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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재형 신부 강론

[스크랩] 2024년 1월 31일 수요일 성 돈보스코 사제 기념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작성자stellakang|작성시간24.01.31|조회수241 목록 댓글 4

 

제1독서

<인구 조사를 하여 제가 죄를 지었습니다. 이 양들이야 무슨 잘못이 있겠습니까?>
▥ 사무엘기 하권의 말씀입니다.24,2.9-17
그 무렵 다윗 2 임금은 자기가 데리고 있는 군대의 장수 요압에게 말하였다.
“단에서 브에르 세바에 이르기까지
이스라엘의 모든 지파를 두루 다니며 인구를 조사하시오.
내가 백성의 수를 알고자 하오.”
9 요압이 조사한 백성의 수를 임금에게 보고하였는데,
이스라엘에서 칼을 다룰 수 있는 장정이 팔십만 명,
유다에서 오십만 명이었다.
10 다윗은 이렇게 인구 조사를 한 다음, 양심에 가책을 느껴 주님께 말씀드렸다.
“제가 이런 짓으로 큰 죄를 지었습니다.
그러나 주님, 이제 당신 종의 죄악을 없애 주십시오.
제가 참으로 어리석은 일을 저질렀습니다.”
11 이튿날 아침 다윗이 일어났을 때,
주님의 말씀이 다윗의 환시가인 가드 예언자에게 내렸다.
12 “다윗에게 가서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하면서 일러라.
‘내가 너에게 세 가지를 내놓을 터이니, 그 가운데에서 하나를 골라라.
그러면 내가 너에게 그대로 해 주겠다.’”
13 가드가 다윗에게 가서 이렇게 알렸다.
“임금님 나라에 일곱 해 동안 기근이 드는 것이 좋습니까?
아니면, 임금님을 뒤쫓는 적들을 피하여
석 달 동안 도망 다니시는 것이 좋습니까?
아니면, 임금님 나라에 사흘 동안 흑사병이 퍼지는 것이 좋습니까?
저를 보내신 분께 무엇이라고 회답해야 할지
지금 잘 생각하여 결정하시기 바랍니다.”
14 그러자 다윗이 가드에게 말하였다.
“괴롭기 그지없구려. 그러나 주님의 자비는 크시니,
사람 손에 당하는 것보다 주님 손에 당하는 것이 낫겠소.”
15 그리하여 주님께서 그날 아침부터 정해진 날까지 이스라엘에 흑사병을 내리시니,
단에서 브에르 세바까지 백성 가운데에서 칠만 명이 죽었다.
16 천사가 예루살렘을 파멸시키려고 그쪽으로 손을 뻗치자,
주님께서 재앙을 내리신 것을 후회하시고
백성을 파멸시키는 천사에게 이르셨다.
“이제 됐다. 손을 거두어라.”
그때에 주님의 천사는 여부스 사람 아라우나의 타작마당에 있었다.
17 백성을 치는 천사를 보고, 다윗이 주님께 아뢰었다.
“제가 바로 죄를 지었습니다. 제가 못된 짓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양들이야 무슨 잘못이 있습니까?
그러니 제발 당신 손으로 저와 제 아버지의 집안을 쳐 주십시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음

<예언자는 어디에서나 존경받지만 고향에서만은 존경받지 못한다.>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6,1-6
그때에 1 예수님께서 고향으로 가셨는데 제자들도 그분을 따라갔다.
2 안식일이 되자 예수님께서는 회당에서 가르치기 시작하셨다.
많은 이가 듣고는 놀라서 이렇게 말하였다.
“저 사람이 어디서 저 모든 것을 얻었을까? 저런 지혜를 어디서 받았을까?
그의 손에서 저런 기적들이 일어나다니!
3 저 사람은 목수로서 마리아의 아들이며,
야고보, 요세, 유다, 시몬과 형제간이 아닌가?
그의 누이들도 우리와 함께 여기에 살고 있지 않는가?”
그러면서 그들은 그분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4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예언자는 어디에서나 존경받지만
고향과 친척과 집안에서만은 존경받지 못한다.”
5 그리하여 예수님께서는 그곳에서 몇몇 병자에게 손을 얹어서
병을 고쳐 주시는 것밖에는 아무런 기적도 일으키실 수 없었다.
6 그리고 그들이 믿지 않는 것에 놀라셨다.
예수님께서는 여러 마을을 두루 돌아다니며 가르치셨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교우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오늘 사제평의회가 열리고 서울대교구 인사이동이 있을 예정입니다. 인사이동의 대상이 되는 신부님들은 어디로 가게 될지 궁금할 것입니다. 교구에서는 인사이동을 하면서 몇 가지 원칙을 지키고 있습니다. 첫째는 출신 본당으로 임명하지는 않습니다. 두 번째로 같은 곳에 두 번 보내지는 않습니다. 세 번째로 같은 신부님과 두 번 지내게 하지는 않습니다. 따뜻한 신부님, 사랑이 많은 신부님, 강론을 정성껏 준비하는 신부님, 미사시간 30분 전에 고백성사를 주는 신부님, 함께 사는 수도자와 신부님들과 잘 지내는 신부님, 성체조배를 자주하는 신부님, 합리적으로 본당의 재정을 관리하는 신부님, 직원들의 마음을 이해하는 신부님, 가난하고 외로운 이들을 먼저 찾아가는 신부님이 떠나면 아쉬움의 눈물을 흘릴 것입니다. 그런 신부님은 어디로 가셔도 사랑받는, 존경받는 신부님으로 지낼 것입니다. 그런 신부님들은 어디로 가도 그 자리가 꽃자리가 될 것입니다.

