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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신윤복은 무엇을 그린 것인가

작성자카페지기|작성시간23.06.20|조회수24 목록 댓글 0

신윤복 ‘단오풍정’


신윤복은 무엇을 그린 것인가?

위 그림의 제목이나 출처는 몰라도 누구나 한 번 이상은 보았을 것이다. 김홍도(金弘道), 김득신(金得臣)과 함께 조선 3대 풍속화가로 위명이 쟁쟁한 혜원 신윤복(申潤福)이 남긴 불멸의 역작 󰡔혜원전신첩(蕙圓傳神帖)󰡕 가운데 「단오풍정(端午風情)」이다. 신윤복이 단옷날의 개울 풍경을 절묘하게 캐치하여 그의 대명사로까지 불리는 걸작인데, 특히 남자들에게 큰 흥미를 유발시키는 테마다. 「단오풍정」은 신윤복의 그림에서도 특히 쇼킹하다. 화면의 중앙에 배치되어 프리마돈나의 배역이 주어진 아름다운 여인의 노랗고 붉은 강렬한 색감의 의상도 유례없이 아찔하지만, 좌하(左下)에 배치된 네 명의 젊은 여인들은 에로티시즘의 극한이다. 지금 보아도 파격적인데 조선시대에는 어땠을 것인가? 남들의 안목에 개의치 않고 거침없이 자신의 세계를 표현하는 신윤복의 작가정신에 경의를 표하고 싶다. 흥분을 끌어내리고 가만히 살펴보면 그림에 나타난 반라(半裸)의 여인들은 기생이 분명하다. 지금의 젊은 여자들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는 외모와 'S라인’도 그렇지만, 목욕을 하면서도 전혀 부끄러움을 타지 않고 오히려 담담한 모습을 보이는 것에 더욱 확신이 선다. 어찌 보면 그녀들은 담담한 차원을 넘어 직업적인 나른함마저 풍긴다. 도발적이고 퇴폐적이기는 하지만 전 재산이라 할 수 있는 몸을 씻는 기생들을 보노라니 말을 알아듣는 꽃으로 표현되는 해어화(解語花)가 조금도 어색하지 않다. 저런 절색들이 있는 기방(妓房)이라면 당장이라도 달려가도 싶은 생각이 굴뚝같은데 시대가 따라주지 않으니 그저 탄식할 따름이다.
그런데 역사를 쓰는 작가의 시각으로 검색하면 이 그림은 상당한 문제가 있다. 좌상(左上)에 배치된 두 명의 중이 바로 그것이다. 전문가들은 아주 흐뭇한 표정으로 목욕하는 기생들을 훔쳐보는 중들을 가지고 ‘정적(靜的)인 구도에 긴장감을 불어넣는 장치’등으로 평가하는데 내가 보기에는 영 아니다. 아주 좋은 기회를 맞이하여 부럽게까지 만드는 남정네들이 왜 하필이면 중들이라는 말인가? 에로틱과 중은 그리 부합되지 않는다. 관찰자들이 순박한 나무꾼 총각들이라면 아주 제격일 것 같다. 뭔가 의식을 이입하고 싶었다면 선비들을 등장시켜 남들 앞에서만 점잖 빼는 이중적 위선을 풍자하는 것이 사리에 맞아 떨어지지 않겠는가. 이도저도 아니라면 임꺽정 같은 산적들을 출연시켜 철퇴처럼 불쑥 솟구친 사타구니를 움켜잡고 침을 질질 흘리게 하든가, 그것이 가장 극적으로 긴장감을 살릴 수 있는 장치일 것이다.
신윤복은 다분히 의도적이다. 이 그림을 보노라면 불타(佛陀)의 뜻을 따르기 위해 속세를 떠나 용맹정진 하는 구도자들은 조금도 연상되지 않는다. 염불보다는 잿밥에 눈이 벌건 사이비 중들만 있을 뿐이다. 저런 중들이 무슨 짓을 못하겠는가, 호젓한 산속에서 여인을 만나면 발정 난 수컷을 변신하여 덮치는 것은 예사일 것이며 불공을 드리러 온 아낙네들도 무사하지 못할 것이다. 실제로 조선시대의 승려들은 매우 부정적인 모습이다. 아이를 가지지 못하는 여인들이 절에 가서 불공을 드려 임신하게 되는 것은 중들이 수고했기 때문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또한 대표적인 풍자극인 봉산탈춤과 하회별신굿 등에서도 중은 아주 음탕하게 묘사된다. 또한 조선시대에는 중들에게 사대문 출입을 금하였으며 중이 과부가 사는 집에 드나들었다가는 엄벌에 처하였다. 그런 것으로 보았을 때 신윤복의 그림에 중이 나타나는 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것인데 왜 문제가 있다고 걸고넘어지느냐는 의문이 제기될 수 있다.

