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옹플뢰르2 - 성당을 보고 오래된 컬러풀한 항구를 구경하다!

작성자가라치코|작성시간24.03.29|조회수81 목록 댓글 0

옹플뢰르 2 - 옛 도시 옹플뢰르에서 성당을 보고 오래된 컬러풀한 항구를 구경하다!

 

 

5월 26일 루앙 리브드로테역 Rouen-Rive- Droite 에서 아침 7시에 출발 기차를 타고

서쪽으로 달려 8시 04분에 르아브르 Le Havre 역에 도착해 스트라스부르 대로

를 걸어서 법원과 시청 Hotel Ville 그리고 파리 거리를 걸어 르 볼킹에서

상업 도크를 보고 기차역 옆에 버스터미널 Gare Routiere Le Havre 로 돌아 옵니다.

 

 

에트르타 Etretat 는 시간상 무리인지라 포기하고 옹플뢰르 로 가려니... 08시 40분 버스 는 

 출발해버렸고 다음 버스는 3시간이나 남은 12시 42분 이라, 택시 를 타니 센강에 걸린

높은 다리를 건너 20여분만에 옹플뢰르 Honfleur 에 도착하는지라 시외버스 터미널

 Gare Routiere Honfleur 에 가서 트루빌-도빌 행 버스 시간이 1시 20분인 것을 확인 합니다.

 

 

3시간 가량 오래된 도시인 옹플뢰르 시내 를 구경하는데 예쁜 주택과 공원을 지나서

성당 이 보이기로 들어가는데 더운 날씨에 강행군을 하는 배낭여행자로서는 

 성당이 참으로 반가운 것이.... 우선 무료인데다가 들어가면 서늘하고 

의자에 앉아 지친 몸과 마음 을 달랠수 있으니 잠시 쉬면 원기가 회복 되기 때문입니다.

 

 

성당으로 들어가서는 성화 들을 보다가 문득 클레멘스 7세 교황 이 떠오르는데... 프랑스왕

프랑수아 1세 와 신성 로마제국 황제 카를 5세 사이에서 나약하고 우유부단한

행동을 취했던 클레멘스 7세 교황은 1525년 파비아 전투 에서는 카를 5세를 후원 했습니다.

 

 

 이탈리아 북부 파비아 전투에서 독일군에 패해 포로 가 되어 마드리드에 끌려갔던

프랑스의 왕 푸랑수아 가 자식들을 인질로 감옥에 보내고 석방 되자.....

클레멘스 교황은 프랑수아와 제휴해 코냐크 동맹 을 체결해 카를 5세에 대항 합니다.

 

 

클레멘스 교황 이 신성 로마제국에 대항하는 정책을 취하자 카를 5세는 독일에서 종교개혁

맞서 싸우기가 어려워졌으니... 카를 5세는 1527년 5월 군대를 보내 로마를 함락한후

교황을 산탄제로성에 감금 하고 로마를 약탈하며 부녀자를 폭행 하는데, 교황과 황제가

연합한 범세계적 왕조 를 세우려는 그의 이상과 다르게 전개되니... 난처한 입장에 처합니다.

 

 

클레멘스 교황의 무능력 때문에 잉글랜드왕 헨리 8세 가 시녀 앤 볼레인과 결혼 하기 위해

아라곤 왕국의 카탈리나 공주와의 결혼을 무효화 해 달라고 신청한 사건은 복잡해

졌으니, 1528년 프랑스가 이탈리아를 침공 하자 교황은 로렌초 캄페지오 추기경과

울지 추기경을 협동 사절로 잉글랜드에 파견해서는 헨리 왕 재판을 심리 하게 했습니다.

 

 

그러나 1529년 5월 31일 카탈리나 영국 왕비 는 그들의 재판권을 거부하고 혼인의

유효성을 유지하기 위해 로마에 항소 했는데 수주일 뒤 프랑스 군대가

이탈리아에서 패배 하자..... 클레멘스 교황은 카탈리나가 로마에 제기한

소송을 기각 하고 1530년 3월 교황 칙령이 선포될때 까지 헨리왕의 재혼을 금지 합니다.

