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폴란드 5 - 크라쿠프를 걸어 중앙시장광장에서 맥주를 들다!

작성자바이칼3|작성시간24.04.01|조회수90 목록 댓글 1

폴란드 5 - 크라쿠프에서 걸어서 플로리안문을 지나 중앙시장 광장에서 맥주를 들다!

 

 

5월 10 폴란드 바르샤바 중앙역에서 9시 40분 기차를 타고 2시간 40분을 달려서 12

20분에  크라쿠프 Krakow Glowny 역에 도착하는데.... 이 오래된 도시는

1040년 부터 1596년 까지 폴란드의 수도 였으며 구 시가지는 유네스코 세계유산 입니다.

 

 

수도 바르샤바 는 제2차 세계대전때 전부 파괴되어 재건됐지만 크라쿠프는 폴란드 침공당시

시장이었던 스타니스와프 클리메츠키 의 용감한 행동그리고 폴란드 총독부의 수도

가 되었다는 점 덕분에 파괴는 면할수 있었으니..... 고풍스러운 건물 들이 많이 남아있습니다.

 

 

붉은색 돌로 쌓은 둥근 원형의 요새로 외성인 바르비칸 krakow-barbican- 을 보고는 그 너머에

크라쿠프성의 북문인 플로리안 문 을 들어가서는 걸어서 차리토리스키흐 박물관을 지납니다.

 

 

이 거리에서 미니 스커트 를 보니 문득 연합뉴스에 정혜원 기자가 올린 글이 떠오르니... 미니스커트

유행시킨 英 디자이너 퀀트 별세영국 버킹엄궁에서  훈장 받은 패션 디자이너 메리 퀀트”  입니다.

 

 

1960년대 패션을 이끌며 미니스커트를 유행 시킨 영국 디자이너 메리 퀀트가 향년 93세로 별세 했습니다. BBC

에 따르면퀀트의 가족들은 성명을 통해 퀀트가 13일 오전 집에서 평화롭게 세상을 떠났다” 고 밝혔습니다.

 

 

고인은 1960년대 스윙잉 식스티스(Swinging sixties· 활기찬 60년대)를 상징하는 미니스커트를 대중화 한

인물로 꼽힙니다.  또 1960년대 런던의 청년 주도 문화 변혁 에서 주요한 역할을 한 인물로 평가받습니다.

 

 

AFP는 그가 미니스커트 창시자 인지를 두고는  논란이 있지만,  세계적으로 유행 시킨 것은 분명하다

고 전했습니다.  퀀트는 미니스커트 뿐만 아니라 핫팬츠보브컷을 유행 시킨 것으로도 알려져 있으며

그는 생동감 있는 색깔 을 많이 사용했으며 특히 젊은 소비자들을 위해 저렴한 제품을 내놓기도 했습니다.

 

 

패션계에 추모의 물결이 이어졌습니다. 1960년대 패션의 아이콘이었던 모델 출신 트위기 (본명 레슬리 혼비)

는 퀀트는 패션을 혁신한 인물 이고뛰어난 여성 기업가였다” 며 고인을 추모했습니다뉴욕

타임스 패션 디렉터인 버네사 프리드먼도 여성의 다리를 해방 시킨 메리 퀀트의 명복을 빈다” 고 전했습니다.

 

 

유럽의 미니스커트가 일본 으로 전해지니, 일본 여학생의 교복은 짧은 세라복과 타탄스커트 교복으로 유명

하니 펑퍼짐한 상의에 매우 짧은 미니스커트 를 입었는데.... 이에 영향을 받아 이웃 국가의 여학생들도

교복치마를 짧게 줄이는 경우가 많았으니 학생부 선생님들이 교문에서 치마 길이를 자로 재기도 했습니다.

 

 

한국에서는 가수 윤복희 가 입은 것이 최초로 알려져 있으니 1967 미국에서 미니스커트

를 입고  귀국할때 공항에서 날계란 세례를 받은 것으로 알려지기도 했으나....

실제로는 그날 미니스커트를 입고 있지도 않았고인적이 뜸한 새벽에 귀국 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윤복희가 풍기를 문란 하게 한다는 이유로 많은 비난 을 받았던 것은 사실이니 한국

에서는  미니스커트는 여성의 활동을 억압하는 답답한 긴 치마를 벗어던진활동적인

신여성을  상징하는 것이었다고 할 수 있으며..... 잘 나가는 여성들이 기성세대가

요구하는 '정숙한 여성의 복장이라는 사회적인 통념을 거스르고 벗어던진 것이었습니다.

 

 

그러고는 크라쿠프 중앙시장광장 Rynek Gfowny 에 도착하는데.... 유럽 도시들은 대개 성당이 있는 중심부

광장을 구심점 으로 하니 구시가의 중앙 광장은 유럽의 여러 광장들 중에서도 가장 큰 축에 속합니다.

