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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서_요20:19~23

작성자김영준|작성시간23.05.28|조회수128 목록 댓글 0

코로나19가 전 세계에 확산되었을 때 중국인들의 음식문화를 질타했습니다. 중국인 때문에 코로나가 생겼다는 것입니다. 더불어 유럽과 미국에서 아시안들에 대한 혐오가 심해졌습니다. 이상한 식문화를 가진 중국인 때문에 발생했고, 중국인과 비슷한 아시아인들이 모두 전염병의 원인이라 생각해 언어폭력과 자잘한 테러가 발생하기도 했습니다.

 

전염병 같은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가 생길 때면 특정한 사람들의 죄때문이라 몰아가는 경향이 있습니다. 지진이 일어나 피해복구가 신속하게 이뤄지지 않을 때 소수민족이 우물에 독을 풀었다고 소문을 내, 죽어 마땅한 죄인 삼기도 했습니다. 큰 전쟁이 일어났을 때도 고리대금업을 하는 특정 민족 때문이라며 별표를 붙여 죽음의 표적으로 삼기도 했습니다.

 

우리 사는 세상에 문제가 발생하면, 무언가에 의해 오염되었기 때문이며, 오염의 원인이 된 사람을 지목해 희생시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조작되어왔습니다. 문제때문에 야기된 위기 상황에 대한 사람들의 분노를 특정한 한 점에 집중시키는 방식으로 세상은 흘러왔습니다. 이런 방식으로 희생제를 지내면, 사람들의 분노가 해소되고, 오염이 지워졌다고 안도하며, 희생물을 죽인 사람들 사이에 보이지 않는 동맹이 맺어져 다시 세상은 안정을 찾는 방식입니다.

 

체계 갖춘 국가나 규모 있는 종교가 어떤 문제를 맞이했을 때 오랫동안 써왔던 방식입니다. 문제의 원인으로 지목된 사람은 혐오되거나 배제되다가 급기야는 죽음에 이르기도 합니다. 예수께서도 당시 로마 제국에 시달리는 사람들의 불만의 표적이 되어 십자가에 달린 죄인으로 죽음에 이르셨습니다.

 

문제는 있습니다. 문제의 원인은 죄입니다. 그러나, 어떤 특정한 사람이 죄인은 아닙니다. 죄와 죄인의 문제가 단순하거나 명료하지 않습니다. 문제의 원인이 되는 죄는 모든 사람에게 있으니까요. 로마서 310절부터 17절입니다.

 

성경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의인은 없다. 한 사람도 없다. 깨닫는 사람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사람도 없다. 모두가 곁길로 빠져서, 쓸모가 없게 되었다. 선한 일을 하는 사람은 없다. 한 사람도 없다." "그들의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다. 혀는 사람을 속인다."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다." "입에는 저주와 독설이 가득 찼다." "발은 피를 흘리는 일에 빠르며, 그들이 가는 길에는 파멸과 비참함이 있다. 그들은 평화의 길을 알지 못한다.

 

모든 사람이 죄인입니다. 세상에 일어나는 풀기 어려운 문제는 한 사람이나 특정한 집단이나, 구별된 성향을 지닌 사람들 때문이 아니라, 여러 복합적인 관계 속에 얽히고 설킨 것들입니다. 복잡하게 얽히고 설킨 것들을 풀만한 역량이 없을 때, 인류는 희생양을 찾아냅니다.

Oedipus and Antigone, or the Plague of Thebes, by Charles Jalabert, 1843, Musée des Beaux-Arts, Marseille © Bridgeman Images

 

기원전 4세기 드라마를 소개합니다. 테바이에 전염병이 돌자, 신탁이 내립니다. 아버지를 죽인 자, 어머니를 아내 삼은 자 때문에 전염병이 돌았다는 것입니다. 확인 결과 테바이 왕 오이디푸스가 아버지를 죽였고, 어머니를 아내 삼은 게 밝혀져 추방당합니다. 오이디푸스는 길에서 만난 사람에게 공격을 당하자 자신을 방어하다가 사람을 죽였고, 테바이 사람들을 괴롭히는 괴물 스핑크스를 제압한 영웅으로 왕이 되었다가 왕비를 맞이했을 뿐이었습니다. 정당 방위 속에 죽인 이가 아버지였고, 공적으로 왕이 되어 맞이한 왕비가 어머니인 줄 오이디푸스는 몰랐습니다. 그러나 오이디푸스는 전염병의 원인을 제공한 죄인으로 지목되어, 희생됩니다. 오이디푸스가 희생양으로 지목된 이유는 그가 다리가 불편한 장애인이요, 테바이 출신이 아닌 이주민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렇게 문제의 원인을 특정인으로 지목하고 죄인으로 낙인찍은 후, 추방하거나 죽이는 방식으로 국가는 다시 안정을 찾습니다. 전염병은 시간이 지나면 사라지고, 함께 문제의 원인을 제거했다는 동맹 의식으로 사람들은 하나가 됩니다. 국가는 이렇게 지속됩니다. 종교도 비슷합니다.

