 죄에 관심이 없으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오직 하나 그분의 관심사는, '어찌되었든 지금 네가 내 앞에 돌아와 주었다'는 것입니다. 아버지 하느님은 이 순간 철저히 자기중심적이십니다. '함부로 떠나 죄짓다가 돌아온' 자의 과거 구체적 죄상보다 '내가 잃었다가 내가 도로 찾아서' 그저 기쁘실 뿐입니다. 용서의 주체는 하느님이십니다.

주인의 기쁨에 하인들은 덩달아 신이 났겠지만 큰 아들은 마음이 불편합니다. 그의 항변에 아버지 마음이 얼마나 아팠을지 함께 느낍니다. 실상 큰 아들도 둘째 아들이 떠났을 당시 한몫 보았습니다. "그래서 아버지는 아들들에게 가산을 나누어 주었다."(루카 15,12)고 복음사가는 분명 복수로 이야기하고 있으니까요. 가산을 동생만큼 받았을 그가 "친구들과 즐기라고 염소 한 마리"(루카 15,29) 주시길 내심 아버지에게 바라면서도 말도 솔직히 꺼내지 못했다는 것이 참 슬픕니다.

겉보기에 성실한 큰 아들과의 관계에서도 온전히 사랑과 신뢰를 받지 못하고, 방종한 둘째 아들과의 관계에서도 맘고생만 죽도록 한 아버지에게 연민이 느껴집니다. 그렇다면 복음의 이 아버지처럼 우리의 하느님도 사랑에 실패하신 분일까요? 아닐 겁니다. 사랑에 실패하신 분이 아니라 번번이 실패하는 사랑을 끝까지 지치지 않고 하시는 분이실 겁니다. 기약 없지만 그 사랑을 우리가 알아들을 때까지 쉬지 않고 지치지 않고...

아버지의 무절제하고 무분별한 사랑과 자비를 못마땅해하는 큰 아들에게 아버지는 거의 울듯이 호소합니다. "내 것이 다 네 것이다."(루카 15,31) 큰 아들 마음에 감추어진 욕망을 읽은 그분은 염소 한 마리가 문제가 아니라 다 네 것이라고 통 큰 발언을 합니다. 용서가 필요한 이에게는 용서와 환대를, 아버지 사랑을 물질로 가늠하고 싶은 이에게는 가진 모든 것을 다 내주는 사랑입니다.

"그러니 즐기고 기뻐해야 한다."(루카 15,32)는 마지막 말씀에 머무릅니다. 즐기고 기뻐하는 것은 그야말로 내면에서 우러나오는 것이지 외부에서 의무적으로 종용해 생성시킬 수 있는 감정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아버지는 마지막 힘을 다해 형제로서 마땅히 가져야 할 마음의 의무를 선포하십니다. 이 긴 비유를 들려주신 예수님의 목소리도 포함된 말씀입니다. 이 말씀에는 사랑의 위엄이 담겨 있습니다. 힘과 권력에 의한 위엄이 아니라 사랑 때문에 한없이 초라해지고 위신 없이 되어 버린, 약함에서 우러나는 위엄입니다.

사랑하는 벗님 여러분, 복음사가는 이후에 큰 아들이 어떻게 행동했을지 침묵합니다. 이 결말은, 예수님께 투덜거린 바리사이들, 율법 학자들에게는 물론, 오늘 이 복음을 듣는 우리에게도 열려 있습니다. 여러분이라면 어떻게 행동하였을까요?


▶ 작은형제회 오 바오로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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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조나단 | 작성시간 24.03.02 아멘 신부님 stellakang 님 고맙습니다.
  • 작성자가을비 | 작성시간 24.03.02 아멘 ~♡감사합니다
  • 작성자발아래 | 작성시간 24.03.02 아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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