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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란드 3 - 크라쿠프에 도착해 그린발트전투 동상을 보다!

작성자바이칼3|작성시간24.03.20|조회수85 목록 댓글 2

 

폴란드 3 - 바르샤바에서 기차로 크라쿠프에 도착해서 그린발트 전투 동상을 보다!

 

 

5월 9일 슬로바키아 브라티슬라바 에서 라인에어 비행기로 덴마크 코펜하겐 에 내려 스칸디나비아항공

으로 트랜짓해 18시 10분에 폴란드 수도 바르샤바 공항 Warszawa /Warsaw 에 도착해 버스를

타고 바르샤바역 에 도착하여 배낭을 메고 30분을 걸어서 Radisson Blu Sobieski 호텔에서 1박합니다.

 

 

5월 10일 아침에 호텔에서 주는 뷔페식 아침을 먹고는 걸어서 바르샤바 기차역 으로 가는데.... 

25분을 걸어서 바르샤바 중앙역 에 도착해서는 기차표를 끊어 9시 40

기차를 타니 남쪽으로 평원을 달려서 12시 20분에 크라쿠프 Krakow Glowny 역에 도착합니다.

 

 

크라쿠프 기차역을 빠져 나오니 광장으로 붉은색의 오래된 건물 들이 늘어서 있어 중후한

느낌을 주는데.... 크라쿠프 도시의 기원은 4세기 까지 거슬러 올라가며 학문,

문화예술 의 중심지에다가 경제 요충지로 1040년 ~ 1596년에는 폴란드의 수도 였습니다.

 

 

현재 인구는  76만명이고  1978년에 유네스코는 도시의  역사적 가치를 인정하여  구

시가지 전체를 유네스코 세계유산 으로 지정했으며..... 폴란드 남부에 비스와강에

접해 고풍스러운 유럽 문화 를 간직한 도시이면서도 5개의 자연 보호 구역이 있습니다.

 

 

수도인 바르샤바는 제2차 세계대전 때 도시 전체가 파괴 되어 구시가지를 포함한 도심지 전체가 다 재건된

이지만, 크라쿠프 는 폴란드 침공당시 시장이었던 스타니스와프 클리메츠키 (Stanisław Klimecki)

의 용감한 행동그리고 폴란드 총독부의 수도가 되었다는 점 덕분에 전면적인 파괴는 면할 수 있었습니다.

 

 

그락(Grakch) 왕 이  통치할 때 바벨 언덕 아래 동굴에는 용 (Smok Wawelski) 이 살면서 매일 기어

나와 가축들을 잡아먹었는데.... 용을 달래기 위해 왕은 처녀들을 재물로 바쳐야 했으니,

용사들에게 용을 물리치는 자 는 큰 상을 주고 공주와 결혼시켜 주겠다고 약속했지만 모두 실패합니다.

 

 

하지만 스쿠바(Skuba) 라는 신발공이 유황을 양가죽에 넣고 동굴 앞에 두자 용이 잡아먹고는 갈증과 고통이

엄습하니 강물을 퍼마셨는데너무 많이 마신 나머지 배가 터져 죽고 공주와 결혼한 스쿠바는 왕의 이름

따서 크라쿠프  라는 도시를 세웠다고는데.... 용은 6세기 후반 침입했던 아바르인 을 상징한다고 해석합니다.

 

 

바르비칸 성 플로리안 문 krakow-barbican - 중앙 광장 직물회관 rynek Gfowny -

성 마리아성당 야기엘론스키 대학 양쪽으로 작은 성당과

옛 건물들을 지난다 바벨 성 wawel castle - 카지미에시 쉰들러 법랑공장 kazimierz-

 

 

도로 한 복판 광장에 돌로 된 큰 탑 이 서 있으니 Grunwald 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고 탑의 정상부에는 말을 탄

왕이 보이며 4면에 동상들이 새겨져 있는데....  주로 중세 기사 들로 그 중에는 드러누운 기사도 보입니다?

 

 

Grunwald (그룬발트 Battle of Grunwald 라면 1410년에 벌어진 타넨베르크전투 를 말하는 것 같은데....

폴란드 그룬발트(타넨베르크에서 벌어진 전투를 지칭하는 것으로 역사적으로 유명한 3개의 전투 가 있습니다.

 

 

타넨베르크 전투 는 역사상 3차례 있었으니 1410, 1914년 1차대전, 1944년 2차대전 으로 여기

동상은 1410년 폴란드-리투아니아 연합군 이 폴란드 그룬발트와 스텐발크(타넨베르크)

주변에서 십자군 독일 기사단국과 치른 전투 로 북방 십자군의 종결을 알리는 상징적 전투 입니다.

