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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분과 전체_롬8장

작성자김영준|작성시간23.03.26|조회수167 목록 댓글 0

발달장애인자조모임 조력자 양성과정에 참여했던 첫날 첫 시간에 강사가 수강자들에게 자기소개를 요청했습니다. 20여명 수강자들이 돌아가며 자기소개를 하는데, 울지 않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말하면서 울고, 들으면서 울었습니다. 발달장애인 자녀를 키우는 부모들의 고통이 깊습니다. 눈물이 깊은 샘을 이루어 몸속 어딘가에서 출렁거리는데, 강사가 자기소개하자며 둑을 터버리니 쏟아졌습니다.

 

세월호 참사 가족들을 만날 때도 눈물 없이 대화하기 어렵습니다. 어느 대목에서든 눈물 나는 순간을 피할 수 없습니다. 2023년엔, 416일 일주일 전 49일이 부활주일입니다. 416일 일주일 전에 부활절을 지나는 게 세월호 가족들에겐 다시 고통일 수 있습니다.

 

불치병과 난치병을 안고 살아가는 무수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제 아버지와 작은 형은 수년 동안 불치병을 앓다가 돌아가셨습니다. 병을 앓다가 사고를 당해, 혹은 태어나면서부터 장애를 입고 살아가는 수 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고통 속에 살아갑니다.
 

 

미켈란젤로는 최초의 인간이라는 아담과 이브를 그린 자리에 줄기가 잘린 나무를 그렸습니다. 등줄기가 잘려 나가는 참척(斬脊)의 고통이 인간의 운명이라고 미켈란젤로는 말하고 싶었을까요. 사전에선 참척(慘慽)이라 쓰지만 저는 참척(斬脊)의 고통이라 고쳐 쓰고 싶습니다. 사전에선 참척(慘慽)을 자식이 부모보다 먼저 죽을 때 부모가 겪는 고통이라 설명합니다. 허리가 잘려 나가는 고통이겠지요.

 

크기에 차이가 있습니다만, 모든 사람에게 고통이 있습니다. 고통은 느닷없이 찾아와 오래도록 사람을 아프게 합니다. 사람이 고통을 겪는 건 육신을 입은 채 살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육신을 벗어버리기 전에 고통을 피할 방법은 없습니다. 육신에서 벗어나는 해탈을 깨달으면 고통을 피할 수 있을까요?

 

하나님의 영이 여러분 안에 살아 계시면, 여러분은 육신 안에 있지 않고, 성령 안에 있습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닙니다. 또한 그리스도께서 여러분 안에 살아 계시면, 여러분의 몸은 죄 때문에 죽은 것이지만, 영은 의 때문에 생명을 얻습니다(8:9~10).

 

사람이 죽어 육신을 벗어 고통에서 벗어나는 게 아닙니다. 육신이 하나님의 영을 입으면 고통마저 의미를 갖습니다.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고 길을 걸으라 하십니다(14:27). 십자가를 지고 걷는 건 육신에 극심한 고통을 겪는 것입니다. 예수께선 육신에 가해지는 십자가 고통을 감내하신 건, 성령을 입으셨기 때문입니다(4:18~19). 육신이 하나님의 영을 입고 십자가를 질 때, 그 고통도 의미를 갖습니다. 십자가에서 죽음으로 육신을 벗어버리고 고통에서 벗어나고자 하신 게 아니라, 성령을 입어 살기 위해, 결국 부활에 이르기 위해, 예수께선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육신을 벗은 게 아니라 성령을 입은 것입니다.

 

육신을 벗어 해탈하기보다 성령을 입어 부활하겠습니다.

 

예수를 그리스도라 고백하고 십자가를 지고 예수께서 가신 길을 걷는 게 고난입니다. 정의, 평화, 자유를 따라 걷는 게 예수께서 매달리신 십자가를 이정표 삼는 길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고난으로 초대하십니다. 정의를 따라 걷다 보면 불의에 맞서게 되고 고난을 맞습니다. 평화를 따라 걷다 보면 전쟁에 참여하게 되고 고난을 맞습니다. 자유를 따라 걷다 보면 억압에 눌려 고난을 맞습니다.

 

예수를 그리스도라 고백하고 십자가를 따라 걷는 길에서 고난을 피할 순 없습니다. 예수와 무관하게 십자가를 모르는 채 살면 고난을 피해도 고통을 피할 순 없습니다. 모든 사람은 크고 작은 고통을 갖고 살아갑니다. 고난을 만나든 고통을 겪든, 인생은 고생입니다. 인생엔 갈래길이 있습니다. 한쪽은 예수를 만나지 못한 채 살아가나 고통을 피할 수 없는 길이고, 또 한쪽은 예수와 함께 기꺼이 고난을 감당하는 길입니다. 이쪽 길이나 저쪽 길이나 고생입니다. 두 갈래로 난 길 어디나 고생길입니다. 예수를 몰라도 고통을 피할 수 없고, 예수와 함께 기꺼이 고난을 감당합니다.

 

사람은 고통이든, 고난이든 악으로 경험합니다. 사람을 고생스럽게 하는 건 무엇인가요? 환난입니까, 곤고입니까, 박해입니까, 굶주림입니까, 헐벗음입니까, 위협입니까, 또는 칼입니까(8:35)선악을 구별할 줄 아는 사람은 환난, 곤고, 박해, 굶주림, 헐벗음, 위협, 칼을 악으로 규정합니다. 고생스럽게 만드는 이런 것들을 조각조각 경험하는 순간마다 악이지 싶습니다. 환난, 곤고, 박해, 굶주림, 헐벗음, 위협, 칼을 악이라 규정하는 것, 선과 구별된 악이 따로 있는 것이라고 이해하는 것, 이것이 원죄입니다. 선악을 알아 시대와 상황과 사람을 선과 악으로 구별하는 것이 원죄입니다. 모든 사람은 선과 악을 창살 삼아 스스로 원죄에 갇혀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런 모든 것을 전체로 합하여 선으로 만드십니다. 환난도 곤고도 박해도 굶주림도 헐벗음도 위협도 칼도, 다 전체로 합해져 선이 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 곧 하나님의 뜻대로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에게는, 모든 일이 서로 협력해서 선을 이룬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8:28).저는 이 말씀을 개역성경으로 처음 접했습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이 말씀은 제 아버지께서 돌아가신 직후에 형이 쓰는 책받침대에 매직으로 적혀 있었습니다. 중학생 소년에게 아버지의 죽음은 악이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의 죽음도 선을 이루어가는 전체의 부분이 된다는 말씀이 심장에 스며들었습니다. 우리 형이 매직으로 적어두었던 말씀 한 구절은 기독교 진리의 핵심입니다. 고통이든 고난이든 사람은 부분부분 악이라 규정할만한 것들을 경험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고통과 고난의 조가조각들을 엮어 전체를 선하게 창조하십니다.

 

하나님이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합니다(4:4). 조각조각 깨진 악을, 조각조각 깨뜨리는 악을, 하나님께서 엮고 꿰매시며 결국 고운 조각보로 창조하십니다. 고통이든 고난이든 인생은 고생이나, 그래서 인생은 아름답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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