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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베르니8 - 모네의집을 보고 인상파 미술관을 구경하다!

작성자가라치코|작성시간24.02.09|조회수101 목록 댓글 2

 

지베르니 여행8 - 모네의집을 보고는 나와 걸어서 인상파 미술관을 구경하다!

 

 

5월 25일 파리 생 라자르 역에서 기차를 타고 베르농 지베르니 역에서 내려

꼬끼리 열차 로 지베르나 마을 에 도착해 모네의 집 아뜰리에 

정원에 수련이 핀 연못 을 구경하고는 나와 끌로드 모네 거리를 걷습니다.

 

 

 끌로드 모네 거리 를 걸어서 인상파화가 미술관 을 찾아가는데 도중에 지붕이 특이한

고풍스러운 집이며 또 기념품 숍과 예쁜 카페와 레스토랑 이 시선을 붙잡습니다.

 

 

거리에 많은 관광객들이 보이는데 외국인도 많겠지만 가족동반 등 차림새로

보아 프랑스인 들도 많은 것 같은데 문득 D 일보 파리 특파원

동정민 씨가 쓴 “프랑스의 세속주의와 톨레랑스” 라는 글이 떠오릅니다.

 

 

종교는 집이나 사원 에서만 믿어라. 자신의 신앙을 왜 공공장소에서 표현 하느냐.”

“그럼 기독교 신자들도 로마시대 처럼 카타콤베(지하묘지) 에서 숨어서

예배를 봐야 하는가. 모든 종교 행위가 은밀하게 치러지는 비밀의식 이어야 하는가.”

 

 

풍자 주간지 ‘샤를리 에브도’  테러 사건 이후 프랑스에서 흔히 들을 수 있는 논쟁이다.

프랑스 정부는 공공장소에서 자신의 종교를 드러내는 행위에 대해 ‘프랑스 공화국’

의 정체성을 깨뜨리는 행위라고 비판 한다.  반면 이슬람 신자들은 ‘신성모독의

권리’ 까지 표현의 자유 라고 주장하는 프랑스인들을 문화적 식민주의 라고 공격한다. 

 

 

한국에서는 지하철에서 “예수 믿으세요!” 를 외치는 개신교 전도사, 길거리에서 목탁 

두드리며 절을 하는 불교 승려를 쉽게 볼 수 있다.  종교적 심성이 열정적 이면서

타 종교에 대한 포용력 도 큰 한국인의 눈으로 볼 때 프랑스의 이러한 논쟁은 다소 낯설다. 

 

 

테러 사건  직후 파리 노트르담  대성당에서  희생자들을 위한  추모의 종을  울렸을 때

샤를리 에브도 직원 들은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고 한다. 이 잡지는 이슬람은 물론

이고 가톨릭까지 모든 종교권력을 비판하고 조롱해 왔기 때문이다. 숨진 스테판

샤르보니에 전 편집장은 “나는 이슬람 혐오주의자가 아니라 무신론자” 라고 밝힌 바 있다.

 

 

프랑스의  ‘종교적 세속주의  (La¨icit´e)’ 의 원칙은 1789년  프랑스 대혁명

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혁명의 주역인 시민 부르주아지 세력 

왕과 귀족 뿐만 아니라  종교 권력과의 치열한 싸움 끝에  공화국을 세웠다.

 

 

또한 종교개혁 당시 신구교 간 유혈충돌, 제2차 세계대전 때 나치의 유대인

대학살 에 대한 기억은 정치와 종교를 철저히 분리하는 계기 가 됐다.

 

 

이 때문에 가톨릭의 나라로 알려진 프랑스 는 “어떤 신도 존재하지 않는다”

생각하는 비율이 40%로 유럽 제일의 ‘반(反)종교’의 나라가 됐다.

프랑스에서  ‘선(禪) 불교’  가 인기인 이유가 불교가 신을 믿는

종교가 아니라  ‘철학’ 이나  ‘명상법’ 으로 인식되기 때문이라는 분석도 있다.

 

 

 2000년대 들어  이슬람 이민자들이 급증 하자 프랑스의 고민이 깊어지고 있다.  이슬람은

종교와 생활을 분리할 수 없어 곳곳에서 마찰을 빚고 있기 때문이다. 급기야 니콜라

사르코지 전 대통령은 2011년 공공장소에서 종교적 상징물을 추방하는 법률 을 통과시켰다.

 

 

 공립학교에서는 무슬림 소녀의 스카프유대인 소년들이 머리에 쓰는 키파(모자) 도 금지

됐다.  최근에는  관청에 설치된 크리스마스 구유 장식도 불법  이라는 판결이 나왔다.