 

 

카를 5세 는 교황이 교회 개혁을 시작한다든지 루터파 운동이 제기한 문제들의 해결을 위해

총공의회를 열겠다는 확실한 약속을 얻어내지 않고 클레멘스를 석방 하자 독일 종교개혁

운동은 더욱 악화되는데, 교황의 우유부단함 에다가 프랑스왕 프랑수아가 공의회 개최를

반대하니 프로테스탄트의 반란은 확대 되고 헨리왕이 로마와 결별하자 더욱 촉진 되었습니다.

 

 

교황은 르네상스시대 전제군주 를 연상시키는데 교회와 가문 이익만 추구할뿐 부패한

교회 개혁에는 결단을 내리지 않으니... 독일에서 평판을 잃은게 얼마나 위험

한지를 과소평가 했는데, 1530년 클레멘스가 볼로냐에서 카를에게 대관식 

거행한 뒤 카를황제가 다시 독일로 관심을 돌렸을 때는... 시기가 이미 늦어 있었습니다.

 

 

교황이 결단하지 못하고  오래 주저하고 있는 동안  잉글랜드에서는 울지가 몰락하고

반(反)교회당이 승리 를 거두자... 1533년 클레멘스가 헨리와 카탈리나의 결혼이

유효 하다고 공포하니, 영국과 로마의 결별은 가속화되었으며 얼마 뒤 수장령이

공포되어 "잉글랜드왕 헨리는 가톨릭에서 벗어나 영국 국교회의 우두머리" 가 됩니다.

 

 

성당에 앉아 생각에 잠기다 보니... 문득동 아일보 김갑식 기자 가 여기 옹플뢰르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도시 르망시의 보몽 본당 이영길 주임 신부 에 대해 쓴

“150년전  佛 신부가 흘린 피, 한국 신부가 땀으로 갚습니다”  라는 기사가 떠오릅니다.

 

 

"프랑스는 한국 가톨릭교회의 설립 과 뗄수 없는 인연을 가진 나라다. 1831년 조선대목구

(조선교구)는 1대 브뤼기에르 주교 부터 9대 라리보 주교 까지 모두 프랑스 출신

선교사가 교구장 을 맡았다. 조선에서 활동한 총 170명 프랑스 신부 중 25명이 순교 했다"

 

 

 "교황 레오 12세 에 의해 조선 파견 선교사 를 전담했던 파리 외방전교회 는 ‘순교대학’

으로 불렸다. 한국의 103위 성인 중에 파리 외방전교회 출신 신부도 10명 이 포함됐다." 

 

 

"그로부터 200여년 후. 한국에 가톨릭을 전파 했던 프랑스가 이제는 거꾸로 한국

으로 부터 성직자를‘수입’ 하고 있다. 프랑스의 신부 수가 매년 급감해 텅 빈

성당들이 늘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프랑스 중서부의 유서 깊은 도시인

르망 교구의 보몽 본당 에서 주임신부를 맡고 있는  이영길 신부 가 대표적인 예다."

 

 

"주일 미사 후 프랑스 신자들 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이 신부.

'페르 리, 코망 사 바 (잘 지내나요, 이 신부님)?'”

 

 

"돌로 지어진 소박한 성당앞 광장에서 아기를 안고 지나가던  40대 남성이 이 신부와 반갑게

인사를 나눈다. 가는 곳마다 아이들을 직접 안아주고, 악수를 나누고, 때로는 사제관

마당 에서 한국식 숯불 바비큐 파티 까지 열어주는 그에게 현지 신자들은 완전히 매료됐다." 

 

 

"르망 교구 는  조선교구 제4대 교구장을 지냈던 장 베르뇌  ( 한국명 장경일·1814

∼1866 ) 주교의 고향이어서 신자들의 한국에 대한 애정 이 각별하다.