그러니까 이 중앙광장은 이탈리아 베네치아의 산 마르코 광장 에 이어 유럽에서 두 번째로 넓은 광장 이며

주변에는  역사적인 건축물들이  여럿 위치하고 있기 때문에  크라쿠프 여행의 시작과 중심이라  할만 합니다.

 

 

광장 주변구시가 곳곳에 아이스크림 가게 가 있는데 폴란드에선 아이스크림을 로디(lody) 라고 하며 맛이

좋다는데폴란드 아이스크림은 뭘 넣었는지 크라쿠프 뿐 아니라 다른 도시에서 파는 것도 맛이

좋고 가격도 저렴하지만 마눌은 나중에..... 라며 뒤로 미루자는데 결국 크라쿠프에서는 맛보지 못합니다.

 

 

크라쿠프 는 1040년 부터 1596 까지 폴란드 왕국의 수도 였는데, 1138년부터 1320년까지 폴란드가 분열되어

혼란기로 떨어지는 바람에 도시는 공작들에 의해 뺏고 뺏기는 쟁탈의 장 이 되었으니... 도시를 차지한

공작은 크라쿠프 공작이자 폴란드를 대표하는 지배자가 되었기 때문인데, 1241년 폴란드까지

침공한 몽골군 은 크라쿠프 근방에서  승리를 거두고 무방비 상태가 된 도시를 점령하고 완전히 파괴합니다.

 

 

1257년에 크라쿠프 도시는 재건 되었지만 2년 뒤 1259년에 2번째 침공한 몽골군에게 또다시

파괴 되었으며, 1287년 몽골군은 3번째로 폴란드를 침공 했지만 실패함에 따라

크라쿠프는 무사할 수 있었고 폴란드는 1300 ~ 1306년까지 보헤미아 왕국 프르세미슬

왕조와 동군연합으로 묶였기 때문에 크라쿠프도 잠시 보헤미아 왕국의 영향권 에 들게 됩니다.

 

 

체코인과 독일인 이 도시에 들어오기 시작했는데동군연합이 끝나고 새로 즉위한 보헤미아 룩셈부르크

왕조의 얀 루쳄부르스키의 사주로 독일인이었던 크라쿠프 시장 알베르트 가 1311년 도시 내 체코인

들과 독일인들을 선동해 브와디스와프 1세를 상대로 반란 을 일으켜서는 도시를 차지하고 보헤미아

와 병합하려 했지만 1년에 걸친 포위 끝에 결국 진압 되었고 도시 내에서 독일인들의 영향력은 감소합니다.

 

 

1320년 폴란드 왕국의 혼란이 끝난 뒤 폴란드가 카지미에시 3세의 통치 아래에(1333~1370안정과 번영

 누릴 때크라쿠프의 황금기 가 시작되었으니 왕의 거처였던 바벨 성이 크게 증축 되었고 성의 나무

부분이 석재로 바뀌어졌으며..... 또한 이 시기 중앙 광장 에 지금까지 남아있는 랜드마크들이 세워졌습니다.

 

 

로마네스크 양식의 성모승천성당 이 독특한 폴란드 고딕양식으로 재건되었고 1358년 중앙 광장의

목재로 지어진 시장이 고딕양식의 직물회관 으로 탈바꿈했는데이 직물회관에서 상인들

이 회의를 하거나 업무를 보았고 크라쿠프와 중부유럽 일대의 직물그리고 근처의

비엘리츠카 암염광산에서 대량으로 산출되던 소금이 동방의 비단향신료 등과 교환되었습니다.

 

 

1364년에는 크라쿠프에 프라하에 이은 중부 유럽 두번째 대학교인 크라쿠프 학당 이 세워졌고

크라쿠프는 한자동맹의 회원 이 되기도 했지만 매우 느슨하게 연결되었는데회원비를

내지도 않았고 동맹 회의에 대표를 파견하지도 않았다는데.... 14세기 후반~15세기초,

크라쿠프는 중부유럽의 주요 무역 중심지 였고..... 수많은 장인들이 찾아와 길드 를 세웠습니다.

 

 

1569 폴란드와 리투아니아가 동군연합 을 이루게 된 뒤강력한 국가의 수도로 예술 과학 분야의 신문물

이 이 도시로 들어왔으니 14세기 말 크라쿠프는 3,500명의 독일인과 체코인을 포함 인구 15,000명을

자랑하는 중부유럽의 대도시였으며 크라쿠프는 전형적인 중세 말 유럽 대도시의 성장 양상을 보여줍니다.

 

 

당시 유럽 전역과 북아프리카를 죽음의 공포로 몰아 넣던 흑사병 (1346~1353까지 유행이 크라쿠프

에는 큰 피해를 주지 않았으며 다른 주요 도시들도 마찬가지였으니그 이유는 폴란드의 왕인

카지미에시 대왕이 현명하게 국경을 봉쇄하고는 여행자들의 이동 을 막았다는게 첫 번째 이유 입니다.

