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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알브레히트 뒤러 (Albrecht Durer, 1471~1528)

작성자샤이닝|작성시간21.04.10|조회수58 목록 댓글 5

알브레히트 뒤러 (Albrecht Durer, 1471~1528)



- 남부독일 뉘른베르크 출신


알브레히트 뒤러는 당시 지도상에 존재하지도 않았던 독일에 르네상스 예술을 가져온 작가입니다. 당시의 뉘른베르크는 목판 인쇄술에 있어서 선구적인 위치에 있었으며, 그에 따른 활발한 출판업으로 도시 경제가 풍요로운 상황이었습니다. 너무나 부럽게도 당시 뉘른베르크에는 실업자 한 명 없이 모든 사람들이 일을 하고, 자기 집을 가졌고, 여유로운 문화생활도 즐길 수 있었다.


뒤러는 금은세공업자였던 아버지를 따라 11세부터 금은세공기술을 익혔습니다. 하지만 자신의 길이 아니라 생각하고 15세때부터 본격적인 화가로서의 길을 걷기 시작했죠. 뒤러는 스승을 능가하는 재능을 가진데다가 풍요로운 경제 상황이 예술가들에게 제공해주는 부로 인해 금새 유명한 동판화가가 되었습니다.


렘브란트, 피카소와 함께 3대 판화가라 불리는 뒤러는 평생 100여점의 동판과 200여점의 목판화를 남겼습니다. 그의 그림에서도 느껴지듯이 완벽주의자였던 뒤러는 판을 제작한 뒤 찍는 종이의 선택과정은 물로 인쇄과정과 판매까지 관여했습니다. 당시 사회는 길드라는 철저한 분업제도가 시행되고 있었습니다. 그 당시에 판화의 모든 제작과정을 화가가 주관한다는 것은 상당한 파격이자 도전이라 할 수 있었습니다.


뒤러는 13살 때 처음으로 자화상을 그리기 시작한 이후 3점의 작품을 남습니다. 너무나 뛰어난 솜씨로 인해 자화상의 화가로 불리기도 합니다. 그는 서양미술사 최초의 유화인 데다가 당시에는 함부로 그릴 수 없었던 정면 자화상을 감히 그리기도 했습니다. 당시의 정면 포즈는 예수 그리스도를 그리는 성화에서나 볼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발상은 예술가의 창조성을 창조주와 같은 맥락으로 해석하고자 함이었습니다. 새로운 아름다움을 창조하는 예술가의 능력은 신이 가지고 있는 창조력과 비견할 만하다는 것이죠. 이러한 예술가에 대한 새로운 인식으로 북유럽에도 이탈리아에서와 같은 르네상스가 시작되게 되었습니다.


그가 그린 자화상 뿐 아니라 여러 인물화 속에 등장하는 주인공들은 우울하거나 슬픈 기분 혹은 불 같은 성격까지도 나타나 있습니다. 이는 뒤러가 얼마나 인물들을 관찰하고 연구했는지 알 수 있게 합니다. 실제로 그는 자신의 예술 철학을 담은 이론서를 내기도 한 지적인 화가 였습니다. 어떤 이는 뒤러를 레오나르도 다빈치에 비견할 만한 과학적인 탐구정신의 소유자라 평하기도 합니다.


1500년에 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 가장의 역할을 담당해야 했던 뒤러는 부담 때문이었는 지 점점 몸이 쇠약해졌습니다. 게다가 당시 유럽은 흑사병이 유행이었기 때문에 뒤러는 흑사병을 피해 몇 번의 여행을 해야만 했습니다. 덕분에 병은 더 깊어졌구요. 또 그에게는 깊은 우울증이 있었습니다. 이런 정서 때문인지 그의 그림들은 다소 신비적이면서도 우울한 경향이 있습니다.


벨기에로 여행을 하던 50세의 뒤러는 고래가 해안에 떠밀려 왔다는 소문을 듣고 네덜란드의 해안가로 달려갔습니다. 하지만 고래는 뒤러가 도착하기 전에 다시 바다로 돌아갔고, 뒤러는 고래도 보지 못한 채 말라리아에 걸리고 말았습니다.