베르뇌 주교는 충북 제천시 봉양읍 구학리 (배론 성지) 에서 한국 최초의

신학교 를 설립하는 등 10년간 사목활동을 펼치다가 1866년 병인박해 때 순교 했다."

 

 

“올해 30주년을 맞은  한국 순교성인 103위 시성식  이후 엄청나게 성장해온 한국

가톨릭 교회에 르망 교구는 꾸준히 성직자 파견을 요청해 왔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의 방한 으로 아시아에서 한국 교회의 존재는 주목 받고 있습니다.”

 

 

"파리 가톨릭대 에서 유학한 이 신부는 1989년 안동교구장이었던 두봉 주교의 권유 

프랑스 로 오게 됐다. 현재 르망 교구에는 한국 신부가 총 4명 으로 늘었다.

이 신부는 주말마다 관내 14개 성당 을 돌아다니며 신자들을 만나고 미사를 집전 한다."

 

 

“원래는 성당마다 주임신부 가 있었는데, 지금은 14개 마을이 합쳐져 하나의

본당 이 됐어요.  그만큼 빈 성당이 많죠. 르망 교구에서 지난해

새로 서품 받은 사제는 2명 뿐이었는데 돌아가신 신부님은 13명 이었습니다.”

 

 

"대표적인 가톨릭 국가 프랑스의 사제 수는 1975년 4만2000명에서 2009년 2만4000명

으로 절반 가까이 줄어들었다. 1905년 철저한 정교 분리법 이 실시되고

1968년 혁명 당시 ‘나는 금지하는 것을 금지한다’는 구호가 등장한

이후 종교생활이 철저한 개인의 영역 으로 취급되면서 관심이 떨어졌다는 설명이다."

 

 

"반면에 한국은 지난 10년 동안 신부가 연평균 3.1% 씩 증가 하고 있다. 프랑스를 비롯해

스페인 이탈리아 등 유럽 국가들의 교구당 사제 수품자는 매년 10명 이 채 안되는데..."

 

 

"서울대교구에서는  매년 30∼40명의 사제가 배출돼  로마 교황청도 경이로운

눈으로 바라 볼 정도다.  한국인 신부의 해외 진출도 늘고 있어

한국 교회는 지난해 해외교포 사목에 173명해외 선교에 82명 을 파견했다. "

 

 

"이 신부는 한국 신자들이 성지순례를 올 때마다 보몽성당의 프랑스 신자 가정과 결연 

해주고 있다. 그는 “한국 신자들은 열정적이고 역동적인 반면에 프랑스 신자들은

은근하면서 깊은 매력 이 있다”며... “세계인들이 하느님 안에서 한 백성이라는

가톨릭 정신  에 따라 서로 나누다 보면 새로운  종교 문화가 탄생할 것” 이라고 말했다."

 

 

"이 신부는 “몇년 전의 세월호 사고 이후 수많은 프랑스 신자들이

한국에 관심을 표하며 위로의 기도 를 해주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한국이 그동안 물질적 성장만 강조해오면서 가족의 소중함, 남을 배려하는

마음, 올바른 것에 대한 판단 등 내적 성장을 이루지 못한 것이 원인”

이라며 “일본이 후쿠시마 원전 사태의 상처를 치유하고 의연하게 일어서고

있는 것 처럼 우리도 이  위기를 새롭게 거듭나는 기회 로 삼아야 한다” 고 말했다. "

 

 

이 오래된 유서깊은 항구 도시 옹플뢰르 Honfleur 는 루앙의 서쪽 74km 칼바도스

주의 센강이 넓게 펼쳐져서 영국 해협 으로 흘러드는 좌안에

위치 하며 어항과 무역항 을 겸한 옛 항구는 16세기 부터 개발되었다고 합니다.

 

 

옹플뢰르  Honfleur  시에서는  노르망디 특유의 오래 된 목조가옥  을 볼 수 있는데

15세기 에 건립된 고딕양식의 생트카트린 교회 도 그 중의 하나이며 요트

타기의 중심지라고 하는데 관광안내소 Office de Tourisme 는 그냥 지나쳤나 봅니다?

