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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베르니9 - 인상파 미술관을 보고 끌로드 모네 거리를 걷다!

작성자가라치코|작성시간24.02.15|조회수108 목록 댓글 2

지베르니 여행9 - 인상파 미술관을 보고는 나와서 끌로드 모네 거리를 구경하다!

 

 

5월 25일 파리 생 라자르역 에서 기차를 타고 베르농 지베르니역 에서 내려 꼬끼리

열차를 타고는 지베르나 마을 에 도착해....  모네의  집  아뜰리에  를 구경합니다.

 

 

그러고는 온갖 꽃이 만발한 화려한 정원 을 보고는 걸어서  수련이 핀 연못 

구경하고 나와 끌로드 모네 거리 를 걸어 인상파화가 미술관 을 찾아갑니다. 

 

 

 

여기  인상파 미술관  에는  일본 그림 우키요에 와 또 우키요에를 모방해서 인상파 화가

들이 그린 수많은 그림들을 보는데, 그중에서도 인상적인 그림은 가츠시카 호쿠사이

Katsushita Hokusai 가 1825년에 그린 후지산(富嶽) 36경중 가나가와천 神奈川 입니다.

 

 

우키요에  는 인상파 화가인  반 고흐, 모네, 드가,  르누아르, 피사로 에 또 클림트 

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고 하는데... 가츠시카 호쿠사이 葛飽北齊 의 그림들은

모네의 그림과 릴케의 시 산, 드뷔시의 고향시 바다  등에도 영감 을 주었다고 합니다.

 

 

가츠시카 호쿠사이 보다 더 유명한  우키요에 浮世絵(부세회) 화가  로는

우타가와 히로시게 歌川広重 가 있으니..... 그의 그림 중에

니혼바시 아침풍경등을 그린 "東海道五十三 역참“  이 유명하다고 합니다.

 

 

우키요에(浮世繪 부세회) 란 일본 무로마치 시대부터 에도시대 말기까지 서민생활을 기조로

하여 제작된 목판화(木版畵) 로 평화가 정착되면서 신흥세력인 무사, 벼락부자, 상인,

일반 대중 등을 배경으로 한 왕성한  사회 풍속·  인간 묘사  등을  주제  로  삼았다고 합니다.

 

 

우키요에의  “우키요”  라는 말은 중세에 전란에 휘말려 빈곤이 극에 달하고 생활이 비참

했을때 불교사상 으로 현세는“우키요(憂き世)”로 무상의 세계  라고 생각해 내세의

극락정토 를 꿈꾸었으니 우키요(憂き世)는 덧없는 세상, 속세  를 뜻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우키요에 는 삽화에서 목판화로 독립 하면서 1765년 스즈키 하루노부 가 다색 목판화

인 니시키에(錦繪) 기법 을 개발한후 우키요에의 판화 기법은 정점에

달했으니 목판에 의한 명쾌한 색면 배치와 조각도의 생생한 각선을 표현 하게 됩니다.

 

 

중국 경덕진에서 생산된 도자기  가 유럽에 수출되던중  청나라가 침입하여 중국이 혼란에

빠지자 네델란드는 규슈 사가현 아리타 에서 생산된 도자기를 찾았는데 임진왜란때

끌려온 이삼평 등 조선도공이 일본화한 채색도자기 생산에 성공했기 때문이니 17~18

세기에 규슈 아리타 북부 이마리항에서 무려 1,000만개의 도자기 가 유럽으로 수출 됩니다.

 

 

일본 도자기는  유럽인들을  매료 시켰으니 유럽인들이 이를 모방하여 유럽 도자기 

생산할 때 까지 유럽에 일본 예술품의 명성 을 드높였던 것이었고 이마리

에서 도자기를 유럽에 수출하면서 포장지로 목판화인 우키요에 종이 를 사용

했는데 우키요에 그림 이 유럽에 알려져 프랑스 인상주의 화가들이 열광 하게 됩니다.

