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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로마제국의 동,서 분열이 잉카 멸망의 단초가 됐다!!

작성자내일을향하여|작성시간13.01.22|조회수98 목록 댓글 0
  로마제국의 동,서 분열이 잉카 멸망의 단초가 됐다.
작성일: 05.02.21
작성자: 지수일

"아직 끝나지 않은 잉카의 저항"에서 잉카의 몰락 과정을 간단하게
다뤄 보았습니다. 그 이후로 바쁘기도 했지만 단순히 스페인의
프란시스코,삐사로 한사람때문에 잉카가 멸망했다고 단정짖기엔
뭔가 석연치가 않았습니다.
그 사람은 왜,어떻게 이곳 잉카땅까지 오게됐는지....

그 이전 자료를 찾다보니까 아시는데로 1492년 콜럼버스에 의해서
신대륙이 발견되고....물론 신대륙이라는 말 자체가 순전히
유럽인의 시각에서 나온 말이지만....
이 콜럼버스는 이탈리아 제노바 출신의 상인이었는데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을 보고 서쪽으로 항해한다면 동쪽으로 가는것보다
더 가까운 거리에 인도에 도착할수 있을것이라는 판단을 하고
세척의 함대를 이끌고 에스파냐를 출발,지금의 바하마 제도에 있는
작은 섬에 도착합니다. 그후 세번에 걸쳐서 북미 대륙을 항해하고
그는 죽을 때까지 그곳이 인도라고 믿었기 때문에 그곳의 원주민을
"인디오"라고 부르게 된것입니다.
컬럼버스가 발견한 이 대륙이 인도가 아니라 새로운 대륙이라는것은
역시 이탈리아 사람인 "아메리꼬 베스풋치"가 남미 해안까지 항해를
하면서 인도가 아닌 새로운 대륙임을 밝혀내서 그의 이름을 따서
"아메리카 대륙"이라 명명했습니다.
마르코 폴로는 그보다 훨씬전인 1257년 로마 교황의 친서를 들고
원나라 (몽골 제국의 5대칸인 쿠빌라이가 중국 대륙에 세운 나라)를
방문하고 황제의 친서를 쿠빌라이에게 전달합니다.
그는 이후 17년간 쿠빌라이밑에서 각지의 사절로 일하게 되는데
이때의 경험들을 바탕으로 기록한것이 동방견문록입니다.
마르코 폴로 역시 이탈리아 베네치아 출신 상인이었는데
귀국후 저술한 "동방 견문록"으로 유럽인들이 아시아에 대한 관심이
급등하게 됩니다.
이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으로 인하여 15세기말 16세기초
대항해시대가 열립니다.
이쯤에서 몇가지 의문이 생깁니다.
로마 교황은 왜 원의 황제 쿠빌라이에게 친서를 보냈을까?

이슬람의 세 확장 과정
6세기말 570년 태어난 "마호메트"가 이슬람을 창시한건
610년의 일입니다.그후 10년간 메카에서 포교 활동을 하고
심한 박해를 피해 "메디나"로 이주를 했는데 이 해 622년을 이슬람의
원년으로 삼았습니다.메디나에서 이슬람은 엄청난 성공을 거두는데
그후 메카를 정복하고 "한손에는 칼,한손에는 코란"이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대규모 정복 전쟁을 벌이는데 바로 지하드,즉 성전입니다.
632년 마호메트가 죽고 그후를 정통 칼리프 시대라고 하는데
7~8세기에 걸쳐서 지중해 연안의 북 아프리카와 이베리아 반도를
정복하고 제국으로 발전합니다.
이때가 우마이야 왕조 시대인데 유럽인들은 이들 아랍 제국을
"사라센 제국(사막의 제국)"이라 부릅니다.이후 이슬람 세력이
지중해를 포함한 세계의 상권을 휘어잡게 됩니다.
반면 유럽은 그리스도 세력의 본거지인데 이슬람 세력에게
지금의 스페인,포르투갈이 정복 당하자 대대적인 저항운동을 벌이는데
이를 "레콩끼스타",실지 회복 운동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이슬람의 만만치 않은 실력때문에 1031년까지 실지회복운동이
계속됩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시기에 스페인과 포르투갈은
훗날 대 항해 시대의 두 주역으로 나설 역량을 축적하게 됩니다.
이슬람의 지배하에 있으면서 셰계 상권을 장악한 이슬람 상인이
들여온 문물들을 받아들이는데 화약,나침반등이 유럽으로 들어온
시기가 바로 이때입니다. 도한 이슬람으로 부터 현대 수학의 기초인
삼각함수와 3차 방정식을 도입했고 천문학과 종이 제작법이
들어온것도 바로 이 시기입니다.
또한 오늘날 전 세계인이 쓰는 아라비아 숫자가 완성된것도
이 시기인데 당시 상대적으로 아시아에 비해 열등했던 유럽이
이슬람을 통해 문물을 받아들이므로 선진국으로 도약하는
계기가 됐습니다.서아시아,북아프리카,지중해의 이베리아반도의
드넓은 제국을 건설한 이슬람 세력은 당시 용병을 썼었는데
노예로 매매된 중앙 아시아의 투르크인이 오랜 번영과 안락으로
전투력을 상실한 아랍인을 대신해서 대소 전투에 투입되면서
전투력을 상승시키는데...우리가 역사속에서 "돌궐"이라 부르는
이 투르크인들이 이슬람 세계를 석권하게 됩니다.
이 또한 역사의 아이러니인데 투르크인이 세운 "셀주크 투르크"왕조가
1055년 바그다드를 점령하자 이슬람의 칼리프는 셀주크왕에게
"술탄"이라는 칭호를 내리고 실질적 이슬람세계의 지배자로
인정을 하게 됩니다.이후 셀주크 투르크는 중앙 아시아,서아시아를
통일하고 당시 비쟌틴 제국(동로마 제국)지배하의 유라시아 반도로
원정을 떠나는데 이게 또 "십자군 운동"의 원인이 됩니다.

