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미술관 박물관 산책

[스크랩] 18세기 흙인 노예 역사/달콤함이 만든 잔혹한 거래, 영국 노예무역

작성자카페지기|작성시간22.04.13|조회수8 목록 댓글 0

 

 

 

 

 

 18세기 흙인 노예 역사/달콤함이 만든 잔혹한 거래, 영국 노예무역

 

달콤함이 만든 잔혹한 거래, 영국 노예무역

 

18세기, 대서양을 가로지르는노예무역을 주도한 영국!

영국은 왜! 흑인 노예들을 상품처럼 바다 건너 대륙으로 팔아넘긴 걸까?

그 잔혹한 욕망의 시작은 바로 너무 달콤해서 끊을 수 없는 설탕 때문이었다?!

 

설탕이 만든 인간 사냥 레게와 태양의 나라 자메이카 영국 식민지이자 카리브해

최대 사탕수수 재배지 유럽이 설탕에 열광하게 된 이유는?

왕실도 구하기 어려운 화이트 골드, 설탕

영국 왕실, 귀족층의 부를 뽐내는 대표적인 물품은 설탕 조각상!

노예무역의 최고 빌런 국가 영국, ​그 노예무역을 주도했던 국가 영국,


아주 오래전 신대륙이 발견되면서 아메리카는 유럽인들에게 기름진 풍요를 약속하는 땅이었다.

그들은 아메리카 대륙을 식민지로 만들어 금과 은을 캐내었고 수많은 담뱃잎을 땅에서 얻어냈으며,

사탕수수를 심어 유럽인들이 그토록 열광했던 설탕을 만들어냈다.

위와 같은 일들이 처음에는 아메리카 원주민들의 강제 노동으로 이루어졌다.

그러나 전염병으로 원주민들이 사라지자 그 자리를 채울 인력이 필요하게 되었다.

이에 유럽인들은 아프리카에서 사람들을 납치해 아메리카로 보내어 농장의 노예로 만들겠다는 계획을 세운다.

일명 노예무역이 시작된 것이다.

 


아프리카로 진출하다

아프리카를 향한 유럽인들의 뚜렷한 목적의식은 성공적으로 진행되었다.

유럽인들의 배가 아프리카 서쪽 해변에 닻을 내리면 상대적으로 불충분한 무기를 가진 아프리카인들은

그들에게 복종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유럽인들의 거침없는 ‘노예사냥’이 시작되면

정박한 배에 납치된 아프리카 사람들이 하나 둘씩 태워졌다.

불행하게도 아프리카의 여러 부족들은 자기 자신이 노예로 끌려가지 않기 위해 서로가 서로를

붙잡아다가 유럽인들에게 바쳤다.

그렇게 유럽인들은 그들의 배에 총이나 보석 같은 물건을 실어다가 아프리카로 와서 같은

아프리카인들로부터 붙잡힌 포로들과 바꾸었다. 그리고 그 포로들을 배에 태워 아메리카 대륙으로

건너가 노예로 판 뒤 설탕 같은 자원을 챙겨 유럽으로 돌아갔다.

이것이 바로 인류 역사상 최악의 인신매매 중 하나로 기억되고 있는 ‘삼각 무역’이다.

이는 유럽-아프리카-아메리카라는 세 개의 대륙을 빙빙 왕래했던 유럽인들이 황홀한

이윤을 맛볼 수 있었던 찬란한 시기였다. 때문에 셀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의 삶이 ‘물건’으로 맞바꾸어졌다.

이렇게 300년이 동안 지속된 노예무역을 통해 약 1500만명에서 최대 4000만명에 달하는

아프리카 사람들이 그들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대서양을 건너 아메리카 대륙이나 서인도제도의 노예로 팔려 나갔다.

영국 '브룩스 (Brookes) ' 노예선의 설계도 (1788년)

아프리카 노예들이 탔던 노예선, 일어날 수도 앉을 수도 돌아 누울 수도 없던 배.

