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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이탈리아 화가 '모딜리아니(1884 ~ 1920)'의 파란만장한 생애 및 작품 세계

작성자카페지기|작성시간23.07.22|조회수34 목록 댓글 2

 

역사상 가장 잘생긴
화가 1위로 선정된

아마데오 모딜리아니

아메데오 클레멘테 모딜리아니

(이탈리아어: Amedeo Clemente Modigliani, 1884년 7월 12일~1920년 1월 24일)는
20세기 초 활동한 이탈리아의 화가이다.
생전에 인정받지 못하고 비참하게 살다가 갔고,
사후에 인정받은 화가 중 한 사람으로 자주 언급되며
그가 죽고 나서 이틀 뒤 자살한 아내도 비극적인 연인으로 자주 언급된다.

1884년 7월 21일 이탈리아 토스카나 지방의 항구도시 리보르노에서 유대인 상인의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광산 사업가로 큰 번영을 누려 어릴적에 모딜리아니의 삶은 꽤 부유했었다.
그러나, 10대 초반에 아버지 사업이 쫄딱 망해서 아버지가 그만 뇌졸중으로 쓰러져 죽으면서 가난이 찾아온다.

그의 어머니 에우제니아는 철학자 바뤼흐 스피노자의 혈통을 이어받은 마르세유의 명문가 출신으로

높은 지성과 교양을 갖추고 있었다.
부친의 사업이 어려워지자 직접 단눈치오의 시를 번역하거나 서평을 써 생활을 유지할 정도였다.

모딜리아니가 태어났을 당시 아버지의 사업 실패로 집안은 어려웠지만
모친 에우제니아는 어린 시절부터 그림에 대한 재능을 보인 아들을

굴리엘모 미켈리의 아틀리에에 데리고 가기도 했다.

 

그러나 모딜리아니는 태어날때부터 몸이 약해 잔병에 시달려야 했다.
즉, 늑막염, 폐결핵, 폐렴 등 병치레가 잦아 평생을 고통받았다.
아주 어릴적에 의사들이 자칫하면 어린 나이로 죽을 수 있다는 판단을 내렸는데,
그땐 아버지가 부유해서 온갖 고급병원에서 진료를 받아 겨우 목숨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집안이 가난해지면서 10대때부터 역시 온갖 병에 시달려야 했다.
어린 모딜리아니와 형제 남매들은 외할아버지인 이사코 가르신이 돌봤는데,
이사코는 예술에 흥미를 가져서 어린 모딜리아니가 그림을 배우는 걸 반대하지 않았다.
그러나, 모딜리아니는 13살에 장티푸스로 죽을 고비를 겨우 넘겨야 했다.
14세에 리보르노 미술학교에 입학해 풍경화가 미켈리에게 데셍과 회화를 배웠지만

병으로 학교를 그만두었고,
17세에는 결핵에 걸려 이탈리아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며 요양을 해야 했다.

▲ 모딜리아니와 유모

 

19세때,
피렌체의 누드화 학교에
등록하여 누드화 공부를 했다.

 

▲ '슬픈 누드' 1908년

그가 누드화 모델을 부탁 했을 때
거절하는 여자가
거의 없었다고 한다.

 

아마데오 모딜리아니

베네치아·피렌체 미술 학교에서 공부한 모딜리아니는
1906년 파리로 나가 몽마르트르에 아틀리에를 빌렸고 세잔의 영향을 받았다.
독립 미술파에 속하며, 파리 화단의 특이한 화가로서 인정되었다.
이때 당시
마약과 술, 담배에 찌든 생활을 하고
외설스런 누드화를 다수 그리며
방탕한 생활을 하며
진정한 보헤미안의 삶을
살게 되었다.

당시에 피카소와
르누아르, 모네 등
유명한 화가들 틈에서
모딜리아니는 화가로 명성을
얻지는 못하고 있었다.

게다가, 어느날

처음으로
어느 남작 부인에게
유료 초상화 제작 주문을 받아,
밑의 작품을 열심히 완성했다.

 

▲ '노란 재킷을 입은 여인' 1909년

 

그런데,
그 남작부인이
내 빨간 재킷을
노란재킷으로 바꾸다니,
초상화 비용을
지불 할 수 없어요.
라고 했다고 한다.

