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로바키아7 - 브라티슬라바 거리를 걸으면서 전쟁과 시민혁명을 생각하다!
어제 2022년 5월 8일 헝가리 비셰그라드 Visegrád 에서 체코 프라하행 기차를 타고 슬로바키아 수도
브라티슬라바 에 도착해 호텔을 찾아 체크인을 한후 걸어서 대통령궁과 분수대 를 구경했습니다.
그러고는 시가지를 가로질러 언덕 에 가파른 계단을 한참 올라서는 오른쪽에 성벽을 따라 걸어 산정에 우뚝
서 있는 브라티슬라바성 Bratislavsky Hrad 을 구경하고는 성을 내려와 걸어서 호텔로 돌아왔습니다.
5월 9일 새벽에 잠이 깨어 호텔 방의 창으로 밖을 보니 마침 동이 터 오는지라 시시 각각으로 변하는
하늘을 보면서 여명(黎明) 을 몸으로 느끼고는...... 호텔을 나와 걸어서 시가지를 구경합니다.
브라티슬라바 는 슬로바키아의 수도 이고, 과거에는 헝가리 왕국의 수도 포조니 이기도
했으며.... 2020년 12월 기준 인구는 44만 명, 대도시권 66만 명으로 인접국들의
수도 오스트리아 빈, 체코 프라하, 헝가리 부다페스트 등과 비교하면 인구가 적은 편입니다.
슬로바키아-오스트리아-헝가리 삼국의 국경선 에 접경하며 오스트리아의 빈과 대중 교통으로 1시간
내외면 닿을 정도로 가까운지라.... 유럽 여행객들이 빈에서 당일치기 로 다녀오거나 부다페스트로
가는 여정 중에 들리는 곳이며 또 체코의 남부 끝자락 국경도시 와도 도로 교통은 한 시간 거리입니다.
전세계 수도 중에 두개의 나라와 경계를 이룬 도시 로 브라티슬라바에서 15km 떨어진 곳에 삼국의 국경 이
접경하는 지점이 있으니, 삼국의 접경점임을 알리는 테이블이 있어 여행객들의 사진 스폿 이 돼주곤
하는데 여타 다른 동유럽 도시처럼 구시가지와 신시가지가 공존하며 도시 가운데를 도나우강 이 관통합니다.
아침 이른 시간인지 거리에는 차도 적고 사람들도 별로 보이지 않아 조용한지라
사람들에게 부닥칠 일이 없으니..... 느긋하게 걸어서 시가지를 둘러봅니다.
성 마르틴 성당 Dom sv. Martina 은 이른 아침이라 문이 굳게 닫혀있고
그 너머 미할라 문 Michalska Brina 을 지나 구시가지로 접어듭니다.
거리에서 그림을 발견하고는 ‘이은화의 미술시간’ 에 나오는 “전쟁과 책” 이란 글이 떠오르니.... “금발의
소녀 가 머리카락과 망토를 바람에 흩날리며 벼랑에 서 있다. 되돌아가지도 앞으로 더 나아가지도
못한 채 발아래 황량한 풍경을 응시하고 있다. 소녀는 무엇 때문에 책을 안고 저곳에 홀로 서 있는 걸까?”
19세기 미국 화가 이스트먼 존슨 은 에이브러햄 링컨 같은 유명 정치인의 초상화로 유명
하지만 풍경화나 일반인을 모델로 한 풍속화에도 능숙했는데... ‘내가 두고 온
소녀 (1872년경)’ 는 그가 48세에 그린 것으로 남북전쟁 시기의 한 소녀를 묘사하고 있다.
앳된 모습이지만 손에 결혼반지를 끼고 있어 기혼 임을 알 수 있다. 소녀는 전쟁터로 나간
남편 을 기다리며, 벼랑 위를 걷고 있다. 발아래 보이는 땅은 울타리로 반반
나뉘었고, 주변은 안개와 먹구름이 휘감고 있다. 내전에 휩싸인 불안한 세상 을 암시한다.
이 그림은 남북전쟁 이 끝나고 몇년후에 그려졌다. 100만명 이상의 사상자 를 낳은 끔찍한 전쟁은 끝났지만
미국 사회는 여전히 혼란과 갈등을 겪고 있었다. 내전이었기에 유럽의 화가들 처럼 전쟁터의 영웅을
미화할수도 없는 노릇. 존슨은 전쟁이 개인에게 미친 영향과 불안한 분위기 를 포착해 묘사하는 방법을 택했다.
그림 제목은 18세기 영국 민요 에서 따왔다. 전쟁터에 나간 군인이 고향에 두고 온 연인을 그리워하는 노래
로, 남북전쟁 시기에 남군, 북군 모두에게 인기를 끌며 불렸다. 이 그림을 그릴 당시 존슨은 늦은 나이
에 결혼해 두 살배기 딸을 둔 남편이자 아버지였다. 가족의 소중함을 그 어느 때보다 절감하던 시기 였다.
