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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이제는 전설이 돼버린 잉카의 수도,쿠스코!

작성자내일을향하여|작성시간13.01.22|조회수53 목록 댓글 1
쿠스코
전설이 돼버린 잉카의 수도,쿠스코!

<사진:쿠스코 광장의 대성당>


잉카인들이 언제부터 쿠스코에 살기 시작했는지
남아있는 기록이 없고 또 기록이 있다해도
대부분 식민지 시대의 기록이라 정확히 알수는 없습니다.
이 기록들이 거의가 잉카인들의 기억을 토대로 씌여진것이라
기록한 사람에 따라 천차만별일수밖에 없는데
어쨌든 오늘날 쿠스코의 형태를 갖춘 사람은
9대 빠차꾸떽황제라는데는 이견이 없습니다.
물론 그 이전부터 잉카인들이 살고는 있었지만,빠차꾸떽이
왕자시절, 잉카족을 침략한 찬까족을 막아낸 후 실질적인
황제의 권한을 행사하며 제일 먼저 한일이 바로 쿠스코를
정비하는 일이었는데 지금의 산토 도밍고 성당 자리에
태양의 신전인 "꼬리깐차"를 짓고, 낡은 집을 헐고 새로 지었으며
쿠스코 중앙을 흐르는 강의 복개공사를 하고
관개수로 시설을 만드는등,쿠스코의 도시 골격이 빠차꾸떽 당시
완성이 되었습니다.
당시 쿠스코는 물론 지금 우리가 보는 쿠스코와는 분명히
달랐습니다. 애석하게도 지금 쿠스코에서는 온전히 남아있는
잉카식 건축물이 단 하나도 없습니다.


<사진:쿠스코 광장의 분수대>

1533년 11월 15일 쿠스코에 무혈입성한 정복자 삐사로는
당시 내전의 후유증을 앓던 잉카인들중 쿠스코계 잉카인들을 도와
끼또계 잉카군을 섬멸하고 다음해 1534년 3월 쿠스코를
스페인령 쿠스코 자치구로 선포를 합니다.
그리고 쿠스코에 정착해서 살 스페인인들 88명에게
시내 중심부의 땅을 골고루 나눠주고 새 도시를 건설하게 하는데
이때부터 쿠스코는 완전한 스페인식 도시로 바뀌게 됩니다.
잉카의 궁전이나 신전등을 허물고 그 돌로 자신들의 입맛에 맞는
스페인식 건물을 지었는데...
좀더 정확히 말하자면 스페인식 건물이 아니라
지중해성 건조 기후대 지역의 건축 양식으로 지어진 도시가
오늘날 우리가 보는 쿠스코입니다.
지중해성 건조 기후대 건축양식이란게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지금 보는 쿠스코의 건축 구조물의 특징을 보면
여러가지 양식이 혼재돼있는걸 볼수가 있습니다.
정교한 화려한 문양의 바로크 양식에, 돔으로 대표되는 비쟌틴 양식,
일부 성당의 뾰족한 첨탑은 고딕 양식...
도시 중앙의 광장과 분수대,높은 담 좁은 골목,그리고 두터운 벽
미로형 골목길과 폐쇄형 주택구조...이런걸 지중해성 기후대 지역의
건축 양식이라고 해도 될듯 합니다만....
지중해성 건조 기후대는 아시는대로 굉장히 건조한 지역입니다.
따라서 식량의 자급 자족이 안돼고, 때문에 끊임없이
타지역과 뺐고 뺏기는 싸움을 할수밖엔 없었는데
적의 침입에 대비하고 퇴각시 안전을 위해 미로형 골목길은
필수였습니다. 또한 좁은 골목과 높은담은 보행자에게
그늘을 드리워주기 위한 배려였고,같은 맥락에서 주택구조도
폐쇄형 구조가 될수밖엔 없었다고 합니다.


