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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프레소 의미

[스크랩] 여행의 이유 / 김영하

작성자카페지기|작성시간23.09.24|조회수51 목록 댓글 0

알아두면 쓸데없는 신비한 여행

 

 

 

 

내가 여행을 정말 좋아하는 이유 중 하나는 과거에 대한 후회와 미래에 대한 불안, 우리의 현재를 위협하는 이 어두운 그림자로부터 벗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여행하는 동안 우리는 일종의 위기 상황에 처하게 된다. 낯선 곳에서 잘 모르는 사람들 사이에서 먹을 것과 잘 곳을 확보하고 안전을 도모해야 한다. 오직 현재만이 중요하고 의미를 가지게 된다. 스토아학파의 철학자들이 거듭하여 말한 것처럼 미래에 대한 근심과 과거에 대한 후회를 줄이고 현재에 집중할 때, 인간은 흔들림 없는 평온의 상태에 근접한다. 여행은 우리를 오직 현재에만 머물게 하고, 일상의 근심과 후회, 미련으로부터 해방시킨다.

 

 

 

 

아폴로 8호에서 보내온 사진

 

 

 

 

내가 세상에 나온 지 한 달 뒤인 1968년 12월. 인류는 처음으로 달 궤도를 돌았다. 아폴로 8호였다. 당시에는 대단했지만 다음해 아폴로 11호가 달에 착륙하자 모든 스포트라이트가 거기로 옮겨가버렸다. 그러나 아폴로 8호의 세 명의 승무원들은 인류 최초로 달의 뒷면을 목격한 인물들이었다. 무엇보다 이들은 지구라는 행성이 달 표면에서 떠오르는 장면을 처음으로 촬영하기도 했다. 달 궤도에 성공적으로 진입해 네 바퀴째를 돌고 있을 때, 이들은 자신들이 떠나온 행성이 달 표면에서 떠오르는 모습을 목격하고 셔터를 눌렀다. 마침 크리스마스이브였고, 그것은 지구에 남겨진 다른 인류에게 보내는, 조금은 당황스러운 선물이었다. 이제는 너무도 익숙한, 그러나 당시로서는 매우 충격적이었던 이 이미지 속에서 지구는 우주의 깊은 어둠 속에 홀로 떠 있는 작고 외로운 푸른 구슬에 불과했다. 그러나 그 작은 구슬이 그들이 살아서 돌아가야 할 곳이었고, 사랑하는 모든 것들이 남겨져 있는 우주의 유일한 안식처였다.

 

시인 아치볼드 매클리시는 아폴로 8호가 달 궤도에 진입한 다음날인 크리스마스에 발행된 뉴욕타임스에 '저 끝없는 고요 속에 떠 있는 작고, 푸르고, 아름다운 지구를 있는 그대로 본다는 것은 바로 우리 모두를 지구의 승객으로 본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썼다. 인류가 지구의 승객이라는 비유는 지금으로서는 진부하게 들릴지 몰라도 당시에는 읽자마자 무릎을 칠만한 것이었다. 승객은 영원히 머물지 않는다. 왔다가 떠나는 존재일 뿐이다. 매클리시는 이어서 우주의 이 끝 모를 차가움 속에서 우리 자신들은 형제, 서로가 형제임을 진실로 아는 형제라고 부연했다. 지구가 고작 아이들이 가지고 노는 장난감 구슬처럼 보인다는 것을 알았을 때, 시인은 자존심을 다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렇기에 지구라는 작은 행성, 푸르게 빛나는 우주의 오아시스와 우리 서로를, 모든 동식물을, 같은 행성에 탑승한 승객이자 동료로 소중히 여겨야 한다고 암시한 것이다.

 

 

 

 

풀리지 않는 난제들로부터 도망치고 싶을 때,

소란한 일상으로부터 벗어나

홀로 고요하고 싶을 때,

예기치 못한 마주침과 깨달음이

절실하게 느껴질 때,

 

그리하여 매순간,

우리는 여행을 소망한다.

 

 

 

 

"어둠이 빛의 부재라면, 여행은 일상의 부재다."

 

"이 책을 쓰는 데 내 모든 여행의 경험이 필요했다."

 

 

 

 

ㅡ 김영하 산문 '여행의 이유' 중에서...

 

 

 

 

 

 

 

 

 

📷

NAS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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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원문 : 여행, 바람처럼 흐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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