 

 

1865년 프랑스 화가 브라크몽 이 일본에서 보내져온 도자기의 포장지로 사용된 우키요에

(浮世繪(부세회)라 불리던 호쿠사이의 민화 한 조각 을 발견하고는 마네, 드가 

친구에게 돌린게 유럽 인상파 탄생 의 발단이 되었으니  자포니즘(Japonism: 일본

미술붐) 이 유럽에 빠르게 퍼졌으며 1867년 파리 박람회에 출품 된 이래 높이 평가됩니다.

 

 

고흐 는 우키요에 작품을 수집하고 따라 그렸다고 하는데 무려 477점 이나 된다고 하니

우키요에의 강한 색감 이 인상파 화가들에게는 색다른 느낌 이었나 본데 인상파

화가들이 지향한 자연을 있는 그대로 그리겠다는 자세나 빛으로 충만한 화면,

순간의 표정을 놓치지 않는 방법 등 일본  '우키요에'  로 부터 배운게 많았다고 합니다.

 

 

'우키요에' 는 서양 예술가들에게 자연에 대한 자유로운 해석등 테마를 제시하여 주었고,

일상생활 중에 "미" 가 있다는 것을 보여 주었으니 일본 미술이 유럽에 끼친

영향을 대단해 고흐는 자기 방을 우키요에 그림으로 장식 했으며 귀를 자른후

그린 “자화상”  에도 배경은 우키요에 그림 이 덮고 있는등 무려 수백편 에 이른다네요?

 

 

모네는 부인 카미유 를 모델로 “일본옷을 입은 여인” 을 그렸으며 우타가와 히로시게 가

그린 우키요에 그림 “오하시 아타케의 소나기” 를 모방해 “ Bridge in the Rain"

을 그리는등 수십편 에 이르고 드가, 마네, 고갱 등도 우키요에 그림에 열광 했으니

프랑스는 “일본 도자기와 우키요에 그림과 칠기” “자포니즘”  광풍에 휩싸였던 것이라!

 

 

유럽에 수출된  일본 도자기  들은  “古伊万里 고 이만리“  라 부르는데 임진왜란 때

남원에서 사쓰마번 시마즈씨에게 끌려간 이들은 규슈 남부 가고시마에

심수관가 등을 이루었고, 김해에서 히젠번 나베시마씨에게 끌려간 이들은

규슈 북부 아리타(有田) 에 도조(陶祖) 이삼평 의 지도하에 조선 도예촌 을 이룹니다.

 

 

사가현 아리타(有田) 에 가면 “고이마리”,  “카키에몽”,  “이로나베시마”  등 도자기를

감상할수 있는데 오늘날에도 일본은 도자기 왕국 으로 통하니  “닛코나 노리다케"

상표의 엔티크 는 세계 유명 미술품 경매에서 상상을 초월하는 가격 으로 거래 됩니다!

 

 

지금도 매년 5월이 되면 아리타에는 20여만명의 관광객 이 운집하는 400년 역사의 도자기

축제 가 열린다는데... 왜 우리나라에서는 고려청자가 맥을 잇지 못하고

완전히 사라져 버렸으며,  그후 조선 시대에 어렵게 익힌  이조백자도  대가  끊어졌을까요?

 

 

일본이나 조선이나   “士農工商 사농공상”  의 신분제 사회였는데  도공 들은

신분이 극히 낮았으니 조선에서는 사람축에도 들지 못하는 "천민" 으로

연속극 “추노, 징비록" 등에서 보듯이 도공들은 수탈과 착취의 대상 이었습니다.

 

 

하지만 일본은 제도가 너무나도 엄격하여  신분을 바꿀수 없는데다가  기술을 우대하는 사회

이니 기술자들은 자손대대로 숙련 을 거듭하여 "그 기술 분야에서 1인자" 가 되어 익힌

기술을 자손대대로 물려 주었던 것이니 중국을 능가하는 최고의 도자기로 발전했던 것입니다.