<사진:쿠스코 중심가의 좁은 골목길>

이런 구조는 당연히 사회 구성원간에 대화의 장을 필요로 했는데
공동체간의 코뮤니케이션을 위해서 광장이 필요했고
건조한 기후니까 광장 중앙에 분수를 두게됐다고 하죠.
이 광장에서 공동체간의 토론이 열리고 생산적인 의견을 나누고..
광장문화를 가진 나라가 비교적 빨리 민주주의가 발달한건
절대로 우연이 아닙니다.
역으로 우리 한국은 혹한의 겨울이 있지만 무덥고 긴 여름이 있어서
주택 구조 자체가 열린 구조일수 밖에 없었고
또 아침에 눈만뜨면 옆집에 상에 숟가락이 몇개 올라가는지
훤히 알고 있는데 궂이 공동체간의 대화의 장이 필요칠 않았죠.
그래서 민주주의의 발전이 더뎠던건지....
어쨌든 이런 모든 특징들이 지중해성 건조 기후대 지역에서
볼수 있는 건축 양식들인데,그중 돔으로 대표되는 비쟌틴 양식은
그 일대가 약 3세기에 걸쳐서 우리가 역사속에서 돌궐이라고
부르는 오스만 트루크의 지배를 받은 영향이라고 보면 됩니다.
이런 다양한 문화를 아무런 거부감없이 수용했던 스페인인들이
왜 유독 쿠스코에선 잉카의 모든 문명이나 문화를 파괴하고
철저히 유린을 하고 단절을 시켰는지...모든 문명이나 문화는
그 나름대로 연속성을 갖게 해줬어야 되는건 아닌지...
왜 그랬는지 알길이 없습니다.

다만 스페인 사가들의 기록에서 그 답을 찾아보자면 기록하기를


"비록 초기 식민지 경영 시대때 일부 몰지각한 군인과 성직자들이
있기는 했지만 그 후에는 비교적 온건하고 합리적으로.."


이런식으로 합리화를 시키고 있는데 여기에 그 답이 있다고 봅니다.
식민지 개척 당시 정복자들의 거의 100%가 왕실 군대가 아닌
일반 사병들이었는데 당시 힘좀 쓴다고 하는 소위 건달,깡패들은
너나없이 일확천금을 노리고 식민지 건설붐에 편승해 남미로
몰려옵니다.
1492년 콜럼부스가 신대륙을 발견한 후로 아즈텍문명을
정복한"코르테즈",그리고 태평양을 발견하고 파나마에 식민정부를
세운 "발보아",잉카를 정복한 "삐사로"등이 그런 부류였습니다.
실제로 삐사로는 문맹이어서 왕실에 제출한 정복허가서에 서명도
대리인을 시켜서 했다고 하지요.
이런 아무런 문화적 소양이 없는 사람들이 재물에만 눈이 어두워서
무차별적인 약탈과 유린,파괴가 이런 결과를 가져오지 않았나.
쿠스코에 남았는 잉카식 건축물이나 구조물이라곤 고작해야
정복자들의 집을 떠 받혀주는 튼튼한 담벼락 몇군데....


<사진:카메라를 대자 어색하지만 밉지않은 미소를 짓는 원주민 소녀>

<사진:세계 각국의 관광객들로 붐비는 쿠스의 중심지> 

오늘 쿠스코는 세계적인 관광도시답게 연간 80만명 이상의
관광객이 찾아옵니다.물론 마추피추를 보기 위해서 오는거지요.
이 관광객들이 뿌리고 가는 직간접 수입이 어림잡아 연간 5억불.
이중 단 1불도 정작 이 땅의 주인이었던 잉카의 후예들에겐
돌아가지가 않습니다.고작해야 관광객 상대로 값싼 기념품을
팔거나 사진찍혀주고 얻는 몇푼의 팁이 수입의 전부인 많은
잉카의 후예들....그 사람들을 위해서 우리가 해줄수 있는건
아무것도 없습니다.그 사실이 더 가슴아프지만 그나마 우리가
해줄수 있는게 있다면 그들의 역사를 바로알고 더 많이 이해를하고
그래도 살고자 애쓰는 그들의 노력에 진정 열린 가슴으로
박수쳐주며 격려해주는일...그 일을 위해 잉카의 역사 탐험을
두려운 마음으로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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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원문 : 페루 사진 널린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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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Camino | 작성시간 13.01.23 즐감했습니다. 작년 2월에 페루 다녀왔는데 여행기간이 너무 짧아 또다시 가보고 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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