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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추상화의 대가, 와실리 칸딘스키를 말하다

작성자디아니|작성시간20.09.08|조회수166 목록 댓글 0

추상화의 대가, 와실리 칸딘스키를 말하다 

30세의 늦은 나이에 그림을 시작한 칸딘스키는 20세기 근대미술사에서 화가로서 이론가로서 당대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작가이다. 러시아 태생의 그는 법률과 경제를 공부하고 대학교에서 강의를 하면서 교수를 제의 받았으나 거절하고, 1896년 화가가 되기로 결심하였다. 그는 항상 가르치는 것에 관심이 있었고, 색과 형태에 대한 분석을 통해 미술 이론을 정립하였다. 동시대 조각가 브랑쿠시가 대상에서 출발한 추상조각을 제작한 반면, 칸딘스키는 자연 대상에서 벗어나 순수 조형요소로만 화면을 구성한 추상화의 길을 열었다.

유년기

칸딘스키는 모스크바에서 태어나 오데사에서 자랐다. 칸딘스키 어머니의 고조할머니는 몽골리아의 공주였고, 그의 아버지는 중국 국경 근처에 있는 시베리아의 작은 마을 카챠 부족이었다. 그는 부분적으로 유럽과 아시아의 문화를 접하면서 자랐다.

그는 러시아 사회에서 귀족으로 부유하게 자랐다. 여행을 좋아해서 베니스, 로마, 피렌체, 코카서스 그리고 크림 반도 등을 다니면서 유럽 문화에 매우 익숙하였다. 1871년 오데사에서 칸딘스키는 중학교,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첼로와 피아노의 아마추어 연주가로 활동하였다. 그는 또한 아마추어 화가로 활동하였는데 이 시기에 가졌던 각각의 색이 가지고 있는 신비한 힘에 대한 사춘기적 확신이 추상으로 향한 첫 충동이었다고 회상하였다.

1886년 그는 모스크바 대학에서 법률과 경제학을 공부하였으나, 그는 후에 자신의 예술에 뿌리를 발견하게 되는 도시의 생생한 건축과 아이콘 수집과 색에 관해 특별한 관심과 느낌을 놓치지 않았다.

1889년, 대학에서 민속학 과제 수행을 위해 북쪽 Vologda 지방으로 칸딘스키를 보냈을 때, 그는 비사실적인 양식의 러시아 민속화에 관심을 가지게 된다. 같은 해에 그는 성 페테스브르그의 에르미타지에서 렘브란트를 발견하였고, 파리 여행으로 시각적 교육에 더욱 관심을 가졌다.

1895년 칸딘스키는 러시아에서 개최된 프랑스 인상파전에서 모네의 <짚더미>를 보고 깊은 감명을 받았고, 이듬해, 30살의 나이에 인생의 큰 선택 길에 놓이게 되었다. 에스토니아의 Duorpat대학으로부터 교수직 자리를 제의받았으나, "지금 아니면 결코 할 수 없다"는 생각으로 그림을 선택하였다. 그는 드로잉, 스케치, 그리고 해부학 공부를 시작하면서 그림을 그렸다.

뮌헨시기

칸딘스키는 이미 몇년 후 미술이론을 가르칠 사람으로서 성공적인 자질과 권위를 갖추고 있었다. 키가 크고 큰 체구의 안경을 쓴 말끔한 옷 차림의 칸딘스키는 항상 고개를 치켜 들고 사람을 내려다 보았다. 1896년 그는 뮌헨에 살면서 Anton Azbe 사립학교에서 공부한 후 뮌헨 미술 아카데미에서 그림을 배웠고 1905년 살롱 도톤의 회원이 되었다.

19세기 리얼리즘을 기초로 출발한 그는 인상주의, 독일에서는 유켄스타일이라고 불리는 아르누보의 장식미술, 신인상주의의 점묘법, 중앙 유럽 표현주의 비재현적인 색채, 그리고 프랑스의 야수주의에 영향을 받았다. 종종 그는 러시아의 이콘과 볼로자 지방의 민속미술을 잊지 않았다. 그는 아시안 선조들이 좋아했던 격렬한 색조들에 환희를 느꼈다. 1903년부터 1908년 사이에 그는 홀란드에서부터 튀니지아의 남쪽, 파리에서 러시아까지, 이탈리아, 베를린 등지로 많은 여행을 하였다.

1908년 이후 뮌헨 무르나우에 살면서 1910년에 최초의 추상회화를 제작하였다. 또한 표현파인 프란츠 마르크와 함께 뮌헨에서 예술가 집단인 '청기사'를 조직하여(1911), 비구상 회화의 선구자가 되었다. 1908년 칸딘스키는 1902년부터 알고 지내던 그의 동료 가브리엘 뮌터와 무르나우 작은 마을에서 집을 구입하여 함께 생활하였다. 예술적 동반자로서 로뎅과 카미유처럼 서로 자극제가 되어주었다.