 

노예선, 생명의 존엄이 사라진 곳

노예제도가 얼마나 이루 말할 수 없는 끔찍한 역사였는지를 돌아볼 때 그 중심에는 ‘노예선’이 있다.

노예선이란 아프리카에서 잡아들인 사람을 태워 나르던 무역선이다.

이는 노예제도의 극단적인 잔인함과 졸렬한 인간 본성이 무엇인지를 그대로 보여주는 상징성을 지닌다.

“할 수 있는 한 최대한 많이 배에 태울 것!” 잡아들인 노예가 많을수록 더 큰 대가를 얻을 수 있다는

단순 명확한 경제관념은 그들을 실어 나르던 배 안에도 그대로 적용되었다.

이윤의 최대화를 위해 배에는 언제나 선박이 수용할 수 있는 인원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태워졌고

그들의 손과 발에는 쇠사슬이 채워졌다.

 


그렇게 배에 태워진 사람들은 배의 공간을 절약하기 위해 갑판 아래 바닥에 일렬로 누워서 생활해야 했다.

때문에 한 사람이 누릴 수 있는 공간의 너비는 몸만 간신히 뒤척일 정도로 그 폭이 50센티미터가 채 되지 않았다.

심한 경우에는 사람들이 차곡차곡 위아래로 포개어져 탑을 쌓듯 누워야 했다.

때문에 이동이 자유롭지 않아 누운 상태로 용변을 봐야 했고 배설물은 그대로 다른 사람의 몸을 향해 떨어졌다.

끊임없이 흔들리는 배는 언제나 멀미와 구토를 유발했고 열악한 위생 시설은 배설물 처리를 곤란하게 만들었다.

때문에 그들은 갑판 아래에서 지내면서 산소 부족뿐만 아니라 끊임없는 악취에 시달려야 했다.

 


또한 배에는 언제나 노예들이 가득 태워졌기 때문에 그만큼 물과 식량이 부족했다.

식사는 하루 한 끼에서 두 끼 정도 옥수수를 쑨 죽과 같은 음식이 주어졌고 이마저도

상태가 매우 부실해서 영양실조를 불러왔다. 물 부족은 탈수증을 유발했고 밀폐된 공간은 전염병을 불러왔다.

질식이나 병으로 죽은 사람은 다음날 바다에 던져졌는데 이로 인해 노예선이 지나가는 항로에는

상어들이 항상 모여들었다. 노예선은 말 그대로 바다 한가운데 놓여있는 죽음의 장소였다.

이러한 상황을 견디기 힘든 나머지 목숨을 끊기 위해 음식을 거부하는 사람들은 도구를 통해 강제로

입이 벌려져 음식을 먹어야 했다. 반란을 일으키는 사람은 철저하게 고문당했으며

그들의 손과 발이 잘려나갔다. 이러한 방식은 이를 지켜보는 다른 노예들에게 극도의 두려움을 주었기 때문에

그들의 반항을 잠재우는 수단이 되곤 했다.

아프리카에서 아메리카까지 도착하려면 기본 한 달부터 수개월이 걸렸다.

이 기간 동안 위와 같은 반복적인 상황으로 인해 수많은 사람들이 배에서 죽음을 당했다.

책 ≪노예에 관한 논문≫을 쓴 알론소 드 산도발(Alonso de Sandoval) (1577-1652)은

그 당시 일어난 노예선의 가혹한 실상을 연구했던 사람이다. 노예들과 직접 나눈 이야기를 바탕으로 한

그의 연구는 노예선에서 이루어진 잔인한 학대를 이해하는데 중요한 실마리가 되었다.

반항과 잘못을 발견 즉시 손가락 끔찍한 고문기

 

그림으로 만나는 고통스러운 역사

 

‘종(Zong)호 학살’이라 부르는 사건은 우리에게 ‘인간이란 어떤 존재인가’라는 물음을 안겨 준다.

1781년 9월 영국의 노예선 종(Zong)호는 아프리카에서 노예 470여명을 배에 태워 카리브해의 자메이카 섬으로 향한다.

