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通通 민들레(사랑방)

"바다 저 쪽으로 건너가자"

작성자김영준|작성시간22.02.17|조회수392 목록 댓글 0

 

한국기독교목회자지원네트워크에서 주관하는

제6차 신학생연합교육에

22년 2월 22일 2시에

'약자와 새롭게 연대하는 교회'를 주제로

한국기독교회관 100호에서 

'민들레와 달팽이' 사례를 소개합니다. 

아래에 발표 원고를 공유합니다.

 


 

“바다 저 쪽으로 건너가자”

- 약자와 새롭게 연대하는 교회 -

 

 

김 영 준

 

 

 

 

 

0. 시작

 

김포중앙교회 부목사였다. 청년예배에서 민수기 8장 말씀으로 설교를 준비하던 중, 신명기 8장 4절 말씀이 깊이 들어왔다.

 

“이 사십 년 동안에

네 의복이 해어지지 아니하였고

네 발이 부르트지 아니하였느니라”

 

광야생활 40년을 상기시키는 말씀이 광야로 나가도록 격려하시는 말씀으로 들렸다. 교회를 세우라는 말씀으로 이해했다.

 

당시, 출산과 육아에 지쳐있던 아내에게 차마 말하기 어려웠다. 새벽에 예배당 기둥 뒤에서 기도할 때마다 눈물이 흘렀는데, 보름쯤 되었을 때 아내가 먼저 얘기를 꺼냈다. 뭔가 하나님께서 “뜻을 갖고 계신 거 같다”. 민수기 8장으로 설교했던 원고를 아내에게 보여주었다. 원고를 읽은 아내가 “그래, 그러자”고 했고, 교회를 개척하기로 작정했다. 사실 설교 원고에는 교회 개척에 대한 내용은 없었다.

 

2011년 12월 25일, 김포시 마산동 솔터마을 207동 806호에서 민들레교회 첫 예배 후

 

그렇게 아내와도 마음을 같이한 후, 하루는 새벽 기도를 마치고 집에 오는데 민들레 한 송이가 돌 틈 사이에 피어있었고, 오래도록 벌 한 마리가 앉아있었다. 교회 이름을 민들레교회로 정했다.

 

2011년 12월 25일에 김포한강신도시에 있는 임대아파트에서 첫 예배를 드렸다.(김포시 마산동 솔터마을 207동 806호) 6개월 동안 집에서 모이다가, 공구상가에 둥지를 틀었다. 보증금 300만원, 월세 23만 원짜리 11평 사무실에 예배드리던 첫날, 아내와 나 두 아이 포함 일곱 명이 공구상가 사무실 맨바닥 위에 야외용 돗자리 하나를 깔고 말씀을 읽고 찬송을 부르고 기도했다.

 

공구상가에는 소규모 공장들이 함께 있었다. 예배당 아래층은 온갖 물건을 만들어내는 공업사였는데, 주일이면 플라스틱 타는 냄새가 예배당 속까지 배었고, 쇠 자르는 소리가 피아노 소리보다 컸다.

 

아무도 찾아오지 않을 곳이었다. 굳이 간판도 필요 없어서 오랫동안 간판도 없었다. 기도하며 하나님께 여쭈었다. “하나님, 누가 여기로 올까요?” 짧은 기도가 끝나자마자 머리를 스치는 짧은 생각을 하나님의 응답으로 여긴다. “니가 가라”

 

 

 

1. 모색

 

아무 데서든, 두 세 명이 모이면 교회라면, 교회 이름 민들레처럼 여기저기에 흩어져있는 교회가 가능하지 싶었다. 한 점에 모이는 게 아니라, 여러 포인트에서 모이는 교회를 상상했다. 집에서도 모이고, 카페에서도 모이고, 도서관 휴게실에서도 모였다. 모임을 공식화하지 않아도, 아무 예전이 없어도 누군가를 만나 성경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이 예배라 여겼다. 여기저기에서 이 사람 저 사람을 만났다.

 

 

 

2. 교회 밖 사회

 

 

(1) 청소년도서관 재능기부

 

서울 마포구에 있는 ‘초록리본도서관’(공동대표:박현홍,김지선)에서 ‘그림속성경이야기’라는 강좌를 열었다. 시민들에게 고흐, 밀레, 미켈란젤로, 다빈치, 렘브란트 등의 그림을 소개하면서, 화가들이 재해석한 성경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많게는 20여명이 모이기도 했고, 적게는 3명이 모이기도 했지만, 한 달에 한 번 여덟 명의 천재 화가들의 그림과 그들이 해석한 성경을 읽을 수 있었다. 모임에 참여한 사람들은 그리스도인도 있었지만, 교회를 떠난 사람도 있었고, 유럽 여행 중 그림을 접했다가 자세히 알고 싶은 사람도 있었고, 공연 작가, 방송국 피디도 있었다. 예배 형식은 없었지만, 그림을 매개로 성경을 나누며 나는 예배를 드렸다 여긴다. 기회가 닿아 이 때 도서관에서 나누었던 내용으로, ‘명화로 읽는 그림 속 성경이야기’라는 책을 출판할 수 있었다.