소녀가 두 손으로 꽉 쥐고 있는 책은 성경이나 문학, 혹은 철학책 일 터다. 그 책이 과연 그녀
에게 길을 알려줄 수 있을까? 위안을 줄 수 있을까? 어쩌면 화가는 그림을 통해
묻고자 했을 테다. 책으로 전파된 세상의 온갖 지식과 종교, 문학, 철학, 사상은
왜 전쟁을 막지 못하는가, 정치인들이 결정한 전쟁에 왜 젊은이들이 희생되어야 하는가라고.
이제 시간이 좀 지났는지 거리에 출근하는 사람들이 많이 보이는데.... 주민과 관광객들이
섞여 지나가는 모습을 보자니 문득 상명대 교수인 박정자씨가 ‘박정자의 생각돋보기’
칼럼에 쓴 “ ’시민‘ 에 대하여“ 라는 글이 떠오릅니다. 몰리에르의 ‘시민 귀족’ 공연 그림.
“현대사회에서 ‘부르주아’ 라는 말은 부자 혹은 상류층 을 지칭하는 보통명사이다. 19세기
까지만 해도 귀족의 지배를 받는 특정 계급 의 이름이었다. 중세 봉건시대에
처음으로 나타난 계급은 농사를 짓지 않고 도시에 살면서 상업 에 종사했다. 도시의
명칭이 부르(bourg) 였으므로 그들은 부르주아(bourgeois 부르에 사는 사람) 로 불렸다.”
“그들의 부(富) 는 토지에서 나온 게 아니고, 생산에 의한 것도 아니며, 돈의 차액에 의한 것
이므로, 자본의 중요성 이 대두되었다. 이 상업 계급이 왕성한 이윤추구
욕구로 상업과 산업을 발달 시켰으며, 산업 혁명 을 통해 공장을 짓고 상품을 만들었다. ”
“그것들을 실어나를 선박도 제조했다. 당연히 기술자 가 필요했고, 부동산 매매 계약이나
상거래 행위를 조정하는 공증인이나 변호사 가 필요했다. 재산관리와 사업회계를
위한 회계사 도 필요했다. 유일한 자산인 육체의 건강을 위해 의사 도 필요했다.
부르주아들은 엔지니어, 변호사, 회계사, 의사 들을 자신의 아들들 가운데서 키워냈다.”
“의사, 변호사 등을 부르주아 라고 부르는 것은 역사적으로나 현실적으로나 단어의 의미와
그대로 부합한다. 사제와 귀족 밑에서 제3신분으로 분류되던 부르주아 계급은
1789년 혁명 을 일으켜 드디어 경제적 힘에 걸맞은 정치적 권력 까지 얻게 되었다.
우리가 ‘시민혁명’ 으로 부르는 ‘프랑스 대혁명’ 이다. 혁명의 명칭은 ‘부르주아 혁명’ 이다.”
“북한이 공산주의 혁명 후 모든 사람을 ‘동무’ 라고 불렀던 것처럼, 프랑스 대혁명
후에도 사람들은 서로를 ‘시민’ 이라고 불렀다. 혁명 선언문 제목도
‘인간과 시민의 권리 선언 (D´eclaration des droits de l‘homme et du citoyen)’ 이다”
“모든 인간은 그 누구에게도 양도할 수 없고, 그 누구도 감히 문제 삼을 수 없는
절대적 권리, 즉 생존권과 행복추구권 을 갖고 태어났다는 루소의
자연권 사상 을 기초로 해서 였다. 그런데 나라에는 농촌 도 있는데 왜
하필 ‘시민’ 이라는 말이 선언문에 추가되었을까? 원형은 루소 에 있었다. “
“더 거슬러 올라가면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 이었다. 고대 그리스 도시국가 시민 이었던
아리스토텔레스는 시민이란 ‘법을 지키고 공직에 참여하는 사람’ 이라 정의했다.
공공성에의 참여가 곧 시민의 조건 이라고 본 것이다. 그러니까 프랑스
대혁명은 고대 도시 국가 차원의 시민 개념을 근대적 국가의 차원으로 확대한 것이다.”
“우리는 가끔 우리 국적 개념 에 해당하는 법률적 지위를 미국에서는 왜
‘시민권’ 이라고 말하는지.... 또 서구 모든 나라 대통령이 대국민
담화를 발표할 때면 왜 ‘친애하는시민 여러분!’ 이라고 말하는지 의아해 했었다.
미국에서 부르는 시민 개념이 프랑스 대혁명 에서 시작되었고, 그 모델이
그리스 로마의 도시 국가 였다는 것을 알고 나면 그 의문이 풀린다.”
“최근 한 사회학자가 “사회 개혁의 단초 를 발견하려던 시민들이 ‘국가
개조!’ 라는 강력한 발언이 나온 이후 무기력한 국민 으로 떨어
졌다” 고 쓴 것을 보고..... ‘시민’ 의 어원적 역사를 한 번 짚어 보았다. “
“서양의 시민 개념과 같은 역사적 맥락이 없는 우리 가 도시의 주민을 ‘시민’, 나라의 주민
을 ‘국민’ 이라고 부르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이 아닌가. 그는 지식인적
비판의식에 충실한 나머지 언어가 사회적 관습 이라는 인문적 교양은 소홀히 한 듯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