보통의 노예선들이 그러하듯 종호의 선장 콜링우드 역시 정원이 훨씬 넘는 인원을 배에 태웠다.

그런데 항해 도중 배에 질병이 발생하며 수십 명의 노예가 죽고 수많은 인원이 영양실조와 병에 걸리게 된다.

이에 선장과 선원들은 3일 동안 133명의 병든 노예들을 산 채로 배 밖으로 던진다.

기막힐 정도로 참담하기 그지없는 이 사건은 다름 아닌 보험금 수령을 노린 선택으로 알려져 있다.

이는 노예가 배에서 죽으면 보험금을 받을 수 없지만 노예가 바다에 빠져 사라질 경우에는

‘재산 손실’로 인한 배상금을 탄다는 계약 조건 때문이었다. 이는 일종의 화물 보험과 거의 다름없었다.

이에 사람이 아닌 ‘화물’로 취급되었던 노예들은 손발이 묶인 채 바다에 떠밀려져 죽음을 맞이했다.

 


그 후 배가 자메이카의 블랙 리버 항구에 도착하자 선장은 보험 회사에 보험금을 청구했고 이 과정에서

선장과 선원들이 노예들을 바다에 버린 증거들이 드러나게 된다. 이에 한 때 노예였지만 자유인이 된

영국의 노예제도 반대 운동가 우다 에키 아노는 노예제 폐지론자인 영국인 그랜빌 샤프에게 이러한

학살 소식을 전한다. 이에 그랜빌 샤프는 종 호 선원들을 살인 혐의로 고발하지만 결국 법원은

선원들의 행위를 살인죄로 인정하지 않는다. 때문에 초기에 종 호 학살 사건은 세상에 잘 알려지지 않았고

그 영향력이 제한적이었다. 그러나 그랜빌은 이 사건을 세상에 알리기 위해 분투했고 결국

이 일은 18세기 후반 노예제 폐지의 대중 운동을 자극하는 중요한 상징이 되었다. 그리고 지금으로부터

13년 전인 2007년, 자메이카의 블랙 리버 항구에는 종 호에서 살해된 사람들을 위한 기념비가 설치되었다.

이 일이 있은 후 60여 년이 지나고 1840년 영국 화가 윌리엄 터너는 당시의 상황을 그려낸 작품 ‘노예선’을

세상에 내놓는다. 그림에는 폭풍우 치는 바다에 산 채로 던져진 노예들(그림 오른쪽 아래)과 그들을 버리고

저만치 멀어지는 노예선(왼쪽 위) 그리고 그 누구도 이들을 구하러 오지 않을 무심한 망망대해가 오롯이 담겨있다.

강렬한 색채의 대비를 통해 주체할 수 없는 혼란과 절망적인 무력감을 그대로 드러내는 이 작품은 그림이라는

매개물을 통해 노예제가 보여주는 물질만능주의의 그 끝이 어떤 모습인지를 고발하고 있다.

영국의 노예선 리커버리(Recovery)호의 선장 존 킴버는 1791년 아프리카에서 300여명의 노예들을 싣고 바다를 건넌다.

선장은 노예가 죽을수록 그만큼 손해가 크기 때문에 가능한 많은 사람을 산 채로 옮기는 것을 원했다.

하지만 노예들이 생활하는 공간에는 언제나 구토와 배설물이 끊이질 않았고 이로 인해

노예들의 건강상태는 매우 좋지 않았다. 그래서 선장은 노예들은 갑판 위로 나오게 해서 바람을 쐬게 했다.

이때 그는 질병을 막는 방법의 일환으로 그들에게 옷을 벗고 춤을 추라고 명령한다.

 


이에 어린 여자 노예 두 명이 이를 거부하자 선장은 그들의 발목을 줄로 묶어 거꾸로 매달아

놓은 뒤 사정없이 채찍질을 했다. 결국 온몸에 멍이 들고 살가죽이 부르튼 채 피범벅이 된

두 명의 여성은 배에서 숨을 거두게 된다. 이때 배에 탔던 외과 의사 토마스 다울링은

영국 노예제 폐지론자 윌버포스에게 이 사실을 이야기한다.

