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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란드 4 - 크라쿠프 그린발트전투 동상을 보고 중앙광장에!

작성자바이칼3|작성시간24.03.26|조회수96 목록 댓글 2

 

폴란드 4 - 크라쿠프의 그린발트 전투 동상을 보고 바르비칸을 지나 중앙광장에 가다!

 

 

5월 10일 폴란드 바르샤바 Radisson Blu Sobieski 호텔에서 주는 뷔페식 아침을 먹고 걸어서 바르샤바

중앙역으로 가서  9시 40분 기차를 타니 12시 20분에 남쪽 크라쿠프 Krakow Glowny 역에 도착합니다.

 

 

폴란드 남부 크라쿠프 도시의 기원은 4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가며 학문문화예술 의 중심지

이자  경제 의 중심도시로 1040년 ~ 1596년에는 폴란드의 수도 였으며 구 시가지

전체는 유네스코 세계유산이고 비스와강에 접해 고풍스러운 유럽 문화를 간직한 도시입니다.

 

 

수도 바르샤바는 제2차 세계대전때 도시가 전부 파괴 되어 재건된 것이지만 반면에 크라쿠프는

폴란드 침공당시 시장이었던 스타니스와프 클리메츠키 (Stanisław Klimecki) 의 용감한

행동그리고 폴란드 총독부의 수도가 되었다는 점 덕분에 전면적인 파괴는 면할 수 있었습니다.

 

 

그락 (Grakch) 왕때 바벨 언덕 아래 동굴에  (Smok Wawelski)이 기어나와 가축들을 잡아먹으니용을

달래기 위해 처녀들을 재물로 바쳐야했는데.... 스쿠바 (Skuba)는 유황을 양가죽에 넣어 동굴

입구에 던져두니 용이 잡아먹고 갈증과 고통이 엄습해 강물을 많이 마셔 배가 터져 죽고 공주와

결혼한 스쿠바는 왕의 이름을 따 크라쿠프라는 도시를 세웠다는데 용은 침력자 아바르인 을 상징한답니다.

 

 

큰 탑에 Grunwald 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고 동상이 여럿 섰는데 Battle of Grunwald 라면 1410년에

벌어진 타넨베르크 전투 를 말하는 것 같으니... 폴란드 그룬발트(타넨베르크주변에서 벌어진

전투를 지칭하는 것으로 역사적으로 1410, 1914년 1차대전, 1944년 2차대전 3번의 전투 가 있습니다.

 

 

1차인 1410년에는 폴란드-리투아니아 연합군 이 폴란드 그룬발트와 스텐발크 (타넨베르크)

주변에서  독일 기사단국 과 치른 전투로....... 여기서 승리함으로써 폴란드 와

리투아니아는 이후 수백년간 번영 하였으며 북방 십자군의 종결 을 알리는 상징적 전투 입니다.

 

 

2차는 제1차 세계 대전 중인 1914년 8월 26일 부터 31일 까지 동프로이센 지역에서 벌어진 독일 제국군 과

러시아 제국군 의 전투이니 실제 전투가 발생한 곳은 타넨베르크 로 부터 동쪽으로 30km 떨어져 있습니다.

 

 

1차대전 초기 독일제국 육군은 프랑스등 서부전선을 먼저 이긴뒤전쟁동원능력이 떨어지는 러시아 동부전선

은 다음에 공격한다는 슐리펜 계획 에 따라 대부분의 육군 병력을 서부전선에 집중 했는데, 예상과 달리

러시아 제국은 미흡한 병력 동원 및 군수장비 에도 불구하고..... 신속하게 동프로이센 지역에 공세 를 취합니다.

 

 

러시아군 총사령부는 80 의 병력을 둘로 나누어 동프로이센 방면과 헝가리 갈리시아 로

진격하도록 했으니 8월 1538개 사단 40만의 북서전선군 은 1군과 2군으로 나뉘어

마주리안 호수를 기준으로 북쪽과 남쪽으로 진격하자.... 독일은 동프로이센 지역에

육군 11개 보병사단과 1개 기병사단으로 구성된 16만의 육군 제8 이 배치되어 있었습니다.