내가 문제를 제기한 기본은 중들이 거기까지 내려오는 자체가 어렵기 때문이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여인들이 목욕하는 개울은 여염에서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개울이었을 것이다. 지금도 인적이 드문 산속에서 여자들이 홀딱 벗고 목욕을 하다가는 큰 사고를 당하기 쉬운데 산적과 무뢰배들이 들끓는 조선시대에는 오죽하였겠는가, 유감동의 사례를 생각하면 금방 답이 나올 것이다. 그러니까 여염과 근접한 곳에서 목욕했을 것인데, 신윤복이 작품 활동에 매진할 시절에는 중들이 민가에 가까이 접근하기 어려웠다.
조선의 기본정책이 사대교린(事大交隣)과 함께 숭유억불(崇儒抑佛)이라는 것은 삼척동자도 다 알 것이다. 사대교린에서 사대(事大)는 정권의 안전을 도모하기 위해 스스로 중국의 영향권으로 들어간 것이라면 억불은 백성의 관심을 호도하기 위한 이벤트의 성격이 강했다. 조선의 생성단계에서는 태조 이성계가 무학대사(無學大師)의 가르침을 받는 등 적지 않은 영향을 주었지만 정도전이 가차 없이 불교를 비판하고 억압했다. 그것은 정도전의 정적(政敵)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빌미는 불교가 제공했다. 불교는 고려를 구성하는 필수성분이었다. 고려는 불교를 숭상하여 왕자들도 출가했을 정도였다. 몽골과의 항쟁에서는 호국불교(護國佛敎)의 위상을 떨쳤고 승려로만 구성된 항마군(降魔軍)이 창설되어 영토를 수호하기 위한 전쟁에 참가할 정도였다. 그러나 말기로 가면서 불교는 극도로 타락하고 부패했다. 국가가 지급한 사전(寺田)이 방대했지만 백성들의 전답을 예사로 빼앗았으며 음란한 짓을 일삼아 지탄을 당하기도 했다. 세금을 내기는커녕 오히려 국가의 지원을 받으면서 토지를 늘려갔기 때문에 재정에 큰 부담을 주었다. 게다가 승려들은 병역과 세금을 면제받았기 때문에 허위로 승적(僧籍)을 발부받는 사례가 빈발하였다. 그에 따라 백성들의 원성이 높았으며 신진 사대부들도 강도 높게 비판하였다. 그런 불교가 새로운 국가가 들어선 뒤에 철퇴를 맞는 것은 당연하다 하겠다.
이념으로 보아서도 불교는 성리학과 양립할 수 없었다. 유교적 통치이념으로 무장된 관료들의 시각에서 사회에 전혀 이바지하지 않으면서 부처에게 충성을 다하고 무가치한 것에 아끼지 않고 돈을 쓰는 불교는 당연히 제거되어야 했다. 게다가 갖은 부패가 만연하였으니 사정대상 1호로 지목된 것은 사필귀정(事必歸正)이라 하겠다. 승과(僧科)를 폐지하였으며 토지개혁에 사찰들도 포함시켜 방대한 사전을 압수하고 노비를 떼어버리는 일련의 조치를 취하자 불교는 빙산과 충돌한 타이타닉처럼 급격히 침몰했다.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승려들에게 도성의 출입을 금하고 백성들에게도 사찰의 출입과 시주를 제한하여 생계를 원천적으로 봉쇄해버렸다. 도성과 인근의 유서 깊은 사찰들은 견디기 어려운 모독과 약탈을 감당하지 못하고 문을 닫기에 이르렀다. 고려 때의 거찰(巨刹)로 이성계의 왕사(王師)로 예우 받은 무학대사가 정진하고 열반했던 회암사(檜巖寺)마저 소실(燒失)되고 말았으니 다른 절은 오죽했겠는가,
그것만 해도 견디기 어려웠는데 갖은 노역과 부역이 가해졌다. 국책으로 시행하는 공사는 물론, 지방에서도 성을 쌓거나 다리를 놓는 등의 힘든 공사가 발생하면 가장 먼저 중들을 동원시켰다. 실록에 중들을 동원한 기록이 무수한 바, 잡곡과 나물을 섞어 쑨 죽도 먹기 어려워 가뜩이나 체력이 저하된 중들이 갖은 노역에 동원되었으니 어떻게 되었겠는가, 최소한의 노동력마저 빼앗긴 절들은 몰락하기 일쑤였다. 거기에 나라에 바칠 종이도 만들어야 했고 특산물도 바쳐야 했다. 게다가 민간에서도 절을 그냥두지 않았다. 지방의 세력 있는 가문들은 주변의 사찰들에게 강제로 노역을 떠맡겼다. 하다못해 양반들이 인근의 산에 유람을 와도 가마를 메고 산과 계곡을 오르내려야 했으니 그 고충은 말로 형언할 수 없었다. 이래가지고서야 무슨 용맹정진의 도량이 되겠는가, 속세의 권력과 분리되기 위해서는 더욱 높은 곳으로 올라갈 수밖에 없었다.
다시 「단오풍정」으로 돌아가자.
「임금이 말하기를, “배불리 먹이고 옷을 주어 역사에 나오게 권하여 원망이 없게 하면 옳을 것이다.” 하니, 황희가 대답하기를, “6백여 명의 중에게 옷을 주기는 어려우나 배부르게 먹일 수는 있습니다.” 하였다.」
