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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를 모르면 인간이라는 동물로 살다 죽는 것이다.

작성자햇살아침|작성시간24.01.22|조회수96 목록 댓글 0

 

 

 

 

 



" 임마누엘 페스트라이쉬(한국명: 이만열) 교수님 강연 요약



 

이만열 교수는 한때 경희대학 아시아 연구소장(1911~1917)으로 있었다. 예일대학에서 중국문학을 전공하고, 대만 대학에서 공부한 뒤 일본 도쿄대학에서 비교문학을 전공하고, 하버드 대학에서 고전문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는 1998년부터 미국 중서부 일리노이대에서 고전문학을 강의했다. 

또 주미 한국대사관 한국문화원에서 자문역할을 했다. 서울대에 1년동안 있으면서 고전소설 구운몽 등 17~18세기 고전문학을 연구했다. 또 연암 박지원 소설을 번역했고, 이러한 인연으로 한국 생활이 16년이나 되었다.


이만열 교수는 한국은 서양식 민주제도가 들어와서 서양의 영향으로 민주화 된 것이 아니라 세종대왕이나 정조 그리고 다산 정약용 같은 이들의 사상을 보면 이미 민주주의 틀이 잡혀 있었다고 한다. 한국의 민주화와 민주주의는 오래된 한국의 전통 속에서 나온 것이지 결코 서양의 영향이 아니라고 했다.

 

 

 

 

 

 

 

 

 

 

 

그는 이어 한국인은 자주적이고, 독립된 생각을 하지 못한다고 꼬집었다. 미국 앞에만 서면 말 잘 듣는 순한 양으로 변해 합리적 이성적 사고가 다 무너진다는 것이다.

 

미국인인 자신이 보기에도 너무 어처구니가 없을 정도라고 했다. 이 교수는 이러한 현상을 사대근성에서 찾았다. 그러면서 이제는 좀 당당해져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과거 제국주의 국가들의 예를 들어 자주성을 강조했다. 미국, 영국, 독일, 일본 등은 과거 자신들 문화가 최고라고 가르쳤다. 이것을 식민지에 전파해서 식민통치에 써먹었다고 했다. 지금도 이런 현상은 변함이 없다고 한다. 자기 문화가 세계최고라고, 끊임없이 자국민의 자존감을 높이는 교육을 한다고 밝혔다.


이 교수는 이와 관련해 일본의 대외 국가전략을 소개했다. 일본은 일본국익을 위해 우수한 외국인 인재를 선별하여 장학금을 주며, 반일본인으로 만드는 것을 국가차원에서 한다고 했다.

 

 

 

 

 

 

 

 

 

 

 

 

 

 

 

 

 

 

 

 

 

 

 

 

 

 

 

 

 

 

 

 

 

 

 

 

 

 

 

 

 

 

 

 

 

 

 

 

 

 

 

 

 

 

 

 

그는 또 한국은 자기 전통문화에 대해서 당당하지 못하다고 분석했다.

 

 

 

이 교수는 한국문화의 본질을 세계에 알리기 위해 몇 가지 대안을 제시했다. 아메리카 드림처럼 코리안 드림에 대한 스토리텔링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세계인에게 영감과 비전을 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교수는 요즘 유행하는 춤이나 노래, 드라마가 한국 문화를 대표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건 겉으로 나타난 표면적인 문화"라며 "홍익인간이나 선비정신 등 전통적인 한국문화가 한국의 본질을 설명해 주는데 그런 부분이 제대로 전달되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또 교육붕괴 현상도 꼬집었다. 학교가 윤리도덕성을 갖춘 인간을 배출해야 하는데 이 기능이 완전히 상실되어 있다고 지적했다. 이와 관련해 현재 대학 교수들 수준을 비판했다.

 

사회과학 논문을 예로 들었다. 이것은 일반국민에게 아무 도움도 안 된다고 일갈했다. 조회수도 30회 정도라고 한다. 그나마 10여 조회수는 논문심사 위원들이 본 것이라고 조롱했다.

