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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상선 신부 강론

3월 9일 사순 제3주간 토요일<진정한 기도는 "하느님 앞의 나"에서 시작됩니다.>작은형제회 오 상선 바오로 신부

작성자stellakang|작성시간24.03.09|조회수132 목록 댓글 5

사순 제3주간 토요일

복음

<바리사이가 아니라 세리가 의롭게 되어 집으로 돌아갔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18,9-14
그때에 9 예수님께서는 스스로 의롭다고 자신하며
다른 사람들을 업신여기는 자들에게 이 비유를 말씀하셨다.
10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갔다.
한 사람은 바리사이였고 다른 사람은 세리였다.
11 바리사이는 꼿꼿이 서서 혼잣말로 이렇게 기도하였다.
‘오, 하느님! 제가 다른 사람들,
강도 짓을 하는 자나 불의를 저지르는 자나 간음을 하는 자와 같지 않고
저 세리와도 같지 않으니,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
12 저는 일주일에 두 번 단식하고 모든 소득의 십일조를 바칩니다.’
13 그러나 세리는 멀찍이 서서 하늘을 향하여
눈을 들 엄두도 내지 못하고 가슴을 치며 말하였다.
‘오, 하느님! 이 죄인을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14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그 바리사이가 아니라 이 세리가 의롭게 되어 집으로 돌아갔다.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갔다."(루카 18,10)

오늘 우리는 예수님의 비유를 통해 하느님 앞에 선 두 유형의 사람을 만납니다. 당시 열심하고 의로운 이의 대명사격인 바리사이와 죄인의 대명사격인 세리가 극명하게 대조됩니다.


"바리사이는 꼿꼿이 서서."(루카 18,11)
"세리는 멀찍이 서서 하늘을 향하여 눈을 들 엄두도 내지 못하고."(루카 18,13)

하느님 앞에서 바리사이는 자기의 공로로 당당하고, 세리는 자기의 부족함에 움츠러 있습니다. 바리사이는 스스로의 결백과 의로움에 자신감이 넘치고, 세리는 자기 죄로 눈도 못 들 만큼 하느님께 송구하고 죄송한 마음이 가득합니다.

"오 하느님 ... 제가 ... 와 같지 않으니 감사드립니다. 저는 ... 바칩니다."(루카 18,11-12)
"오 하느님 이 죄인을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루카 18,13)

바리사이는 하느님께 자기의 공을 일일이 설명하며 여타의 죄인들과 같지 않음을 알아주시길 은근히 요구하고, 세리는 그저 자비만을 간청할 뿐입니다.

"그 바리사이가 아니라 이 세리가 의롭게 되어 집으로 돌아갔다."(루카 18,14)

예수님께서 누가 봐도 인간적으로 부족함이 없는 바리사이가 아닌, 명백히 죄인인 세리의 기도를 하느님께서 들어 주신다고 선언하시지요. 그런데 이미 예수님의 말씀 안에 그 이유가 들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애초에 바리사이의 기도를 "혼잣말"(루카 18,11)이라고 표현하셨으니까요.

기도하는 사람마다 나름 기도에 대해 정의를 합니니다만, 가장 보편적으로 보면 하느님과의 대화, 하느님과의 만남, 하느님과 마음 나눔, 하느님과의 일치, 하느님과의 사랑 등으로 이야기하지요. 기도에 무수한 형식이 있고 기도 안에도 다양한 내용이 담길 수 있지만, 꼭 필요한 건 기도를 드리는 이와 대상 되시는 분의 관계성, 즉 상호관계성이 아닐까 합니다. 이것이 빠지면, 글쎄요, 그건 자기 외에 듣는 이 없는 독백, 즉 혼잣말에 불과할 뿐입니다.

혼잣말은 자기 암시와 자기 위로, 자기 영광으로 흐릅니다. 자기의 공적을 기억하고 자기 확신을 공고히 하며 스스로를 높일 뿐, 굳이 상대가 필요 없습니다. 중요한 건 오직 자기 자신입니다.