화가로써 성공을 하지 못해서였는지,
이유는 알 수 없지만,
갑자기
모딜리아니는 유화를 그리지 않고,
조각에 열의를 보여서
브랑쿠시, 콕토 등과도 사귀었다.

그의 조각 작품 보실까요?

 

▼ 여신의 두상

빈털털이로 요절한,,
불운한
모딜리아니는 절대 몰랐겠죠?
이 조각상이 훗날

650억원에 낙찰 되리란
사실을...

모딜리아니의 64㎝ 짜리 조각
'여신의 두상'이 출품되자마자,

20여명의 거물급 입찰자들이
서로 사겠다고 경쟁함.

최종 낙찰가는 무려 3850만유로.
세금과 각종 수수료 포함 4320만유로
(약 630억원)

(1914년, 제1차 세계대전)
전쟁이 일어나기 전까지
모딜리아니는 조각에 열중했다.

전쟁이 터지자,
모딜리아니는
당장 전선에 달려가려했지만,
건강상의 문제로 거부당하고
파리에 머무르게 되었다.

그러나 돌조각에서 나오는 먼지로 폐가 나빠지자

조각을 그만두고 그림만 그렸다.
이 시기에 유화를 다시 그리기 시작한다.

모딜리아니는
당시 리베라 디에고와
피카소 등 유명한 화가들과
교류했고
서로의 모델이 되어줬다.

▲ 모딜리아니, 피카소, 앙드레살몽(소설가)

 

훗날
앙드래살몽은
모딜리아니를 주인공으로
책을 내기도 했다.

밑의 그림은
모딜리아니가 그린 피카소

▲ '피카소의 초상화' 1915년

 

특히,
디에고 리베라의
초상화를 많이 그렸다.
(프리다 칼로의 남편)

디에고의 육중한 몸집과
불같은 성격을 그림에
투영시켰다.

▲ 디에고 초상화

 

1912년 파리 가을 미술전에 작품을 출품했지만 주목 받지 못했고
초상화 한 점 당 10프랑 밖에 받지 못했다.
그러나 미남으로 유명했던 모딜리아니에겐 모델을 자청하는 여성들이 많이 있었다.
30세에 몽파르나스로 거처를 옮겨

영국 시인 베아트릭스 헤이스팅스(1879–1943)와 사귀었고, 1916년까지 동거했다.

33세 되던 해인 1917년, 그의 전속화상이던 친구 즈보르프스키의 집에서 머물며 작품활동을 했다.
이 때, 몽파르나스의 카페에서 모딜리아니는 프랑스에서 활약한 우크라이나계 조각가 하나 오를로프의 소개로

14세 연하이자 미성년자인 19세의 화가 지망생 잔 에뷔테른(Jeanne Hébuterne,1898.4.6–1920.1.26)을 만났다.
잔은 모딜리아니와 같은 아틀리에를 쓰는 일본인 화가 후지타 쓰구하루의 모델이었다.
보수적인 부르주아 가정이었던 잔의 가족은
가난하고 병약하며 마약을 하는 유대인 모딜리아니와의 교제를 싫어했지만
두 사람은 동거에 들어갔다.

▲ 잔 에뷔테른

 

잔도 그림을 그리는
미술학도였음.
(집안도 부유한 로마 카톨릭집안)

▲ '죽음' 잔 에뷔테른 (종이에 수채)

▲ 잔이 그린 모딜리아니 1918년

▲ 잔 본인의 자화상

 

모딜리아니는
잔을 모델 삼아
그림을 많이 그렸다.
(무려 25개 이상..)

▲ '잔 에뷔테른-화가의 아내' 1918년

▲ '모자를 쓴 젊은 여인의 초상' 1917년

모딜리아니의 작품은
목과 얼굴이 긴 것 말고도
얼굴을 일부러 비대칭으로 표현,
또, 눈동자를 그리지 않거나
눈을 자세히 표현 안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어느날

잔느가 물었다.
왜 내 눈동자를
그리지 않아?

그러자, 그의 대답은,

내가 너의 모든 것을
알게되면
그때 눈동자를 그려줄께.

눈을 표현하기 싫어했던 모딜리아니는
얼굴의 길이와 목을
강조 했던 것일까?

그리고,

특이한점은
수많은 여인의
누드화를 그렸지만,
'잔'의 누드화는
그리지 않았다.