다시 고향으로 돌아온 뒤러는 의뢰도 없는 마지막 작품을 그렸습니다. 그리스도의 제자 4명을 그린 <네 사도>를 뉘른베르크 시에 기증하면서 그는 “나에 대한 기념물로 공공장소에 전시하고 이방인의 손에 들어가지 않게 해야 한다” 고 말했습니다. 뒤러의 신앙철학과 인간에 대한 탐구정신이 결집된 이 작품은 현재 독일 뮌헨의 박물관에서 많은 이들에게 감동을 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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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가 아버지의 초상(1490)]


그의 나이 19세에 그린 아버지의 초상화입니다. 뒤러에게 있어서 아버지는 정신적인 의지였으며, 그의 영향을 많이 받았습니다. 이 그림에는 진지하면서도 온화해 보이는 아버지에 대한 존경심과 애정이 잘 묻어있습니다. 뒤러는 인물화를 통해 인물에 대한 자신의 감상을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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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시록의 네 기사(1498)]


말세에 이루어진다는 요한 계시록의 봉인이 열리는 장면입니다. 인간에게 내려지는 하늘의 심판을 내용으로 하며 네 봉인이 하나씩 열릴 때마다 재앙, 전쟁, 기아, 죽음을 상징하는 네 기사가 죄인들을 응징하는 것입니다. 목판으로 제작한 것이며 뒤러는 인쇄술에 사용되는 목판기술을 예술의 경지에 이르게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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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화상(1498)]


프랑스의 루브르 박물관에 소장된 이 그림은 서양미술사 최초로 그려진 유화 자화상입니다. 한손에 엉겅퀴를 들고 멋지게 차려입은 22세의 청년은 결혼식을 기다리고 있는 듯 하죠. 하지만 이 그림은 그리스도의 수난을 상징하는 것이라고 해요. 균형과 조화가 잘 잡힌 이 작품을 보면 철저한 화가의 철저한 성격 뿐 아니라 그림 속 인물의 정갈한 심리까지 표현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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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담과 이브(1507)]


아담과 이브, 두개의 작품을 한 데 모아 하나로 만들었습니다. 거의 실물 크기로 그려진 것으로 아름다움과 순수, 에로틱함이 모두 묻어나는 작품이죠. 아담은 지식의 가지를 손에 든 채 이브를 향하고 있고, 이브는 뱀이 주는 사과를 받아 들고 아담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두 사람은 배경인 나무를 통해 한 공간으로 연결되고 있습니다. 이 작품에는 이상적인 인체 비례를 연구한 뒤러의 끊임없는 노력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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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죽음과 악마(1514)]


뒤러의 3대 동판화 중 하나인 이 작품은 그의 윤리의식을 상징화 한 것입니다. 특히 마틴 루터의 영향으로 중세신앙을 잇는 듯한 그의 경건한 신앙이 나타나 있습니다. 기사를 유혹하는 죽음의 신과 악마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위풍당당하게 가고 있는 기사를 다소 신비적으로 그려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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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그리스도에 대한 탄식(1500)]


이 작품 속 강렬한 색채와 인간들의 구도와 원근법이 이탈리아 르네상스화에서처럼 대담하게 표현되었습니다. 이탈리아 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뒤러는 그 곳에서 만난 르네상스화에 적지 않게 영향을 받았습니다. 전체적으로 삼각형의 구도를 이루고 있는 군상들의 뒤로 펼쳐진 배경과의 공간감이 이채롭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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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화상(1500)]


이 자화상은 뒤러의 마지막 자화상으로 가장 완성도가 높은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을 본뜬 이 그림 속 뒤러는 오만한 표정 이상의 신성함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앞에서 설명한 것처럼 신과 자신을 같은 선상에 놓고 동일시 하고 있는 것이죠. 특히 뒤러의 눈은 정말 눈 앞에 서서 감상자를 꿰뚫어 보고 있는 듯 합니다. 이는 인물의 내적 성찰을 말하고 싶어하는 뒤러의 의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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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박사의 경배(1500)]


앞의 <죽은 그리스도에 대한 탄식>과 비슷한 구도와 색채, 공간감을 보이고 있습니다. 특히 인물들 뒤로 멀리보이는 배경인 산 풍경이 비슷하죠. 막 태어난 아기 예수에게 경배하기 위해 동방에서 찾아온 세 박사가 가져온 선물을 아기에게 바치고 있는 장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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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신성균 | 작성시간 21.04.12 제가좋아하는화가군요 독일의 다빈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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