 

 

조선에서는 신분제도가 물러서 상인이나 도공도 돈을 벌어 논을 사서 지주 가 되고  노비를

거느리면 족보를 사서 양반 행세 를 할수 있었으니 자식에게는 천한 신분 을 물려주지

않기위해 자식에게 기술을 가르치는 것을 꺼리고 하루빨리 돈을 벌어 신분을 바꾸었습니다.

 

 

상인이나 기술자들은  남을 속여서라도 떼돈  을 벌려는 생각으로  상도가 타락했던 것이니

조선 말기에는 도자기 기술도 사라져 버리고  일본의 양은 남비를 수입 하는데,

남의 성을 도용 하는지라....  "양반은 조선 초기 3~4% 에서 무려 90%"  로 늘어나게 됩니다.

 

 

해서 지금 한국의 성씨는 3천개  안되지만, 중국은 2만 3천개 이고  일본은 13만개 

훨씬 넘는다는데,  일본에서는 메이지유신후 정부가 성씨를 등록 하도록 하자...

한국인들 처럼 노비가 주인의 성씨를 쓰거나 또는 남의 성을 도둑질 하지 않고

친척들이 모여 새로운 성씨를 만들었기 때문으로 한국과 일본은 문화가 다른가 합니다.

 

 

한국은  성씨 숫자도 적지만  특정한 성씨에 편중 된게  특이한데,  1억 2천 7백만 일본에서

1위 사토(佐藤)씨는 1.5% 인 189만 이지만, 김해김씨는 7.9% 412만 이고 2위 밀양박씨

303만, 3위 전주이씨 261만... 20위 전주최씨 39만 까지 2,200만 이며 30위 함안조씨

까지 합하면 2.500만 이니 본관으로 쳐서 3천개 성씨 중에 30개가 인구의 50% 에 달합니다?

 

 

교토에 천년넘는 기업이 6개로  결혼용품점 겐다는 1,300년부채가게 마이센도는  1,200년

그리고 떡가게 이치와가 천년 이 되었다고 하며.... 곤고구미 는 쇼토쿠태자의

초청으로 백제에서 건너와 사천왕사를 짓고 절을 관리한게 578년이니 1,440년이 되었네요?

 

 

여관 호시 는 718년 이시카와현 고마쓰에서 창업해 지금도 그 자리에서 영업 을 한다니

천삼백년 이 되었고, 규슈 사쓰마의 도공 심수관가도 400년 이 넘었으며 스미토모 는

1623년에 창업했으니 400년, 다이마루 백화점은 1717년에 창업했으니 300년 이 됩니다.

 

 

그러니 일본은 수백년된 기업은 셀수조차 없는데  우리나라는 자신의 기술과 직업을 자손에게 물려

주길 꺼리고 너도나도 "지주 양반"  이 되려다 보니, 7~8년전 통계지만  100년을  넘는 기업

이라야 "박승직 상점으로 출발한 두산" 과 "까스명수의 동화약품"  에 조흥은행 등 3곳 뿐이네요?

 

 

오늘 19세기 프랑스  인상주의 화가  모네등의  그림들을 둘러 보았는데....  19세기 후반이

되면 인상주의는 신인상주의 로 변하니 대표적인 화가는 프랑스인으로 1869년에 

지베르니 북쪽에 있는 르 샤토 캉브레시에서 태어난 마티스 가 있으니..... 서울

예술대 배한성 교수는 동아일보에  “마티스 ‘음란서생’ 을 사로잡다” 라는 글을 올렸습니다.

 

 

지금은 아름다운 은퇴의 삶을 즐기는 A선배는 여성 아나운서로 최장수 인기를 누렸다. 똑

부러진 성격에 뛰어난 음성과 학벌까지 콧대도 높았다.  그녀가 들려준 이야기 한 토막.

 

 

"1960년대 젊은이들의 휴일 여가는 극장을 가거나 근교 산으로의 등산 이 고작이었다.

어느 날 지인들과 산행에 나선 A선배 그만 자연(?) 이 부르는 난감한 상황

찾아왔다.  그날따라 동료 여성도 없었다.  도저히 참을 수 없자 멤버들의

성향을  분석했다나...... 말이 없고  순진무구한  B씨에게  망을  봐달라고  부탁했다."