진정한 기도는 "하느님 앞의 나"에서 시작됩니다. 지고의 선, 지고의 진리, 지고의 아름다움이신 분 앞에 서면 상대적으로 악하고 거짓이며 추한 부분이 없을 수 없는 자기의 실존이 있는 그대로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럴 때 완전무결한 분이시면서도 초라한 자기에게 몸을 굽히고 귀를 기울이고 있는 그 상대를 향해 자연스레 일어나는 참회, 간청, 두려움, 감사, 사랑이 기도랄 수 있습니다. 자비를 간청하는 기도를 통해 세리와 하느님 사이에는 서로를 향한 필요가 생겨납니다. 그의 기도가 하느님을 움직인 것이지요. 이 상호 관계성이 진정한 기도입니다.

"이 세리가 의롭게 되어 집으로 돌아갔다"고 하십니다. 그 의로움의 증거는 차츰 삶으로 드러날 것입니다. 하느님과의 관계성은 이웃에게로 흘러넘치게 마련이니까요.

벗님 여러분은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시는 편이세요? 아니면 냉담하고 계시나요? 교회 안에 냉담한 신자가 열심한 신자보다 훨씬 많아서 걱정이라네요. 하지만 저는 걱정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주일미사 잘 나오고 열심히 기도생활하고 좋은 일도 많이 하는 사람이 주일미사 빠지기를 밥먹듯 하고 기도생활도 거의하지 않는 냉담신자보다 꼭 더 훌륭하다고 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소위 열심한 신자라 하더라도 자신은 "이만하면 하느님께서 기뻐하실거야" 라고 생각하는 순간, 냉담신자가 "하느님 정말 죄송합니다. 이 죄인을 용서하소서" 라고 고백하는 것보다 하느님 보시기에 더 사랑스럽지 않기 때문입니다.

벗님, 사정상 냉담하고 계십니까? 큰 죄중에 있어 교회에 못나가고 계십니까? 너무 걱정마시고 오늘 세리처럼 고백하십시오. ‘오, 하느님! 이 죄인을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이것으로 충분합니다. 자비하신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을 따뜻하게 안아주실 겁니다.

바리사이는 어떻게 하면 율법을 잘 지켜 모세를 통해 약속하신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을까 고민하며 열심히 산 사람입니다. 이에 비해 세리는 자기가 먹고살기 위해 동족들에겐 매국노로 취급받던 사람입니다.

윤리적인 기준에서 보면 누가 뭐라 해도 세리보다는 바리사이가 더 훌륭한 사람입니다. 하지만 하느님 앞에서는 다 '도토리 키재기'입니다. 똑같은 죄인일 따름이니까요.

하느님께로부터 의로운 사람으로 평가받는 사람은 그래서 바리사이같이 아무리 훌륭하게 보여도 자신은 죄인일 따름이라고 고백하지 못하는 사람이 아니라, 자신을 겸손하게 죄인으로 고백하고 있는 세리라는 말씀이지요.

벗님 여러분은 어떤 사람인가요?

자신이 죄인임을 깊이 인식하는 바리사이인가요?

자신은 그래도 잘 사는 사람이라고 여기는 바리사이인가요?

아니면 세리같은 사람인데 자신이 죄인임을 깊이 인식하는 세리인가요?

아니면 그것도 모르는 세리인가요?

 

저는 여러분이 1번일 거라고 믿습니다. 아니면 적어도 3번이시길 축원합니다. 잘 살든 못 살든 제 꼬라지를 아는 사람이 되는 것이 중요합니다.

오늘 나의 보잘것 없는 수고와 공로를 자랑하기보다 겸손하게 나의 부당함을 고백함으로써 하느님의 마음에 드는 그분의 사랑받는 자녀가 되시길 축원합니다.


▶ 작은형제회 오 상선 바오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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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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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아참 | 작성시간 24.03.09 주일미사 잘 나오고 열심히 기도생활하고 좋은 일도 많이 하는 사람이 주일미사 빠지기를 밥먹듯 하고 기도생활도 거의하지 않는 냉담신자보다 꼭 더 훌륭하다고 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 작성자yilee엘리사벳 | 작성시간 24.03.09 말씀 감사합니다
  • 작성자김광시 | 작성시간 24.03.09 아멘 💖💖💖
  • 작성자조나단 | 작성시간 24.03.09 아멘 신부님 stellakang 님 고맙습니다.
  • 작성자발아래 | 작성시간 24.03.09 아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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