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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부래미 박서방_마23:1~39

작성자김영준|작성시간23.11.10|조회수25 목록 댓글 0

김목사는 종교지도자입니다. 저는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 교단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고, 사람들이 저를 목사라 부릅니다. 교회에서도 목사라 부르고, 교회 밖 모임에서도 목사라 불립니다. 저는 목사라는 호칭을 사양할 마음이 조금도 없습니다. 목사라 불리는 순간, 저는 나이, 경력에 무관하게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존중받고 예우 받습니다. 저는 목사라는 이름을 적절하게 사용하기를 좋아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지금 ‘목사’와 그 역할이 비슷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을 향하여 준열하게 비판하십니다. “화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교인 한 사람을 얻기 위하여 바다와 육지를 두루 다니다가 생기면 너희보다 배나 더 지옥 자식이 되게 하는도다”(마23:15) “화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여 회칠한 무덤 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도다”(마23:27) 지금 여기에 예수님께서 오신다면, 김목사에게 하실 말씀들입니다.

 

부자가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낙타가 바늘귀를 통과하는 것만큼 어렵듯이, 목사가 예수를 따르는 것도 어쩌면 불가능한 건 아닐까요? 부자가 그 소유를 포기하기 어렵듯, 목사도 그 권위를 포기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권위를 포기하기 어려운 김목사에게 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그들은)...잔치의 윗자리와 회당의 높은 자리와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과 사람에게 랍비라 칭함을 받는 것을 좋아하느니라”(마23:6~7) 바리새인과 서기관에게, 조금도 관대하지 않으신 예수님께서 김목사에게 관대하실 리 없습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을 향한 예수님의 일갈은 제 목을 겨누는 칼입니다.

 

지금 여기에 예수님께서 오신다면, 김목사의 설교를 듣는 여러분들에겐 뭐라 하실까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모세의 자리에 앉았으니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그들이 말하는 바는 행하고 지키되 그들이 하는 행위는 본받지 말라”(마23:3) 목사의 설교는 듣고 행하되, 목사의 행위는 본받지 말라 하십니다.

 

영화 ‘포레스트 검프’에서, 주인공 포레스트가 달리는 장면이 나옵니다. 3년여,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달리기만 하는데요, 달리는 포레스트를 보고 사람들이 함께 달리기 시작합니다. 말없이 길을 달립니다. 길이 막히면 다시 되돌아 달립니다. 침묵 중에 그저 길을 달리는 포레스트를 따라 사람들이 함께 달리는 장면이 기억납니다.

 

말 없이 가는 길이 설교가 되면 좋겠습니다. 문자와 언어를 넘어선 성령의 역사가 있어서, 정교한 설교원고가 없어도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며 길을 가면 좋겠습니다. 그만한 영성을 우리가 지니면 얼마나 좋을까요. 목사의 행위는 본받지 말고, 목사의 설교를 듣고 행하여 길을 걷는 게 성도들의 지혜겠습니다. 말하는 목사에겐 흠이 많아도, 듣는 성도들의 지혜로, 예수께서 가신길을 끝까지 달려가시길 부탁드립니다.

 

렘브란트, The Descent from the Cross, 158*117cm, 1634,  Hermitage Museum

 

모든 바리새인이 말만 했던 건 아닙니다. 바리새인 중에도 더러 예수 따르기를 고민하며, 예수가 버려진 자리까지 따라갔던 사람도 있습니다. 바리새인 중, 군계일학(群鷄一鶴)같은 사람입니다.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 와서 당돌히 빌라도에게 들어가 예수의 시체를 달라 하니 이 사람은 존경 받는 공회원이요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자라”(막15:43) 산헤드린 공회의 회원은 사두개인들과 바리새인들이었습니다.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 존경받는 공회원이었다는 것은, 요셉이 바리새인이라는 뜻이겠습니다. 예수님 오시기 전부터 제사장을 배출하는 사두개파는 오래도록 헬라 세력과 로마의 어용 종교인들이었기 때문에 백성들의 존경을 받지 못했거든요. 존경받는 공회원이라는 표현으로 보아, 아리마대 요셉은 바리새인이었겠습니다.

 

바리새인 요셉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예수의 시체’를 내리게 해달라고 로마 당국에 요청한 겁니다. 십자가에 달린 채 시체는 서서히 썩으며 날짐승에게 쪼이거나, 혹은 밤에 태워지기도 하면서 제국에 저항하는 이의 본보기로 전시되었습니다. 서서히 죽이면서, 죽어서도 끝나지 않는 끔찍한 모습을 사람들에게 보여 공포심을 심어주는 게 십자가 형의 목적인데,  아리마대 요셉이 사실상 형집행 정지를 요청한 겁니다. 로마 제국에 대항한 반역자를 처형 중인데, 그래서 예수님을 근거리에서 따르던 제자들은 다 도망쳤는데, 그 때에 바리새인 요셉이 ‘예수의 시체’를 요청한 건 자기 신변의 위험을 감수하는 용감한 제안입니다. 아무도 예수를 따르지 않고 따를 수 없는 때에 ,예수를 따르는 사람이라고 공언하는 셈입니다. 끔찍한 십자가 형벌을 보여 사람들이 더 이상 예수를 따를 엄두를 내지 못하게 하려는 게 로마 당국의 의도였을텐데, 아리마대 요셉의 제안 자체가 로마 당국의 의도를 좌절시킨 셈입니다. 바리새인이라는 집합은 예수에게 저주를 받았지만, 바리새인 가운데 아리마대 요셉은 예수를 따랐던 제자로 인정받습니다. “저물었을 때에 아리마대의 부자 요셉이라 하는 사람이 왔으니 그도 예수의 제자라”(마27:57) 

 

1894년 동학농민혁명이 있었고, 1895년 을미사변 후 의병이 일어났습니다. 청일전쟁 이후 한반도에 주둔한 일본군들이 의병들을 죽였습니다. 권정생은 <한티재 하늘>에서 일본군이 의병들을 처형하는 장면을 소개합니다. 어머니에게 들은 "이야기를 옮겨 적었"다는 <한티재 하늘> 한 토막을 소개합니다.

