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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르고뉴 본5 - 시료원을 보고 와인박물관 지나 대성당에!

작성자가라치코|작성시간23.07.23|조회수99 목록 댓글 2

 

 

부르고뉴 본5 - 구시가지에 시료원을 보고 와인박물관을 지나 대성당에 가다!

 

 

5월 23일 리옹 에서 기차를 타고 북쪽으로 달려 오후 5시에 화이트 와인 의 산지인

부르고뉴의 본 Beaune (Chagny) 역에 도착해 호텔에 체크인을 하고는

4~5분을 걸어서 중세 시대의 성벽이 그대로 남아있는 동문 을 지나

구시가지 Old Town 골목길을 걸어서 병원인  시료원  Hotel Dieu  을 구경합니다.

 

 

1,443년 본의 대법관 니콜라 롤랭 부부가 가난한 사람을 위한 병원으로 지었다는 시료원

에 입장하니 약초를 끓여서 즙을 내어 약을 만드는 약항아리가 있는 약국에다가

좋은 침대가 양쪽으로 보이니 르네상스 시기인 15세기 에 이런 병원 시설을

갖춘게 놀라운데 재정 자립을 위해 포도원을 가꾸며 와인 을 직접 생산한다고 합니다?

 

 

시료원을 나와 골목길로 들어가 부르고뉴 와인 박물관 Musee du Vin Bourgogne 에 도착하니

시간이 늦어 문을 닫은지라 내일 아침에 오기로 하고 큰 길로 나가서 건물 너머로

교회의 종탑을 발견하고는 노트르담 교회 Collegiale Notre Dame 에 도착해 외관을

보고 닫힌 문을 미니 열리기로..... 안으로 들어가 잠시 휴식을 취하며 부르고뉴를 생각 합니다.

 

 

부르고뉴 Bourgogne 는 북쪽은 샹파뉴, 동쪽은 프랑슈콩테, 남쪽은 중앙산지, 서쪽은

셰르와 접하며 욘· 손에루아르· 코트도르· 니에브르의 4 데파르트망으로

이루어져 있으니 주민을 부르기뇽 이라고 부르는데 주도는 디종(Dijon) 으로

옛날에 부르고뉴왕국 이 있었으며 ‘부르고뉴 와인’이라는 백포도주의 산지 입니다.

 

 

부르고뉴 라는 이름은 5세기 중엽에 이 지방의 론강과 손강의 유역에 정착한 게르만족인

부르군트족 에서 유래하는데 7~ 9세기 부르군트 왕국 은 론강 및 손강 유역에서

프로방스에 이르는 넓은 판도를 차지하고 있었으나 9세기 분열에 즈음하여

북쪽 고지 부르군트 서부가 부르고뉴 공작령 이 되어 오늘날의 부르고뉴 가 되었습니다.

 

 

카페왕조에 속하였다가(938∼1032) 독립한 카페계 제1부르고뉴가 (家:1332∼1361) 지배를

받았으며 제2부르고뉴가 (1363~1477)는 1세기 동안에 필립 르 아르디, 장 상 푀르,

필립 르 봉, 샤를 르 테메라르등을 배출하면서 강대한 나라가 되어 경제력에서 뿐만

아니라 문화면에서도 중심이 되었으나  샤를이 전사한  후에야 프랑스 왕국에 합병 됩니다.

 

 

부르군트족 Burgundians 은 동(東) 게르만계 부족으로 발트해 연안 포메른 동부에 살다가

1세기경 비스툴라강의 하류 지역으로 이동하였으나 게피다이족을 막아내지 못해

서쪽으로 이동하여 로마제국 경계에서 정주해 살면서 로마제국의 용병 으로 이름을

떨치며 맹방 부족으로 살다가 로마제국의 세력이 약해지면서 세력을 확대하기 시작합니다.

 

 

부르군트족 은 400년경 라인강 서안까지 영토를 확장하고 413년에 군디카르 의 지휘하에

보름스를 수도로 제1차 부르군트왕국 을 건립하였으나 436년 아틸라의 지도하에

로마의 장군 아에티우스가 이끄는 훈족 용병군 에게 패하여 멸망하였으니...

중세 독일의 영웅 서사시  “니벨룽겐의 노래”  는 이 사건을 소재로 하였다고 합니다.

 

 

군디카르의 손자 군데리크 는 패잔병인 부르군트 부족을 이끌고 론강 상류 남안 사부아

지방으로 이동하고 론강 중류 및 손강 하곡 지방에 진출하여 443년 제네바를

수도로 제2차 부르군트왕국 을 재건하였는데.... 군데리크가 죽은 뒤 왕국은

그의 세 아들에 의해  제네바·  리옹·  빈  을 각각 수도로 하는 세 왕국으로 분할됩니다.