 

 

국가마다 지칭하는 명칭은 다르니, 폴란드는 그룬발트 전투 라고 하고 리투아니아는 잘기리스

전투라 하며 독일에서는 제1차 타넨베르크 전투 라 부르는데..... 당시

리투아니아는 노르만(바이킹발트신화 신앙을 믿었던 동유럽 최후 비기독교 왕국 이었습니다.

 

 

따라서 종교적 열의와 비기독교인 노예사냥 수익에 눈이 돌아간 십자군 튜튼 기사단 에 자주 침공을 당했는데,

더 이상 버틸수 없었던 리투아니아 대공 브와디스와프 2 야기에우워(요가일라) 는 1386년 2월 카톨릭

으로 개종하고 폴란드 여왕인 앙주 왕조의 야드비가와 결혼해 폴란드와 리투아니아는  동군연합 이 됩니다.

 

 

가톨릭 튜튼 기사단이 얼마나 주변국의 미움과 원성 을 사고 있었는지 알수 있는데.... 폴란드

와 리투아니아는 서로 치고 박던 원수 사이였으며,  리투아니아 자체도 튜튼 기사단과

타타르인들의 침공에 맞서.... 리투아니아인과 루스인(러시아인들이 연합한 국가였습니다.

 

 

튜튼 기사단 은 야기에우워가 폴란드의 왕관을 노리고 거짓으로 개종했다고 주장하면서 계속 공격 했으며

야기에우워의 사촌으로 리투아니아 대공을 노리고 봉기한 비타우타스(Vytautas) 와 손을 잡기도 합니다.

 

 

다만 튜튼 기사단 입장에서는 그런 무리수 라도 둬야 했으니.... 리투아니아를 공격하지 못하면 십자군을

표방한 튜튼 기사단은 정복할수 있는 나라가 더 이상 없으니 그대로 고사할 수 밖에 없기도 했습니다.

 

 

야기에우워 는 비타우타스와 내전 끝에 협정을 맺어 리투아니아 통치권을 사실상 그에게 넘기고

결속을 공고히 했으며,  리투아니아는 토크타미쉬 칸과 손잡고 러시아를 속국으로

삼았던 킵차크 칸국을 공격 하는데 큰 관심을 두고 있었으므로...... 후방을 공고히 

필요가 있었으며그 때문에 튜튼 기사단에 사모기티아 까지 넘겨주고 우호관계를 쌓기도 합니다.

 

 

그러나 1409년 사모기티아에서 튜튼 기사단에 대한 반란 이 일어나자 리투아니아는 반란을 후원했고,

새로이 선출된 튜튼 기사단장 울리히가 대군을 거느리고 다시 리투아니아를 공격

하여 큰 피해를 주자 야기에우워는 즉시 반격을 하여 튜튼 기사단을 도처에서 요격 하는데 성공합니다.

 

 

휴전 협정이 맺어지고그 기간 양군은 최대한 전력을 끌어 모았으니 폴란드-리투아니아 연합군은 헝가리왕

지그몬드에게 황금 을 보내자,  지그몬드는 곧 이 연합군을 치지 않겠다는 약속 을 했으며 한편

연합군은 보헤미아 왕국의 용병단 도 끌어들였는데이때 용병대장으로 참전한 사람이 바로 얀 지슈카 입니다.

 

 

1410년 7월 9폴란드-리투아니아 연합군은 프로이센으로 진군 하며 대대적인 역공을 펼치기

시작했으니.... 연합군이 독일 기사단국의 수도인 마리엔부르크 로 진출하자 기사단은

황급히 군대를 정비해 최종 방어선인 드레빈츠강 유역 방어선을 강화하니,  연합군은

드레벤츠강을 지나기 위해 동쪽으로 우회했고기사단은 연합군과 평행하게 강을 따라 이동 합니다.

 

 

강이 급격히 북쪽으로 꺾이는 지점에서 기사단은 강을 건너 방어적인 대형 을 취했으니 튜튼 기사단은

그룬발트(Grunwald) 마을 근처에연합군은 탄넨베르크 마을에 진을 쳤는데 기사단은 습지로

둘러싸인 지점을 얻을 수 있었으니 연합군은 5마일을 이동해 병력을 매복시킬수 있는 숲 을 차지합니다.

 

 

리투아니아 기병대의 선제공격 으로 양군 사이에 격전이 벌어졌으니 노궁과 창병으로 리투아니아 기병대를

격퇴시킨 기사단은 폴란드군과의 접전 에 돌입했는데 양군의 기병대가 혼전을 거듭하는 와중에 기사단

소속 디폴트 폰 쾨커리츠 라는 기사가  홀로 브와디스와프 2세를  향해 돌격 하여  거의 그를 죽일뻔 합니다.

