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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르농 지베르니에서 기차로 루앙에 도착해 시가지를 걷다!

작성자가라치코|작성시간24.02.28|조회수89 목록 댓글 2

 

베르농 지베르니에서 기차를 타고 서쪽에 고도 루앙에 도착해 시가지를 구경하다!

 

 

5월 25일 파리 생 라자르역 에서 기차를 타고 베르농 지베르니 Vernon- Giverny 역에서

내려 코끼리 열차를 타고 센 강을 건너 지베르니 Giverny 마을에 도착해 모네의 집

Les Jardin et Maison de Claude Monet 아뜰리에와 정원에 수련이 핀 연못 을 구경합니다.

 

 

 

그러고는 끌로드 모네 거리를 걸어서 인상파 미술관 Musee des Impressionismes 을 보는데

두군데 모두 일본 그림 우키요에 가 많으니... 1865년 브라크몽 이 일본에서 수입된

도자기 포장지로 사용된 우키요에(浮世繪(부세회) 라고 불리던 호쿠사이의 민화 

조각을 발견해 마네, 드가등 친구에게 돌린게 유럽 인상파 탄생 의 발단이 되었다고 합니다.

 

 

이후 새 것을 찾던 인상파 화가들에게 자포니즘 (Japonism: 일본 미술붐)이 크게 번졌으니

고흐 는 자기 방을 우키요에 그림으로 장식했으며 귀를 자른후 그린 “자화상”에도

배경은 우키요에 그림이 덮고 있으며 모네 는 부인 카미유 를 모델로 “일본옷을

입은 여인”을 그렸고 우키요에 "오하시의 아타케 소나기" 를 모방해 다리 그림을 그립니다.

 

 

 코끼리 열차를 타고 베르농 지베르니 로 돌아와서는 오래된 시가지를 구경하고는 베르농

지베르니 Vernon- Giverny 역으로 돌아오는데 역에는 일본그림 우키요에 가 도배하듯

걸렸으니 프랑스의 인상파가 일본 우키요에의 영향을 받아 완성되었다는 사실을 실감합니다.

 

 

 

그러고는 베르농 지베르니역 에서 루앙 으로 가는 오후 05시 07분 르아브르행 기차 

오르는데 이번 인터 시티 기차 는 좌석 번호가 없으니 그냥 빈 좌석을 찾아 앉습니다.

 

 

기차는 푸른 들판을 서쪽으로 달려 오후 5시 53분 루앙 리브드로테역 Rouen-Rive- Droite

에 도착하기로 배낭을 메고 내리는데 좌석에 누가 "지갑" 을 흘리고 내렸네요?

 

 

 

 

해서 지갑 을 주워서 들고 내려서는 마침 기차 차장 이 보이기로 전해주는데 이번

여행에서 스페인 남쪽 바다 가운데 테네리페섬 테레리페 공항

앞 버스에서 내린 사람의 스마트폰 을 주워서 건네준 이래 이게 두번째인가 합니다!

 

 

 

루앙역 을 나와서는 역 앞 광 맞은편에 자리한 우리가 인터넷으로 예약한 아스트리드 호텔

Astrid Hotel : Place Bernard Tissot  로 들어가는데 여긴 더불룸이 1박 54.7 €

이니 싼 편인데 가족이 운영하는 작은 호텔로 늘 그러하듯 No Smooking Room 을 외칩니다.

 

 

 

배정 받은 11호 방으로 들어가서는 제일 먼저 확인하는게 휴대한 전기 남비며 또 휴대폰과

디카를 충전 해야 하니 전열기를 꼽는 소켓 을 확인하는데 어찌된 셈인지 전원이

없기로 다시 내려가 리셉션에서 아주머니에게 Change Room! 이라고 말해 다른

방으로 바꾸었는데 올라가 보니 한군데 소켓이 있으나 꼽아도 전기가 들어오지 않습니다.

 

 

다시 내려와 새로 바꾸어 달라고 말하는데 이번에도 소켓이 없으면 호텔을 바꿀

각오로 강력하게 요구 하니 26호 방을 주는데 올라가니 이 방에는 앞 선

방과는 방향과 구조가 완전히 다르니, 소켓이 3군데나 있고 꼽아보니

전기도 잘 들어오는지라 만족하는데.... 앞서 두 방은 왜 그런지 알 수가 없네요?

 

 

 호텔을 나오니 이슬비가 내리는지라... 우산을 쓰고 남쪽에 센 강을 향해 천천히 걸으니

비가 오는지라 디카를 찍기가 어려워 사진이 많지 않은게 아쉬운데, 서양 사람들은

이정도 이슬비는 아무렇지도 않은양 그냥 맞고 다니네요?  옛날 베트남 후에 왕릉에

소나기가 내리자 한국인들은 기겁해서 냅다 뛰는데 서양인들은 그냥 맞으며 구경하더군요?