 

 

그런데 낯선 등산객이 불쑥 나타났고, 화들짝 놀란 B씨가 소리쳤다. A선배 잽싸게

일어나던 중 엉덩이 맨살이 그만 노출됐는데, 문제는 얼떨결에 그 장면을

B씨가 보았다는 것이다.   A선배가 말했다.  "내 맨살을 본 건 저 남자가

처음이어서  할 수 없이 결혼했지요."  그 해프닝이  해피 웨딩  이 되었던 것이다."

 

 

"우리 세대에게 여성의 노출은 일종의 금기 였다. 풍기문란죄로 미니스커트 길이

까지 단속하지 않았던가. 그런 시대를 살았으니 누드는 언감생심

이었다. 에두아르 마네의  '올랭피아' 나  '풀밭 위의 점심식사' 정도 밖에 몰랐다."

 

 

"누드 에 관심을 갖게 된 건 최고경영자 아카데미에서 공부할 때다. 커리큘럼에

누드 스케치와 미술 특강 이 있었다. 벨기에의 시인이자 저널리스트인

카미유  레모니에  의 말이  인상적이었다.  '누드와  옷을  벗는  것은  다르다. "

 

 

"팰티를 벗고다니거나  슈미즈를 막 벗어 던진 여성은 누드라고 할수 없다. 누드가 품격을

갖추려면 순간적인 상태를 보여서는 안 된다. 누드는 아무것도 감추지 않는다. 뭔가를

감추려 하는 순간 음란해진다.  아무것도 감추지 않아야만 더 잘 보여줄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예술적 감성보다 '흑심' 이 앞서는건 어떻게 해야 할까. 소마미술관 '테이트명

작전 누드' 에 나온 앙리 마티스의 '옷을 걸친 누드'   앞에서 음란서생 처럼

있었으니 말이다."   "누드를 대하는 대중적 호기심과 속물성 은 외설· 관음 ·

병태  같은  단어와  함께.....   보는 사람의 관점과 격의 문제  를  생각하게 해주었다."

 

 

"피카소에서 데이비드 호크니 를 망라한 122점 걸작이 모두 여성 누드

보여주는 것은 아니다. 8개의 테마 여서 인체의 미학 부터

성경과 신화,  초현실주의적  기발한  상상과 공상력  까지 넘나 든다."

 

 

"중요한 것은  '이 전시의 미션이 무엇인가?'  일 것이다. 인간의 몸에 대한

예술적인 물음  과  답을 각양각색으로  생각하게 해준다는 것 아닐까."

 

 

"그 마지막에  로댕의  '키스'  가 있다.  진품을 보니 어떻더냐고 사람들이 물을 때

뭐라 말할 재주가 없다.  "이번 생애에 또다시 보기는 힘들겠죠?  직접

느껴보시죠" 라고 할 뿐. 한마디 덧붙였다. 2월 4일까지 입니다. 얼마 안 남았습니다"

 

 

모네에다가 후기 인상주의 마티스 까지 생각하고는 인상파 미술관 을 나와서 

끌로드 모네 거리 를 걷는데 죄우에 카페며 레스토랑에 기념품 숍 은 

기본 이고....   또  예쁜  화랑 들이 많은데다 집들도 예뻐서 구경하며 걷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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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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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카페지기 | 작성시간 24.02.15 이제 '대한민국'은
    •일본을 넘어서
    •독일을 이기고
    •영국을 이기고
    •미국을 이겨야 된다.
    이것이 우리의 도전의 대상인 것이다.
    •은밀하고 •치밀한 전략과 전술로
    각고의 인내와 과감한 실행력이 있는
    사람들만이 이루어 낼 수 있는
    도전이고 성취인 것이다.
    부자되시기바랍니다.💕💕
  • 답댓글 작성자가라치코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24.02.16 이제 완연한 봄 기운을 느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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