 

 

8월 17일 독일 제8군 1군단은 러시아 제1군을 스탈루포넨에서 격퇴했지만 중과부적이라 사령관 프리트비츠

는 동프로이센을 포기 하고 비스툴라강 서안으로 철수해 방어거점으로 삼자고 주장했으나동프로이센은

근대 독일의 정신적 고향이자 독일제국 귀족들의 영지겸 거주지 였기 때문에 무슨 일이 있더라도 사수

해야만 했던 독일군 수뇌부는 사령관에 파울 폰 힌덴부르크참모장에는 에리히 루덴도르프를 임명합니다.

 

 

8군은 1개 사단으로 북부 러시아 제1군 40만 을 막는 동안 나머지 병력으로 남방의 제2군 을 잡는다는 허무

맹랑한 작전계획을 세우니.... 러시아 제1군은 초전 승리후 굼비넨 지역에서 진격을 정지했고너무 이른

동원으로 장비를 갖추지 못했던 러시아 제2군은 호수 남방의 소택지에서 진격에 난항 을 거듭하고 있었습니다.

 

 

이 작전계획은 러시아군의 명령문을 입수 했기에 입안할수 있었으니 러시아군의 통신 보안은 매우 열악 하고

안이한 수준이라? 8군 참모 호프만의 계획을 들은 힌덴부르크와 루덴도르프는 지친 상태인 제2군을 먼저

공략하기로 결정하고 제1기병사단이 러시아 제1군을 견제 하는중 제1,3 예비군단이 남하해 제20군단과

합류해 러시아 제2군을 남쪽에서 포위하고 동시에 제1, 17군단이 북쪽을 틀어막는 거대 포위망 을 형성합니다.

 

 

8월 28러시아 제2군 40만이 포위 되자,  독일군은 때려 부수기 시작하니 2군사령관 알렉산드르

삼소노프는 1군에 지원 을 요청하였지만 사령관 파벨 폰 렌넨캄프는 무시 했으며....

참패한 러시아군은 전사 12만 5천명야포 500문 포획에 포로 9만명 에 달하는 큰 피해를 입었습니다.

 

 

2군을  휩쓴 독일 제8 은 기수를 렌넨캄프의 러시아 제1군쪽으로 돌렸으니  8군은 숨 돌릴 새 없이

굼비넨에 머무르고 있던 러시아 1군을 마수리안 호수로 밀어붙여 다시 한번 대 포위를 완성

했는데러시아는 12만의 병력과 500문의 대포를 잃었고 6만은 포로 가 되면서 처참히 붕괴되었습니다.

 

 

독일 군부가 동프로이센 방어에 과도하게 집착해 서부전선에서 기한내 도착하지도 못할 1

군단 병력을 차출해 동부로 보낸건.... 동프로이센은 독일 제국의 발원지 이자 발트해,

폴란드 방면을 동시에 공격할수 있는 전략적 요충지로 동프로이센이 밀리면

자연 방어선이 없는 서프로이센포메른포젠이 뚫려 수도 베를린 이 위협받기 때문이었습니다.

 

 

일본군은 현대전의 요소가 군수 보급의 물량과 화력과학 기술 에 달려 있다는 것 은 인식하고

있었지만 나라가 작아 역량 이 되지 못했는데..... 이 타넨베르크 전투 를 통해 양적

열세를 포위 섬멸을 통한 단기 결전 으로 해소할수 있고,  양적 열세를  '정신적

우세로 물질적 위력을 능가' 할 수 있다고 믿게 되어 훗날 간 크게도 2차대전을 일으키게 됩니다.

 

 

일본은 타란토 해전 도 연구했으니 2차대전때  영국은 이탈리아의 타란토를 공격하니 항공모함 함장

리스터 소장은 타란토항에 정박중인 이탈리아 군함 46척 을 향해 1940년 11월 11일 항공모함에서

어뢰를 장착한 항공기 21대 를 발진시키는데  급강하해 투하된 어뢰가 바다로 떨어져 군함 밑부분

정확하게 타격하는 기술이라....  야광탄을 쏜후 어뢰를 투하해 전투함 3척과 순양함 2척 을 대파합니다.

 

 

멀리 동방에서 이 타란토 전투를 철저히 연구 한 나라가 있으니 바로 일본 이라.... 일본 해군은 장교

를 타란토 현지에 파견 해서는 이 타란토 전투를 철저하게 연구해 1년 후인 1941년 12월 하와이

진주만 공격에 성공 하는데..... 이때도 하와이 진주만의 수심이 너무 얕은지라 비행기에서 투하한

의뢰를 미군 함정의 아랫부분에 정확히 타격하는 훈련을 사전에 수없이 해서 마침내 성공한 것입니다.