 

 

(2) 장애인부모회 후원

 

그렇게 모이고 만나다가 개척 2년째 되었을 때 성탄절을 준비하며 헌금을 모으기로 했다. 헌금을 모아 지역에 꼭 필요한 사람들과 나누기로 하고, 기도하다가 장애인 단체(한국장애인부모회 김포지회)를 만나게 됐다. 대림절 기간 내내 146만원을 모아 전달했다. 장애인 단체의 회장은 중증장애인의 어머니였고 그리스도인이셨다. 처음 뵈었을 때부터, 속 깊은 얘기를 하게 됐는데 이사야 58장 말씀을 이정표로 삼고 사시는 분이었다.

 

내가 기뻐하는 금식은

흉악의 결박을 풀어 주며 멍에의 줄을 끌러 주며

압제 당하는 자를 자유하게 하며

모든 멍에를 꺾는 것이 아니겠느냐

또 주린 자에게 네 양식을 나누어 주며

유리하는 빈민을 집에 들이며

헐벗은 자를 보면 입히며

또 네 골육을 피하여 스스로 숨지 아니하는 것이 아니겠느냐

(사58:6~7)

 

교회 식구들 중에도 뇌병변장애, 조울증, 아스퍼거증후군, 지적장애, 성격장애 등을 갖고 있는 성도들이 있었다. 어떻게 도와야할지 몰라 긍긍하던 중에 ‘발달장애인자조모임 조력자 양성과정’에 참여하게 됐다. 앞서 만났던 장애인 단체에서 주관하는 교육이었다. 약 20 여명이 참여했는데, 장애인을 키우는 부모님들이 대부분이었고, 단체 실무자와 특수학교의 방과 후 교사, 그리고 나만 장애인 가족이나 당사자가 아니었다. 조력자 양성과정을 마치고, 장애인자조모임의 조력자로 참여하게 됐다. 2015년이다.

 

민들레교회의 첫 번째 세례자 이학영 청년은 자폐성장애인이다. 세례문답을 대신해 사도신경을 읽으며 신앙고백을 하고 있다.

 

 

(3) 조합 준비와 창립

 

장애인자조모임에 참여하며, 발달장애인을 지원하는 사회적협동조합 창립을 준비했다. 1년 여 발기인들과 더불어 준비했는데, 딱 한 가지 부족한 게 있었다. 부동산이 없었다. 준비 서류에 주소를 적을 수 없었다. 당시 민들레교회는 공구상가를 떠나 감리교회 예배당을 빌려 예배드리고 있었기 때문에 교회이름으로 된 부동산 관련 계약서가 없었다.

 

걸으며 기도했다. “하나님 우리에게 돈을 주시든지, 땅을 주시든지 해야 되지 않을까요?” 그렇게 기도하며 걷는데 전화벨이 울렸다. 부목사 시절 함께 예배드리던 양동일 장로께서 헌금을 보내주시고는 폐업 중이던 카페를 보증금도 없고, 임대료도 없이 예배 처소로 사용하는게 어떻겠냐고 제안하셨다.

 

양동일 장로와 교회가 임대계약을 맺었다. 보증금 0원, 임대료 0원이라 기재된 부동산임대차계약서가 작성됐다. 어쩌면 세상에 하나 밖에 없을 계약서를 작성함으로 사회적협동조합 설립을 위한 마지막 서류가 구비된 것이다.

 

사회적협동조합 인가를 위한 서류를 갖추게 되어, 2016년 11월 보건복지부에서 사회적협동조합 인가를 받았다. 협동조합 이름은 파파스윌(Papa's Will), 요한복음 9장 1~3절 말씀에서 따온 이름이다.

 

예수께서 길을 가실 때에 날 때부터 맹인 된 사람을 보신지라

제자들이 물어 이르되

랍비여 이 사람이 맹인으로 난 것이 누구의 죄로 인함이이니까

자기니이까 그의 부모니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 사람이나 그 부모의 죄로 인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

 

카페 공간을 근거지로 협동조합 인가를 받고, 민들레교회도 카페 공간에서 예배를 드리기 시작했다. 예배를 드리며 공간에 대한 고민을 구체적으로 하기 시작했다. 카페를 보통 사람들과 경쟁에서 이길 수 없는 사람들의 해방구로 만들고 싶었다. 발달장애인처럼 느린 사람들이 마음껏 놀 수 있는 공간이 되기를 바랐다. 느린 사람들의 느림이 눈에 띄지 않는 공간되길 기도하는 마음으로 공간 이름을 ‘민들레와 달팽이’로 지었다.

 

2017년 1년 동안 발달장애인 청년이 바리스타 실습을 했다. 전문경영인 없이 카페에서 흑자 수익을 내긴 어렵다고 판단해서, 교회가 발달장애인 청년에게 최저임금 수준의 근로장학금을 수여했다.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얻고, 눈 먼 자가 다시 보고,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는 것이 예수님의 구원 행위였다.(눅4:18) 갇힌 자가 풀려나는 것, 눈 먼자가 보게 되는 것, 눌린 자가 자유를 얻는 것은 모두 일상에 관한 것이다. 감옥에 갇혔기 때문에, 장애인이기 때문에, 구조적 억압 때문에 일상을 살 수 없는 사람들에게 예수께서는 일상을 선물하셨다. 일상을 살지 못하는 사람에게 일상을 살게 되는 것이 성령이 임한 결과다.

