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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의 냄새/윤의섭

작성자차꽃 곽성숙|작성시간18.06.15|조회수425 목록 댓글 0

바람의 냄새/윤의섭

이 바람의 냄새를 맡아보라
어느 聖所를 지나오며 품었던 곰팡내와 오랜 세월 거듭 부활하며 얻은 무덤 냄새를
달콤한 장미향에서 누군가 마지막 숨에 머금었던 아직 따뜻한 미련까지
바람에게선 사라져간 냄새도 있다
막다른 골목을 돌아서다 미처 챙기지 못한 그녀의 머리 내음
숲을 빠져나오다 문득 햇살에 잘려나간 벤치의 추억
연붉은 노을 휩싸인 저녁
내 옆에 앉아 함께 먼 산을 바라보며 말없이 어깨를 안아주던 바람이
망각의 강에 침몰해 있던 깨진 냄새 한 조각을 끄집어낸다
이게 무언지 알겠냐는 듯이
바람이 안고 다니던 멸망한 도시의 축축한 정원과
꽃잎처럼 수없이 박혀 있는, 이제는 다른 세상에 사는 아이들의 웃음소리와
전혀 가 본적 없는 마을에서 피어나는 밥 짓는 냄새가
그런 알지도 못하는 기억들이 문득문득 떠오를 때에도
도무지 이 바람이 전해 준 한 조각 내음의 발원지를 알 수 없다
먼 혹성에 천년 전 피었던 풀꽃 향이거나
다 잊은 줄 알았던 누군가의 살내거나
길을 나서는 바람의 뒷자락에선 말라붙은 낙엽 냄새가 흩날렸고
겨울이 시작되었다 이제 봄이 오기 전까지
저 바람은 빙벽 속에 자신만의 제국을 묻은 채 다시 죽을 것이
【마계/민음사/2010】
........................................................
바람의 냄새는 어떤 맛일까? 합니다.
2월, 겨울비가 습하게 다가오던 이른 아침 안개 맛일까?
5월, 그 어느 날 늦은 밤 놀이터에 앉아 있으면 그윽하기 짝이 없던 아카시아 향 같은 달콤한 맛일까?
8월, 더위 속에 내린 소낙비 뒤로 불어오던 산바람, 강바람, 들바람에 묻어오는 흙냄새 같을까?
10월, 산에 가면 산꽃, 들에 가면 들꽃의 소박한 꽃향기가 그럴까?
11월, 가을 끝 무렵 비에 젖은 낙엽을 태우던 냉갈내가 그렇고,
12월, 이산저산 구름 몰고 다니는 한계령의 쓸쓸한 겨울 바람 냄새가 그럴테고,
목욕을 막 끝낸 아이들의 뽀송한 살내음이 그렇고,
스쳐 지나가는 낯선 남자의 썩 괜찮은
로션 냄새가 그렇고,
우리 엄니의 쪼글한 젖무덤의 마른 냄새가 그렇고,
묵은 책 천장까지 높이 쌓아올려진 헌책방의 책냄새가 그렇고,
무엇보다 일없이 헤매다 종일 굶은
내 앞에 스며드는 밥냄새야 말로 아프게 그리운 바람 맛일까요?

【윤의섭】
●출생 1968년/ 경기도 시흥
●아주대 국문학과, 중앙대 예술대학원 문예창작 석사, 아주대 국문학과 박사
●1992년 경인일보 신춘문예 당선
●대표작 /말괄량이 삐삐의 죽음, 천국의 난민, 붉은 달은 미친 듯이 궤도를 돈다 , 마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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