그런데 이런 백해무익한 것에 정부가 학문연구기금이라는 명목으로 국민세금을 퍼붓고 있다고 분개했다.

 

 

그리고 이런 논문을 기준으로 교수로 채용하고 있다고 꼬집었다. 생활속에 뛰어 들어 세상물정을 아는 사람이 교수가 되어 학생들을 가르쳐야 정상인데, 아무도 관심 없고 도움이 되지 않는 죽은지식을 습득한 자를 학생들을 가르치는 교수로 채용한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교육은 자격증, 면허증을 주는 것이 아니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특히 한국의 교육에는 '왜?'라는 질문이 없다고 분개했다. 서양은 교육 기본이 '왜?'라는 질문이라고 밝혔다. '왜?'는 자아정체감과 인간완성으로 나가는 교육 출발점인데 이것이 한국교육 더 나아가 한국사회 전반에 존재하지 않는다고 꾸짖었다.

 

왜 하는 지도 모르는 지식을 암기하고, '왜?'가 없는 충동소비, 불필요한 낭비, '왜?'가 없는 정치문화, 일회용 문화가 횡행하고 있다고 따갑게 지적했다.

 


또 교육에는 조상얘기가 없다보니 아이들이 정체성이 없어 속이 비어 있다고 비판했다. 그러다 보니 외모지상주의 문화가 지배하고 있다고 비꼬았다. 또 한국 언론의 파탄을 신랄하게 비판했다. 신문방송이라는 언론이 객관적 입장에서 정확한 정보를 전달하는 것이 기본 사명인데, 이것을 저버리고 자기 생각이 잔뜩 들어간 소설수준의 보도를 남발한다는 것이다.

 

 

혁명은 습관, 생각, 문화를 근본에서 바꾸는 것이라고 했다. 실패한 혁명으로 그는 러시아 공산주의 혁명을 예로 들었다. 마찬가지로 촛불혁명이 정말 혁명이 되려면 그때 주장된 것을 토대로 우리 자신의 습관, 생각, 잘못된 문화를 뜯어 고쳐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한국인은 특출난 정치인이 나와서 세상을 바꾸어 줄 것을 기대하는데 스스로 자신을 혁명하지 않는한 그런일은 없을 것이라고 했다.


이 교수는 이러한 한국사회를 정상 사회로 돌리는 대안도 제시했다. 그는 선비정신에서 찾으려고 했다.

 

 

 

 

 

선비들이 추구한 가치를 회복하면 된다고 강조했다. 우선 공동체를 중시하고 책임감을 심어주고 약한 자를 돌아보며 자기가 사는 공동체 정보를 알려주고 관심부터 갖는 것에서 출발하자고 했다. 이만열 교수님 강연 요약


 

 

 

 

 

 

 

 

 

 

“미국의 공상적 기계주의, 영국의 천박한 상업주의, 프랑스의 퇴폐주의, 러시아의 야만성 이런 외부의 위협에서 독일의 우월한 문화를 지키기 위해 무제한 적이고 무차별적인 무력을 사용해야 한다.“

 

이것이 히틀러 나치 제3제국의 기본정책이었다. 그리고 이것을 나치의 입맛에 맞게 설계해준 것이 랑케의 ‘실증사관’이다.

 

랑케의 실증사관을 따르던 독일의 역사학자들은 독일의 우월한 증거이자 산물인 문화를 보존하자고 역설하면서, 수많은 근거 중, 자기들에게 맞는 일부만을 논거로 사용하는 교활한 방법으로 나치에 협력했었다. 결론을 미리 세워놓고, 자기들 입맛에 부합하는 증거만을 부각시키는 수법을 사용했던 것이다.

 

 

유럽에서 이런 나치에 협력한 실증사관은 나치의 패망 후 쇠퇴했다. 그리고 이런 나치사관을 ‘유사역사학’이라 불렀다.