 

발달장애인 청년 1명이 집 밖에서 일을 하는 것은 장애 때문에 일상을 살지 못하는 당사자와 그 가족 전체가 일상을 사는 시작이다. 장애인이 밖에서 일을 하게 되는 것은 당사자와 그 가족들에게 구원이다.

 

 

(4) 이주민을 위한 검정고시

 

‘민들레와 달팽이’는 ‘민들레교회’와 ‘달팽이학교’를 합친 말이기도 하다. ‘달팽이학교’는 이주여성, 학교 밖 청소년 등 역시 의도치 않게 느리게 길을 가는 사람들의 배움터이며 민들레교회의 사회선교 프로젝트다.

 

 

베트남, 캄보디아, 태국 등 다양 국적의 이주민 여덟 명이 검정고시를 준비하며 공부했고, 학교 밖 청소년 한 명과 글쓰기 수업을 했다. 처음 시작한 베트남 이주민 네 명은 2017년 4월 초등검정고시에 합격했고, 그 중 두 명이 2018년 8월 중등검정고시에 합격했다. 2019년 4월, 이주여성 한 명이 고등검정고시에 합격했다.

 

공부하러 온 학생들은 간식을 싸오곤 했는데, 한 번은 사과를 깎아 먹었다. 사과를 깎는 방향이 여느 한국인과 달랐다. 한국의 선주민들은 칼을 몸 안쪽으로 당겨 돌리며 과일을 깎는데, 베트남에서 온 이주민들은 칼을 몸 바깥쪽으로 밀어 돌리며 과일을 깎았다. 칼날이 몸 바깥쪽으로 향하니 더 안전해 보였다. 시아버지께선 베트남에서 온 며느리의 사과 깎는 걸 보시고 혼내셨다고 한다. 사소한 일상이라도 더 나은 것이라면 서로에게 배워가는 게 다문화의 가치겠다. 이주민이 선주민에게 일방적으로 배워야하는 것이 아니라, 선주민 역시 이주민에게 좋은 것을 배우는 것, 이주민과 선주민이 서로 배우는 다문화 사회가 풍성하다.

 

캄보디아 이주노동자과 과학 수업을 할 때, ‘분해’를 설명해야 했다. 이해하기 쉽도록 모나미153 볼펜의 꼭지와 몸통과 심과 스프링을 분해한 후, 이것이 분해라고 설명했더니, 뜬금없는 질문을 했다. “분해의 뜻이 이사에요?” 캄보디아에선 분해와 이사가 같은 단어라고 한다. 사연을 들어보니, 캄보디아에선 이사할 때, 문손잡이, 전등, 변기까지 분해해서 옮긴다고 한다. 이사는 짐을 옮기는 것뿐만 아니라, 집을 분해하는 것이기도 해서, 캄보디아에선 이사와 분해를 같은 단어로 표현한다고 했다. 언어만 다른 게 아니라, 생활풍속의 차이에서 비롯되는 개념도 다르다. 초등 과학을 가르쳐주며, 가보지 않은 캄보디아의 이사 풍습을 배운다. 가르치며 배우고, 배우며 가르친다.

 

또, 한 달에 한 번 ‘문학 속 성경’이라는 강좌를 열어, 김훈, 윤동주, 심훈, 이청준, 센케비치, 톨스토이, 호손 등의 책을 읽으며, 작가들이 재해석한 성경을 접하기도 했다.

 

 

(5) 세월호를 기억하는 김포사람들

 

세월호 참사로 희생된 304명 중, 70여명이 그리스도인이었다. 그 가족들 거의가 교회를 떠났다고 한다. 세월호 안산 분향소에서 예배드리는 가족들을 1년에 두 차례 찾아 함께 예배를 드렸다. 2015년 12월 24일 성탄전야에는 “함민복 시인과 함께 듣는 세월호 가족이야기”라는 행사를 주최해서, 지역주민 40여명과 함께 세월호 가족들의 이야기를 들었다. 당시, 장기동에 있는 지음교회당(감리교)을 빌려 예배드리고 있었다. 지음교회당은 상가 6층에 있었고, 24평쯤 되는 공간이었다.

 

2017년 세월호 3주기를 맞아, 김포지역 교회와 지역단체들이 두 달여 회의하고 준비해서, 세월호 가족 합창단과 세월호 약전 작가, 그리고 박주민 국회의원을 초대해서 두 주간 공연과 강연을 했다. 각각 200 여명이 참여했다. 김포지역의 6개 장로교회와 14개 감리교회, ‘여성의전화’, ‘민주사회김포시민연대’, ‘조강문화협동조합’, ‘김포강화밀알선교단’ 등이 연대·연합하여 행사를 치렀다. 카페 ‘민들레와 달팽이’는 준비하는 기간 내내 지역 단체들의 회의장소와 사랑방으로 활용되었다.