(1896년 병신년) 정월 스무날 아침 일찍, 향고골 고지기 채서방이 동산에 올라가 크게 소리치고 있었다. 괴인테 마을 앞 강변 서깥으로 모이라는 전갈이었다......
......버드나무 두 그루의 굵직한 둥치엔 무언가 서속짚으로 엮은 거적으로 가리워져 있었다......
......누런 똥색 군복을 입은 수비대 대장인 듯한 사나이가 검자주빛 말을 타고 달려왔다......
......말을 탄 채 그 왜놈 사나이가 무어라고 명령을 내렸다......
......명령을 받은 수비대 둘이 뒷편 버드나무 둥치에 거리워진 서속짚 거적을 들쳤다. 놀랍게도 나무둥치엔 상투머리 남정네 하나와 아직 더벅버리 총각 하나가 따로따로 묶여 있었다......
......묶여있는 두 남정네는 틀림없이 빤란구이일 게다......
......명령을 받은 수비대 둘이 멀찌감치서 두 남정내를 향해 총을 겨누었다......
......한 사람이 두 발씩 총알이 나갔고 남정네 둘의 가슴에 피기 흘러내리며 고개를 떨구었다......
......버드나무 둥치에 묶인 빤란구이 둘은 피를 흘린 채 그냥 버려졌다. 누가 거두라는 말도 않고 아무도 거두는 이도 없었다. 이백 명이 넘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겁을 집어먹고 도무지 소리 한 번 지르지 못하고 있다가 수비대들이 사라지자 다투어 서깥을 떠나고 있었다. 꾀죄죄한 무명옷에 짚신을 신은 너무도 초라하고 멍텅구리 같은 사람들은 주인을 따라왔던 강아지들과 함께 비굴하게 흩어져 가기 바빴다......
......총맞은 구멍에서 피가 흘러흘러 무명옷을 적시고 바지가랑이 아래로 내려와 맨발등을 적시고 버드나무 그루턱을 적셨다. 먼저 흐른 피는 꺼멓게 말라붙고 나중 흐른 피는 팥죽물처럼 걸쭉하게 넘어가는 햇빛에 번들거렸다.
  얼굴빛은  푸르등하다가 점점 검어지고 눈은 흰챙이가 더 들어가고 입은 반쯤 벌리고 있었다. 넘어가는 햇빛에 어디서 날아왓는지 겨울 파리 몇 마리가 콧구멍과 입언저리에 붙었고 피가 흐르는 앞가슴에도 붙었다.
  다음날 아침, 사람들이 강변을 건너다보니 시체는 그냥 묶인 채 있었고 한낮이 되자 제법 따뜻한 햇볕에 냄새가 나고 어제보다 더 많은 파리떼가 날아와 붙었다. 그 위에 까마귀떼가 날아와 시체의 가슴팍을 파먹기 시작했다. 소리개가 빙빙 하늘 위를 날아다녔다. 시체의 머리는 더 많이 수그러졌고 살갗이 쪼그라들었다. 까마귀가 파먹은 가슴팍 옷이 찢어지고 시체 한 구는 바지가 반쯤 벗겨지고 허벅지가 주먹 크기만큼 뜷어져 있었다. 
  사흘째는 더 심했고 더 처참했지만 아무도 시체를 거두는 이가 없었다.
  나흘째 아침이었다. 사람들은 버드나무에 시체가 말끔히 치워진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그리도 아무도 모르게 행기봉 골짜기 양지쪽에 새 무덤이 두 개 생겨 있었다.
  누가 그 거룩한 일을 했는지 아무도 몰랐다. 다만 이듬해 정월 열흐렛밤, 행교골 자부래미 박서방네 집에 누군지도 모르는 기제사를 드린다는 것을 하나 둘씩 입과 입으로 퍼져 나갔다.  

권정생, 『한티재 마을1』, 지식산업사, 1998, 25-28쪽 

일본군 입장에서 의병은 반란군입니다. 로마군 입장에서 예수는 반란을 꾀하는 불령선인이었습니다. 로마군대가 예수를 나무(십자가) 매달아 죽였듯, 일본군이 의병을 죽여 나무에 묶은 채 두었습니다. 옛날 십자가에 매달린 사람은 오래 피를 쏟으며 짐승들의 먹이가 되어 비참하게 죽는 모습으로 사람들에게 전시되었습니다. 우리 의병들도 총살 당한 후 짐승에게 파 먹히며 사람들에게 그 끔찍한 모습이 전시되었습니다. 이때 시신을 수습하는 건 동조자로 찍혀 함께 죽거나 그에 상응하는 불이익을 받아야했을 것입니다. 아리마대 요셉기 십자가에 달린 예수를 내려 장사 지낸 건 당시 세계 최상 군대인 로마군대에 맞서는 용감한 행위였습니다. 자부래미(잠보) 박서방이 버드나무에 묶인 의병들의 시신을 수습하고 제사를 모신 건 "주인을 따라왔던 강아이들 함께 비굴하게 흩어"지던 사람들과 다른 용감한 행위였습니다.  아리마대 요셉과 자부래미 박서방은 자기 안위가 아니라 비참한 죽음을 지켰습니다. 비참한 죽음을 존엄한 죽음으로 끌어올렸습니다. 

 

 

 

글/ 민들레교회 목사 김영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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