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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내가 모른다는 것을 안다"_ 눅26:15~36

작성자김영준|작성시간23.04.23|조회수191 목록 댓글 0

길을 가다가 예수를 만났습니다. 예수에게 예수에 대해 말합니다.

 

그는 하나님과 모든 백성 앞에서, 행동과 말씀에 힘이 있는 예언자였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대제사장들과 지도자들이 그를 넘겨주어서, 사형선고를 받게 하고,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습니다. 우리는 그분이야말로 이스라엘을 구원하실 분이라는 것을 알고서, 그분에게 소망을 걸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그런 일이 있은 지 벌써 사흘이 되었는데, 우리 가운데서 몇몇 여자가 우리를 놀라게 하였습니다. 그들은 새벽에 무덤에 갔다가, 그의 시신을 찾지 못하고 돌아와서 하는 말이, 천사들의 환상을 보았다는 것입니다. 천사들이 예수가 살아 계신다고 말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와 함께 있던 몇 사람이 무덤으로 가서 보니, 그 여자들이 말한 대로였고, 그분은 보지 못하였습니다(24:19~24).

 

글로바가 한 말입니다. 누가는 글로바를 사도 중 한 명이라고 적습니다(24:11~13).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마지막까지 함께 있었던 여인들 중 한 사람이 글로바의 아내였습니다(19:25). 십자가 처형장을 지켰던 이의 남편 글로바와 지금 예수에 대해 말하는 글로바가 동일인이라 확증할 순 없습니다. 확증하긴 어려우나 짐작컨대 글로바라는 사람은 어쩌면 신실하고 용감한 여인의 남편이고, 사도들 중 한 명이라 여겨질만한 사람이라, 예수의 얼굴을 전혀 모르진 않았을 것입니다. 아주 잘 알았을 수도 있구요. 그래서 이렇게 자세히도 예수에게 예수에 대해 말합니다. 이야기를 듣는 이가 예수인 줄 모르고 예수에 대해 잘도 말합니다. 예수를 알아보았다면 말하는 중간에 멈췄겠지만, 예수를 알아보지 못해 꼼꼼하게 설명합니다.

 

, 글로바는 예수를 몰라봤을까요?

 

밀이든지 그 밖에 어떤 곡식이든지, 다만 씨앗을 뿌리는 것입니다.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원하시는 대로, 그 씨앗에 몸을 주시고, 그 하나 하나의 씨앗에 각기 고유한 몸을 주십니다... 죽은 사람들의 부활도 이와 같습니다. 썩을 것으로 심는데, 썩지 않을 것으로 살아납니다. 비천한 것으로 심는데, 영광스러운 것으로 살아납니다. 약한 것으로 심는데, 강한 것으로 살아납니다. 자연적인 몸으로 심는데, 신령한 몸으로 살아납니다. 자연적인 몸이 있으면, 신령한 몸도 있습니다(고전15:37~44).

 

바울은 죽은 사람의 부활을 씨앗이 죽어 나무가 되는 것과 비교합니다. 씨앗이 부활할 때 씨앗으로 부활하지 않고, 나무로 부활합니다. 나무가 씨앗을 품고 있지만 모양이 전혀 다릅니다. 부활한 예수는 글로바가 이전에 알던 예수와 전혀 모양이 달랐을까요.

 

바울은 예수의 죽음과 부활에 관해 설명하면서, 자신의 죽음을 말합니다. 바울은 장차 호흡이 다해 생명이 끝나는 죽음이 아니라, 반복되는 죽음을 말합니다. 나는 날마다 죽습니다(고전15:31).

 

바울이 날마다 죽는다면, 바울은 날마다 부활했겠습니다. 날마다 다른 사람이 알아보지 못할 만큼 변화되는 게 부활이겠습니다. 성장하는 아이들은 변화합니다. 탈피하듯 변화하며 부활을 삽니다. 부활의 과정은 몸에 스트레스를 주기도 합니다. 늙어가는 것 역시 변화입니다. 젊었던 모습으로 되돌리기보다 늙어 변화하는 모습은 신비입니다. 대부분 사람들의 부활은 이렇게 점진적인 것이라 알아볼 순 있습니다. 육으로 부활하는 건 알아보기 쉽습니다. 그런데 영으로 부활하는 것, 신령한 몸으로 부활하는 건 잘 알던 사람도 알아보지 못할 수 있다니, 신비롭습니다. 날마다 죽는다고 말하는 바울은 날마다 다른 사람이 알아보지 못할만큼 변화했던 것일까요.

 

나는 부활을 믿지만, 부활을 모릅니다. 바울처럼 대단한 인생을 사는 것도 아니어서 날마다 죽는다고 멋있게 말하지도 못하는 까닭에 내가 경험하는 부활을 설명할 길이 없습니다. 예수처럼 악에 저항하다가 온 인류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지도 못할 것이라, 내 인생과 내 몸으로 부활을 증명할 길이 없습니다. 나는 다만 예수에 대해 말하고, 바울이 한 말을 인용할 뿐입니다. 글로바처럼, 예수에게 예수에 대해 자세히 말하나 예수를 알아보지 못합니다.

 

그래도 아는 건, 예수는 우리 사는 세상에 오셨다는 것입니다. 알아보지 못하지만, 알아보고 싶어하지 않지만, 예수는 세상 여기저기에 오셨습니다.

 

너희는, 내가 주릴 때에 내게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실 것을 주었으며, 나그네로 있을 때에 영접하였고, 헐벗을 때에 입을 것을 주었고, 병들어 있을 때에 돌보아 주었고, 감옥에 갇혀 있을 때에 찾아 주었다' 할 것이다. 그 때에 의인들은 그에게 대답하기를 '주님, 우리가 언제, 주님께서 주리신 것을 보고 잡수실 것을 드리고,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실 것을 드리고,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영접하고, 헐벗으신 것을 보고 입을 것을 드리고, 언제 병드시거나 감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찾아갔습니까?' 하고 말할 것이다. 임금이 그들에게 말하기를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여기 내 형제자매 가운데, 지극히 보잘 것 없는 사람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다' 할 것이다(25:35~40).

 

의인들은 예수를 알아봅니다. 예수를 알아보는 이가 의인입니다. 배고픈 사람, 목마른 사람, 나그네, 헐벗은 사람, 병든 사람, 감옥에 갇힌 사람이 예수입니다. 부활하신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다시 오시는 방식입니다(1:11). 다시 오신다고 약속하셨던 예수께선 배고픈 사람, 목마른 사람, 나그네, 헐벗은 사람, 병든 사람, 감옥에 갇힌 사람으로 오십니다. 글로바처럼, 나는 예수에 대해 말하지만 예수를 알아보지 못합니다. 의인이 아닌 모양입니다.

나는 예수에 대해 말할 수 있지만 예수를 모릅니다. 나는 내가 예수를 모른다는 걸 아는 목사입니다.
 

카라바지오, 엠마오에서 저녁 식사, 141*175cm, 런던내셔널갤러리, 16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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