 

 

이때 후일 크라쿠프 추기경이 되는 즈비그니에프 올레시니츠키 가 그를 쓰러트려 브와디스와프가

겨우 목숨을 건지는 위기 상황이 벌어지기도 했고,  폴란드 왕기가 탈취 되기도 했으나

다시 폴란드군이 탈환하였고 기사단은 배후로 기병대를 진출시키기도 했으나 역시 요격당합니다.

 

 

그때 패주하던 리투아니아군이 다시 돌아와 기사단에 돌격 을 가했으며 측면이 뚫리면서 기사단의 전열

이 붕괴 하기 시작했으니 이윽고 폴란드-리투아니아 연합의 총공세로 기사단은 완패했는데,

이때 기사단의 주력군이 상당수 붕괴 하고 기사단장 울리히를 포함하여 고위 간부들도 대거 전사 합니다.

 

 

튜튼 기사단 병력 2만 7천명 중에 8천명이 전사하고 1만 4천여명이 포로 로 잡혔으며,

기사도 400명이나 죽었으니 말 그대로 박살이 난 셈이었고....

폴란드-리투아니아 동맹군은 3만 9천명 중 5천명이 전사하고 8천명이 부상 당했습니다.

 

 

기세를 탄 연합군은 독일 기사단국 수도 마리엔부르크도 공격 했으나 공성엔 실패하여 퇴각했으며

이후  1차 토룬 조약이 맺어져 기사단이 사모기티아와 도브리진 지방을 포기 하는 것으로

결말이  났지만..... 기사단의 군사력은 큰 손상 을 입었고 뒤이어 권위와 재정 형편도

급속히 약화되기 시작했으니 이후 폴란드가 전쟁을 계속 벌이자 더이상 버티기 어려워집니다.

 

 

기사단의 봉신들이 폴란드에 가담 하는 사태가 벌어지자 기사단은 마침내 굴복하니 1466년 기사단

은 2차 토룬 조약을 맺고 포메른과 비스와강 양안 및 바르미아(에름란트의 주교 관할구를

폴란드에 넘겨주었으며 프로이센의 나머지 지역은 계속 보유 했으나 그 지역에서 기사단장의

지위는 폴란드 왕의 봉신 으로 격하되었으니.....  이 전투는 튜튼 기사단 몰락의 시발점 이 되었습니다.

 

 

전투 중 리투아니아군이 패주했다가 복귀해서 기사단의 측면을 무너뜨린 부분에 대해선 해석이 엇갈리는

.... 처음부터 리투아니아군이 거짓 후퇴 를 계획했고 이것이 성공했다는 해석과리투아니아

군이 정말로 전열이 무너져서 패퇴  했다가 겨우 수습해서 역습에 성공한 형태라는 해석으로 나뉩니다.

 

 

폴란드와 리투아니아 쪽에서는 말 그대로 나라를 구한 위대한 승리 로 여겨지고 있으며....

부가 효과로 기독교를 받아들임으로써 서구 세계의 선진문물 을 직접 받아들일 수

있게 됨으로써 문화적으로 뒤쳐져 있던 리투아니아가 문명국 으로서 인정받게 된

계기가 됐으니 오늘날까지도 리투아니아는 유럽에서 알아주는 독실한 가톨릭 국가 입니다.

 

 

폴란드와 리투아니아는 연합 왕국 을 구성하게 되면서 국가의 역량 자체가 훨씬 커졌으니

지도만 봐도 당시 리투아니아 대공국의 영토가 폴란드 왕국의 2배 가 넘었는데,

만약 서로 다른 나라로 지냈다면 국경을 마주 댄 이상 얼마 안가 적으로 돌아섰을

것이며... 결국 양국은 중소 국가 이상으로 발전하지 못한채 사이좋게 자멸 했을 것입니다.

 

 

이런 가상 적국 1순위를 평생의 동반자 로 끌어들임으로써 서로 윈윈전략 이 된 것인데그리고

역사적으로 앙숙이었던 독일 기사단을 완전히 복종 시키며 그후 200여년간  중부

유럽의 강대국 으로 군림하게 될 폴란드리투아니아의 전성기의 초석을 다지게 된 전투입니다.

 

 

얼마나 자랑스러운지 양국에서는 해마다 이 날을 기념해서 리인액트 같은 각종 행사를 거창하게 하며

미디어 매체에서 크게 다루는데.... 2010년에 만들어진 그룬발트 전투 600주년 기념 영상은 국뽕이

최고조에 달했음을 보여주니  19세기 화가 얀 마테이코 가 1878년에 민족 기록화 로 그리기도 했습니다.

 

 

당시는 리투아니아 대공국 소속이었던 벨라루스 에서도 이 전투를 성대하게 기념하고 있는데중세 갑옷과

무기를 차려입고 리인액트먼트 를 하면서 그룬발투(Grunwald) 전투 승리 를 기리는 문화가 있습니다.