 

 

옹플뢰르 Honfleur 는 16~ 17세기에 세느강 하구 무역항 으로 번영을 누리다가

르아브르 Le Havre 에 그 지위를 뺏겼으며.... 화가 부댕 과 작곡가

사티의 고향 으로 바다 위에서 노르망디 대교를 전망하는 유람선 이 있다고 합니다.

 

 

그러고는 성당 을 나와서 내려와 도로를 건너 벼룩시장 에 들러 온갖 잡동사니를

구경하고는 오래된 항구 에 이르니 보트며 요트 가 빽빽하게 들어

찼는데..... 레스토랑이며 카페 에서 내놓은 테이블에는 관광객 들이 가득합니다.

 

 

그러고는 옹플레르 시청 Hotel de Ville 는 문이 닫혔기로 외관만 구경하는데

부두에는 젊은 학생들 단체가 왔는데 인솔자는 부두를

보며 설명하는 것이.... 옹플레흐 Honfleur 도시의 역사 를 말하는가 봅니다?

 

 

여기  옛 항구  Vieux Bassin  아무리 보이도 질리지 않는게.....  먼저 각양 각색의 보트며

요트 들이 구경할만하고“ㄷ" 자 형태로 둘러싼 집들이 건물 높이가 6~7층 정도로 일정

한데다가 비슷하면서도 조금은 다른 개성을 지닌 각기 다른 칼라를 가진 집들이 볼만합니다.

 

 

일간 르피가로는 파리 어느 아파트에 매달린 어린 아기를 구한 흑인 불법 체류자 가사마 

띄운 마크롱 대통령을 언급하면서 “마크롱 대통령의 ‘영웅 프로젝트’ 가 가동됐다”

“마크롱 대통령은 젊은 사람들에게 공화국의 모범을 알려주고 싶어한다. 아르노 벨트람

(스스로 인질을 자처했다 숨진 군인) 에 이어  가사마 영웅 만들기 나선 이유” 라고 보도했다.

 

 

벨트람 중령 은 3월 남부 소도시 트레베에서 이슬람 극단주의자의 인질극 이 벌어졌을 때

스스로 인질을 자처해 인질로 잡혀 있던 여성을 구하고 목숨을 잃은 군인 이다.

당시 마크롱 대통령은 수차례 그를 “프랑스의 영웅”이라고 칭송한 뒤

앵발리드에서 국가장으로 장례식  을 치르고 그 자리에서  직접 최고 훈장을 추서  했다.

 

 

프랑스의 과거 영광을 되찾기 위해 활력을 불어넣는 개혁을 진행 중인 마크롱

대통령은 수차례 영웅의 필요성을 강조해 왔다. 대통령의 한 측근은

 “대통령은 프랑스인들의 무기력해진 성향을 확 뒤엎고 싶어 한다.

그래서 영웅적인 행동을 알리고 그들도 따라하기를 원하는 것” 이라고 전했다.

 

 

영웅 만들기를 열심히 하는 나라 중에 미국 이 있는데.... 경향신문 이기환

논설 위원은 칼럼 여적 에서 "조작된 영웅 기사"  를 올렸던게 따오릅니다.

 

 

"데이비 크로켓 (1786~1836)은 미국의 서부개척시대를 이끈 전쟁영웅이다. 크로켓은

1836년 벌어진 멕시코군과의 알라모 요새 전투 에서 일약 미국의 레전드 

발돋움했다. 멕시코군 7000명의 포위 공격에 텍사스군 187명이 13일간 이나

저항했는데,  최후의 1인으로 버티다 쓰러진 영웅  이 바로  크로켓  이었다는 것이다."