로마의 분리와 십자군 원정까지..
도시국가였던 로마는 기원전 1100년경 인도-유럽어계의 라틴인이
세웠는데 한니발 장군의 까르따고와 3차례에 걸친 포에니 전쟁에
승리한 이후 제국으로의 기틀을 다지게 됩니다.
기원전 146년 까르따고를 완전 섬멸한 로마는 여세를 몰아 그리스의
마케도니아까지 속국으로 삼게 되는데 왕정,귀족 공화정을 거치면서
정치의식이 성숙해진 로마는 귀족과 평민이 법률상 평등한
민주 공화정을 수립하게 됩니다.그러나 이 평등한 권리에 소외된
노예들의 반란이 속출하게 되고 이를 진압한 공로로 군인들의 세력이
커지게 되는데 대표적인 군인이 바로 율리우스 카이사르입니다.
기원전 60년 카이사르가 주도하는 1차 3두 정치가 성립되고
카이사르 주도하에 지금의 프랑스,영국까지 원정에 성공하자
그 인기를 두려워한 원로원과 폼페이우스는 카이사르를 제거할 계획을
세우게 되는데 사전에 이 계획을 눈치챈 카이사르는 군사를 이끌고
"주사위는 던져졌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기고 루비콘 강을 건너
로마로 입성하고 반대파를 제거합니다. 그는 종신 독재관,
최고 군사령관으로 민주 공화정내의 로마에서 독재적 권력을
가지게 됩니다.그러나 공화정을 옹호하는 "부르투스"파에게 기원전
44년 암살당하고 2차 3두정치가 실현됩니다.
2차 3두 정치의 한축이었던 카이사르의 양자 옥타비아누스가
기원전 27년 황제에 오름으로 제정 로마시대가 열리게 됩니다.
이후 황제의 지위가 세습되고 서기 180년까지 오현제시대가 계속되는데
이때가 제정 로마시대의 전성기로 사람들은 이를 "팍스 로마나"라고
부릅니다.5현제중 마지막 황제인 마르크스 아우렐리우스가 전쟁중
원정지에서 전사하자 군인 황제 시대가 열리면서 제국은 혼란에
빠져들고 이 혼란을 수습한 사람이 284년 황제가 된 디오클레티아누스.
이는 혼란한 제국을 동서로 나누고 각 지역을 4명의 정,부제가
통치하게 했는데 이중 한명이 콘스탄티누스였는데 황제를 무너뜨리고
다시 로마를 통일합니다.이 콘스탄티누스는 313년 밀라노 칙령으로
그리스도교를 공인하기도 합니다.
이후 330년 콘스탄티누스는 제국의 수도를 그리스인의 식민도시였던
비잔티움을 콘스탄티노플(지금의 이스탄불)로 개칭하고 천도하는데...
4세기 말이 되면서 거대하게 팽창한 제국의 통치가 사실상
불가능해 지면서 395년 당시 황제 테오도시우스는 제국을 동,서로
분리하도록 유언합니다. 이로써 제정 로마시대는 막을 내리고
동로마제국(비쟌틴 제국)과 서로마 제국으로 분열하게 됩니다.

