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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별볼일 없을 줄 알았던 스파클링 와인 한 병이 가져다 준 깊은 휴식

작성자카페지기|작성시간22.09.12|조회수9 목록 댓글 0

때로 그럴 때가 있지요. 주말의 마무리는 이런 식으로... 일부러 약간 달콤함을 띤 와인을 잡게 되는 경우. 그런데 이번엔 어쩐지 스파클링을 마시고 싶었습니다. 이사가는 손님으로부터 예쁜 스파클링 와인 플루트 잔을 선물받았거든요. 그동안 내 서비스에 감사한다면서. 좋은 우체부가 된다는 건, 실수 없이 우편물을 전해주는 것만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아무래도 내가 배달을 맡은 커뮤니티 안에서 사람들을 만나고, 그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내 이야기를 하면서 정을 쌓는 것, 그래서 내가 속한 커뮤니티에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를 파악하는 것도 제 일의 큰 부분이지요.

아무튼 저는 그렇게 해서 많은 사람들을 만났고, 정을 쌓을 수 있는 기회들이 있었습니다. 몇몇 이들은 제게 절대 잊어버릴 수 없는 추억을 남겨 주었지요. 지금은 세상을 떠난 마가렛 할머니, 역시 얼마전에 세상을 떠난 사이먼 할아버지 같은 경우는 제 인생을 완전히 다른 각도에서 제 스스로 바라볼 수 있는 기회를 주셨다는 느낌입니다.

나이드신 분 들 뿐 아니라, 저보다 어린 사람들도 제게 세상을 달리 볼 수 있는 많은 기회를 주었습니다. 얼마 전 자기 아파트를 떠나 타주로 이사간 제이미네 부부가 그랬습니다. 사람 돕는 걸 좋아하고, 그래서 부부 중 아내는 교사, 남편은 간호원이었던 그 부부는 제이미의 고향인 시카고로 돌아가기로 결정했다고 합니다. 지금 사는 곳에서 꽤 오래 살았기 때문에 이런 저런 짐들이 있었을 터, 제게 이사를 간다고 통보하고 새 주소를 적은 '메일 포워딩 폼'을 건네 주었습니다. 미국에서는 이사간 이들에게 1종과 2종 우편물은 1년간 포워드, 즉 새 주소로 배달해 주는 서비스를 합니다. 그래서 저는 이들이 시카고로 이사간다는 것을 알게 됐지요.

"조셉, 와인 이야기 그동안 잘 들었는데, 앞으로 그 얘길 못 들어서 섭섭할 것 같아. 그리고 이건 조셉이 가져가는 게 좋겠어. 이사가는 데 쉽게 깨질 것들을 굳이 가져갈 필요가 없어서." 그들이 건네준 건 리델의 샴페인 플루트 세 개였고, 저는 이걸 고이 싸서 집으로 가져왔습니다.

아마 그 잔 때문이었을까요. 저는 아내와 가볍게 스파클링 와인 한 잔을 하고 싶었습니다. 그녀도 "오늘은 한 잔 해요."라고 말했던 참이었습니다. 차고에 가서 굴러다니던 와인들을 천천히 들여다보고 있다가, '카페 드 파리'에서 나온 배 맛 스파클링 와인을 꺼내들었습니다. 그렇게 특별한 의미를 담을 필요는 없는 와인이지만, 사연 없는 와인도 없지요.

아내는 어느날 엄청나게 세일을 때린다는 스파클링 와인을 사들고 들어왔습니다. 가격은 겨우 4달러 선. 원래는 10달러 정도 하던 거였는데, 집에 와서 마셔보니 그녀의 입맛엔 딱 맞는다는 거였습니다. 원래 와인을 사는 건 제가 하는 거지 그녀가 하는 건 아니었는데, 아내가 두 케이스의 와인을 사 들고 오는 건 처음 봤습니다. "아, 이거, 내가 먼젓번에 맛있다고 했던 거."

열 두 병의 스파클링 와인과 열 두 병의 이태리 IGT (특정 지역과 상관 없는 방식으로 만든, 그래서 이태리 DOCG 등급 체계에서 벗어나 있는) 와인을 낑낑대며 들고오는 그녀를 보며 제가 황당해 했었지요. "아 빨리 받아서 들고가지 않고 뭐해요!" 그녀를 알고 지낸 시간이 이제 그녀를 모르고 지냈던 시간보다 길어지고 있는 저로서는 정말 황당한 일이었습니다. 오래살고 볼 일이야. 저 여인이 집에 자기가 직접 와인을 박스떼기로, 그것도 두 케이스(스물 네 병!)나 가져 오다니.

아무튼, 아내가 저렴하게 구입해 놓은 그 와인은 제 입맛엔 상관 없는 거였지만, 그게 가끔 마시고 싶을 때도 있었습니다. 특히 짜거나 매운 음식들, 즉 우리나라 음식들과 함께 할 때, 때로 이 족보 떨어지는(?) 와인은 좋은 매치가 되곤 했으니까요.