 

 

491년 둘째 아들 군도바드 (재위 474∼516) 가 왕국을 재통일하고 빈을 수도로 삼았으며

그는 아들 지기스문트 를 동고트왕 테오도리쿠스의 딸과 결혼 시켜 동고트왕국과의

제휴를 꾀하였으며 501년  “부르군트 법전”  을 편찬시키고 재통일을 완성해

510년에는 서고트족으로 부터 프로방스 지방을 빼앗는 등 왕국의 최전성기를 이룹니다.

 

 

군도바드 는 만년에 프로방스를 동고트의 테오도리쿠스에게 빼앗기고, 나라 안에서는

아리우스파 부르군트족 과 가톨릭파 원주민간의 종교적 대립이 표면화되었으니

 520년 지기스문트 (재위 516∼523) 는 이 문제를 해결하고자 가톨릭 으로의

개종을 단행하였으나..... 부르군트족과 원주민과의 대립은 쉽게 풀리지는 않았습니다.

 

 

523년후 프랑크군의 침입이 계속되었으니 군디마르 (재위 523∼534)는 프랑크군을 반격해

 성공하였고 이로인해 프랑크 분방왕(分邦王) 크로데마르가 패사하였으나 534년

클로타르 1세등 프랑크 연합군에게 패해 군디마르는 전사하고 왕국은 프랑크왕국에

합병 되었으니 프랑스 동부에 있는  부르고뉴 지방은 이 부족의 이름  에서 유래한 것입니다.

 

 

이런 저런 옛날 생각을 하며 성당을 둘러보다 보니 엄청 큰  파이프

오르간 보이는데.... 문득 동아일보 김민 기자가 쓴

바로크 시대로 무대 여는 ‘오르간 오딧세이’” 라는 글이 떠오릅니다.

 

 

“프랑스 작곡가  베를리오즈 는  '근대의 악기법과 관현악법’ 에서 파이프 오르간을 이렇게

설명한다.  오르간과 오케스트라는 서로 은밀한 적대감 을 갖는다.  자신의 영역을

쉽사리 내어주지 않으려 하는 라이벌 관계다. 오르간이 황제라면 오케스트라는 교황 이다”

 

 

파이프 오르간 음색을 솔로로도 감상할 수 있는 서울 송파구 롯데콘서트홀의

오전 공연 ‘오르간 오딧세이’가 새롭게 단장했다. 1월 선보이는

‘오르간 In 바로크’  는 오르간 음악이 다수 작곡된  바로크 시대가  주제다. "

 

 

"오르간 연주자도 했던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의  ‘토카타와 푸가 D단조’,  프랑스 작곡가

니콜라 드 그리니의‘대영광송’의 한악장 등을 선보인다. 발 건반으로만 연주하는

프랑스 작곡가 장 랑글레의 ‘프레스코발디 오마주’  가운데  ‘에필로그’ 도 만날 수 있다”

 

 

“연주는 오르가니스트 류아라가 맡았다. 콘서트 진행을 맡은 트럼피터 나웅준은

이원 생중계 방식으로 파이프 오르간 내부 를 대형 스크린을 통해 보여준다. "

 

 

"건반악기이면서 관악기의 특성을 지닌 파이프 오르간 의 성격과 다양한 음색 

결정짓는‘스톱’, 파이프에 바람을 공급하는 ‘바람상자’, 음의 세기를

조절하는 ‘스웰박스’  등  오르간 내부 구조와 움직이는 모습  을 관찰할 수 있다. ”

 

 

“‘오르간 In 바로크’는 28일과 다음달 25일 오전 11시 30분에 공연된다. 4월부터는

고전주의, 낭만주의 시대 오르간 음악이 정기적으로 이어진다. 7월과 12월에는

시즌 특별 콘서트가, 10월에는 다양한 악기와 함께 오르간을 연주하는 ‘오르간

플러스’가 준비돼 있다.  ‘오르간 오딧세이’ 는 올해 모두 11회 공연을 가질 예정이다.”

 

 

 본 Beaune 의 구시가지를 구경하며 성문을 나서는데 우리가 들어온 동문인 생 니콜라스

 Porte Saint-Nicolas 문으로 갈까 하다가..... 같은 길을 두 번 걷는 것 보다는

북문 으로 가자며 울 마눌이 저만치 앞장 서기로 뒤따라 가는데 옛 집들도 볼만합니다.