 

실증사관 = 유사역사학이다.

 

 

 

 

이런 랑케의 실증주의를 이병도가 존경하는 일본 선생들이 받아들여, 허울 좋은 실증을 내세우며, 동아시아의 변방이었던 일본의 비천한 역사를 화려한 역사로 왜곡했다.

 

그리고 같은 방식으로 한민족의 역사를 축소 격하하는 '식민사관'을 만들었다. 그래야 한민족에 대한 식민지배가 수월했으니까.

 

 

이런 랑케 실증주의는 내포한 문제점 때문에 나치 패망이후 유럽에서 치열한 공격을 받고 쇠퇴하였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이병도를 중심으로 널리 퍼져 오늘날에 이른 것이다. 랑케 실증주의의 맨얼굴을 보지 못하고, 두툼한 화장을 보고 '실증=과학적'이라 착각하는 인간들이 지식인 행세를 하고, 역사학자 행세하는 곳이 한국이다.

 

 

 

실증사관 = 유사역사학 = 식민사관 이다.

 

 

 

 

 

 

 

 

 

식민사관 유사역사학자들의 주요 레퍼런스로 사용하는 일본서기는 거짓과 사기로 구성돼 있다. 식민사관 유사역사학자들은 ‘일본서기가 위서가 아니니, 인용하고 활용한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일본서기가 거짓을 담고 있어도, 당시 일본 정권에서 인정했기 때문에, 위서가 아니니, 잘못된 부분을 가려서 이용해야 한다' 고 한다. 이것은 나치에 협력한 유사역사학자들과 같은 수준의 정신 나간 헛소리다.

 


일본서기는 백제의 역사를 차용해서, 당시 야만상태에 있던 일본 정권을 홍보하기 위한, 거짓으로 가득 찬 책이다. 일본서기와 다른 기록물과 부합되는 것이 극히 일부에 불과할 정도로, 사기로 점철된 문서다. 이 문서를 일본정권은 왜 인정했을까? 당연히 역사적 사기를 치려고 인정한 것이다.

 

 

 

일본서기는 흔히 말하는 ‘위서’보다 더 질이 나쁜 악질 사기 잡서다. 여기서 무슨 진실을 뽑아내서 인용한다는 건가? ‘위서가 아니다’라는 물타기로, 일본서기를 인용한 연구서는, 모두 같은 문제를 가지고 있는 것이고, 바로 그것이 식민사관 유사역사학적 사고방식이다.

 

식민사학자들은 역으로 윤내현 교수같은 분들을 유사역사학이라고 말한다. 도둑이 재발 저린다는 것이다. 스스로 유사역사학을 하면서, 타인에게 자신들의 오명을 덮어쒸우는 것이다.

 

 

러시아 역사학자 曰, 일본과 중국은 가공의 역사를 만든다. 그런데 한국은 자랑스러운 역사가 있는 것도 없앤다.

 

 

 

 

 

 

 

 

 

 

 

 

 

 

 

 

 

 

 

 

 

 

 

 

BCE 4500년경에 갑자기 메소포타미아 하부 지역에 나타나 도시국가를 세우고 뛰어난 고대문명을 이룩한 수메르인들은 중앙아시아에서 온 사람들이었다.

고대 바빌론 문명은 바로 이들로부터 시작되었는데 수메르인들은 자신들이 ‘안샨’으로부터 왔다고 그들이 남긴 점토판에 기록되어 있다. 수메르 말로 ‘안’은 하늘, ‘샨’은 산을 의미하는데 즉 안샨은 천산(天山)이라는 뜻이다. 중앙아시아에 있는 천산 산맥이 이들이 출발한 곳으로 보인다.

 

 

 

 

 

 



 

 

 

한사상을 연구한 김상일 박사는 수메르인이 동북아시아의 몽골족이었을 것으로 보고 있다. 수메르인은 여러 도시 국가를 세웠는데 그 가운데 하나가 우르다.