 

 

세속주의 란  다른 문화와  종교를  인정해온  ‘톨레랑스(관용)’  의 전통에

기초한 공화국의 원칙 인데, 모든 종교의 존재를 부정하는

‘무신론’ 과 혼동되면서 이슬람과의 갈등 을 불러왔다는 비판도 제기되고 있다.

 

 

미국식 소수 공동체 활성화보다는 공화국의 전체적 가치 를 내세우는 프랑스

대해 “계몽(啓蒙) 근본주의”  “종교의 자유가 아니라

‘종교로  부터의  자유’  를 외치는 나라”  (뉴욕타임스) 라는 비판도 나오고 있다.

 

 

파리 연쇄 테러 사건 이후 프랑스는 공화국의 새로운  ‘정체성과 가치’  에 대한 토론이

한창이다. 대한민국도 세계화 시대를 맞아 동남아 이주 노동자 와 국제결혼 커플 

크게 늘어나고, 탈북 난민 들의 규모도 커지고 있다. 우리도 이념과 종교, 인종을

넘어 대한민국을 통합 수 있는 정체성과 가치 가 무엇일까 하는 논쟁을 시작해야 할 때다.

 

 

이 마을에 있는 지베르니 인상파 미술관 Musee des Impressionismes Giverny

옛날 아메리캥 미술관  Musee d'Art Americain  에  인상파  라는

미술사조를 테마로 삼아 새롭게 창설한 미술관으로 파리의 마르모탕 모네

미술관 과 제휴해 기획전이 끊이지 않으니  모네 팬  들이 많이 찾아온다고 합니다.

 

 

파리 서쪽 70km 노르망디와 일드 프랑스의 경계에 있는 지베르니 는 인상파의 창시자

모네 가 1883년 부터 1926년까지 43년 동안 작품 활동을 펼치던 마을이니

모네는 여기 지베르니에서  “수련”,  “작은 배”,  “루앙 대성당”  등의 작품을 남깁니다.

 

 

모네의 집에서는 모네의 아틀리에 와 직접 가꾼 수 련의 배경이 된 정원  두 곳을 볼 수

있으며 마을 서쪽 5km 에 인구 2만명의 도시 베르농 (Vernon) 이 있고 북쪽 15km

에는 뛰어난 자연 풍광과 중세 유적들을 간직한 레장들리 (Les Andelys) 가 있습니다.

 

 

지베르니는 인구 500명 이 거주하는 작은 마을이지만 센 강 연안의 목가적이고 아름다운

경치와 클로드 모네를 비롯한 유명 예술가들의 흔적 을 볼 수 있는 곳으로 유명하다나요?

 

 

11세기 로마네스크 교회인 지베르니 생트 라드공드 교회 (Église Sainte-

Radegonde de Giverny) 는 마을의 또 다른 볼거리라고 합니다.

 

 

모네의 집 근처에는 지베르니 인상파 미술관 (Musée des Impressionnismes Giverny) 이

있으며 거리에는 장미와 담쟁이 넝쿨로 뒤덮인 독특한 반 목조 가옥 들이 남아있습니다.

 

 

인상파(印象派) 는 자연이 화가에게 주는 “순간적인 인상을 작품에 표현” 하려는

미술의 한 사조로 19세기 실증주의와 사실주의의 영향으로 대상을

눈에 보이는 그대로 재현 하려는 운동이 일어나 옥외에서 태양 아래

자연의 변화무쌍한  순간적 양상을  미묘하게 묘사하는 일  이 시도 되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표현상의 새로운 기법과 주관적 감각의 반영을 중시하는 이들이 생겼으니 자연

을 하나의 현상 으로 보고, 빛과 대기의 변화에 따라 색채가 일으키는 변화 에 흥미를

갖고 사물의 인상을 중시하여 그림을 그렸는데 프로이센 - 프랑스 전쟁으로 인해 런던

으로 피신한 모네와 피사로 는 터너와 컨스터블등 영국 풍경화파의 외광 표현법  을 접합니다.

 

 

모네,  드가,  모리조,  기요맹,  고갱,  시슬레,  르누아르,  세잔 이  1874년 나달의 사진관에서

8회의 전시회를 열면서 인상파 라는 이름이 생기는데 인상파 화가들은 색채감과 구도 에서

일본 풍속화인 우키요에  그림에서 많은 신선한 충격과 영감  을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인상주의 화가 들은 자연을 하나의 색채 현상 으로 보고, 빛과 함께 시시각각으로 움직이는

색채의 미묘한 변화 속에서 순간적으로 느껴지는 인상을 포착 하여 그리는데.....

모네, 르느와르 그림들이 대표적이니 클로드 모네 (Claude Monet) 의 작품 “인상,

일출” 에서 ‘인상주의’ 라는 말이 생겼으니 ‘빛은 곧 색채’  라는 원칙을 끝까지 고수합니다.