 

 

이 전투에 관련된 일화로  '러시아 1군 사령관 렌넨캄프와 2군 사령관 삼소노프 가 러일전쟁시 봉천전투의

패전 책임을 두고 주먹다짐 을 벌였는데.... 관전무관으로 파견되었던 독일군 호프만 중령 이 목격

하여 렌넨캄프가 삼소노프를 도우러 오지 않을 거라고 장담할 수 있었다는 이야기가 널리 퍼져 있습니다?

 

 

그런데 이 타넨베르크 전투에 고려인즉 조선인 의병들이 대거 참가 했다는 사실이 밝혀졌으니... KBS

취재진이 연해주와 중앙아시아의 고려인 가족들을 취재하던 도중대한제국의 참령이자 고종황제

의 시종무관인 김인수 를 비롯하여 구한말 일본군에 맞서 두만강 변에서 의병투쟁을 벌이다가 나라

가 망하자 러시아 시베리아 보병사단에 몸을 의탁했던 조선인 의병 들의 행적을 밝혀내어 보도 했습니다.

 

 

1915년에 블라디보스톡과 하바롭스크의 한인 3,000명 이 국적 취득 및 현역군 입대 의사를 밝혔다

(러시아 외무성 일지 1915년 12월 7),  1차 세계대전에 러시아군에 소집된 조선인

수는 장교 100명과 하사관 및 사병 4,034명 이었다 (1918년 블라디보스토크 일본 총영사 보고서)

 

 

노르망디에서 포로가된 독일군의 한국인 여부 는 사실 여부에 관해 논란이 많지만 이와 유사한 경우가 실제

로  1차세계대전 당시에 존재하였으니.... 100년전 세계 1차 대전 당시에 러시아군 소속으로 폴란드

타넨베르크 전투에 참전해 독일군에 포로가 된 고려인 의 자료를 독일 훔볼트 대학에서 찾아냈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1차  세계대전 당시인  1914년 8월  러시아군이  독일군에게  치욕적인  패배를 당했던

폴란드 타넨베르크 전투에서 독일군 포로 가 되었고, 1916년 3년째 독일 포로수용소

에서 생활하던 중 여러 기록들을 남겼으니 자필 신상카드군복차림 의 각종 사진들.... 

더구나 100년 전의 우리 민족의 노래와 수수께기등을 담은 음반 도 무더기로 발견 되었습니다.

 

 

그들의 노래는 100년전 우리 노래가락 을 생생히 들려주는 소중한 자료들이니 이들은 연해주

의 짜레찌예 출신의 고려인 이며..... 구한말 일본군에 맞서 두만강 변에서 의병투쟁을

벌이다가 나라가 망하자 러시아 시베리아 보병사단에 몸을 의탁했던 베테랑 전사 들이었습니다.

 

 

전인평 교수가 동아일보에 쓴 독일 조선인 포로가 부른 아리랑과 독립운동 가요” 라는 기사

에는 아라랑 아라랑 아라리요 아리랑 뛰어라 노다 가세.” 지직거리며 거친 소리를 내는

에디슨 축음기  녹음에서 들려오는 소리는 너무나 애잔하여 듣는 이의 가슴을 쥐어 뜯는다. “

 

 

또한 목메어 부르는 독립운동 가요 만났도다 만났도다원수 너를 만났도다” 를 듣노라면,

멀고 먼 이역 땅에서 독립운동에 매진하였던 조상들의 모습이 떠올라 숙연해 진다.

때는 1916년 가을 그리고 1917년 봄독일 포로 수용소에서 조선인 다섯명이 노래 를 불렀다.“

 

 

“ 이들 조선인들은 전쟁 포로로서 언제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을지 자신의 장래에

대해 한 치 앞을 모르는 암울한 포로 생활 중에 이 노래를 불렀다그러면

왜 어떻게 조선인들이 독일군의 포로 가 되어 멀고 먼 독일에서  노래를 불렀을까?”

 

 

“1860년대  조선왕조는 대기근과 홍수 그리고 민란  등으로 대단히 어수선한 상황 이었다.