 

 

(6) 성탄전야; 지역주민을 위한 따뜻한 공연 선물

 

2017년 12월 24일 성탄전야 김포아트홀(관장:김용)에 420여명의 김포사람이 찾아왔다. ‘이야기꾼의 책공연’의 ‘행복한 왕자’를 관람하기 위해서였다. 민들레교회는 김포문화재단과 함께 시민들에게 무료공연을 성탄전야에 선물했다. 초대받은 김포시민들은 ‘여성의전화’, ‘김포시장애인자립생활지원센터’, ‘발달장애인지원네트워크 파파스윌’, ‘아름다운가게’, ‘김포이주민센터’, ‘다문화가족지원센터’, ‘연세언어치료원’, ‘모자가정지원센터’ 등의 회원 및 참가자들이었다. 420여명이 참여했고, 특히 휠체어 장애인을 위한 6석이 모두 활용됐다.

 

다문화 가정, 한 부모 및 조손가정, 장애인 가족 등 문화공연에 접근하기 어려운 시민들이 있다. 특히, 휠체어로 이동하거나, 이상행동이 있을 수 있는 장애인들이 공연장을 찾기란 쉽지 않다. 과연, 처음 공연을 접했다는 관객이 다수였다.

 

성탄전야에 예배당에서 교회 가족들과 성탄을 준비하는 건, 이루 말할 수 없이 아름다운 모임이다. 아울러 교회가 성탄전야에 예배당 밖으로 나가서 시민들을 만나는 것 또한 새로운 예배일 수 있겠다.

 

 

(7) 미등록 이주민 미혼모 가정 학습 및 생활 지원

 

베트남에서 온 이주여성 M은 비자가 없다. 미등록 이주민이다. 한국에서 아이 셋을 낳았다. 비자 없는 엄마의 아이들은 국적이 없다. 공장에서 일하는 M의 월 소득은 170여만 원이다. 비자도 국적도 없는 가정은 기초생활수급 대상이 될 수 없고, 의료보험에도 가입할 수 없다. 지역아동센터에서도 받아주지 않는다. 원룸에 4가족이 사는데, 임차비가 밀릴 때도 있다. 사정을 아는 집주인이 기다려주지만 불안한 하루하루 한 달 한 달이다. 어쩔 수 없이 토요일에도 아침 7시에 인력사무소로 출근해 일하고 돌아오면 저녁 7시다. 토요일 하루 일당이 6만 5천 원이다. 아이들은 토요일에 엄마 없이 12시간 동안 집을 지킨다. 긴급 생활지원비로 1년 동안 월 20만 원을 지원했다. 토요일에 인력사무소에 나가는 대신 공간 민들레와달팽이에서 3시간 청소를 부탁하고 6만 5천 원을 지급한다. 엄마가 일하는 동안 아이들은 민들레와달팽이에서 학습지도사와 함께 그림책을 읽거나, 손놀이를 하거나, 놀이터에서 논다. 공간 민들레와달팽이에 처음 오던 날 스쿠터에 아이 셋을 태워 오셨다. 20cm 간격으로 오토바이들이 강물처럼 흘러가는 하노이의 출퇴근 풍경을 떠올리면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지만, 한국의 도로 문화에선 위험하고 낯설다. M가정을 지원하기 위해 수채캘리전시회를 열어 412만 원을 모았다. 취등록세 포함 420만 원짜리 중고 자동차를 샀다.

22년 1월 20일 법무부가 '미등록 외국인 아동 체류자격'을 15년에서 6년 또는 7년으로 완화하겠다는 발표를 했다. 한국에서 태어났어도 대한민국 국적이 없을뿐만 아니라 외국인등록번호도 없는, 땅에 존재하지만 서류엔 없는 아이들이 있다. M의 딸은 초등학교에 진학하면서 학교에 내는 서류에 등록번호를 적을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 이유가 궁금하다.

 

미등록 이주민 미혼모 가정에 대한 편견일까. 이해할 수 없는 일이 발생한다. 다문화가족지원센터에서 ‘아동복지법위반’건으로 M씨를 경찰에 신고한 것이다. “요리용 나무젓가락(길이 30cm)으로 피해 아동들의 종아리 부위·를 각각 1회씩 때렸다. 이로써 ... 피해아동들의 신체에 손상을 주거나 신체의 건강 및 발달을 해치는 신체적 학대 행위를 하였다.” 경찰은 검찰로 송치했고, 법원은 엄마와 세 딸에게 분리 명령을 내렸다. 공권력과 공공기관이 갖고 있을 미등록 이주민 미혼모에 대한 편견을 뺀다면 나무젓가락으로 종아리를 한 대 때려 신체적 학대 행위를 하였다는 경찰의 송치 의견서를 아무리 읽어도 이해할 수 없다. M은 매일 울면서 아이들을 기다린다.

 

 

(8) 협동조합 달팽이학교

 

 

달팽이 학교는

선생님이 더 많이 지각한다.

 

동화 ‘달팽이 학교’(시 이정록, 그림 주리)의 첫 문장이다. 한국에서 늦게 공부하는 이주민, 느리게 공부할 수밖에 없는 중도입국청소년, 느리게 진보하는 혹은 퇴보하는 발달장애인을 만나는 민들레교회의 사회선교 프로젝트가 ‘달팽이학교’였는데, 2020년 7월 7일 협동조합 달팽이학교를 창립해 교회와 사회가 함께 운영하는 실험을 한다.