 

 

독일에서는 조상(동프로이센이 크게 패배한 전투 라 좀 쉬쉬하는 모양이니.... 오히려 이쪽에선

1914년에 있었던 2차 타넨베르크 전투 가 더 유명하며 그리고독일 이외의 모든 나라는

타넨베르크 전투라고 하면 1914년의 것을 지칭하지....... 이 1410년 전투를 지칭하지는 않습니다.

 

독일 극우 쪽에서는 오히려 훨씬 열세의 병력으로 버틴 기사단 이 더 대단한 것이며 쪽수로

밀어붙여서 이긴게 뭐 자랑이냐 하며 정신승리를 자행 하기도 하지만사실 이 전투

자체가 튜튼 기사단이 십자군 전쟁에서 빠진 뒤 다른 곳에서 세력을 확장해 보려고

시작한  '북방 십자군의 최종 종착역 이었기 때문에 저런 행동들이 지지를 얻지는 못합니다.

 

 

리투아니아가 기독교로 개종 함으로써 사실 이교도 토벌이란 명목이 사라졌음에도 불구하고 그동안

이루어 놓은 영토와 재물이 아까워서라도 전쟁을 계속 했기에 본래의 목적을 상실해버렸으며,

4차 십자군도 그렇고 재력이 없는 무력 집단이 된 십자군인지라 탈선 의 가능성은 언제나 있었으며

정교회를 신봉해서 종파가 달랐긴 하지만.... 기독교 국가인 노브고로드 공화국을 공격하기도 했습니다.

 

 

기독교문화권임에도 불구하고 리투아니아에서는 십자군을 좋게 보지 않으니 십자군을 신의 대리인으로 봉사

하는 선하고 숭고한 전사 로 묘사하는 서유럽과 달리 리투아니아에서는 수백년동안 자신들의 삶의 터전을

불사르고 약탈한 침략자 로 표현하며 전래동화나 설화들에 괴물로 변하는 독일 기사단 이라던가 십자군의

침공에 고통받고 맞서 싸우는 민중의 이야기가 많으니 가톨릭 튜튼 기사단은 노예 사냥에 눈이 먼 자들 입니다.

 

 

러시아 쪽에서도 민족주의적 관점에서 역사왜곡 을 하니 러시아의 직계 전신이라고 보기 어려운 스몰렌스크

공국에서 지원군 좀 파병했던 것을 가지고 폴란드리투아니아 뿐만 아니라 러시아도 같이 싸웠기 때문

2차 대전의 독소 전쟁 보다 500년 앞서....  게르만족의 침공 에 맞서 슬라브족을 지킨 전투 라고 주장합니다?

 

 

러시아는 역사적으로 보면 독일계 침략자 에 매우 적극적으로 협력해 폴란드를

괴롭혔으니.... 폴란드 대홍수 부터 시작해 폴란드 분할나폴레옹 전쟁,

폴란드 침공 등 독소전쟁 이전에도 폴란드를 도와준 적이 한번도 없었습니다!

 

 

수백년 동안 폴란드를 침략하고 압제한 저  러시아가    같은  슬라브족”   운운 하는건

가당찮은데.....  튜튼 기사단 으로 부터 노브고로드 공화국을 지킨

알렉산드르 넵스키 라면 독일인으로 부터 러시아를 수호한 영웅이라 할수도 있겠습니다.

 

 

이런저런 옛일을 회상하며 걸어서 우리 앞을 가로막고 선 긴 건물을 따라 돌아가니 앞이 탁 트이고 붉은색

돌로 쌓은 둥근 원형의 요새 가 앞에 나타나는데.... 이른바 바르비칸 krakow-barbican- 인가 봅니다?

 

 

바르비칸은 외성(外城)  으로 주 성벽에서 바깥쪽으로 떨어져 나와   주 성벽과 정문인

성 플로리안 문 공격을 어렵게 만들어서 방어의 효율을 높이는 역할을 했다고 합니다.

 

 

중세 말에서 근세 초에 이르기 까지 유럽의 요새화가 잘 된 도시들은 대부분 바르비칸 을 가지고

있었는 데.... 오랜 세월 그리고 근대화 도시계획으로 거의 없어지고 원형이 잘 보존

된 것은 크라쿠프가 유일 하니 15세기 중반 개축됐다고 합니다.  나의홈 : cafe.daum.net/baika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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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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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카페지기 | 작성시간 24.03.20 내가 웃어야 내 행운도 미소짓고,
    나의 표정이 곧 행운의 얼굴이다.
    여유를 찾는 행복한 시간 만드시길 바랍니다.
    당신에게 오늘 좋은 일이 일어날 것이다.💖💖
  • 답댓글 작성자바이칼3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24.03.21 온갖 세상사에도 마음을 다스려
    편안하게 웃을수 있다면
    그건 점차 성불에 다가간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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