 

 

당시 폴란드의 인구밀도가 매우 낮았고 무역이 지중해 연안이나 발트해북해 연안보다 적었다는 점,

그리고 폴란드인들이 고양이 를 싫어하지 않아 쥐가 적었다는 점 등이 2번째 이유라고 합니다.

 

 

한편 흑사병 유행기간 동안 유럽 전역에서 사회 혼란을 조장한다는 의심을 받고 끔찍한 박해를 받던 유대인

들은 따뜻하게 맞아주던 카지미에시 대왕의 폴란드로 대거 이주 했는데크라쿠프에도 수많은 유대인

들이 들어왔으니 크라쿠프 시가지 남쪽의 왕의 이름을 딴 '카지미에시 (Kazimierz)' 라는 구역에 정착합니다.

 

 

15세기 중순부터 크라쿠프는 폴란드가 르네상스 를 받아들이는 창문 역할을 했으니 1596년까지

수많은 이탈리아 예술가 들이 찾아와 도시는 문화적으로 크게 발전했는데,  프란체스코

피오렌티노 (Francesco Fiorentino), 산티 구치 (Santi Gucci) 등 이탈리아의 화가

들이 도시로 들어와 자신의 작품을 남겼고 도시 자체도 수많은 지성인과 예술가들을 배출합니다.

 

 

가장 유명한 인물이 야기엘론스키 대학교 에서 공부한 코페르니쿠스 (1473~1543) 였으며.  독일 출신

의 예술가도 들어왔는데뉘른베르크 출신의 바이트 슈토스는 1489년 성 마리아 성당의 정교하기

그지없는 대제대를 완성시켰으며...... 1500년에는 인쇄소가 등장해 수많은 인문저작 들이 발간됩니다.

 

 

중앙시장광장에 있는 직물회관인 수키엔니체 Sukiennice (Cloth Hall) 는 크라쿠프가 중부유럽의 무역

중심지 로서 번영했던 건물로 1358년 고딕양식 으로 지어졌고 1870년 리모델링 했다고 합니다.

 

 

1층은 기념품 시장, 2층은 박물관이며 구 시청사는 철거했지만 시계탑 은 철거하려 한 것을 크라쿠프 시민들과

예술가들이 청원한 끝에 남겼다고 하며 폴란드에선 아이스크림을 로디(lody)  라고 하는데 맛이 좋습니다.

 

 

성모승천 성당 bazylika-mariack 이라고도 부르는 성 마리아성당 은 독특한 폴란드

고딕 양식의 성당으로 특히 높이가 서로 다른 2개의 첨탑이 특징 입니다.

 

 

성당 내부에도 12세기~19세기의 유물들이 있으며 내부는 푸른색으로 화려하게 장식되어 있어

매우 독특한 분위기를 나타내며.... 내부의 성상들은 전부 목조품에 금칠 을 한 것이라고 합니다.

 

 

마리아 성당 첨탑에서는 매시간 마다 나팔수가 나팔을 분다고 하는데황당하게도 잘

연주하다가 갑자기 중간에 연주가 끊기는데 이것은 의도적인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과거 몽골군이 쳐들어왔을 때 모두 혼비백산하는 동안 끝까지 도망치지

않고 경보 나팔을 울렸던 한 나팔수를 기리기 위함인데.... 그는

결국 활에 목이 꿰뚫려 사망 했고 연주가 끊기는 지점은 그가 사망한 지점 이랍니다.

 

 

광장에는 한 복판에 거대한 기념탑 이 서 있고 거기 둘러가면서 청동 조각상 들이 보이는데.....

비둘기에다가 관광객들도 많지만 수학여행이나 체험 학습을 나온 어린이들도 한 무리 보입니다.

 

 

그리고 오늘 이 광장에는 특이하게 차려입은 여성들 이 기념탑 앞에서 10여명이 모여 집회를

하고있는데.... 가만히 살펴 보자니 페미니즘 이거나 아님 성소수자 단체 인 것도 같습니다.

 

 

14일 오후 3시께 서울 용산역 광장에 모인 무지개행동 회원 500여명은 국제 성소수자 혐오 반대의

날을 기념 하는 집회를 열고 용산 대통령 집무실 앞을 지나 녹사평역 이태원광장까지 행진했다.

이날 무지개 행동은 본격적인 행진에 앞서 용산역 광장에서 본집회를 열고 성명을 발표했습니다.