 

 

클로드 모네 는 르 아브르에서 화가 외젠 부댕 을 만나 야외에서 외광묘사 에 대한 기초적

화법을 배웠으며 네덜란드의 풍경화가 요한 바르톨드 용킨트 를 알게 되어 대기

중의 빛을 포착해내는 기법 을 익혔으니 훗날 모네는 용킨트를 가리켜 자신이

예술가의  눈을  키우도록 가르침을 베풀어준.....  진정한 거장이라 말하기도 했습니다.

 

 

모네  는 19세때 파리로 가서 아카데미 쉬스에서  카미유 피사로 (Camille Pissarro) 와 교우

했으며 1860년 군대에 소집되어 1년간 알제리에서 복무하던중 장티푸스에 걸려 군에서

제대하고는파리로 돌아와 글레르 밑에서 르누아르, 시슬레, 바지유 등과 사귀며 공부

했으니 이들의 우정은 새로운 생각과 열정이 반영된 미술운동을 탄생시키는 밑거름이 됩니다.

 

 

1874년 첫번째 그룹전을 열어 "인상, 일출”을 출품했는데 비평가 루이 르로이는 모네의

그림에 대한 조롱의 의미를 담아 처음으로‘인상주의’라는 말을 사용했으며

이후 인상파 란 이름이 모네를 중심으로 한 화가집단 에 붙여졌는데 모네는 1886년

까지 8회나 이어진 인상파 전시에서 5회에 걸쳐 작품을 출품하여 대표적 위치를 굳힙니다.

 

 

모네 는 1890년 부터 하나의 주제로 여러 장의 그림을 그리는 연작 을 제작했으니 “건초

더미” 를 비롯해 “포플러 나무”,  “루앙 대성당”,  “수련”  은 대표적인 연작이니

모네는 연작을 통해 동일한 사물이 빛에 따라 어떻게 변하는지 표현해낼수 있었다 합니다.

 

 

폴 세잔 (Paul Cézanne)은 빛의 변화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모네 능력에 감탄하면서 ‘모네는

신의 눈을 가진 유일한 인간’이라는 유명한 말을 남기기도 했으니 모네의 눈에는

매시간, 매분, 매초마다 빛의 변화가 느껴졌으니 태양이 뜨고 질 때까지 캔버스를

바꿔가며  하나의 대상을 그렸으니 하루 종일 빛을 보면서 작업하느라 시력이 손상  됩니다.

 

 

모네가 그린 연작 중에 하나인  “건초더미”  를 보자면..... 지베르니의

여름 끝자락 막바지에 이르러 지베르니에는 원뿔 모양의 건초

더미들이 점점 늘어났으니 그는 1884년 부터 건초더미들을 그렸습니다.

 

 

봄이 될 때 까지 계속해서 하루 중 각기 다른 시간대에 관찰된 스물 다섯점 을 연작을

탄생시켰으니 이 그림들은 4000 프랑에 팔렸다고 하는데, 금년 미국 뉴욕의

소더비 경매에서는 이 그림 한점이 천문학적인 금액인 1,318억원에 낙찰  되었다네요?

 

 

건초더미의 단순한 형태가 주는 이미지에 다채로운 빛을 선사 하는

그림들은 비평가와 수집가의 마음을 모두 사로잡았다나요?

 

 

피사로 는 “사람들은 모두 모네만을 원해. 가장 끔찍한 것은 모두가 해질녘의

건초더미 들만 원한다는 사실이야.”  라고 하였다는 말이 전해집니다.

 

 

모네의 흥미  를  유발한  것은....  건초더미  자체  보다는  빛과  함께

변해가는 건초더미의 모습 이었기에 건초더미와

건초더미를 둘러싼 풍경은 모두 대기의 미묘한 변화 와 함께 존재합니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합니다.  “내 생각엔,  하나의 풍경 이란

그것을 둘러싼 대기와 빛의 힘으로 존재  하는 것입니다.”

여긴 일부 그림에 사진 촬영 불가라는 안내 주의 표시가 붙어 있습니다.

 

 

오늘 지베르니 마을에서는 모네의 집 아뜰리에 에서 무수히 많은 일본 우키요에

그림 을 보았는데..... 같은 마을에 자리한 여기 인상파 미술관 에도

일본 그림이 많으니 프랑스의 인상파  "일본 우키요에로 부터

영감을 받아 탄생"  했다는 말을 실감 합니다!   나의홈 : cafe.daum.net/baika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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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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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카페지기 | 작성시간 24.02.09 이렇게 보니 참 좋네오ㅡ.
  • 작성자카페지기 | 작성시간 24.02.09 이번 남프랑스와
    북프랑스 여행이 잘되길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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