위의 기록은 태종이 광흥창 등의 공사에 중들을 동원했을 때의 일부분이다. 국력이 강할 무렵의 국책 공사인데도 의복을 지급하지 않았다. 태종이 옷과 음식을 주라고 하였는데 실무자인 황희는 “옷을 주기는 어렵다”고 말하고 있다. 분위기를 보면 충분히 의복을 지급할 여력이 되는 것 같다. 그렇기 때문에 태종도 그렇게 말한 것인데 황희가 거부한 이유는 그리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황희는 중들이 깔끔한 모습으로 일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사회적으로 지탄받는 중들은 남루하고 헤어진 차림을 하고 다녀야 격에 맞았다. 특히 많은 사람이 보는 공사에서 비루한 차림의 중들이 일하게 하면 충분한 전시효과를 거둘 수 있었을 것이다. 중은 천하고 비루하다는 인식을 심어줄 기회라고 생각하고 있는 황희가 그들에게 의복을 주라는 태종의 명을 따를 이유가 있겠는가,
조금만 생각해도 겨우겨우 연명하는 중들이 차림이 깨끗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들의 차림이 정갈한데다 표정에도 아무런 걱정근심이 없으니 그 또한 이해하기 어려운 노릇이다. 하물며 불교가 거의 고사(枯死)할 무렵인 시대에 그런 모습으로 그려지는 것은 오류의 범주에 포함하기 어려울 것 같다.
「단오풍정」에서 중들이 음탕하고 기생충 같을 것이라는 사회적 편견이 여과 없이 드러난다. 사실과 전혀 다르게 왜곡하여 일반화시키는 「단오풍정」 같은 작품들을 볼 때마다 한숨을 쉬게 되지만 그렇다고 해서 신윤복을 비판할 생각은 없다. 그는 그림을 도구로 삼아 복선을 깔아두거나 뭔가를 주장하는 사상가가 아니라 그림 자체를 사랑하는 화가가 아닌가, 창작의 자유라는 프리즘으로 그의 그림을 분석하면 그만일 것이다. 역설적으로 생각하면 한 번 더 생각하고 접근할 수 있으니 그 점은 매우 감사하게 생각한다.
하기야 지금 세상이 그때보다 나을 것도 없다. 시대는 언제나 희생양을 요구했다. 최근의 희생양은 호남(湖南)이다. 살갑고 정겨운 호남사람들이 어느 날 갑자기 상종하지 못할 자들로 전락하고 말았다. 도둑놈도 전라도 사기꾼도 전라도라는 인식이 팽배하였으며 7,80년대의 드라마에서는 못된 역할은 거의 전라도 사투리를 써야만 했다. 그것도 모자라 전라도를 ‘빨갱이 소굴’로까지 매도하였으니 조선시대와 무엇이 다르겠는가, 혜원의 그림은 표현기법과 수준의 모든 면에서 배울 가치가 충분하다.
추신
조선시대에 불교가 대우 받은 적이 없지는 않았다. 임진왜란 당시에 승병(僧兵)이 궐기하여 큰 공을 세웠을 때가 바로 그때인데, 워낙 다급했기 때문에 억지춘양으로 그렇게 된 것이었다. 실제로 전쟁이 끝난 다음 다시 예전의 상태로 돌아가 버렸다. 아쉬울 때만 대우하는 인간의 습성이 그대로 반영된 것인데, 그들이 추앙한 성리학의 성현들은 은혜를 그런 식을 갚으라고 가르치지는 않았을 것이다. 배운 자들이 더하다는 생각을 금할 길이 없다.
추신 2
고려 말에 불교가 타락하여 지탄당하고 그로 인해 개혁대상이 된 것은 사실이지만 불교 자체를 일반화하여 매도해서는 안 될 것이다. 문제는 종교와 신앙을 이용하여 사리사욕을 채우려는 인간에게 있지 않은가, 당시의 불교가 내포했던 문제점들은 지금도 곳곳에 산재하고 있다. 사방이 온통 십자가의 군락인데다 재벌을 방불하게 하는 거대한 교회가 곳곳에 들어서 있지 않은가, 세금도 내지 않는 교회들이 소유한 부동산 등의 재산에 대한 시비가 끊이지 않지만 상세한 내막은 전혀 외부에 알려지지 않는다. 경건해야할 종교인들이 앞장서서 벌이는 추태는 고려 말에도 흔했을 것이다. 정신적인 안정과 치유에 신명을 다해야 할 종교단체들이 돈과 결부되면 심각한 부작용이 발생하는 법인데, 반드시 어떤 특정종교에 해당하는 사안이 아닌 것이다.
그리고 최근 발굴되고 있는 회암사의 터에서 목이 잘리고 불탄 불상들이 무더기로 발굴되었다고 한다. 불상을 참수하고 화형에 처하는 자들과 단군상의 목을 자르는 자들이 무엇이 다르겠는가, 그런 면에서는 지금이 예전만 못하다는 생각이 강하게 든다.
(*이 기사는 네티즌, 전문가, 기자가 참여한 <블로그> 기사로 한겨레의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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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원문 : 차 한잔의 여유(餘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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