 

㉠ 말레이시아를 경유한 재정착 난민 학생을 위한 과외 수업을 한다. 미얀마 국경을 넘어온 친족과 카친족이다. 난민 가정 청소년은 학교의 수업을 이해하기 어럽다. 익숙하지 않은 한국어로 학제가 다른 공교육의 진도를 따라가기란 여간 쉽지 않다. 학원에 다니는 건 경제적으로도 어렵고, 느리게 공부하는 학생을 위한 학원은 없다. 해서, 청년 교사가 난민 가정을 방문해 한국어와 교과 공부를 돕는다.

 

㉡ 조현병을 앓는 정신장애인은 갈 곳이 마땅찮다. ‘하루 한 시간’ 민들레와달팽이에서 청소 알바를 한다. 매주 수요일엔 조합원이 경영하는 자수 공방에서 ‘슬로 스티치’라는 이름으로 바느질 수업을 한다. 조합원이 강사인 휘트니스센터에서 저녁마다 운동한다.

 

㉢ 발달장애인 청년 세 명과 조력자 한 명이 자조모임 ‘푸른 하늘’을 꾸렸다. 가정에선 부모가, 학교에선 특수교사가, 시설에선 사회복지사가 발달장애인을 위해 여러 가지 결정을 내리지만, 자조모임에선 발달장애인 당사자 스스로 모든 결정을 한다. 발달장애인자조모임은 장애인 당사자가 ‘자기 결정권’을 행사하는 해방구다.

 

㉣ 조합원들과 비장애인들을 위한 감수성 강좌를 연다. 강사가 선정한 책을 기반으로 인권·성인지·장애인·다문화 감수성 강좌를 통해 듣고 대화하며 배운다.

 

㉤ 심리상담을 필요로 하는 이웃들이 있다. 정신건강의학과의 약물 치료 외에 심리상담을 병행해야 하는 경우, 비용이 세다. 상담전문가들과 MOU를 맺어 최소한의 상담비로 지역에서 상담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만난다.

 

㉥ 일주일에 한 번, 혹은 한 달에 한 번, 두 달에 한 번 책 모임을 한다. ‘슬로리딩’, ‘장애학연구’, ‘성서읽기’ 등 선정도서 또는 각자 읽고자 하는 책을 읽고 대화한다. 읽고 대화하는 모임에서 또 다른 모임들이 발아한다. 과거 ‘문학 속 성경이야기’를 수강했던 이들이 이주여성 검정고시의 강사가 되었던 것처럼, 책모임에 참가한 이들이 ‘협동조합 달팽이학교’의 이사회를 구성했다.

 

 

 

3. 사회를 향한 하나님의 시선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요3:16)

 

하나님께서 독생자를 주신 이유는 교회를 사랑하셨기 때문이라기보다, 세상을 사랑하셨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은 교회에게 독생자를 주신 게 아니라, 사회에게 독생자를 주신 것이다.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는 이의 충만함이니라”(엡1:23)

 

예수께선 세상에 오셔서 세상에 살다가, 십자가의 길을 걷다가 죽으셨다. 교회는 예수님의 몸이다. 예수님의 몸으로서 교회는 지역사회를 위해 교회의 생존권도 포기할 수 있어야 한다. 교회가 예수님의 몸이라면, 예수님을 따라, 사회를 위해 죽어야 한다. 지속가능성을 고민하지 않을 수 없는 시대에 교회의 죽음을 말할 수 있는 이유는, 우리의 믿음 때문이다.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가 부활했다. 교회는 부활을 믿는다. 부활을 믿는다면 지속가능성은 교회의 고민이 아니다.

 

‘시냇가에 심은 나무’는 ‘아낌없는 주는 나무’다.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시절을 따라 과실을 맺는다면, 과실을 내주어야 한다. 자기에게 맺힌 과실을 스스로 먹는 나무는 없다. 과실도 내 주고, 몸뚱이도 내 주는 나무 같은 사람들의 모임이 교회다. 예수님의 몸으로서 지속가능성을 포기하는 교회일 때, 교회는 비로소 만물을 충만하게 하는 충만이 된다.

 

 

 

4. 동반자로서의 교회와 사회 _ 협동조합의 실험

 

 

그러나 교회의 현실은 예수님의 몸이 되기 전에, 교회 자체도 예수님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환자들의 모임이기 쉽다. 전체가 부분의 합이라면, 사람들의 모임이 신성을 갖기란 수학적으론 불가능하다. 수학과 신학 사이에 교회의 현실이 있다. 수학으로 설명되지 않는 신학의 초월이 일어나는 곳이 교회이면서, 또한 열렬한 신앙고백을 올리지만 산술적인 한계를 고스란히 갖고 있는 것이 교회이기도 하다.

 

교회는 사회와 연대함으로 산술적 한계를 메울 수 있다. 사회엔 조직화 되진 않은, ‘양심들’이 있다. ‘양심들’은 옛날 엘리야 선지자 학교에 속하진 않았지만, ‘바알에게 무릎 꿇지 않은 사람 칠천명’같은 사람들이다.(롬11:4)

 

협동조합은 예수님의 몸으로서 세상과 만날 수 있는 통로 중 하나겠다. 협동조합은 상호주의와 호혜주의를 원칙으로 운영된다. 즉, 강자가 약자를 돌보는 게 아니라, 혹은 부자가 빈자를 살피는 게 아니라, 조합원들 상호 간에 호혜적 관계를 맺고 거래함으로 더 나은 일상을 공유하는 것이다.