 

 

“1990년 517일 세계보건기구는 동성애를 질병분류 목록에서 삭제 했다이 결정은 종교의 이름으로 죄악

으로 낙인찍히고과학에서는 질병으로 낙인찍혀온 성소수자 들의 존재를 있는 그대로존엄한 이들로

대우해야 한다는 선언이기도 했다” 며 이날을 기념하여 제정된 성소수자 혐오 반대의 날은 성소수자

혐오와 차별에 맞서 모든 이들이 평등과 권리를 이야기하는 국제적인 기념일로 자리 잡았다” 고 밝혔습니다.

 

 

이어 이들은 우리는 혐오를 끝내고 세상을 바꾸며 새로운 시대를 열기 위한 행진을 이어나간다.

경찰에 의해 한 차례 막혔던 행진길을새 정부의 대통령실을 향하는 길을 무지개로 물들이며

나아간다”  고 말했는데성소수자차별반대 무지개행동 (무지개행동)이 국제 성소수자 혐오

반대의(517)’ 을 맞아 서울 용산 대통령 집무실 앞을 지나가는 기념 행진을 진행한 것입니다.

 

 

윤석열 대통령이 국방부 청사로 집무실을 이전한 뒤에  열린 첫번째 대규모 집회 인 데.....

집무실을 관저에 포함된다고 해석해 100m 이내 집회시 위에 금지통고를 하고있는

경찰은 이날 집회를 허용한 법원의 판단 에 따라  무지개 행동의 행진을 막지 않았습니다.

 

 

마눌이 중앙시장을 구경  하는 동안 나는 북쪽 건물 앞에 길게 늘어선  레스토랑 에서

내놓은 탁자 앞 의자에 앉아서 생맥주 한잔 을 시켜 감자칩 과 함께 드는데...

구경 중에는 사람 구경이 최고 라고 했으니 광장에 들어찬 수많은 사람들을 구경합니다.

 

 

내가 맥주잔을 들고 앉아있는  레스토랑은 탁자를 밖으로  내놓은지라   바벨성으로 오르내리는

여행자들이 지나가는 골목길 옆이니 구경 중에 최고는 사람 구경” 이라는 말이 실감납니다.

맥주잔을 기울이다 보니 취기가 도는 데...... 불현 듯 이생진의  許女史”  라는 시 가 떠오릅니다.

 

 

그제야 술이 묻는다.

너는 술만큼 투명하냐?

너는 술만큼 진하냐

너는 술만큼 정직하냐?”

 

 

이때 물음에 답한 것은 내 얼굴빛

내 얼굴빛이 홍주빛일 때

비로소 내게 홍주 마실 자격을 준다!“

 

 

홍주” 는 글씨와 그림 그리고 소리 를 자랑하지 말라는 예향인 진도의 전통주 인데 석양 무렵 서해

와 남해가 만나는 세방 마을로 달려가 붉은 노을 을 바라보며 마신다고 했으니.... 오늘 오후

이역만리 폴란드의 크라쿠프 중앙시장 광장에서 혼자 앉아 술을 마시며 되뇌이기 좋은 시이지요!!!

 

 

그러고는 인파로 붐비는 낯선 광장을 바라보다가 불현듯 떠오르는게 있으니.... 오페라

탄호이저  제3막 아리아인 저녁별의 노래 는 순례자들 사이에서 사라진

탄호이저를 찾는 가련한 엘리자베드를 옆에서 지켜보던 볼프람이 부르는 노래 이지요?

 

 

죽음의 예감인 양 황혼이 땅을 덮고

골짜기를 검은 옷이 감싼다.

아득히 높을 곳을 향하는 그녀의 영혼에도

밤의 공포를 가로지는 길은 두렵다.

 

 

여러 별들 중 가장 아름다운 별이여빛을 내서

아득한 등불을 저 멀리 보내어

부드러운 빛이 밤의 어둠을 헤치고

골짜기의 길을 친히 가리켜주오.

 

 

오 나의 자애로운 저녁별이여

나는 언제나 행복한 기분으로 반겨 맞지만

그녀를 결코 배반할 리 없는 이 마음을

꼭 전해주시오.

 

 

그녀가 지나갈 때에

아득히 높은 곳에서 천사가 되기 위해

그녀가 이땅의 골짜기에서 날아오리.

 

 

그러고는 마눌이 중앙시장 구경을 마치고 돌아왔기로 자리를 털고 일어나서  광장을 가로질러 

빠져나가서는 바벨성 으로 가기 위해 대로를 걸으니 가게 호객꾼인지 모르겠는데.... 

 옷이 아주 컬러풀하고 모자 챙 위에는 꽃을 꽂은 여자 를 봅니다. 나의홈 : cafe.daum.net/baikall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 북마크
  • 공유하기
  • 신고하기

댓글

댓글 리스트
  • 작성자카페지기 작성시간 24.05.01 멋지고 아름다운 느낌이든다
    여행은 언제나 신선함을 선물해주는 아름다운 동반자이다
댓글 전체보기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