 

도연명은 歸去來辭에서 이렇게 말을 했습니다. “이미 지난 일은 돌이킬 수 없고, 앞으로 다가올 일은 추구할 수 있음을 알았노라. 사실 길을 잘못 들기는 했으나 아직 멀리 벗어나지는 않았고, 지금이 옳고 예전이 틀렸다는 것을 깨달았다. 농부가 내게 봄이 왔다고 알려주니, 장차 서쪽 밭에 할 일이 생기겠구나! 부귀는 내가 바라는 바가 아니요, 천국은 기약할 수는 없는 것이거늘. 주어진 천명을 즐길 뿐 다시 무얼 의심하랴!” 뉴욕에서 5년을 지내고 있습니다. 정들었던 사제들이 소임을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갔습니다. 어느덧 4명의 사제가 돌아갔습니다. 이제 저도 ‘귀거래사’할 날이 올 겁니다. 그렇습니다. 신앙인은 어디에 있느냐를 생각하기보다, 어떻게 사느냐를 생각해야 합니다. 계절은 이렇게 다시 바뀌고 세상의 모든 것들은 봄을 맞을 준비를 합니다. 우리 신앙인들은 하느님께로부터 왔으니 하느님께 돌아가야 함을 늘 잊지 말고 살아야 할 것입니다.

 

저는 ‘바람과 해님’의 이야기를 좋아합니다. 사나운 바람은 나그네의 옷을 벗기지 못했지만 따뜻한 햇볕은 나그네 스스로 옷을 벗게 했다는 동화입니다. 어릴 때, 이 동화를 읽으면서 감동을 했고, 늘 이 동화는 제게 영향을 주었습니다. 하지만 우리 사회가 건전하게 성장하기 위해서는 공정한 감시와 비판이 있어야 한다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권력을 잡은 세력은 늘 방송과 언론을 장악하려는 유혹에 빠지곤 합니다. 그렇게 하면 국민의 눈과 귀를 가릴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부정과 부패를 가릴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릴 수는 없습니다. ‘방송과 언론’은 사회적 약자를 위한 배려를 해야 하고, 정부의 잘못된 정책 수행에 대해서도 엄격하게 비판을 해야 합니다. 이와 같은 감시와 비판의 기능이 약해지면 당장의 정책 수행에는 도움이 될지 몰라도, 우리사회는 점점 병들게 되고 어디가 잘못되었는지도 모르는 사회가 될 수 있습니다.

 

 

비판과 비난은 비슷한 면이 있지만 커다란 차이가 있습니다. 독일의 철학자 칸트는 ‘순수이성 비판’이라는 책을 통해서 비판은 사상의 발전에 반드시 필요한 요소라고 말을 했습니다. 비판은 공정하고 사심이 없는 가운데서 시작하는 것입니다. 가난하고, 약한 이들에 대한 배려를 생각합니다. 비난은 공동체를 분열시키고 사회 발전에 도움을 주시 못합니다. 비난은 질투와 사적인 감정에서 시작합니다. 다윗은 충실한 부하 우리아를 전쟁에서 죽게 했습니다. 그리고 우리아의 아내를 취하였습니다. 나탄 예언자는 다윗왕의 잘못에 대해서, 잘못한 일에 대해서 비판을 하였습니다. 하느님의 뜻을 전했고, 다윗왕은 자신의 잘못을 뉘우칠 수 있었습니다. 요한복음 8장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부정한 여인을 앞에 놓고 비난을 하였습니다. 모두 손에 돌을 들고, 유대인들의 법을 들어 돌로 쳐야 한다고 비난의 목소리를 높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이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여러분 중에 죄 없는 사람이 먼저 저 여인에게 돌을 던지시오.’

 

오늘 복음은 비난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의 고향 사람들은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저 사람이 어디서 저 모든 것을 얻었을까? 저런 지혜를 어디서 받았을까? 그의 손에서 저런 기적들이 일어나다니! 그들은 그분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예언자는 어디에서나 존경받지만 고향과 친척과 집안에서만은 존경받지 못한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뒷담화만 하지 않아도 천국에 갈 수 있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공정하고 올바른 비판은 받아들일 줄 아는 겸허함이 있어야 합니다. 질투와 사적인 감정에서 나오는 비난은 하지 않는 절제가 있어야 합니다. 1월의 마지막 날입니다. 고칠 수 있는 것은 개선할 수 있는 용기를 청하고, 고칠 수 없는 것은 받아들이는 겸손함을 청하고, 고칠 수 있는 것과 고칠 수 없는 것을 식별할 수 있는 지혜를 청하면 좋겠습니다.

 



※ 출처 : 미주가톨릭평화신문→ ( 오늘의 복음 묵상)  ▶ 글쓴이 :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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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조나단 | 작성시간 24.01.31 아멘 신부님 stellakang 님 고맙습니다
  • 작성자발아래 | 작성시간 24.01.31 아멘. 감사합니다.
  • 작성자atti | 작성시간 24.01.31 아멘.
  • 작성자들꽃1 | 작성시간 24.01.31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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