 

 

 

큰 도로를 건너 잔다르크 거리 Rue Jeanne d'Arc 를 따라 내려가니 왼쪽 골목에는

잔다르크 탑 Tour Jeanne d'Arc 을 지나니 멋진 건물은 도자기박물관 

 Musee de la Ceramique 인 것 같고, 나무가 우거진 곳은 베로드렐 광장

Sq. Verdral 이며 그 뒤편에는 루앙 미술관 Musee des Beaux Arts de Rouen 입니다.

 

 

 

이 도시 루앙 Rouen 은 노르망디의 중심 으로 멀리 로마 시대 에서 기원하며

세느강이 도심을 흐르는데..... 내륙으로 120km 나 깊숙이

들어와 있지만 원양선이 들어올 수 있는 전국 3위의 주요한 항구 라고 합니다.

 

 

루앙 Rouen 은 911년 노르망디 공국의 수도 가 되었고 17세기에는 전국 제2의

도시로 성장해 도자기, 유리제조, 섬유 및 인쇄업에 제지공업이

발달하여 프랑스가 소비하는 인쇄용지 대부분을 공급하고 있으며

루앙 노트르담 대성당 은 고딕 양식의 성당으로 꼽히는데 현재 인구는 10만 입니다.

 

 

 

생마클루 성당 은 플랑부아양 양식이고 생투앙 성당 은 아름다운 창문으로

유명하며 고딕 양식의 재판소 청사와 시계탑 이 있고 회화와 도자기

박물관 에는 17세기의 프랑스 회화작품과 루앙 자기 가 소장되어 있다고 합니다.

 

 

그외 17세기에 이 도시 출신의 위대한 시인으로 피에르 코르네유 (Pierre Corneille) 

있으니 그의 희곡 “르 시드(Le Cid)”는 세계적으로도 유명한데... 스페인을

700년간 통치하던 이슬람 무어인 을 몰아내고 기독교왕국을 회복하는 레콩키스타

Reconquista 에서 최고의 인물로 기독교 세계의 영웅 엘시드 El Cid 를 그런 것 입니다.

 

 

 

희곡 “르 시드(Le Cid)”에서 주인공 로드리고 의 부친과 그의 연인 시멘 의 아버지는

왕자의 스승 자리를 놓고 자존심 대결을 벌이다가 원수지간 이 되니 연인도

집안의 명예와 사랑 사이에서 딜레마 에 빠지는데 사랑을 택하자니 가문의

명예 를 더럽히고 집안을 택하자니 사랑을 버릴 수밖에 없는 처지에 빠진 것 입니다.

 

 

 

이슬람 발렌시아 왕국 을 점령해 기독교왕국을 세우는 로드리고(엘 시드) 는 독백을 통해

자신의 고민을 표현하는데“내 안의 격렬한 투쟁이라니! 내 사랑과 명예가 서로 대치

되다니. 부친의 복수를 하자니 연인을 잃겠고한쪽은 심장을 달구고 한쪽은 팔을 붙잡네”

 

 

뒤이은 시멘 의 대사는 로드리고의 독백에 대한 화답과도 같습니다.“내 명예를 지키고

고통을 끝내기 위해, 그를 고소하고, 그를 죽이고, 그를 따라서 죽으려네.”

 

 

루앙 은 피에르 코르네유 말고도 보봐리 부인을 쓴 소설가 G.플로베르 의 이름을 딴

박물관이 있고, 또 이 도시는 100년 전쟁 시 영국과 프랑스 사이의

분쟁지였으며.... 1431년에 성녀 잔 다르크 가 가톨릭 교회의 종교

재판에서 사악한 마녀임이 들통(?) 나서 화형에 처해진 도시 이기도 합니다.

 

 

게르만 프랑크족이 로마령 갈리아(프랑스)를 차지하고 세운 메로빙거 왕조 는 궁재 피핀이

무느뜨리고 카롤링거 왕조 를 세우니 아들 샤를 마르텔 은 독일과 북이탈리아 까지

대 왕국을 건설했으나 루트비히 1세를 거쳐 손자 넷은 왕국을 분할해 서로 골육상잔 

벌이다 843년에 베르됭조약으로 셋으로 나뉘게되니 프랑스와 독일 그리고 북이탈리아 입니다.

 

 

10세기 초 노르만(바이킹) 데인족(덴마크 지방) 의 망명객 롤로 는 운명을 함께할 자들을

모아 바다를 건너 잉글랜드를 급습 했고 프리슬란트를 속국 으로 만든후 890년에

바이유 백작 영토로 원정해 백작의 딸과 결혼 했으며 이듬해 프랑스 리주를 약탈 했습니다.

 

 

이후 노르만족 바이킹은 600척의 배 를 타고는 프랑스 해안에 상륙 했으니 한 무리는

루아르강을 따라 낭트 까지 올라가며 기옌과 앙주를 점령 하고 주력은 센강을

따라 올라와 이 도시 루앙을 점령 하고는 센 강을 따라 계속 진군해 파리로 쳐들어

가니 훗날 위그 카페의 증조부 강성공 로베르  파리 시테섬을 방어하다가 전사 합니다.