 

 

『구약성서』에 나오는 이스라엘의 조상 아브라함의 고향이 바로 갈데아 우르인데 이 우르국은 20세기 고고학자들의 발굴로 그 존재가 증명되었다. 12환국 가운데에는 우루국이 있는데 이 우루국이 수메르의 우르가 아니라고 누가 단정할 수 있겠는가?


우선 수메르인들의 언어가 우리 말과 같은 교착어라는 것이다. 주어나 목적어 같은 체언 다음에 조사가 붙는 교착어는 한국어를 비롯한 일본어, 터키어 등의 알타이어가 그러한데, 수메르어도 그렇다는 것은 수메르인들이 중앙아시아 쪽에서 이동했음을 드러내주는 증거다.

 

 

수메르어와 한국어는 어순도 거의 같고 단어도 비슷한 것이 많다는 것은 두 언어 사이의 친연관계가 있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또 수메르인들은 우주를 ‘안키’라고 부르고 우주를 둥근 하늘과 평평한 땅으로 이뤄져 있다고 생각하였는데 이는 동양의 천원지방(天圓地方) 사상과 다를 바 없는 것이다.

 

 

 

 

 

 

 

 

 

또 수메르인들은 왕권이 하늘에서 내려왔다는 천명사상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는 동양의 천명사상과 동일한 것이다. 그 외에도 순장의 관습과 그들이 상투를 틀었다는 것이다.


유태인들 즉 히브리인들은 유일신 사상에 바탕을 둔 종교를 만들어낸 민족이다. 고대에는 다신신앙이 일반적인데, 야훼 신앙은 야훼를 제외한 다른 신들을 부정하는 유일신 신앙이 유태교로 발전되고 유태교에서 기독교가 나오고 또 이슬람도 유태교와 기독교를 모태로 해서 태동하였다.

배타적 유일신 신앙은 다른 신을 인정하지 않는 독선적인 모습을 보였던 터라 세상에 좋지 않은 결과를 가져다주었다. 야훼신 이외의 다른 신을 믿는 사람들을 이단으로 몰아 불태워 죽이고, 이교도들에 대한 전쟁을 성전으로 미화한 서양 기독교나 자신들의 신앙에 반대되는 세력들에게는 무자비한 테러를 행하는 일부 과격 이슬람주의자들이 그렇다.


그런데 야훼 신앙의 출발점이 아브라함이었다. 『구약성서』 「창세기」에 보면 야훼가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지시한 땅으로 가라”고 명령하였는데 아브라함이 이 명령을 좇아서 가나안 땅으로 갔다는 것이다.

그런데 실은 가나안으로 이주하려고 한 것은 아브라함이 아니라 그의 아버지 데라 때부터였다. 데라가 자기 아들들과 그 며느리들 즉 일가를 거느리고 가나안 땅으로 향하던 중 오늘날의 터키 국경지역에 위치한 하란에서 죽은 것이다. 


유대교는 야훼 신만을 숭배하는 독특한 종교다. 야훼는 아브라함을 다신숭배가 지배하던 수메르 땅에서 이끌어내 가나안으로 오도록 하였지만 아브라함의 후손들은 흉년으로 인해 이집트로 내려갔다가 그곳에 정착하고 말았다.

그렇게 수백년을 이집트에서 보내다보니 자연스럽게 이집트인들의 노예로 전락하였는데 이들을 이끌고 이집트를 탈출한 것이 모세라는 영웅이었다. 물론 바이블에는 야훼가 모세에게 명하여 히브리인들을 이집트에서 인도하여 가나안으로 가라고 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히브리인들이 가나안으로 들어가는 과정은 순탄하지 못했는데 근 40년을 방황하다가 가나안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유태교는 야훼가 내렸다는 율법에 기초를 두고 있는 종교다. 바이블에 나와 있는 계명은 600개가 넘는데 이 계명들이 기록된 책이 유태인들이 ‘토라’라고 부르는 『구약성서』의 앞 다섯 권, 즉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다.


