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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김병종의 시화기행] 어두운 세상도 아랑곳않고… ‘삶의 환희’를 색칠하다 (44) 프랑스, 니스

작성자카페지기|작성시간22.02.02|조회수14 목록 댓글 0

[김병종의 시화기행] 어두운 세상도 아랑곳않고… ‘삶의 환희’를 색칠하다 (44) 프랑스, 니스

 

문화일보 2020년 09월 15일(火)

▲ 마티스풍 여름, 16.3x23.3㎝, 종이에 채색, 2020

■ (44) 프랑스, 니스

파격 화풍에 야수파로 불리며
온갖비난에도 제 갈길 간 화가
보는이 행복하게하는 그림그려

열두살 어린 피카소 질투 받고
미술도시서 보이지않는 대결도

파리 떠나 니스서 ‘은둔의 삶’
40여년간 오로지 그림과 동거
병상서도 크레용 매달아 벽화


여름이 간다. 한동안 불타던 태양도 함께 간다. 마티스 풍의 깊디깊은 블루 대신 커튼을 젖히면 소슬한 가을이 홀로 와 있다. 앙리 마티스. 파리 미술계의 신사라는 그는 가슴에 늘 이글거리는 태양 하나를 숨긴 사내였다. 하지만 그 태양이 식고 사람들이 떠나가고 난 뒤 소슬한 가을 같은 외로움의 시기에 그의 그림은 익어갔다. 그의 사진을 보며 생각한다. 설마 작업을 할 때도 저런 단정한 차림을 하고 있진 않겠지. 하지만 그는 뜻밖에도 ‘야수파’란다.

‘사치, 고요, 쾌락’이라는 작품을 선보였을 때 평론가 루이보셀은 ‘새로운 화파의 선도자’라고 마티스를 예찬했다. 그러면서 고흐의 강렬한 색과 세잔의 반 추상공간에 고갱의 원시성을 뒤섞어 놓은 듯한 마티스의 신작들이 조만간 파리 화단을 평정할 것이라고 예언했다. 동시에 그는 그 파격적인 화풍으로 인해 마치 원형 경기장에 끌려 나온 노예와 검투사들을 향해 야수처럼 퍼붓던 저주와 악평도 함께 듣게 될 것이라고 했다.

 

그런데 어이없게도 그 예언은 전복돼 훗날 마티스 화풍 자체를 이르러 야수파라 부르게 된 것이다. 관중 쪽에서의 야수 같은 공격이 아니라 작가 쪽에서 관중을 향해 야만의 화살을 쏘아댄 것이었다는 것이 맞겠다. 하지만 행복한 야만이고 야수인 셈. 그만큼 그의 그림은 보는 이를 행복하게 한다.

법학 전공의 늦깎이라는 콤플렉스 때문에 6년여에 걸쳐 유명화가의 작업실을 전전하며 독학으로 미술공부를 했던 마티스는 오랜 세월에 걸쳐 자신이 쌓아 올리고 학습했던 전통 미학의 세계를 서서히 비틀고 변형시켜 우아하면서도 거친, 야만과 문명이 조화롭게 공존하는 화풍을 만들어낸다. 더 나아가 회화와 디자인이 어깨를 나란히 하는 것 같은 화풍, 일본과 아프리카와 유럽이 만나는 것 같은 화풍을 만들어낸다.

 

마침내 그 옛날 한 사람이 던져준 ‘야수처럼’이라는 말을 자기 작품에 적용해버린 것이다. 그런데 그의 이름이 드러나고 애호가층이 생기면서 허다한 평론가들은 그의 그림을 “영혼 없이 눈만 즐겁게 하는 장식적인 그림” “터무니없는 낭만적 낙천주의” “일본과 아프리카의 불쾌한 접속” 등으로 비난하게 된다.

 

하지만 소나기 같은 비난과 비판에도 불구하고 그는 한결같이 행복하고 아름답고 신비한, 그 위에 생의 환희로 출렁거리는 화면을 만들어낸다. 생의 환희, 맞고 말고다. 그의 그림에선 화병의 초록 잎이며 분홍색 커튼이며 낡은 의자까지도 기쁨과 행복의 빛을 쏘아댄다.