 

2012년 12월 협동조합기본법이 발효되면서, 2021년 현재 약 2만 개의 협동조합이 생겼다. 금융, 보험업을 제외한 어떤 업종이든지 5명 이상이 모여 신고하면 설립할 수 있다. 출자액과 관계없이 ‘1인 1표’로 운영되고, 한 사람의 출자액은 30% 이내로 제한된다.

 

앞서, 소개한대로 민들레교회는 장애인부모, 특수교사, 사회복지사, 지역 시민들이 참여해서 만든 사회적협동조합의 발기인 및 이사단체로 참여했다. 또, 이주민을 위한 검정고시, 문학 속 성경이야기, 학교 밖 청소년 모임 등의 교육 사업을 협동조합 체제로 엮기 위해 시도하였고, 마침내 달팽이학교는 협동조합 법인이 되었다.

 

협동조합 설립은 허가제이기 때문에, 법인이 되는 데에 큰 제약이 없다.(다만, 사회적협동조합 설립의 경우 재경부 심사와 해당 부서의 인가를 받아야 해서 일반협동조합설립보다 복잡한 과정을 거쳐야 한다.) 재단 법인이나 사단법인을 설립하려면 자본금도 갖추어야 하지만, 협동조합 설립 시에는 자본금의 규모는 중요하지 않다. 동아리 형태의 모임도 협동조합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교회의 인적․물적 자원이 협동조합을 통해 사회에 흘러가면서 강폭이 점점 넓어지는 효과를 낼 수 있다. 교회 내 성도들과 교회 밖 시민들이 협동조합을 플랫폼 삼아 모이며 시너지 효과를 내는 것이다. 협동조합에서의 만남을 통해, 교회 밖 시민들이 교회의 성도가 되기도 한다. 교회는 교회 밖 사람들의 언어와 사상을 이해하며, 도그마의 함정에 빠지지 않을 수 있다. 이렇게 협동조합이 갖는 호혜성이 교회와 협동조합의 관계 속에서도 발현된다.

 

덴마크에서는 10명만 모이면 협동조합이 만들어진다는 말이 있다고 한다. 상생과 공생, 협동과 협업을 통해, 거대 자본이나 큰 부동산이 없어도 이익과 가치를 생산하는 협동조합들이 덴마크를 비롯해, 북유럽과 영국, 스페인, 이탈리아, 북미 등지에서 활발하게 성과를 내고 있다. 명문 축구 구단인 F.C.바르셀로나, 썬키스트, 웰치스, AP통신 등이 협동조합이다. 우리나라에도 유명한 협동조합 회사들이 있다. 햇사레, 서울우유 등이 성공적으로 자리 잡은 협동조합이다.

 

교회 내 성도나 교회 밖 시민이나 경제 문제를 피할 순 없다. 협동조합은 그 당위와 명분만이 아니라, 실제로 이윤 및 이익을 낼 수 있다. 기본법 발효 후 시간이 많지 않아 더 많은 실험이 필요해서인지 실패하는 사례도 적지 않지만, 기업의 도산율 보다 높지 않고 해산 시에도 위험부담이 거의 없다. 피할 수 없는 경제 문제를 위험이 거의 없는 방식으로 풀 수 있다면, 협동조합은 향후 교회의 진로를 찾을 수 있는 희미한 지도가 되진 않을까. 혹, 그것이 가짜 보물지도여서 아무 것도 얻지 못한다 해도, 사람을 만날 수 있다면 교회에겐 도전해볼만한 기회 요인으로 충분하지 않을까.

 

교회의 운영방식으로, 또는 교회가 사회를 만나는 접점으로 협동조합의 방식과 조직이 과연 매력적인지, 더 많은 사례와 실험을 기대한다.

 

 

 

5. 과제 ; 영성

 

 

민들레교회는 일주일에 한 번 주일에 예배를 드린다. 수요일과 금요일에 예배 시간이 따로 없다. 새벽기도도 없다. 했었다. 새벽기도도 했고, 수요일엔 구약성경을, 금요일엔 신약성경을 강해하는 예배를 드렸었다. 상가전체가 철시한 공구상가에서 저녁 모임을 하는 게 위험하게 느껴졌고, 감리교회당을 빌려서 주일에 모일 때엔 수요일과 금요일엔 예배당을 빌릴 수 없었다. 카페 공간의 특성상 개인 기도의 공간을 구별하기 어려워 새벽기도도 여의치 않다.

 

대신, ‘문학 속 성경이야기’, '큐티본문 QnA', '복음과상황 독자모임‘ 등을 월1회씩 수요일에 모여 진행했다. 생각하는 그리스도인으로 독려하고, 더러 단비같이 촉촉한 책을 읽으며 울기도 하고 웃기도 하며 책 나눔을 하는 시간이 색다르지만 충분하진 않다. 민들레교회가 모이는 공간에선 깊은 기도로 들어가는 시간을 구별하기가 쉽지 않다. 영성에 관한 책을 읽거나, 기도원이나 수도원을 찾아 기도하는 방법, 아침 기도문을 작성해 공유하는 방법 등을 모색 중이다. 모색하는 길에, 하늘에 닿는 사다리가 내려오길 기도한다.