그런데 야훼 유일신 신앙은 쉽게 확립되지 못한다. 주변 족속들이 모두 다신신앙을 하고 있는데 히브리인들만 유일신 신앙을 고수하는 것이 쉽지 않았던 것이다. 바이블에는 히브리인들이 이방인 신들을 섬기고 그들에게 제사를 드린 기록들로 가득 차 있다. 즉 야훼 유일신교인 유태교가 확립된 것은 훨씬 후대의 일이라는 것이다. 역사가들은 그 시기를 바빌론에서 귀환한 BCE 6세기 이후로 잡고 있다.

그러므로 그 이전에는 주변 이민족들의 신앙관습이 히브리인들 사이에서 많이 행해졌는데 대표적인 것이 바알 신 숭배다. 바알은 농사와 자연을 주관하는 신으로 가나안에서 아주 인기가 높은 신이었다. 야훼가 질투를 느낄 정도로 히브리인들 역시 바알 신을 숭배했다. 그런데 바알신은 가나안과 수메르의 최고신인 엘 신의 아들로서 엘을 대신하여 신단의 우두머리가 된 신이니 수메르 출신의 신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바알 신과 더불어 인기가 높았던 여신이 있는데 바알의 배우자인 아세라 여신이다. 아세라 여신 역시 수메르의 이쉬타르 여신에게서 온 것이다. 그리스의 비너스 여신처럼 성과 사랑, 전쟁의 여신이었다. 그러니 히브리인들도 야훼 일신교가 확립되기 전에는 수메르신들을 섬겼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스라엘인들은 높은 산 위에 신들을 모신 신전을 지었는데 이는 지구라트라는 높은 탑을 세우고 그 위에서 신에게 제사를 지낸 수메르인들의 관습과 일치한다. 또 이스라엘인들이 야훼 신에게 바친 제사들 가운데 희생짐승을 통째로 불에 태워 바치는 번제燔祭 역시 수메르 문화의 영향을 받은 것이었다.


마지막으로 하나 지적하고 싶은 것은 옛 이스라엘인들도 조상숭배를 했다는 점이다. 이들에게는 조상의 무덤에 구멍을 뚫어두고 음식을 바치는 관습이 있었는데 이는 수메르인들에게서도 그대로 나타나는 관습이었다. 죽은 조상에 대한 제사는 동이족의 관습과 완전히 일치하는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일반적으로 서양문명은 그리스·로마의 고전문명으로부터 나왔다고 한다. 로마인들은 건축이나 토목에는 능했지만 학문에는 능하지 못했다. 모두 그리스인들로부터 배웠다. 실제로 로마의 상류층은 아들을 그리스 학교로 보내 공부를 시키는 것이 일반화되어 있었다. 그래서 로마문명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로마 문명이 된 것이다. 그리스는 서양인들의 학교가 된 것이다.


중세기에는 그리스의 학문과 예술에 대해 제대로 평가할 역량도 없었다. 그러다 르네상스 시대와 와서야 그 진면목을 깨닫게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리스문명이 어느날 땅에서 솟아난 것일까? 그리스 주변에는 바빌로니아, 이집트, 페니키아 등이 있었는데 이들 문명들로부터 많은 것을 배웠다. 그런데 이들 문명은 모두 수메르문명의 계승자이자 후계자들이다. 특히 바빌로니아문명이 그렇다. BCE 2000년 이후 수메르인들의 도시국가는 아카드인들을 비롯한 셈족들의 지배로 넘어가는데 이들은 수메르문명을 그대로 계승하였다.

문명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문자다. 수메르인들이 발명한 설형문자가 이들에 의해 계승되어 널리 퍼져나가 중동일대의 공통적 문자로 사용되었다. 문자와 더불어 그 문자로 기록된 학문도 전파되었던 것은 물론이다. 그리스인들의 뛰어난 천문학도 수메르에서 왔다.

