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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려움과 떨림_빌2:12

작성자김영준|작성시간23.12.17|조회수19 목록 댓글 0

일어나지 않은 일이나 확정되지 않은 장래 때문에 불안하곤 합니다. 상대방이 저지른 잘못 보다 크게 분노하곤 합니다. 불안과 분노가 저에게 있습니다. 나쁜 세포처럼 불안이 자라며, 바이러스처럼 잠복했던 분노가 발현되곤 합니다. 내 마음을 나도 모르겠습니다. 나도 모르는 내 마음을 향해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모든 지킬만한 것 중에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잠4:23) 마음이 생명의 근원이라 하십니다. 마음을 지키지 않으면 죽는다고 하십니다. 마음을 지켜야 삽니다. 마음이 생명의 근원이기 때문입니다. 근원이라는 말 속에는 ‘샘’이라는 뜻이 녹아 있습니다. 물줄기를 이루는 첫 번째 샘이 근원입니다. 불안이 생명의 샘에 황토가 일게 하며, 분노가 생명의 샘에 독을 풉니다. 제 마음이 독으로 오염된 더러운 흙탕물 같습니다. 아직 저는 제 마음을 지킬 줄 모릅니다. 불안과 분노 때문에 마음을 지킬 줄 모르는 저에게 말씀하십니다. “노하기를 더디하는 자는 용사보다 낫고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성을 빼앗는 자보다 나으니라”(잠16:32) 분노하지 않는 자가 용사보다 낫다고 하십니다. 마음을 다스리는 자가 성을 빼앗는 자보다 낫다고 하십니다.

 

성을 빼앗은 자의 흔적이 로마에 있습니다. 지금도 여전히 남아있는 콜로세움(Colosseum)은 70년, 예루살렘이 파괴되던 해에 착공되었습니다. 로마 황제 베스파시아누스가 착공했고, 예루살렘을 무너뜨린 티투스가 황위를 이어받아 80년에 완공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이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무너지던 해에, 여전히 우뚝한 콜로세움의 기초가 놓였습니다. 한 해에 로마 박물관을 찾는 사람들이 4천만 명이 넘는다고 합니다. 오늘도 로마에는 적어도 10만 명의 사람들이 콜로세움을 볼 것입니다. 성을 빼앗은 자의 위력과 제국을 통치하는 자의 위엄을 보았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콜로세움을 착공한 베스파시아누스 황제보다 분노하기를 더디하는 자가 낫다고 하십니다. 예루살렘을 빼앗은 티투스 황제보다 자기 마음을 다스리는 자가 낫다고 하십니다. 잠언 16장 32절을 다시 읽겠습니다. “노하기를 더디하는 자는 용사보다 낫고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성을 빼앗는 자보다 나으니라” 말씀이 육화된 교회는 분노를 더디하는 자들입니다. 교회는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자들입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를 따라 잠잠히 희생을 감수하는 사람들이, 교회입니다. 교회는, 못 박히시는 십자가 위에서 못 박는 사람들을 위해 탄원하며 기도하는 예수를 그리스도라 믿는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이신 예수를 따라 원수를 위해 기도하는 사람들입니다. 죽음의 불안에 잠기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죽는다고 하더라도, 분노로 스스로를 방어하지 않는 사람들이, 교회입니다.

 

학문이 깊은데도 기꺼이 바보가 되는 사람이 있습니다. 대단히 유능한데도 무능력하다는 평가를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1415년 체코 카렐대학교의 학장이었던 얀 후스(Jan Hus, 1372년?~1415년7월6일)는 당시 세 명의 교황이 서로의 교권이 우월하다고 다툴 때에 성경의 권위가 교황의 권세보다 우월하다고 했습니다. 아울러 교회가 성찬을 베풀 때 사제들에게만 허락된 포도주를 평신도들도 마실 수 있다고 했습니다. 성경보다 교황이 더 높고, 사제에게 특권을 주는 교회는 교회가 아니라고 했습니다. 교황을 중심으로 조직된 "보이는 교회"는 엄밀히 교회가 아닙니다. 교황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보이지 않는 교회”야 말로 교회입니다. 성경의 권위를 인정하고 평신도의 거룩함을 의심하지 않는 교회라여 진실로 교회라고 주장하다가 얀 후스는 1415년 7월 6일, 콘스탄츠 공의회에서 화형당합니다. 후스는 죽을 줄 알았지만 진리를 말하는 바보였습니다. 진리를 말했기 때문에 대학의 교수였는데도 체코 사회의 지도자가 되지 못한 무능한 사람이었습니다. “보이지 않는 교회”가 따로 있다고 말하는 후스 때문에 교황은 불안했습니다. “보이는 교회”의 최고 권력자인 교황과 교권주의자들은 진리를 말하는 후스에게 분노했습니다. 당시 교회는 불안과 분노를 다스리지 못하고 후스를 죽였습니다. 사람을 죽이는 교회는 교회가 아닙니다. 후스가 맞았습니다. “보이는 교회”는 충분히 교회가 아닙니다.

 

내 마음 속에 일어나는 불안을 다스리지 못해 분노한다면, 옛날 콘스탄츠 공의회를 주관했던 교황을 닮았습니다. 나는 불안하고, 나는 분노합니다. 나는 교권을 중심으로 조직된 "보이는 교회"에 아직 매여있습니다. 당시 공의회를 준비하기 위해 콘스탄츠 당국은 종교지도자들과 정치지도자들을 위해 수천 명의 창녀를 대기시켰다고 합니다. 프랑스 작가 발자크가 이를 풍자하는 콩트를 썼고, 이 콩트를 소재로 콘스탄츠(Konstanz)에 앵페리아(Imperia)라는 가슴을 드러낸 여자가 하체를 드러낸 왕과 교황을 양손에 들고 있는 조각이 세워져 있습니다.

 

불안과 분노를 감당할 수 없어 앵페리아의 손에 자신의 몸을 의탁한 이들이 후스를 죽였습니다. 앵페리아의 손에 놓여 뚱뚱한 하체를 드러내고 있는 이들이 후스를 죽였습니다. 앵페리아의 손에 들려있는 “보이는 교회”의 수장들이 “보이지 않는 교회”가 있다고 진리를 말한 후스를 죽였습니다. 하나님은 후스를 구원하십니다. 죽음의 위협 속에서도 마음을 지킨 후스를 구원하십니다. 후스를 구원하신 하나님이 나를 구원하시길 기도합니다. 빌립보서 2장 12절입니다.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불안과 분노가 아니라, 두려움과 떨림입니다. 죽어 없어질 권력이 아니라 살아계신 하나님을 향한 두려움으로 구원을 이룹니다. 권력의 서슬이 아니라 최후의 심판대를 향한 떨림이 구원을 이룹니다. 불안과 분노가 아니라,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받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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