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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수상

나의 인생영화 1 / The reader (책 읽어주는 남자)

작성자앵커리지|작성시간24.04.29|조회수192 목록 댓글 39

사람은 누구나 아픔과 비밀을 지니고 살아간다.
그 비밀이라는 것이 대개가 세상이 정한 도덕과 법이라는 울타리를 조금 벗어난

것으로, 그 사람의 성장 과정이나 일상 혹은 인생 전체에 큰 영향을 미치곤 한다.

그것이 옳은가 그른가, 적법한가 불법인가 혹은 윤리적인가 그렇지 않은가의

판단은 이미 그 의미를 상실한 다음이다.  

영화 '더 리더(The Reader / 책 읽어주는 남자)' 는 10대 소년과 30대 여인의 우연한 

만남과 사랑(맞나?)과 심리 변화를 유태인 학살에 대한 나치 전범재판이라는 역사의 

한 구간을 관통하는 시간속에서 치밀하고도 한 켠 무덤덤하리만큼 냉혹히 묘사한다.
초반부터 등장하는 10대 소년과 30대 여인의 알몸과 섹스는 평소에 가졌던 가치관과

도덕적 관념을 잠시 접어두라는 신호이다. 비워진 마음으로 영화를 마주해야 한다.

소년의 마음과 몸을 통째 매혹시킨 여인 한나는 때론 불같고 때론 얼음처럼 차갑게 그를 

대하고 한 발짝 뒤에서 소년을 응시하며 늘 꼬마(Kid) 라고 불러 그 거리를 확인한다.
격렬한 정사 후나 전에, 혹은 목욕탕 안에서 책을 읽어 달라고 해서 그 내용에 몰입하는

그는 많은 것을 감추고 있음을 눈빛 하나로 표현한다. 그리고 어느날 홀연히 사라진다. 

 

영화는 이 과정에서 그다지 친절하지 않지만 법대생이 된 옛날의 소년 마이클과 여인

한나의 조우를 나치 전범 재판정을 빌려 그려내며, 그 치열한 감정의 변화를 뛰어난

연기자들이 아주 절제있게 나타낸 것이 오히려 이것이 영화이고 소설임을 느끼게 한다.

이 역설의 아이러니.

 

한나는 나치 전범으로 확정되어 무기형을 선고받고 수감되며 어른이 된 소년 마이클은
변호사가 되었지만 옛날의 기억으로 인해 부모와 아내 등 모든 가족에게서 조차 유리된

채로 살아간다. 그러던 중 마이클이 한나에게 책을 읽은 녹음 테이프를 보내주면서 둘

사이엔 또다시 감정의 물꼬가 트이고 한나는 글을 배우기 시작한다. 그녀는 문맹이었고

전범 재판 당시에 증거로 채택된 보고서는 그녀가 쓰지 않았던(쓸 수 없었던) 것이다.

은빛 머리를 흩날리는 중년이 되어 면회를 온 마이클에게 "꼬마가 어른이 되었네" 라고

말하는 그녀. 그런 그녀를 복잡한 심경의 눈으로 바라보는 랄프 파인즈의 연기가 일품이다.
20 년간 수감 생활 후 가석방되는 그녀의 후원자로 지정되어 찾아온 마이클의 소극적이고
사무적인 응대가 비극적인 결말을 예고하고, 그녀는 결국 감방에서 목을 매 생을 마감한다.
목을 매기 위해 책상에 책을 쌓고 올라서던 그녀의 거친 발이 어쩌면 그리 아프게 하던지.

 

어른 마이클을 연기한 랄프 파인즈의 연기는 일품이다. 1997년 제작된 '잉글리쉬 페이션트'

에서 보여준 연기에 비하면 덜 인상적이지만.  
케이트 윈슬렛의 연기는 최고였다. 1975년생이면 한국 나이 서른 다섯인 2009 년에 전라의

연기를, 그것도 팽팽하지 않은 가슴을 그대로 드러내 보여준 것과 30대에서 60대 까지의

복잡한 심리를 묘사한 연기는 오래 기억에 남을 것이다.

영화 타이타닉에서 보았던 통통하고 젊은 그녀는 이제 내공 깊은 연기로 스크린을 압도하는

진정한 연기자가 되어 있었다. 이 영화로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받았다는 게 사족(蛇足)일

정도로.

 

누구와도 좋다.
할 수 있다면 가슴에 담은 사람과 함께 보길 권한다. 그 사이가 어떻든 설명할 필요는 없다.
삶의 의미에 대해, 사랑에 대해 졸렬하지 않은 마음으로 보라고 당부하고 싶다.

 

2024.04.29

앵커리지

 

몇 년 전에 써서 블로그에 보관했던 글로 복사와 스크랩을 허하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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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석촌 | 작성시간 24.04.30 여러분들이 회상하니 저도 호기심이 발동하네요.
    잘 읽고 갑니다.
  • 답댓글 작성자앵커리지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24.04.30 기회가 된다면 한 번 보십시오 ^^
  • 작성자나무랑 | 작성시간 24.04.30 제작자가 어마무시해서 보게 되었던 영화인데요.
    (아웃 오브 아프리카를 만든 시드니 폴락감독과 잉글리쉬 페이션트를 만든 안소니 밍겔라 감독였거든요.)
    그러게요 케이트 윈스렛은 타이타닉 영화에서 여주 치고는 예쁘지도 않고 통통해서 별로였는데 더리더에서는 정말 연기 잘하는 배우로 거듭 태어났어요.
    잉글리쉬 페이션트에서 상당히 멋있었던 랄프 파인즈도 더리더에서는 왠지 멋있다는 생각은 안들었어요.
    영화 보는 내내 문맹인 한나가 얼마나 안쓰러웠는지 몰라요.
    앵커리지 님께서 쓰신 글을 보니 옛생각이
    나서 반가웠어요.
    허심탄회하게 영화이야기 할 수있는 기회를 주셔서 감사드려요. 앵커리지 님


  • 답댓글 작성자앵커리지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24.04.30 나무랑님의 영화평은 저보다 훨씬 섬세하고
    정확했을 겁니다.
    저는 영화 줄거리 보다는 객관자의 입장에서
    가능하면 짧게 쓰려고 하는 편입니다.

    감사합니다
  • 답댓글 작성자나무랑 | 작성시간 24.04.30 앵커리지 앵커리지 님께서 저보다 훨 잘쓰셔서
    더 좋았는데요 모.
    같은 영화를 보고 공감할 수있다는 게
    더 중요하잖아요.
    그냥....감명 깊게 봤던 영화를 이야기
    할 수있는 기회가 생겨서 반갑고 감사했어요.
    저도 짧고 간결하게 요점만 전달하고 싶은데 그게 잘 안되요 그게 제 글쓰기의 한계이기도 하구요.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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