동,서로마로 분리된후 서로마 제국은 게르만인 용병대장 오도아케르에
의해 멸망되고(476년) 서로마 제국 황제의 지위를 동로마에 반환됩니다.
이때 게르만인의 대 이동으로 유럽 각지에 크고 작은 여러개의 왕국이
성립되는데 프랑크,앵글로 색슨,서고트 왕국등이 이시기에 성립됩니다.
한편 아시아 대륙을 마주보는 콘스탄티노플에 수도를 정한 동로마는
마호메트로 대표되는 이슬람 세력의 서진을 막는 그리스도 세계의
방파제 역할을 했는데 726년 성상 숭배 금지 칙령으로 이견을 보이던
그리스도교가 로마 카톨릭과 그리스 정교회로 분리하자
서로마 멸망 이후 정신적 지주가 없는 서방세계에 교황이 등장하고
동로마 제국에서는 황제밑에 주교가 종속하는 그리스 정교회가
성립하여 로마 카톨릭과 그리스 정교회의 대립이 잦아지게 됩니다.
1054년 황제를 정점으로 하는 그리스 정교회는 교황을 모시는
로마 카톨릭에서 완전히 분리하게 되는데 1071년 앞서 언급한
투르크인에 세운 셀주크 투르크의 이슬람세력의 침입이 빈번해지고
소아시아를 비롯한 그리스도교의 성지 예루살렘을 정복당하자
동로마의 황제 알렉시우스는 성지를 되찾기위해 로마 카톨릭의
교황에게 원조를 요청하게 됩니다. 이때는 이미 서방세계의 가톨릭의
권위가 절대적인 위치를 차지하게 됐는데 그리스 정교회에 비해
확실한 우위를 점할 좋은 기회라고 판단한 로마 카톨릭에서는
십자군을 조직하게 됩니다.
1096년 프랑스와 이탈리아의 제후가 주축인 1차 십자군 전쟁은
3년간 계속되는데 예루살렘을 탈환하고 성지를 회복하는 성과를
올립니다. 이후 이슬람이 세력을 재편성해서 그리스도교 세력을
재차 공략하자 7차례에 걸쳐서 십자군 원정이 이뤄지는데
1차때와는 다르게 점점 십자군 원정군의 성격이 바뀌어 갑니다.
후기 십자군은 성지탈환이라는 목적은 단순한 명분이고
참가 병사들은 약탈에만 급급하고 이 원정에 물자와 선박을 제공한
상인들만 부를 늘리는 계기가 됩니다.

이 십자군 원정의 출발지가 이탈리아 반도라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전쟁에 필요한 모든 물자와 선박,무기등을 제공,판매하면서
서로마제국의 멸망이후 정치적 권력에서 철저하게 소외됐던
이탈리아 반도에 "길드"라는 상인 조합이 형성됩니다.
이탈리아 반도의 상인들은 7차례에 걸친 십자군 원정에 필요한
모든 물자를 독점 공급하면서 지중해의 상권을 장악하게 됩니다.
결국 180여년에 걸친 십자군 전쟁은 별 실효없이 끝나고
이탈리아반도의 상인들은 이슬람세계 원정에서 얻은 막대한 부로
새로운 세계로 눈을 돌리게 됩니다.

또 다른 영웅 칭기즈칸의 등장과 그 영향
이 즈음 12세기 중엽 아시아 대륙에서는 몽골족의 한 씨족에서
테무진,후에 칭기스칸이 태어나고 1204년 몽골고원을 정복합니다.
대규모 편제가 하루 100km 이상 진군하는 엄청난 기동력을 바탕으로
1220년 투르크족의 호라즘 제국을 정복하고 서러시아까지 이르는
광대한 제국을 건설한 몽골은 칭기즈칸 사후 5대칸인 쿠빌라이는
중국 한족의 나라인 남송을 멸망시키고 원을 창업하게 됩니다.

바로 이때 수세기동안 그리스도교 세계를 괴롭히던 이슬람 세력을
멸망시킨 몽골에 감사의 친서를 로마 카톨릭의 수장인 교황이
이탈리아 베네치아 상인 마르코 폴로를 통해서 전한게 계기가 되어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이 탄생하게 됩니다.
마르코 폴로는 원제국에 17년간 머물면서 쿠빌라이의 사절로 활약하고
이때 동방의 여러 물품을 서방에 전하는데 이 시기에 서방사람들이
처음 후추라는 향신료를 맛보게 됩니다.
후추가 유럽에 전해진 이후로 전 유럽의 육류 소비량이
7배 이상 증가를 하고 후추 또는 향신료는 거의 금값에 비견될만큼
높은값에 거래됐는데.......