 

고대 그리스의 12궁도는 바로 수메르인들이 고안한 것이며 수학에서 각도와 시간을 재는데 사용되었던 60진법도 수메르에서 온 것이다. 

그리스인들이 바빌로니아문명을 배웠다는 것은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 발견된 점토판 가운데서 한 면에서는 설형문자가, 다른 한 면에는 그리스문자가 기록된 점토판이 있었다는 사실에서 입증된다. 이처럼 그리스문명이 수메르문명을 계승한 바빌로니아, 이집트, 페니키아 등의 선진문명에서 배웠다는 것은 그리스문명이 수메르와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지금 한류가 전세계를 휩쓸고 있는것 또한 우연히 일어난 일은 아닐 것이다. 수천년 이어온 문명의 종주국이기에 가능한 일이 아닐까? 우리 모두는 한민족으로서의 자긍심을 가지고 우리 문화와 우리 역사를 새롭게 바라보고 배우고 전해야 할 것이다



성서학자들에 의하면 모세의 5경인 구약의 창세기.출애굽기.레위기.민수기.신명기에 쓰여진 제사음식.性행위.종족번식.사회규율 등의 율법은 그 제정 유래 및 각 법조(法條)의 형식과 내용에 이르기까지 거의 대부분이 함무라비법과 같다고 한다. 그리고 함무라비法의 기원은 바로 인류최초의 법전인 수메르법전이다.

이스라엘의 시조인 아브라함은 이 메소포타미아의 갈대아 우르 지방에서 태어난 슈메르인의 후손으로서 성장 후 고향을 떠나 가나안 땅으로 이주하였다. 유대교를 창설한 이스라엘 민족의 후손인 모세는 자기 민족의 수호신인 여호아를 중심으로 자기 민족의 정신적 단합을 도모하였다.

◆ 뮐러(Muller), 유대인의 시조(始祖)인 아브라함이 우루 땅에서 함무라비 왕의 고향인 하란을 거쳐 가나안 땅으로 이주해 오면서 함무라비 법전을 가져 왔을 것이다.

◆ 크레이(Clay)와 루즈(Lutz), 바빌로니아의 제1왕조의 제6대왕인 함무라비(BC 1704 ~ 1662년)왕이 공포한 함무라비 법전은 함무라비 왕의 창작이 아니라 그 이전에 존재했던 슈메르 법전의 수정 보수판이다.

◆ 中田薰(일본 : 前동경大교수), 모세 5경의 모법(母法)은 함무라비法이고 함무라비法의 母法은 슈메르법이다.

기독교의 역사는 서구문명의 발상지인 고대 메소포타미아의 문명으로부터 비롯되었으며, 메소포타미아 문명은 수메르인들에 의하여 성립된 것이다. 유프라테스강.티그리스강 유역에 고대 메소포타미아 문명을 개척한 족속은 동방(東方)으로 부터 이주해온 슈메르족이었다.

◆ 삼성기(三聖記), 고기(古記)에 이르되 환국(桓國)에는 분국(分國)이 12나라였다. 그 넓이가 남북이 5만리요 동서가 2만리이니, 그 12국 가운데 우르(虞婁 : Ur)國과 슈메르(須密爾 : Sumer)國이 있다.

◆ 크렘머와 다글라스氏(美), 슈메르인은 동방(東方)으로부터 왔다.

◆ 대영백과사전(大英百科辭典), 슈메르語와 한국어는 동일한 [교착어]로서 그 어근(語根)을 같이 한다.

 

 

 


◆ 上野景福(日本), 슈메르인들이 사용한 설형문자는 약 5500년전 태호복희씨가 사용한 8괘 부호등과 비슷하다.

 

 

 

 

 

 


◆ C.H 고든박사(英), 슈메르인들이 중근동(中近東)에 들어오기 前에 고대문자적(古代文字的)기호를 가지고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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