1910년에 그린 <기수>와 때를 같이하여 칸딘스키는 수채에 의한 추상화를 시도하였다. 또한 그 자신의 예술관을 이론적으로 뒷받침해 주는 '예술에 있어서 정신적인 것에 대하여'라는 책을 1912년 출판하였다. 이후 그는 거의 완전한 추상 미술을 하게 되며 추상 미술은 가시적인 세계의 재현을 통해서 성취되기 보다는 추상적인 추성과 시적인 표현을 통해서 가능하다고 보았다. 생명력 있는 표현을 특징으로 하는 칸딘스키의 추상미술은 구체적인 대상을 배제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유기체를 연상시키며 그가 추구한 것은 회화 그 자체로서 즉흥적인 정신세계를 표현하고자 하였다.



칸딘스키는 어느날 자신의 스튜디오에 들어서면서 거꾸로 놓여있는 그림을 보면서 참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그 순간 그는 그림이 무엇을 그렸느냐와 관계없이 색채와 선의 구성만으로도 충분한 표현적 효과를 가질 수 있다고 느끼게 된다. 칸딘스키의 추상미술이 어느 한 순간에 완성된 것은 아니지만, 이런 깨달음은 구체적인 대상이 완전히 배제된 미술관으로 나아가는데 결정적인 기여를 하였다. 뒤집어진 그림을 통해 색채와 선 만으로도 강렬한 느낌을 전달할 수 있는 확신을 통해 형성된 칸딘스키의 추상화는 일반적으로 구체적인 대상을 묘사하지 않은 회화를 뜻한다. 언뜻, 아무런 의미와 감정도 없어보이지만, 칸딘스키는 추상화 속에 '영혼을 울리는 감동'이 담겨져 있다고 말한다.

특정 대상이나 자연의 모습을 화면에서 완전히 제거한 칸딘스키는 이 같은 실물 주제의 포기를 정당화하며 회화의 자율성을 부르짖었다. 무형의 주제로부터 예술에 대한 생각을 나름대로 정립하여 공감각의 원리로 발전시켜 나갔다. 그는 대상을 구체적으로 묘사하거나 재현하지 않는 대신 대상을 보았을 때 느껴지는 감동을 그대로 캔버스에 옮겼다.

결국 화폭 위에는 자신의 감정이 담긴 색채와 선만 남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구체적으로 대상을 묘사하지 않으면서 화가 자신의 감성과 정신을 표현하는 일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자칫하면 화가가 일방적으로 자신의 주관적인 감정만을 표현함으로써 감상자에게는 의미 없는 낙서나 얼룩으로 치부될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또한 칸딘스키는 자신의 회화에 음악성을 부여하여 "색채는 건반이며, 눈은 망치이고, 영혼은 아름다운 소리를 내는 줄을 가진 피아노이다. 예술가란 그 건반을 이것저것 두드려 목적에 부합시켜 사람들의 영혼을 진동시키는 사람이다." 라고 말할 정도였다. 그는 음악이 화음만으로 청중의 심금을 울릴 수 있는 것처럼 회화에서도 색채나 선반으로만 대상을 표현해 내는 일이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음악에서 음의 높낮이가 다르고 악기마다 독특한 음색이 있듯이 색에서도 노란색은 전형적인 지상의 색으로 맹목적인 착란이나 광기 어린 병적인 색으로 나타나며, 파란색은 하늘의 색이며, 순수에 대한 동경을 준다는 것 등 각각의 색채마다 느낌이 다름일 연구를 통해 밝혔다. 칸딘스키는 이런 연구를 통해 심지어는 색상으로 보면서 음악을 들을 수 있다고도 했다. 음악이 화음을 통해 음의 균형과 조화를 이루듯 회화 역시 서로 다른 색채와 선이 화를 이루기 위해서는 전체를 통제하는 힘이 필요하며, 이를 위해 기하학적이며 단순화된 표현으로 내적인 감정을 드러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절제된 감정을 느낄 수 있는 그의 말년 작품에서 잘 드러난다. 모든 색채에는 의미가 있듯 이런 형태 또한 아무렇게나 그려진 것이 아니었다. 이것들은 운동감, 균형감, 무게감 등을 나타내면서 제각각 의미있게 표현되고 있는 것이다. 작품에 명시되어 있는 <즉흥>, <음향>과 같은 음악적 용어가 등장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컴포지션 No. 7> (1913)

칸딘스키는 전부 10점의 컴포지션 시리즈를 제작하였으나, 세계 대전 중 3점이 손실되어 현재 남아 있는 작품은 아쉽게도 7점이다. 그의 컴포지션은 획기적인 변화를 보여주는 시점에 제작된 것으로 칸딘스키의 작품 세계의 변화 과정을 살펴볼 수 있는 좋은 자료임과 동시에 그의 걸작들이다. <컴포지션 No. 7>은 구체적인 기하학적 추상에 들어간 <컴포지션 No. 8>을 그리기 전에 제작한 것으로 흐트러진 색의 추상 세계를 표현한 것이다.