당시 민초들의 생활은 말할수 없이 어려웠고 고단했다이러한 상황에서 함경도 사람

들은 살길을 찾아 국경을 넘었다(불법 월경). 그리고 흘러간 곳이 러시아 영토인 연해주

이다.  이곳에서 조선인 대부분은 무국적자 로 형언할수 없는 고난의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의 기운이 감돌자 러시아 황제는 동원령을 발동했다무국적자로 지내던

조선인 일부는 군에 입대하면 러시아 국적 을 준다는 말에 군대에 지원하였다그러나

불행하게도 참전 조선인 중에 일부는 1914년 8월 타넨베르크 전투에서 독일군에 포로 

붙잡혔고이들은 독일 쾨니히스브뤼크뮌스터그리고 하메르슈타인의 포로수용소에 수용 되었다.”

 

빌헬름 2세 황제가 통치하던 독일에서는 제1차 세계대전 중인 1915년 말에 왕립 프로이센

표음 위원회 가 설립되어 세계 여러나라의 다양한 지역에서 잡혀온 포로 를 활용하여

음악과 언어를 녹음 하고 또한 노래의 가사녹음한 사람의 인적 상황을 꼼꼼하게 정리하였다.”

 

경황 없는  전쟁통에 포로들의 음악과 언어를 녹음  하겠다는 저 발상도 놀랍거니와

녹음후 노래 가사와 가창자 인적사항 도 적었다신상 기록지에

이름생년월일부모 출신지사용가능 언어직업종교 를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다

 

새삼스레 독일인의 치밀함에 소름이 돋을 지경인데.... 에디슨이 축음기 를 발명한 것이 1876년이니 아직

녹음시설이 보편화되지 않은 형편이었는데이런 작업을 하였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목소리의 주인공은 이주민 2, 3세로서 김 그레고리안 스테판강 가브리엘유 니콜라이유 니키

포르 이다.  이들이 부른 노래는 모두 45곡으로 1시간 10분 분량이다녹음에는 수심가애원성,

국문 뒤풀이 등의 민요가  들어 있고..... 특별히 귀중한 것은 독립 운동 가요 가 들어 있다는 점이다.”

 

강 가브리엘(강홍식이 1917년 3월 녹음한 독립운동가요  대한 사람의’  는  대한 사람의 우리들은요

총과 칼이야 무서말게요 라는 가사로 시작한다. 1917년 하메르슈타인에서 유 니콜라이가

녹음한 독립운동가요 만났도다’  는 만났도다 만났도다원수 너를 만났도다” 라는 가사로 시작한다.“

노래를 부른 포로 5명의 나이는 당시 23세에서 41 였다이들은 귀한 집안의 아들이기도 하고 혹은

가장이기도 하였을 것이다이들은 고향으로 돌아갔을까아니면 고향을 그리며 타향에서 눈을 감았을까? ”

 

이 45곡의 노래 는 국립국악원 김해숙 원장과 송지원 연구실장 등의 3년여 작업 끝에

그리움의 노래 라는 CD 2장으로 재탄생 했다자세한 서지 연구와 악보도

소개되었다낯선 땅의 전쟁 포로로서 내일을 기약할 수 없는 참담하고  처절한

상태에서 노래하는 조선 청년오늘날 우리가 그들의 마음을 어떻게 헤아릴 수 있을까?”

 

 

이 자료에 담긴 노래들은 우리 민족이 겪어온 질곡의 역사 를 고스란히 담고 있다는

점에서 학문적으로도 매우 소중하다앞으로 이 귀중한 자료가 유능한 전문가

의 손을 거쳐 예술 작품으로 다시 태어나길 기대한다이 조선인 포로의

노래를 이제 드라마 오페라 또는 뮤지컬 로 재현할 역량 있는 작가가 기다려 진다.”

 

 

이들 외에도 4,000명의 고려인 들이 1차세계대전 당시 러시아군에 입대하여 독일전선에 참전한

기록들도 찾아냈다는 내용도 있는데 '노르망디의 한국인 포로'  는 논란이 많지만

(고려인인지 아니면 중앙아시아계 인물인지 알수 없음?) 1차 세계대전 당시에

제정 러시아군 소속으로 동부전선에 참전한 수 많은 조선계 병사들 은 엄연한 역사적 사실입니다.