피카소와 어느날
전시회를 열었는데,
베일에 가려져있던
모딜리니아의 작품을 보고
쟌은 울음을 터트렸는데,


그 작품을 한 번 보실까요?

▲ '어깨를 드러낸 잔 에뷰테른 ' 1919년

▲ '잔 에뷔테른의 초상 ' 1919년

 

여러분은
잔이 울음을 터트린 이유를 알겠나요?

 

정답은,


눈동자가 있음.

 

 

잔은 이 그림을 보고
얼마나 기뻤을까?

이제 잔의 눈동자를
그릴 수 있는 모딜리아니가
되었는데,

모딜리아니(35)는 결핵으로
죽어가고 있었다.

 

같은 해 모딜리아니는 폴란드 화상 레오폴트 즈보로프스키의 주선으로
베르트 바이유 화랑에서 개인전을 열었지만
출품한 누드화가 외설적, 즉 미풍양속을 해친다는 이유로 경찰이 압수했고 전시기간도 단축되어
결국, 전시회는 실패로 돌아갔다.

그림은 싸구려로 팔리는 신세가 되었고
가난에 허덕이며 온갖 질병에 시달리던 모딜리아니는 술과 마약으로 버티는 신세가 되었고
당연히 건강은 더더욱 악화되었다.
1918년 건강이 악화되어 니스로 갔고 11월 29일 그곳에서 딸 잔이 태어났고
폴 기욤이 주최한 『젊은 작가전』에 파블로 피카소, 앙리 마티스와 함께 작품을 전시했다.
1919년 파리로 돌아왔고 잔이 두 번째 아이를 임신한다.
1919년 7월 7일, 잔과 공식적으로 결혼했지만 생활고로 인해 잔은 친정으로 가게 되었다.
잔의 부모는 두 사람이 만나지 못하도록 단단히 통제했다.
1920년 1월 22일 결핵성 수막염 및 알콜 및 마약 중독으로 인해 파리 자선병원에 입원했고
1월 24일 35세에 사망해 페르 라세즈 묘지에 안장되었다.

 

잔은 장례식에서 그야말로 울다 미칠 정도로 슬퍼했다.
잔이 얼마나 힘들어했는지는 그녀가 죽기 얼마 전에 다 그린 유작 [자살]에 나오는
그림 속 칼로 자살하는 여인이 그녀 자신을 가리킨다는 점에서 짐작할 수 있다.
그녀가 자살할까봐 오빠인 앙드레가 곁에서 지켜봤지만,
앙드레가 잠을 자던 1월 26일 새벽, 잠을 깬 잔은, 당시 임신 8개월째였던 뱃속에 든 둘째아이와 함께
4층 창문에서 뛰어내려 만 20세 나이로 남편의 뒤를 따라간다.

 

그로부터 10년 뒤

잔의 가족들은 잔을 모딜리아니 곁에 묻어주었다.

▲ 자살

▲ 페르 라세르 묘지

 

묘비에 적히길,
이제 영광을 차지하려고
한 순간
죽음이 그를 데리고 가다.

 

모딜리아니가 죽기 바로 직전에
자신의 초상화를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그렸다. 다음과 같이

자신이 죽을 것을 알았던 것 같다.

한번도 그리지 않았던
자화상을 그렸으니,,

표정은 온화해 보이고
오른손에는 빠렛트가 들려있다.

살아생전에,
반 고흐 만큼이나
인정받지 못하고

가난으로 고생했지만,
죽은 후에 작품이
100배 이상 뜀.

 

사후
살아 생전, 음식값으로 식당에 그림을 대신 줬다가
욕설과 함께 그림이 거리에 내던져지는 굴욕을 당했던 모딜리아니였다.
하지만 그가 죽고 아내도 비극적으로 죽은 뒤 15년도 안돼 엄청난 재평가로
그림값이 1,000배가 넘게 올랐기에 지인들이나 친척들은 무척 안타까워했다.
아내 잔의 부모는 "남편따라 자살하지 말고 그대로 둘째 아이 낳고 살았더라면..."이라고

두고두고 안타까워했다.

모딜리아니가 잔과의 사이에서 낳은 외동딸인
잔(어머니 잔 에뷔테른의 이름을 따서 붙였음) 모딜리아니(1918–1984)

(처음에는 지오바나 에뷔테른이라 불렸다.)는
아마데오 모딜리아니의 누나인 마르가리타가 양육했다.