윌버포스는 이를 하원에서 연설하며 선장을 살인 혐의로 고발하지만

결국 희생자들은 학대가 아닌 질병으로 사망한 것이라며 선장의 무죄판결이 이루어진다.

이 재판은 언론에서 큰 주목을 받게 된다. 때문에 이 사건은 노예 선원들이 노예를 살해하면

죄를 물을 수 있다는 것을 알려준 대표적인 사례가 된다. 사회와 정치 풍자 미술가인 아이작 크뤽생크가 그린 위 그림은

채찍을 들고 있는 선장과 거꾸로 매달려 있는 15세 소녀의 모습을 명확하게 보여준다.

보는 이에게 경악과 침묵을 안겨주는 이 그림은 당시 소녀가 느꼈을 이루 말할 수 없는

수치심과 상상할 수 없는 고통을 여지없이 보여주고 있다. 1792년 영국 런던에서 출판된 이 판화는

노예제 폐지를 위한 대중 운동의 핵심적인 이미지가 된다.

설탕과 맞바꿨던 흑인 노예설탕의 달콤함 뒤에 숨겨진 검은 비극

​설탕을 얻기 위한 잔혹한 인간 샤냥

농장의 어린 흑인 노예가 아파서 일을 할 수 없다고 하자.

​감독관이 솥안에 넣고 벌을 준 사건

닥치는대로 잡아들인 인간 사냥 상품가치가 없는 어린아이는학살.

이렇게 약 300여 년간 지속된 노예무역에 의해 약 1500만 명에서 4000만 명에 달하는

아프라카 흑인 들이 아메리카 대륙으로 팔려나가고 말았죠.

그런 모진 시간을 버텨낸 노예들은 브라질을 비롯한 중남미, 서인도 제도 등에 도착한 뒤로는

갑판위에 진열되어 마치 경매장처럼 구매자와 배의 선장 간의 가격 흥정이 벌어지며

그렇게 낙찰받은 노예들은 주인들의 재산이 되어 가슴이나 어깨, 등 쪽에 주인의 이니셜을 낙인.

밤낮없이 하루 17시간 이상 격한 노동에 시달리면서 작은 소리에도 여지없이 채칙이 그들에 향합니다.

게으름을 피우거나 농땡이. 피곤한 기색. 1일 할당량을 맞추지 못한 것 자체를 상상할 수 없지요.

 

오죽하면 설탕에 "악마의 창조물" 이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였으니까요.

그렇게 그들은 삶의 자유를 잃은 채  한 사람의 재산이 되어 죽을 때까지 노동착취를  당해야 했죠,

 

 

그러다 미국 남북전쟁으로 1863년 1월 1일에 에이브러함 링컨은 노예 해방을 선포되고

북부가 승리하면서 1865년에 비로소 노예들이 해방되었습니다.

노예해방을 했던 링컨보다 앞서 노예해방에 앞장섰던 윌리엄 윌버포스가 그 인물이다.

금수저에 에스컬레이터를 탔던 그였지만 노예무역 폐지를 위해 자신의 일생을 보낸

윌리엄 윌버포스의 노력으로 1833년 7월 26일 영국 하원에서 노예제 폐지 법안이 통과되어

영국에서 노예제도는 폐지되었다.

 

하지만 해방이 되고 나서도 분리된 평등이란 이름으로 흑인과 백인 간의 불평등은 지속되었고

현재까지도 많은 수의 흑인들은 차별받고 있지요.

요즘엔 흑인들뿐만 아니라 우리 아시아인들까지 차별을 받고 있는 실정.

어떤 인종이나 어떤 나라나 기득권층의 횡포는 다 똑같아 보이네요.

 

 

 

 

어메이징 그레이스 파크라이5 ost 한글자막 amazing grace

 

 

다음검색
스크랩 원문 : 체칠리아의 음악 카페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 북마크
  • 공유하기
  • 신고하기

댓글

댓글 리스트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