실로 그림은 이 어둡고 불안한 세상을 이겨내기 위한 ‘기쁨의 깃발’이 돼야 한다는 선언처럼 보이는 화풍이다. 그런데 1906년 앵데팡당전에 출품된 그의 ‘삶의 환희’를 보고 남몰래 좌절과 충격, 이글거리는 질투를 느낀 한 사내가 있었다. 19세에 피레네산맥을 넘어 파리로 입성한 파블로 피카소. 파리로 왔던 그 스페인 청년은 대충 도시의 몇 군데 주요 화랑들을 둘러본 후 장차 자신이 그 미술 도시의 선두주자가 되리라는 내밀한 자신감을 갖게 된다.

 

그러다가 12세 연상 마티스의 작품을 보고 그가 자기보다 먼저 새로운 회화세계의 문을 연 것 같은 느낌을 받게 된다. 장차 그가 도착하고 싶은 지점에 먼저 그가 가 있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마티스 역시 피카소의 번쩍이는 재능을 알아봤음은 물론이다. 이후 두 사람은 보이지 않는 경쟁 구도를 형성하게 된다.

당시의 유명한 소장가였던 거투르드 스타인은 한 인물평에서 마티스를 ‘학자와 같은 분위기의 인물’로, 피카소를 ‘서커스의 광대 같은 인물’로 묘사했다. 스타인의 평은 적절했지만 피카소의 마티스를 향한 시선은 선망과 질투로 이글대는 것이었다. 마티스의 두 번째 개인전에서 정작 사람들에게 둘러싸인 사람은 마티스가 아닌 피카소였다.

 

작은 키에 불어도 잘 못 하는 그에게는 거부할 수 없는 매력과 흡입력이 있었던 것이다. 얌전한 서생 같은 마티스는 야수파로 불리기는 했지만 작업의 금도(禁度) 같은 것이 있었다. 일탈을 즐겨 하는 쪽은 아니었다. 그런데 당시 파리 화단이 그토록 풍요했던 것은 이런 보이지 않는 재능의 불꽃 튀는 대결들이 여러 군데에서 폭죽처럼 쏴 올려지곤 했기 때문이다. 부러운 대목이다.

“다시는 그자에 대해 말하지 말아라. 그자는 매복해 있다가 덮치는 사냥꾼처럼 늘 나의 것을 훔치는 도둑이야.” 마티스가 어느 날 피카소에 대해 딸에게 신경질적으로 내뱉은 말이라고 한다. 마티스와 피카소. 12세 차이의 두 사람을 두고 훗날 사람들은 세기의 라이벌이라고 부르곤 했다.

 

아닌 게 아니라 피카소의 1930년 작 ‘꿈’을 보면 평론가들이 지적한 것처럼 마티스보다 더 마티스적이다. 피카소가 일정 부분 마티스를 훔쳤던 것도 사실인 것 같다. 하지만 마티스도 일본의 우키요에(浮世繪)와 아프리카 미술에 곁눈질했다. ‘잠언’에 일렀듯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이란 없었던 셈이다.

그런데 피카소가 ‘게르니카’에서 보여지듯 자신의 조국이 처한 현실이며 전쟁에 대해 가끔 격정적으로 울부짖고 포효하는 것 같은 열기를 쏟아놨던 데 반해 마티스의 화면은 아무리 거칠어도 정제돼 있었다. 프랑스적인, 너무나 프랑스적인 화풍을 고수했던 것이다. 색채, 빛, 선을 통해 그리고 암 수술을 받은 후 병상에서부터 시작한 종이 오리기를 통해 도안과 순수미술의 경계마저 허물었다.

 

생애 동안 큰 전쟁을 두 번이나 겪었던 암울한 시기를 거치면서는 더더욱 색채는 호흡이요 형태는 기도라는 듯, 생의 환희를 노래하는 듯한 유희적 작업에 열중했다. 거대 담론이나 사회적 이슈에는 무심한 듯 주로 실내풍경과 여인들을 그리면서 그는 색채를 빛으로 바꾸는 경지로 들어서고 있었다. 이런 그를 두고 평론가들은 여전히 악평했지만 애호가층은 점점 두꺼워졌다. 하지만 그는 끝내 시끌벅적한 파리를 떠나 햇빛 좋은 남쪽 니스로 옮겨간다.