밑의 사진은
모딜리아니 어머니와
딸 잔느

▲ 잔느 모딜리아니와 친할머니

 

화가가 되어 고생만 하다 죽은 남동생의 인생이 싫었던 마르가리타는

조카딸에게 부모에 대해 거의 언급하지 않았다.
아버지가 유대인이라서 이탈리아 파시스트들에게 시달림을 받던 잔은 프랑스로 피신하기도 했다.
나중에 부모에 대해 알게 된 잔은 미술사를 연구하는 학자가 되어서
아버지 모딜리아니에 대한 자료를 모아 평전 『모딜리아니:인간과 신화』(1959)을 펴냈다.

▲ Jeanne Modigliani

 

모딜리아니에게는 잔과 만나기 전에 사귄 여성들로부터
적어도 최소 3명의 사생아들이 있었다고 생각되며
그중 확실하게 그의 자식으로 추정되는 건

잔과 처음 만난 연도인 1917년에 그가 만나던 여자들 중 하나인
시몬 티루(Simone Thiroux)에게서 태어난 제라르 티루(Gérard Thiroux)라고 하는 아들이다.
이 아이는 2004년에 사망했다고 한다.

이후 미국 소더비 경매에서 앙리 마티스와 모네의 작품을 제치고
1916년작 소파에 앉은 누드라는 작품도 6900만 달러로 최고가로 팔렸고
2018년 경매에서도 1917년작 나부라는 작품도 1억 5천 720만 달러로
역대 최고가로 팔리면서 가치를 증명하였다.


화풍(작품세계)
모딜리아니는 폴 세잔와 앙리 드 툴루즈로트레크의 영향을 받았다.
그는 항상 인물만을 그렸는데 파리의 뒷거리에 사는 가난한 사람들 및 여성의 나체 등을 즐겨 그렸다.
그의 인물화는 가늘고 긴 목이나 달걀 모양의 얼굴을 가는 선으로 둘러 독특한 기품과 아름다움을 나타냈다.


그의 화풍은 1914년을 기준으로 전기와 후기로 나뉘는데,
초기의 작품은 다소 조화롭고 고전적인 느낌을 가진다면
후기의 작품들은 인물의 표현이 다소 비정상적이며 형태도 단순화되었다.
그 이유로는 그가 회화를 잠깐 접고 조각을 했을 때
고대 에투르스크 조각과 아프리카 원시조각의 형태를 접했고
거기에 흥미를 느껴 인물을 세밀하게 그리기보단 내면적인 특징을 그리는데 힘썼기 때문이다.

모딜리아니는 총 314점의 작품을 남겼는데
주요작품으로

《첼로 연주자 The Cellist》(1909),
《여인의 두상 Head of a Woman》(1911),
《섕 수틴의 초상 Portrait of Chaim Soutine》(1916),
《붉은 누드 Red Nude》(1917),
《잔 에뷔테른의 초상 Portrait of Jeanne Hébuterne》(1918)등이 있다.

 

그밖에,

모딜리아니의 생애는
영화, 연극, 소설로
자주 만들어지는 소재이다.

그의 일생을 다룬 전기 영화 [모딜리아니](Modigliani, 2004, 아래 포스터) 에서
배우 앤디 가르시아가 모딜리아니 역을 맡았다.

영화 007 스카이폴에 범죄집단이 그림을 불법거래하는 장면에서
모딜리아니의 [부채를 든 여인] 이 등장한다.

그것(영화)에 등장하는 스탠리가 무서워하는 그림이
모딜리아니의 화풍으로 그려진 피리부는 여인이다.

2011년 7월 3일 신비한 TV 서프라이즈에도 나왔다.

Al Bano and Romina Power - Liberta - Modigliani

[위키백과, 나무위키, 네이버 블로그 교차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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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댓글 리스트
  • 작성자눈길반짝 | 작성시간 23.07.22 오~모딜리아니 의일생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예술가들의 삶 참~가혹 하네요ㅠㅠ
    생명력 가득한 예술품으로 고통스러운
    재창조 늦게라도 인정받아서 좋으네요
  • 답댓글 작성자카페지기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23.07.23 예술작품을 보는것만으로도
    마음이 우아하고
    아름다움을 간진한 모습입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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