 

 

프랑스왕 샤를 2세는 공포에 질려 파리(시테섬)를 버리고 도망쳤는데 성 디오니시우스의

유해를 지키고자 북쪽 생드니 수도원에 요새 를 차리고는 노르만족에 협상 을

제의하니 바이킹 해적 들은 은 7천리브르를 받는 댓가로 강화를 하고는 철수해

노르망디로 돌아가는데 브르타뉴는 이 노르만족과 연합해서는 르망을 점령 하기도 합니다.

 

 

911년 프랑스왕 샤를 2세 는 노르만의 수장 롤로에게 은 7천리브르 외에도 노르망디

땅을 넘겨주고 공작 작위를 주었는데 후손 노르망디공 윌리엄 1세 는

1066년 잉글랜드를 정복하여 앵글로 노르만왕조(영국) 를 세웠으며 루앙 

1106년 영국의 봉토가 되었고 백년전쟁 중인 1420∼1450년에는 영국령 이었습니다.

 

 

노르만 데인족 롤로 는 루앙 을 견고한 요새로 만든후 잉글랜드와 브루타뉴 그리고

프랑스 중심부를 공격 하는데 게르만 프랑크족인 프랑스왕 샤를 3세 는

클레르몽, 르망, 낭트, 앙제와 사르트르에서 토착 갈로로만인 주민들이 들고

일어나 소요를 일으키자 왕권 안정을 위해 침략자인 노르만족과 손을 잡기로 합니다.

 

 

롤로가 그리스도교로 개종하면 기셀라 공주를 신부로 주겠으며 노르망디지역을 떼어주고

브루타뉴도 노르망디의 봉토 로 내어 주겠다고 타협이 되니 911년 솜강에서 생마로

성문에 이르는 땅을 하사받아 노르망디 공작 이 되니 생클레르쉬르앱트 협약으로 불립니다.

 

 

그 자리에서 롤로는 프랑스 샤를3세에게 충성을 맹세 하는데 반 야만인에다가 자존심이

높은지라 왕에게 무릎을 꿇고 발에 입을 맞추는 의식은 거부 하고 부하에게

대신 하게 하니 이 부하도 내키지 않는지라 무릎을 꿇지 않고 서서 입맞추려

왕의 발을 잡아당기니 샤를 3세는 뒤로 넘어져 바닥에 구르는 사건 이 발생 합니다.

 

 

노르만 데인족 롤로등 바이킹 전사 들은 자신들의 오랜 신 외에는 다른 신이나 인간에게

머리를 숙이고 무릎을 꿇는 것을 한사코 거부한 것이니 자존심이 높았던 것을

알수 있는데, 롤로는 노르망디 공작에 루앙 백작 이라 불리기도 하니 그는 파리

귀족 로베르에게서 성을 받아 로베르 라고 칭하며 노르망디와 브르타뉴를 통치 했습니다.

 

 

노르만족 바이킹 롤로, 바뀐 이름 로베르는 루앙 도시를 재건하고 수도원을 보수 했으며

땅을 갈고 도둑을 없앴으니... 도둑을 없애는 방편으로 도로의 가로수에

금팔찌를 매달아 놓고 만지지 말라 명했으니 팔찌는 3년 까지도 그대로 있었다는데

노르만인들이 힘들때 외치는“Haro 하로 ”“아 롤로 Ah Hrolo" 의 탄식 이었다고 합니다.

 

 

 

파리를 지키다가 전사한 강성공 로베르의 후손인 외드 는 프랑스왕이 노르만에 굴복하고

또 독일왕에게 저자세를 취하는데 반대해 프링스 토착인과 귀족들의 추대로 왕위 

올랐으나 영국으로 도망친 왕자가 돌아와 독일 협조를 받아 샤를 3세로 왕위 에 오르자

물러났지만 결국 동생 로베르가 세력을 키우고 그 아들 위그 카페는 새 왕조 를 열게됩니다. 

 

 

샤를 2세의 장조카 피핀 은 노르만족과 동맹해 자기 영토를 회복할려고 했으나 은 4천

리브르만 날렸으며, 샤를 2세 는 다른 무리가 점령한 아키텐 을 회복하는데만도 5천

리브르를 추가로 지불해야 했는데, 이런 돈을 마련하기 위해 프랑스왕은 백작이나

주교등에게는 1수 그리고 자유민에게는 1드니, 농노에게도 그 반 을 부담시켜야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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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댓글 리스트
  • 작성자카페지기 | 작성시간 24.02.28
    내가 웃어야 내 행운도 미소짓고,
    나의 표정이 곧 행운의 얼굴이다.
    여유를 찾는 행복한 시간 만드시길 바랍니다.
    당신에게 오늘 좋은 일이 일어날 것이다.💖💖
  • 답댓글 작성자가라치코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24.03.01 여유를 가진다면 세상이 편안하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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