 

 

"크로켓의 이야기는 존 웨인의  ‘알라모’ (1960) 등  6번이나 영화로 제작 됐다. 린든 존슨

미국 대통령은 1968년 “ 고조할아버지가 알라모 요새에서 전사했으며, 베트남전쟁

에서 꼭 필요한 모범적인 군인상 은 바로 크로켓 같은 영웅”이라고 추앙했다. 그러나

‘고조 할아버지 운운’  도 믿을수 없는 이야기였고  크로켓의 영웅담 또한‘조작’  이었다."

 

 

" 미국의 존슨 대통령 은  크로켓을 어려운 베트남 전쟁을 독려하기 위한 선전

도구 로 활용한 것이다. 역사가들은‘크로켓이 전사한게 아니라 항복해서

속절없이 살해됐다’고 본다. 영웅적인 항거가 없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크로켓은 개척시대를 활짝 연 영웅 서사시의 주인공 으로 남아 있다. "

 

 

"일본‘육탄 3용사’ 의 영웅담도 비슷하다. 1932년 일본군이 중국군의 방어망에 고전하자

에시타 다케지 (江下武二) 등 일등병 3명이 “황군을 위해 죽겠다” 며 결사대 를

자원했다. 3인은 몸전체에 폭탄 을 둘러매고  을 붙인채 ‘제국 만세’ 를 외치며

적의 철조망을 폭파 시켰다.  그러나 육군의 자체 조사 결과  ‘터무니없는 과장’  이었다."

 

 

"죽은 3인 말고도 상관의 명을 받아 폭탄을 들고 돌진한 병사들이 더 있었다는 것. 이들은

임무를 완수하고 돌아왔지만 죽은 3인은 목표지점에 늦게 도착하는 바람에 폭사

했다는 것. 진상을 파악한 오노 히토마토 (小野一麻呂) 중령은 “죽은 3인은 그저

통상의 임무를 수행했을뿐 무슨 결사대를 자원한 것은 아니다” 라는 조사결과를 공표했다."

 

 

"오노는  “전쟁터에 나선 군인은 그 자체가 결사대  인데,  만약 어려운 임무때 마다

결사대를 모집한다면 그게 무슨 군대냐” 고 반문했다.  백번 옳은 말 같은데

때는 늦었다. 죽은 3인은 이미 언론에 의해‘육탄 3용사’ 로 신격화된 뒤 였다.

한달만에 12편의 영화 가 개봉됐고, 찬양가가 쏟아졌으며, 동상과 기념물 이 건립됐다."

 

 

"영국의 월터 롤리 (?~1618) 는 자신이 두 눈으로 똑똑히 본 사건 을 다른 목격자

가 전혀 다르게 기록한 것을 보았다.  롤리는 자신의 원고를 불태워

버렸다. 진실은 일어난 순간 사라지고 목격자의 주관이 남는다 

사실에  절망  했다는 일화다.  진실의 기록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웅변해 준다."

 

 

"최근 한국전쟁 때 북한군 자주포를 육탄으로 파괴 했다며 태극무공훈장을 받은 심일소령 

공적이 도마 에 올랐다. 굳이 이제와서 까발릴 필요 가 있겠느냐는 얘기도 나올법 하다.

그러나 크로켓이나 육탄3용사의 예 처럼 목격자가 믿고 싶은 기억만 역사로 기록될 수 있다"

 

 

"진실이 영영 어둠 속으로 묻혀 버려서야 되겠는가. 1932년 당시 ‘육탄 3용사’ 의 기사를

 아사히 신문은 지난 2007년 이 보도가 거짓이었음을 공식적으로 사과 했다. 잘못을

잘못이라고 솔직하게 고백하는데 75년이 흘렀다. 그만큼 진실을 기록하는게 어려운 일이다."

 

 

그러고는 부두 주변에는 작은 기념품 가게 가 빼곡이 들어차 있는데.... 어느 

집에서는 잠수부가 머리에 덮어쓰는 도구 도 있어 눈길을 끄니 이런

저런 가게들을 구경 하며 바다쪽으로 걸으니 저 편에 회전목마 가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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