러시아 시기

1914년 세계 제1차 대전이 발발하였을 때, 칸딘스키는 가브리엘 뮌터와의 관계가 깨졌다. 그는 약 15여년을 함께 했던 가브리엘과 헤어진 후, 모스크바로 돌아가 그곳의 여인 니나 안드리브스케야와 결혼하였다. 비록 칸딘스키는 50세가 넘었으나, 신부는 매우 어렸고 결혼은 매우 성공적이었으며 그는 모스크바에서 정착하여 살았다. 칸딘스키는 모스크바에서 Russian Academy of Artistic Sciences를 설립하고 모스크바 대학교 교수가 되어 정부지원으로 개인전도 개최하는 등 많은 활동을 하였다. 그러나 러시아 정부는 추상 미술을 인정하지 않아 그와 그의 아내는 1921년 다시 베를린으로 갔다. 1933년까지 바우하우스의 교수로서 후진 지도와 신예술 개척에 힘썼다.

바우하우스 시기

이시기 즈음에 칸딘스키는 화가로서 국제적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그는 대학에서 학위를 취득하고 법과 경제를 강의하던 것처럼 항상 가르치는 것에 관심을 가졌다. 그는 형태의 요소, 색채 과정, 벽화 작업을 지도하였다. 이 시기 동안 칸딘스키의 작품은 점차 기하학적 형태에 의한 구성적 양식으로 변화하였다.

<컴포지션 No. 8> (1923)

칸딘스키는 <컴포지션 No. 7>을 그린 뒤 10년 후에 이 작품을 제작하였는데 작곡가의 변주와 같은 감을 그림으로 표현한 것이다. 하단 부분의 다채로운 색으로 구성된 원들은 음악의 악보를 나타낸 것임을 알려주는 부분이다. 작품에서 컴포지션이라고 명명된 것은 바로 그 이유이다. 맨 위의 반원 네 개는 템포, 강, 약, 중강, 약을 의미하며 그 밑의 반원들은 음표와 화음의 연관성을 표기한 것이다. 무미건조한 선들에서 원을 중심으로 그림에 생동감을 주고 있는데 이것은 칸딘스키가 이 작품을 통해 마음 속의 울림을 음악으로 강조하려는 의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원의 크기와 색의 변화에 의해 오케스트라 같은 감정을 표현하고 있는데 가만히 보면 첼로와 바이올린, 트럼펫과 피아노 건반 소리가 들리는 듯 하다. 칸딘스키는 각이 진 곳과의 만남을 아담과 신의 만남과도 같은 신성하고 아름다운 일이라고 평소 말했다고 한다. 특히 이 작품에서 삼각형과 사각형, 다각형의 꼭지점이 원과 맡닿아 있거나 연결되어 있는데 이것은 유기적으로 서로 다른 음을 하나로 묶어준다는 의미를 가진다. 그에게 있어 원은 음악성, 화학성, 극대화한 감정의 울림을 나타냈다.

파리 시기

1928년 이후 독일 시민이 되었지만, 1933년 나치가 바우하우스를 폐쇄시키자 그는 프랑스로 떠났다. 이 시기 동안 칸딘스키는 뮌헨 시기의 유기적 방식과 바우하우스 시기의 기하학적 방식을 합성시켰다. 그는 1938년 프랑스 시민권을 취득한 후, 여행 이외에는 파리 교외의 누이쉴센을 떠나지 않고 11년 동안 살았고 1944년 사망하였다.

<컴포지션 No. 10> (1939)

칸딘스키는 1944년 그가 죽기 5년 전 컴포지션 시리즈의 마지막 작품을 완성하였다. <컴포지션 No. 10>의 분명한 특징은 삭막한 검은색을 배경으로 한다. 색과 형태는 특히 검은 배경과 선명한 대조를 보인다. 형태들의 움직임은 위를 향하고 있으며 무한한 우주 속으로 올라가는 열기구를 강조하고 있다. 책 모양과 갈색 풍선 모양 사이의 둥근 형태는 외부 공간을 의미한다. 칸딘스키에게 있어 검은색은 강한 지독한 혐오를 표현하는 것으로 거의 마지막 예술적 진술로서 선택한 색이라는 사실은 매우 중요하다. 칸딘스키는 현대 추상회화의 선구자로서, 대상의 구체적인 재현에서 이탈, 선명한 색체로써 교향악적이고도 다이내믹한 추상 표현을 관철한 후 점차 기하학적 형태에 의한 구성적 양식으로 들어갔으나, 몬드리안과는 또 다른 독자적인 발전의 발자취를 남겼다.


출처/국립현대미술관 웹진 Art:m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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