 

미처 영성을 갖추지 못한 민들레교회는 소위, “약자와 새롭게 연대하는 교회”, 혹은 좋은 교회의 범례가 될 수 없다. 다만 민들레교회는 이름대로 민들레처럼, 작고 질긴 교회쯤 되겠다.

 

민들레교회는 민들레교회다. 각 교회의 이야기는 달라야 하고, 다를 수밖에 없다. 작든 강하든 질기든 새롭든,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이라면, 생명이다. 과제는 있으나 생명인 까닭에 우리는 충분히 우뚝하다.

 

 

 

6. 공든 탑은 무너진다

 

 

코로나가 온 세계를 점령한 지금, 그리고 코로나와 공존할 장차, 교회는 어떤 모습일까. 모임은 위축되고, 예전은 약화될 것이다.

 

사람의 모임이 교회의 첫걸음인데, 그 첫걸음을 떼기가 어려워질 것이다. 코로나와 더불어 살게 된다면, 이후에도 코로나와 유사한 전염병을 맞이하게 된다면, 교회의 자원은 고갈되고 그간 해오던 사업은 멈출 것이다. 악순환이 반복되면 조직은 와해되고 연보는 줄어들 것이다. 닥친 현실은 분명 위기다.

 

10년 공든 탑이 무너져버린 것 같다. 민들레교회의 소모임도 와해됐고, 예배에 참석하는 사람도 줄었고, 재정도 코로나 이전보다 약 30% 줄었다. 코로나가 덮치기 직전, 예배도 풍성하고, 소모임도 잘 조직되고, 재정도 안정되었던 2020년 2월을 돌아보면, 야속하다.

 

공든 탑은 무너진다. 사람이 만든 모든 것은 무너지는 게 역사다. 역사를 인정한다면, 탑을 세웠던 자리에 연연하지 말고 다시 길을 나서야 한다. 우뚝한 바벨탑은 참으로 공든 탑이 아닌가. 바벨탑이 무너진 자리에서 아브라함의 길이 시작되었거든, 여기 무너진 자리에서 길은 다시 시작된다.

 

모든 현실은 위기다. 코로나 이전에도 교회는 인구 절벽, 다원주의, 세속화 등의 바이러스를 앓아왔다. 또, 위기는 새로운 상상력을 자극하는 전환기다. 이런 전환기일수록 교회는 상상해야 한다. 황폐해진 가비오타스Gaviotas 마을을 생태공동체로 일구자고 제안하고 실행한 ‘파올로 루가리’가 한 말이다.

 

진정한 위기는 자원의 부족이 아니라 상상력의 부족이다.

 

 

 

7. 다시 시작

 

 

모임의 규모가 어떠하든 예전의 형식이 무엇이든, 말씀과 기도는 교회의 축이다. 말씀이 과거에서 현재에 닿는 것이라면, 기도는 현재에서 미래를 찾는 것이다. 말씀이 육신이 되신 예수처럼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는 교회를 꿈꾸며, 아직 이르지 못한 지평선 너머에 닿기를 기도한다. 교회는 다시 여기로 오시는 예수를 맞아 마주 걷는다.

 

세습, 횡령, 스캔들 따위로 어지럽고 부끄러운 교회의 자화상을 직시하되, 다시 예수의 옷을 입고 시작하는 게 믿음일 터다. 날마다 다시 시작한다.

 

시작은, 그것이 역사적 사건이 되기 전에 인간이 가진 최상의 능력이다...“시작이 있기 위해 인간이 창조되었다”고 아우구스티누스는 말했다. 새로운 탄생이 이 시작을 보장한다. 실제로 모든 인간이 시작이다. 한나 아렌트, 『전체주의의 기원』

 

 

 

8. “바다 저쪽으로 건너가자”

 

 

태초에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시던, 땅은 ‘깊음’으로 덮여있었다. ‘깊음’은 혼돈과 공허와 흑암이 뭉치였다. 혼돈과 공허와 흑암이 출렁거리는 바다로 덮여 있던 게 창조 이전의 땅이었다.

 

짙은 바다는 무섭다. 폭풍까지 치면 훨씬 위험하다. 바다는 그래서 혼돈과 공허와 흑암이 높은 밀도로 뭉쳐있는 세상을 상징한다(창1:2).

 

예수께서 “바다 저쪽으로 건너가자”고 제안하신다(막4:36,5:1;5:21). 혼돈과 공허와 흑암이 출렁거리는 바다를 건너는 게 가능할까. 예수께서 폭풍 이는 바다를 향해 「“고요하고 잠잠하라”하고 말씀하시니, 바람이 그치고, 아주 고요해졌다.」(막4:39) 혼돈과 공허와 흑암의 풍랑을 잔잔케 하시는 「“이분이 누구이기에, 바람과 바다까지도 그에게 복종하는가?”」(막4:41) 교회는 예수님의 몸이다. 폭풍 이는 바다를 고요하고 잠잠하라 하셨던 예수의 몸이 교회다(엡1:23).