 

 

이들 중에는 1차세계 대전 이후 연해주에서 계속 항일의병투쟁을 한 경우나 또는 재불 독립운동가인

홍재하 처럼 러시아군 으로 1차 대전에 참전했다가 이후에도 러시아가 아닌 타국에서 독립운동

에 계속 투신한 경우 또는 고종의 시종무관 출신으로 고종의 명에 따라 항일에 투신하였다가

망국후 러시아 여성과 결혼 하여 러시아 제국군의 대령 으로 까지 진급하게된 케이스도 존재합니다.

 

 

3차 타넨베르크 전투 는 독소전쟁 후반 1944년 7월 25일부터 8월 10일까지 에스토니아의 타넨베르크 방어선

일대에서 벌어진 독일 국방군의 방어전이니,  독일군은 1944년 1월 14일 에스토니아 나르바에

소련군을 막을 새로운 방어선을 구축하 는데... 독일 병력의 대부분은 무장 SS 소속 외국인 의용부대 였습니다.

 

 

특히 에스토니아헝가리 의용병 을 주축으로 하는 독일군이 6개월간 소련군의 공격을 저지 하며 격렬한

전투를 치르는데소련군이 이반고로드(Ivangorod) 강을 공격하여 독일군을 두개로 분리시키자

독일군은 타넨베르크 선으로 방어선 을 옮겼고나르바 서쪽에 위치한 청색 고지에 3개의 진지였습니다.

 

 

20 무장친위대 제에스토니아 척탄병 사단은 1944년 7월 27일부터 소련군 전차 113대를 격파 했는데,

그들과 전투를 벌인 소련군 중에는 1940년 6월 에스토니아를 침략 합병한후 강제 징집한

에스토니아인으로 구성된 '제 에스토니아 소총군단' 이 포함되어 있었으니 동족끼리 싸운 비극 입니다?

 

 

1944년 9월 독일군이 철수하면서 에스토니아 의용부대원들을 해산 했지만 소련군에 대항해서 게릴라 활동을

벌이는데다른 친위대사단 소속 패잔병들과 만나 후퇴중 전차를 몰고오는 소련군 들과 마주쳐 교전하지만

알고보니 그 소련군들도 에스토니아인 이라는 것을 알고는, 서로 사격을 멈추고 말 없이 자기 갈 길을 갑니다?

 

 

붉은색 돌로 쌓은 둥근 원형의 요새 바르비칸 krakow-barbican- 이 보이니 외성 으로 주 성벽에서 바깥쪽으로

떨어져 나와 주 성벽과 정문 공격을 어렵게 하는 요새 로 중세말~근세 초 유럽의 요새화가 잘 된 도시들은

대부분 바르비칸이 있었는데,  원형이 잘 보존 된 것은  크라쿠프가 유일 하니  15세기 중반 개축됐다고 합니다.

 

 

조금 더 걸으니 성 플로리안 문 인데 바르비칸 뒤에 있는 구시가지의 북쪽 정문 으로 성문 양

옆으로 과거 도시를 방어하던 성벽이 조금 남아 있으니, 바르비칸과 성 플로리안 문은

크라쿠프에 도착하면 만나게 될 첫 관광포인트로 크라쿠프 구시가지로 들어가는 관문 입니다.

 

 

그러고는 크라쿠프 중앙시장광장 Rynek Gfowny 에 도착하는데.... 유럽 도시들은 대개 성당이 있는 중심부

광장을 구심점 으로 하니....... 구시가의 중앙 광장은 유럽의 여러 광장들 중에서도 가장 큰 축에 속합니다.

 

 

그러니까 이 중앙광장은 이탈리아 베네치아의 산 마르코 광장 에 이어 유럽에서 두 번째로 넓은 광장 이며....

주변에는 역사적인 건축물들이 여럿 위치하고 있기 때문에 크라쿠프 여행의 시작과 중심 이라 할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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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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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카페지기 | 작성시간 24.03.27 이제 '대한민국'은
    •일본을 넘어서
    •독일을 이기고
    •영국을 이기고
    •미국을 이겨야 된다.
    이것이 우리의 도전의 대상인 것이다.
    •은밀하고 •치밀한 전략과 전술로
    각고의 인내와 과감한 실행력이 있는
    사람들만이 이루어 낼 수 있는
    도전이고 성취인 것이다.
    부자되시기바랍니다.😁😁
  • 답댓글 작성자바이칼3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24.03.28 비가 자주 내리니......
    이제 완연한 봅인가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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