거대한 영토를 자랑하던 몽골제국은 그 비대한 몸집을 지탱하지 못하고 너무나 일찍 몰락하고 맙니다.
쇠락한 셀주크 투르크의 뒤를 이어서 역시 투르크인이 세운
"오스만 투르크"가 세력을 확대하면서 동지중해 해상을 점령하자
동방의 향신료를 구하러 갈 루트가 막혀버린 이탈리아반도의 상인들은
다른 루트를 찾기에 골몰했습니다.
항해비용의 최소한 20배 이상의 이익이 보장되는 향신료를 얻기위해
지중해가 아닌 다른 루트를 개발하기 위한 탐험에 상인들이 앞다퉈
나서기 시작했고 일찍이 이슬람의 지배하에서 많은 선진문물을
받아들였던 경험이 있는 스페인과 포루투갈이 왕실차원에서
이 탐험의 스폰서가 되줍니다. 콜럼버스의 항해를 지원한것도
스페인 왕실이었고,마젤란의 세계 일주 항해를 지원한것도 역시
스페인 왕실이었습니다.파나마 지협을 횡단하고 태평양을 발견한
발보아를 지원한것 역시 스페인 왕실이었습니다.
반면 포루투갈은 1488년 아프리카의 희망봉을 발견하고
1498년 바스코 다 가마는 희망봉을 돌아 마침내 인도에 도착해서
후추등의 물품을 싣고 다시 돌아오기까지 2년이 걸렸으며 출항한
170명의 승무원중 100명을 잃었지만 총 항해 비용의 60배에 달하는
막대한 이득을 봄으로 대항해 시대의 막을 올리는 계기가 됩니다.

대항해 시대의 개막과 식민지 경영시대
1519년 스페인의 꼬르테즈는 11척의 배에 508명의 병사와 말16마리
대포와 화승총을 싣고 신대륙 원정에 나섭니다.
지금의 유카탄 반도에 도착한 꼬르테즈는 연안을 따라 진군을 계속하고
1521년 3만명의 아즈텍인을 학살하고 아즈텍 제국을 멸망시키고
스페인령 자치구를 선포합니다.

꼬르테즈의 성공은 스페인의 힘좀 쓴다는 건달들에게는
하나의 성공신화였습니다. 이즈음 프란시스코 피사로의 소원은
제 2의 꼬르테즈가 돼는것이었습니다.
피사로는 발보아가 건설한 스페인령 자치구 파나마에 머물면서
정보를 수집하기위한 원정을 떠나는데 지금의 콜롬비아 지역에서
사로잡은 한 원주민으로 부터 "비루"에 가면 금이 많다는 정보를 듣고
대대적인 원정을 준비합니다.
이 "비루"라는 말은 당시 콜롬비아 지역 원주민들이 쓰던 언어로
"남쪽 지역"이라는 뜻이었습니다.
그래서 지금의 페루라는 국명이 이 "비루"가 변해서 된건 아닐까
추측을 해봅니다만.....
어쨌든 이 정보를 바탕으로 스페인 왕실에 정복허가서를 제출하고
1531년 180명의 군사와 27마리의 말을 태운 피사로의 배가
지금의 페루 북부 해안 도시 "뚬베스"에 상륙합니다.
그리고 이미 전편에 다룬 "아직 끝나지않은 잉카의 저항"에서처럼
잉카 역시 어이없이 멸망을 하고마는데.....

제가 비약이 심했나요?
잉카멸망의 단초를 동,서로마의 분열에서 그 원인을 찾고,나아가
이슬람의 창시와 세력 확장,투르크인의 등장,동,서교회의 분리
성지회복을 위한 십자군 전쟁,이탈리아 반도 출신 상인들의 활약.
칭기즈칸의 몽골제국과 쿠빌라이칸,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
오스만 투르크의 재결집,지중해 점령...후추를 통해 막대한 부를
갖기를 희망하는 상인들의 모험과 그를 지원했던 스페인과 포르투갈.
이 모든 역사적 사실들이 아직 생기지도 않은 잉카를 멸망시키기위한
과정이었다고 보지는 않습니다.
다만 일련의 역사적 사실중에 단 한가지만이라도 이가 빠졌다면.....
그랬다면 이 페루땅이 아직도 잉카인들의 땅이 아니었을까....
물론 역사에 가정은 없다지만 위의 역사적 사실중에 단 하나라도
일어나지 않았다면....그랬다면 진짜 아직 잉카가 존재했을까?
물론 잉카가 아직까지 존속한다고 해서 지금의 페루보다
더 살기 좋은 나라가 됐을거라고 말할수는 없습니다.
다만 아직도 소외되고 핍박받는 잉카의 후예들의 삶이 지금보다는
덜 힘들지 않았을까....

잉카의 생성과 발전 과정은 좀 미뤄야 되겠습니다.
다음은 남미 각 나라가 스페인으로부터 독립하는 과정을 알아봅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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