 

그러나 바다 위엔 길이 보이지 않는다. 폭풍 치는 바다에선 하늘마저 가려져 버리기 때문에 방향마저 잃어버리기 쉽다. 화가 윌리엄 터너는 폭풍 치는 바다 위에서 돛대에 자기 몸을 묶어 바다를 관찰했다는데, 그가 그린 폭풍 치는 바다엔 어떤 형상도 보이지 않는다. 꿈틀거리고 휘몰아치는 기운만 확인될 뿐 폭풍 치는 바다엔 아무것도 없는 것만 같다. 눈 뜨고 있기에도 버거운 폭풍이라면, 아무것도 보일 리 없다.

 

예수께선 굳이 왜 바다 저쪽으로 가자고 하실까? 이적을 일으켜 자신의 신성을 증명하기 위해서일까?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호칭보다 ‘사람의 아들’이라 자칭하길 좋아하셨다. ‘하나님의 아들’로서 폭풍을 잠잠케 해 자신의 신성을 증명하는 무대로 바다를 선택하신 게 아니라,

 

예수께서 “바다 저쪽으로 건너가자”고 하시는 건 저쪽에도 사람이 있기 때문이다. ‘바다 저쪽’에 군대 귀신에 사로잡힌 사람이 있기 때문이다(막5:1~10). ‘바다 저쪽’에 병에 걸려 죽게 생긴 아이가 있기 때문이다(막5:21~24). ‘바다 저쪽’에 12년 동안 피흘리는 여인이 있기 때문이다(막5:25~34). 자신의 힘으로 일상을 살 수 없는 사람들이 있는 곳으로 예수께서 건너가자 하신다.

 

군대에 사로잡혀 무덤 사이에서 쇠고랑에 묶여 쇠사슬에 매여 사는 사람이 있는 ‘바다 저쪽’이 예수께서 가신 길이다. 죽을 거 같은 어린 소녀와 죽어가는 딸을 고치고 싶은 아비가 있는 ‘바다 저쪽’이 예수께서 가신 길이다. 12년 동안 하혈을 하는 까닭에 마을에 들어올 수 없고 사람들을 만날 수 없는 여자가 있는 ‘바다 저쪽’이 예수께서 가신 길이다. 예수께선 오늘도 제안하신다. “바다 저쪽으로 건너가자”

 

어디로 가야할지 모르겠을 때다. 코로나 3년 차, 모든 교회가 3년을 코로나와 함께 지나간다. 그런데, 길을 잃은 건 진짜 코로나 때문일까. 교회들이 저지른 목회세습, 횡령, 스캔들로 인한 사회적 불신이라는 바이러스 때문에 길을 잃어 어디로 가야할지 모르는 걸까.

 

어디로 가야할지 모르는 건 길을 잃은 게 아니라 길을 가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바다 저쪽으로 가야하는데 가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군대 귀신에 사로잡혀 쇠사슬에 매여 쇠고랑에 묶여 있는 사람을 만나고 싶지 않기 때문에 길을 잃은 것이다. 어린아이의 죽음에 어찌 할 수 없어 차라리 만나지 않으려다가 길을 잃은 것이다. 12년 동안 피 흘리며 일상을 빼앗긴 여인과 접촉하면 사회적으로 지탄받을까 두려워하다가 길을 잃은 것이다. 길을 잃어버린 게 아니다. 길을 가고 싶지 않은 것이다. 예수께서 가셨던 길은 우리가 가고 싶은 길이 아니기 때문에 길을 잃어버렸다며 주저앉아 뭉개고 있는 것이다.

 

바다를 건너가는 건 분명 익숙한 여정은 아니다. 바다는 항상 흔들리는 공간이다. 가만히 있어도 흔들리는 길이다. 그러나 그 바다 위에 길이 있다. 보이지 않을 만큼 좁은 길이 있다. 예수께선 좁은 길이 생명으로 가는 길이라 하신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거라. 멸망으로 이끄는 문은 넓고, 그 길이 널찍하여서, 그리로 들어가는 사람이 많다. 생명으로 이끄는 문은 너무나도 좁고, 그 길이 비좁아서, 그것을 찾는 사람이 적다."」(마7:13~14)

 

보이지 않는 바다 저쪽에서 사람들이 부른다. 사람들의 고통 소리가 우리 갈 길을 가르쳐준다. 여기에 쉽고 익숙한 길은 사실 길이 아니다. 멸망으로 이끄는 포장도로를 길이라 부를 순 없다. 여기 익숙한 길들이 막혀 있다면, 길이 보이지 않아 위태하고 위험한 바다로 가야 할 때다.

 

폭풍이 일면 위태하고 위험할 거 같지만, 그렇지 않다. “고물에서 베개를 베고” 자도 될 만큼 안전한 공간이다. 바다야말로 길이며, 또 안전한 땅이다. 옛날 모세는 바다를 마른 땅 같이 안전하게 건넜다. 바다를 위험하게 경험하는 건 제국의 군대였지, 광야에서 하나님께 예배드리겠다는 히브리 사람들은 아니었다. 새로운 길을 찾아 나서는 이들에게 바다는 안전지대다. 익숙하지 않고 보이지 않을 뿐, 바다엔 길이 있다.

 

길을 잃었다면, 바다 저쪽으로 갈 때다. 바다 저쪽에 사람이 있다.

 

 

글/김영준

교정,교열/임지예, 신지혜, 유한나, 이현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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