 

 

거리에서 주민과 관광객들이 섞여 지나가는 모습을 보자니 문득 상명대 교수

인  박정자씨가   ‘박정자의 생각돋보기’   칼럼에 쓴

“ ’시민‘  에 대하여“  라는 글이 떠오릅니다. 몰리에르의 ‘시민 귀족’  공연 그림.

 

 

“현대사회에서 ‘부르주아’ 라는 말은 부자 혹은 상류층을 지칭하는 보통명사이다.  19세기

까지만 해도 귀족의 지배를 받는 특정 계급 의 이름이었다. 중세 봉건시대에

처음으로 나타난 계급은 농사를 짓지않고 도시에 살면서 상업 에 종사했다. 도시의

명칭이 부르(bourg) 였으므로 그들은 부르주아(bourgeois 부르에 사는 사람) 로 불렸다.”

 

 

그들의 부(富)  는 토지에서 나온 게 아니고,  생산에 의한 것도 아니며,  돈의 차액에

의한 것 이므로,  자본의 중요성 이 대두되었다. 이 상업 계급이 왕성한 이윤추구

욕구로 상업과 산업을 발달 시켰으며, 산업혁명 을 통해 공장을 짓고 상품을 만들었다. ”

 

 

“그것들을 실어나를 선박도 제조했다. 당연히 기술자 가 필요했고, 부동산 매매 계약이나

상거래 행위를 조정하는 공증인이나 변호사 가 필요했다. 재산관리와 사업회계를

위한 회계사 도 필요했다. 유일한 자산인 육체의 건강을 위해 의사 도 필요했다. 

부르주아들은 엔지니어, 변호사, 회계사, 의사  들을 자신의 아들들 가운데서 키워냈다.”

 

 

의사, 변호사 등을 부르주아 라고 부르는 것은 역사적으로나 현실적으로나 단어의 의미와

그대로 부합한다. 사제와 귀족 밑에서 제3신분으로 분류되던 부르주아 계급은 1789년

혁명 을 일으켜 드디어 경제적 힘에 걸맞은 정치적 권력까지 얻게 되었다. 우리가

‘시민혁명’  으로 부르는  ‘프랑스 대혁명’  이다. 혁명의 명칭은  ‘부르주아 혁명’  이다.”

 

 

“북한이 공산주의 혁명 후 모든 사람을  ‘동무’  라고 불렀던 것처럼, 프랑스 대혁명

후에도 사람들은 서로를  ‘시민’  이라고 불렀다.  혁명 선언문 제목도

인간과 시민의 권리 선언 (D´eclaration des droits de l‘homme et du citoyen)’ 이다”

 

 

“모든 인간은 그 누구에게도 양도할 수 없고, 그 누구도 감히 문제 삼을 수 없는

절대적 권리, 즉 생존권과 행복추구권 을 갖고 태어났다는 루소의 자연권

사상을 기초로 해서 였다. 그런데 나라에는 농촌도 있는데 왜

하필 ‘시민’  이라는 말이 선언문에 추가되었을까? 원형은 루소  에 있었다. “

 

 

“더 거슬러 올라가면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 이었다.  고대 그리스 도시국가 시민 이었던

아리스토텔레스는 시민이란 ‘법을 지키고 공직에 참여하는 사람’ 이라 정의했다.

공공성에의 참여가 곧 시민의 조건 이라고 본 것이다. 그러니까 프랑스

대혁명은 고대 도시국가 차원의 시민 개념을 근대적 국가의 차원으로 확대한 것이다.”

 

 

“우리는 가끔 우리 국적 개념에 해당하는 법률적 지위를 미국에서는 왜 ‘시민권’ 이라고

말하는지, 또 서구 모든 나라 대통령이 대국민 담화를 발표할 때면 왜 ‘친애하는

시민 여러분!’이라고 말하는지 의아해 했었다. 시민 개념이 프랑스 대혁명 에서

시작되었고, 그 모델이 그리스 로마의 도시국가  였다는 것을 알고 나면 그 의문이 풀린다.”

 

 

“최근 한 사회학자가  “사회 개혁의 단초를 발견하려던 시민들이  ‘국가

개조!’ 라는 강력한 발언이 나온 이후 무기력한 국민 으로 떨어

졌다” 고 쓴 것을 보고..... ‘시민’ 의 어원적 역사를 한 번 짚어 보았다. “

 

 

서양의 시민 개념과 같은  역사적 맥락이 없는 우리가  도시의 주민을 ‘시민’나라의

주민을 ‘국민’ 이라고 부르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이 아닌가.  그는 지식인적

비판의식에 충실한 나머지 언어가 사회적 관습이라는 인문적 교양은 소홀히 한 듯 싶다.”