'카페 드 파리'는 이른바 '샴페인 방식'으로 만든, 이중 발효시킨 제대로 된 브뤼 스타일의 끄레망을 만들기도 하지만, 이들의 인기 품목은 배나 석류 맛으로 만든 '플레이버 스파클링' 들입니다. 젊은 입맛에 맞는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이제 '젊다'고 말하기에는 정치적 성향과는 상관 없이 입맛만큼은 보수 우경화(?)의 길을 걷고 있는 저에게, 이태리 샤르마 방식, 즉 큰 발효조에 포도를 넣어 대량생산하는 식의 와인은 무언가 격 떨어지는 것처럼 생각돼 왔는데, 이런 와인이라고 무시할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새삼 느끼게 해 준 것은 음식과 와인과의 만남 때문이었습니다.

아내는 며칠 전 마늘쫑을 꽤 많이 사와서 그걸 볶아 주었는데, 저는 여기에 맞출 와인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그녀는 어제 이 마늘쫑을 살짝 데쳐 무쳐 주었는데, 아삭한 질감이 그래도 잘 살아 있는 이 반찬에 맞출 와인을 찾자 바로 "까페 드 빠리 있잖아?"라고 저에게 거꾸로 조언을 주더군요. 그래, 그거다. 어차피 그 스파클링 와인은 이런 식으로 마셔 보려고 둔 것이었고, 저는 별 생각 없이 이 녀석을 열었습니다. 게다가 이 와인을 제대로 따라 마실, 폼생폼사에 딱 어울리는, 제이미 부부가 내게 선물해 준 리델 잔은 찬장 안에서 유난히 반짝이고 있었으니까요.

아삭. 매콤, 달콤, 짭짤. 그녀가 만든 마늘쫑 무침은 특별히 성당의 어느 자매님이 직접 만들어 담아 주신 고추장에 다시 물엿을 넣어 볶은 것이었는데, 무침 장으로는 말할 나위 없이 좋았고 아삭한 마늘쫑의 식감이 좋았습니다. 게다가 내가 정신없이 마늘쫑과 부추무침을 먹고 있을 동안, 아내는 장볼 때 사온 병천순대를 쪘고, 치킨 소시지, 얇게 썬 마늘을 잔뜩 넣어 볶아 놓은 브로컬리를 내 놓았습니다.

달콤한, 굳이 심각하게 마실 필요가 없는, 너무나 평범하고 달콤한 스파클링 와인, 그래서 프랑스에서 만들어졌음에도 불구하고 끄레망이란 이름도 못 다는 이 저렴한 스파클링이 마늘쫑 무침을 만나는 순간 확 피어났습니다. 그리고 내게 대롱대롱 매달려 있던 피로와 정신적인 피곤함도, 그 순간만큼은 싹 사라지는 느낌이었습니다.

"쓸데없이 이 와인 사왔다고 할 일이 아니었네." 혼자서 중얼중얼거리는 소리를 그녀가 들었는지 제게 한마디 합니다. "마누라가 하는 말, 그리고 내가 뭘 사올 때는 다 이유가 있는거야." 그냥 그런 줄 알고 넘어가 주는 게 우주의 평화를 지키는 지름길임을 알고 있는 저는 그냥 플루트 잔을 잡고 홀짝홀짝 스파클링 와인을 마십니다. 그 짜고 맵고 달콤하고 아삭한 것이 이 달콤하고 목을 간질여주는 '싸구려' 스파클링 와인과 만나서는 화사한 춤을 추는 듯 해서. 게다가 냉동순대라고는 해도, 병천순대는 이름값을 해주는지라. 그리고 소시지는 늘 스파클링 와인과는 좋은 짝이라.

하긴, 와인이란 게 이런 거였지. 언제 내가 그렇게 격식 차리고 좋은 와인 마셨냐.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아내는 한 잔 마시고 얼굴이 새빨개져서는 잠깐 이런 저런 이야길 하다가 먼저 꿈나라로 가고 맙니다. 저는 그러는 동안 남은 와인과 마늘쫑 무침, 순대, 그리고 볶은 브로컬리를 천천히 다 먹어 치웠고, 고양이 밥을 줬고, 그릇을 가져다가 씻고, 컴퓨터 화면에 눈을 줬습니다. 취기는 저에게 다시 내일을 준비할 수 있는 힘을 주었고, 그 힘으로 일요일인 오늘, 저는 아버지 병상 옆에 와 다시 아버지의 옆을 지키고 있습니다.

아버지의 옆에 앉아 있는 이 시간은 내 삶을 돌아볼 수 있는 시간입니다. 지금까지 내가 생각해보지 못했던 것들, 그리고 우리의 노년이란 것이 어떤 모습일까를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시간이기도 할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카르페 디엠, 지금 내게 주어진 이 시간을 가장 소중한 것으로 알고 즐기는 것은 중요할 것입니다.

시애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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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원문 : 와인리더소믈리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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