 

2천 년 전 유대교는 사람들이 그리스도가 지목한 나사렛 예수를 희생양 삼아 죽임으로 로마 군대를 막고, 유대교의 본산인 예루살렘 성전을 지킬 수 있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희생된 예수께서 부활하셨습니다. “두 손과 옆구리에상처를 안으신 채 부활하셨습니다. 죄인으로 지목되어 희생되었던 예수께서 새로운 세상을 열자 하십니다. 요한복음 2022절과 23절입니다.

 

성령을 받아라.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 죄가 용서될 것이요, 용서해 주지 않으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

 

모든 사람이 죄인이지만, 죄인을 지목해 죽이거나 추방하는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게 아니라, 용서하자고 하십니다. 죄인을 죽이거나 추방하며 맺는 동맹이 아니라, 서로 용서하고 용서받는 이웃이 되자고 제안하십니다.

 

전염병의 원인은 사람들이 도시에 밀집해 살기 때문입니다. 밀집해 사는 모든 사람이 전염병의 원인입니다. 모든 사람이 죄인입니다. 어떤 한 개인이, 특정한 성향, 종교, 사상 집단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죄인입니다. 두드러지는 신체 특성을 가진 사람이나 외지에서 온 낯선 이주민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죄인입니다. 우리 모두 각자가 누군가에게는 낯선 이방인이요 독특한 정체성을 가진 고유한 사람입니다. 독특하고 고유한 게 죄가 된다면 모든 사람이 죄인입니다.

 

20세기 초 유럽에서는 유대인을 죄인으로 지목했습니다. 21세기 한국교회는 성소수자를 죄인으로 지목합니다. 희생물로서 문제의 원인으로 표적지 삼아, 문제의 진짜 원인이 되는 지도자들의 성범죄와 세습과 횡령 등 권위적 구조에서 드러나는 악행을 감추려 합니다.

 

2천 년 전, 예수께서는 로마 제국과 유대교 지도자들의 죄와 구조적 모순을 대신 떠안고 죽어 마땅한 죄인이 되어 십자가에서 처형되셨습니다. 이런 희생양 제의는 예수가 마지막이어야 한다는 게 하나님의 뜻입니다. 히브리서 1010절과 11절입니다.

 

이 뜻을 따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써 우리는 거룩하게 되었습니다. 모든 제사장은 날마다 제단에 서서 직무를 수행하면서 똑같은 제사를 거듭 드리지만, 그러한 제사가 죄를 없앨 수는 없습니다.

 

인류는 문제가 생길 때마다 희생물을 삼아 혐오하고 배제하여 죽이거나 추방했습니다. 반복되고 반복되지만 이런 방식으론 문제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계속해서 희생되는 사람이 나와야 하는 야만에서 벗어나 누군가를 정죄하는 게 아니라 서로 용서하는 방식으로 문제를 풀자는 게 예수의 생각입니다. 예수의 희생은 마지막이어야 합니다. 예수는 자신이 최후의 희생제물이었기를 바라며, 누구의 죄든지 용서하라고 하십니다.

 

성령을 받아라.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 죄가 용서될 것이요, 용서해 주지 않으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

 

어쩔 수 없이 사람은 죄를 짓습니다. 먹고 사는 게 모두 죄입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소비하는 거의 모든 행위가 죄입니다. 도시에 사는 우리는 모두 죄인입니다. 모두 서로 용서하는 것에서 문제를 제대로 파악할 수 있습니다.

 

답을 모를 땐, 문제를 다시 읽고 다시 읽어야 합니다. 함께 읽어야 합니다. 함께 풀어야 합니다. 우리 이웃은 문제의 원흉이 아니라, 문제를 함께 풀 수 있는 동지입니다. 모든 사람이 죄인이라, 모든 사람은 용서가 필요합니다. 모두가 서로 용서하면, 모두가 한뜻 품은 동지입니다.

 

모두를 용서하게 하는, 성령을 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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