 

 

문득 동아일보에  한상복의 여자의 속마음에 나오는 “당신의 모든 것을 알고

말겠어” 라는 글이 떠오릅니다.  “아내가 휴대전화 통화  내역이며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이메일 까지  감시한다며 불만인 남자들 이 많다. ”

 

 

“하지만 이는  ‘감시’  라기 보다는  ‘알고 싶어서’  가 정답일 것이다.  게다가 자기

남자에게만 그런 것도 아니다. 여자 끼리도, 휴대전화를 뒤지지는 못하지만

속속들이 알려 한다. 오랜만에 만난 두 여자의 대화에선 화투의 ‘패 맞춰

보기’ 가 연상된다. 질문들을 화투패 처럼 깔아 놓고 번갈아 뒤집으며 확인 을 한다.”

 

 

“예뻐졌다” 는 인사로 시작해 근황을 파악 하고, 이어 남편과 아이, 어르신들 안부

까지 주고 받는다. 그런데 남자 끼리의 가족 안부와는 달리 여성들 간의

‘근황 맞춰 보기’ 는 정교하고 구체적 이다. 이런 대화도 오간다. “너네 오빠는

아직 이혼 안했어?”  “오빠가 왜?”  “올케랑 사이 안 좋아서 별거 직전  이라며?”

 

 

“친구의 주변을 크게 한바퀴 돌며 어떤 변화가 있었는지 하나도 놓치지 않겠다는 각오가

엿보인다. 한 여성이 그룹 내 친했던 남녀가 사귄다는 고백을 듣고 충격 을 받았다.

"남자를 짝사랑했냐” 고 물어보니 아니란다. “그럼 뭐가 힘드냐” 는 질문에 예상 밖의

대답을 했다.  “셋이 친했는데  내가 낌새를 못챘다는게 말이 돼요?  ”정답은 배신감 이다“

 

 

“남자 관점에선 왜 배신감인지 납득하기 어렵다연인을 빼앗긴 것도 아닌데….

오히려 축하해 줄 일이 아닌가? 하지만 이런 상황을 견디지 못하는 게

여성이다.  미리 미리 호혜의 원칙에 의거해  서로를 낱낱이 알아야  한다.”

 

 

“만화  ‘심야식당’ 에도 비슷한 상황이 나온다. 약혼한 여성이 친구에게 사과 를 한다.

“비밀로 해서 미안해.  원거리 연애였고 어떻게 될지 나도 자신이 없었거든.”

친구가 화를 낸다. “나한테 말도 없이 사귀고, 게다가 약혼까지!  그것도

내가 남자랑 헤어진 최악의 순간에!” 약혼한 여성이 친구를 속인 것은 사실 이다.“

 

 

방해받을까 봐 두려웠던 것 이다.  그녀는 사실  친구에게 트라우마  가 있다.  중학교 때

짝사랑하는 남자애 얘기를 털어놓았다가 친구에게 감쪽같이 가로채기 당했던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친구에게 동정심과 죄책감 을 느끼기도 한다. 친구는 그녀에게

쏘아붙인다.  ‘야비해! 자기만 행복해지겠다니,  네 행복한 얼굴 따위  보고 싶지 않아!’”

 

 

관계에 특히 민감한 여성들 사이에선 ‘나만 몰랐다’ 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혼자 몰랐다가는 혼자 남겨질 가능성이 높다.

소외되거나  버림받은  비루함과  동급  으로 여겨질  수도  있다."

 

 

 "그래서 더욱 격한 배신감으로 직결되는 것이다. 그들은 사람들에 대해 

더 많이 알아야 관계에서 우위 를 차지할 수 있다고 여긴다. 

주변 사람을 파악함으로써   자신을 지켜내고  가치를 높이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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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댓글 리스트
  • 작성자카페지기 | 작성시간 23.07.23
    지족상락(知足常樂)
    만족함을 알면 인생이 즐겁다.
    지족제일부(知足第一富)
    만족을 아는 사람이 제일 큰 부자(富者)다.
    비록 넉넉지 못하고 잘 나지 못했다 해도 만족함을 알아야 한다.
    겸손(謙遜)하고 소박하게 감사하는 인생이어야 한다.
    감사드립니다.
  • 답댓글 작성자가라치코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23.07.25 스스로 만족을 안다는게......
    말은 쉽지만 참 어려운 일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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