파리의 본류였지만 파리의 영주 자리를 스페인 사내 피카소에게 내어주고 니스의 한 빌라에서 은둔의 삶을 살다시피 그림과만 동거한 것이다. 맞는다. 진실로 그림과의 동거였다. 그는 이 시절, 먹고 자고 산책하고 그리고를 반복하는 나날을 보냈다. 이렇게 1917년부터 1954년까지 40여 년을 이 평화로운 전원도시에 살며 회화와 드로잉, 조각, 일러스트, 세라믹 도자기 빚기 등을 했다.

 

그런 그의 작품들은 지금 니스의 마티스 미술관에 모여 있다. 하지만 이 건물은 본래 미술관으로 설계된 것이 아니라 가톨릭 수사였던 장 바티스트 클리에오(1627∼1686)의 저택이었다. 미술관으로 들어서니 낡은 가구에서 풍기는 것 같은 냄새가 난다. 고풍스러운 집에 들어설 때면 달려드는 그 냄새가 나는 좋다. 시간의 더께가 느껴지는 단아한 공간. 그의 그림은 공기마저 아늑한 이곳에서 한결같이 행복해 보인다. 지금 이 오래된 3층 건물에 니스 시절의 마티스 분신들이 오롯이 모여 있다.

 

위층에서는 화가의 기침 소리가 들려오는 듯하다. 창밖으로는 끝 간데없이 올리브 나무들이 보이고 푸른 하늘은 그 위에 아스라하다. 이곳의 풍광 속에 잠기다 보면 누구라도 그 평화 투성이의 풍경과 안온한 대기감에 중독되고 만다. 와글대던 파리가 부질없어 보였을 수도 있다. 가슴에 불길을 지닌 그였지만, 오히려 그래서 상처와 곡절이 많은 삶이었다. 한사코 고즈넉하고 평화로운 전원 속으로 들어가려 했던 이유다.

기나긴 올리브밭 끝의 붉은벽돌 미술관의 지척에는 그가 1930년대 초부터 살며 그림을 그렸던 작업실 겸 숙소인 시미에(Cimiez)의 오래된 호텔 레지나(Hotel Regina)가 있다. 니스의 시내가 내려다보이는 이 빌라에서 만년의 그는 심근경색과 폐렴, 관절염 같은 치명적인 질병들에 시달리며 고통의 나날을 보냈다. 선비 같은 외모와는 달리 심심찮게 여성과 스캔들을 일으키고 수많은 관광객이 모여드는 파리를 등지면서 그는 가족들과도 소원해져 있었다.

 

홀로 남은 빈집에서 그는 그림의 모델이었던 러시아 여인의 보살핌을 받으며 침대에 비스듬히 누운 채 그녀를 조수로 해 긴 막대기에 크레용을 매달아 벽화 스타일의 종이 오리기 그림들을 그렸다. 생의 마지막에 이르렀음을 본인도 알았지만 그렇게까지라도 해 존재의 의미를 확인하고 싶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야말로 ‘나는 숨 쉰다. 고로 그린다’의 한 생애였다.

화가, 서울대 명예교수, 가천대 석좌교수

■ 병든 그를 극진히 돌봤던 간호사 수녀가 된 그녀에게 지어준 교회

- 마티스와 로자리오예배당


72세가 되던 1941년 마티스는 요양차 산기슭에 자리한 남부 중세 도시 방스로 작업실을 옮기는데 당시 21세의 간호사 모니크 부르주아를 만나 극진한 간호를 받게 된다. 그러나 2차 대전으로 서로 헤어지게 되고 다시 만났을 때 그녀는 수녀 ‘자크마리’가 돼 있었다.

훗날 사람들은 이 두 사람의 관계가 사랑이었느냐 아니었느냐를 놓고 의견이 분분했다. 하지만 사랑의 감정이 있었다 하더라도 엷게 스친 정도였을 것이고 그것도 그녀가 수녀가 된 뒤로는 영적(靈的)인 사랑에 가까웠을 것으로 보인다. 어쨌거나 마티스는 헌신적으로 병든 자신을 간호했던 그녀를 위해 3년에 걸쳐 자비로 예배당을 지어줬고 마티스의 벽화와 스테인드글라스가 남아 있는 그 로자리오 예배당(사진)은 또 하나의 작은 마티스 미술관이 돼 있다. 두 사람 사이의 사랑과 이별을 그린 영화로 ‘마스터피스’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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