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문득 바람 생각 / 윤온강

작성자아목동아|작성시간24.04.25|조회수97 목록 댓글 3

어느 날 문득 바람 생각

 

 

 아파트 2층 거실에 앉아 있으면 앞쪽 담장 너머 언덕에 있는 소나무가 보인다. 그 나무가 처음 눈에 띈 것은 바람이

세게 부는  어느 봄날 저녁이었다.

 

 희한하게도 내 눈에는 그 나무가 바람에 심하게 흔들리는 모습이 꼭 중년쯤 되는 사나이, 아니 그냥 늙수그레한

사나이라고 해야 맞을까, 그런 사나이가 우쭐우쭐 춤을 추는 것으로 보였다. 막걸리 한 사발 들이켜고 몸을 앞으로

구부린 채 어깨를 들썩이며 신나게 춤을 추는 모습이었다. 그날 이후 그쪽을 쳐다보면 즉시 그 소나무가 눈에

들어왔다. 왜 그런 거 있잖은가? 

 

어느 날 눈에 한 번 들어오면 다음부터는 무조건 그것만 먼저 보이는 것처럼 말이다.

 가만히 있을 때는 왠지 슬퍼 보이던 그 나무가 바람 부는 날에는 어김없이 쿵저쿵쿵저쿵 리듬을 타며 신나게

춤을 추는 것이었다. 그 춤추는 모습이 어찌나 신명이 나 보이던지 나도 덩달아 춤을 추고 싶은 생각이 들 정도다.

그래서인지 그가 춤추지 않고 가만히 있으면 나는 매우 심심하다. 그리고 괜히 트집을 잡고 싶어진다. ‘왜 춤추지

않는 거야?  신나지 않아서라고? 춤은 꼭 신나야 추는 것은 아니야. 추다 보면 신이 날 수도 있어.’ 하지만 그 소나무는

아무 대답이 없다.

 

 바람이 잔잔한 날, 그 나무의 꾸부정한 어깨 위로 비치는 교교(皎皎)한 달빛이 왠지 그를 더 처량하게 보이게 한다. 

그렇다. 바로 그거였다. 바람이 있어야 춤을 추는 것이었다.  나는 갑자기 ‘바람’이란 단어에 꽂히고 말았다. 

곧 바람에 관한 깊은 명상에 빠져들었다. 바람, 그는 누구이며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 자인가?

 

 먼 옛날 북쪽 시베리아의 어떤 동굴에 바람이 살고 있었다. 그는 자신이 어떻게 생겨났으며, 어디서 왔는지, 

언제부터 거기  있었는지 전혀 모르고 있었다. 그냥 지구가 생기고, 온 들판이 용암에서 뿜어내는 김과 연기로 뒤덮여

있을 때부터 그는 거기 있었다. 그는 자기가 누구였는지 몰랐으므로, 그냥 동굴 안에서 낮잠을 자며 이따금 동굴 밖의

풍경을 막연히 내다보고 있었다. 무료한 나날이었다. 바깥은 아직도 뜨거운 열기로 펄펄 끓고 있었다. 그는 궁금했다. 

그 열기가 어느 정도 되나 하고 구경삼아  슬슬 나가 보기로 하였다. 그렇게 해서 바람은 세상에 나서게 되었다. 

그가 지나는 길목에선 꺼진 불이 다시 활활 타오르기도  하고, 어떤 데서는 아주 꺼지기도 했다.

 

 신기했다. 전에는 자신이 그렇게 조화를 부릴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존재인 줄을 몰랐다. 재미있었다. 마냥 들판을

뛰어다녀  보기도 하고, 산봉우리에 올라가 보기도 했다. 넓은 바다에도 가보고, 깊은 골짜기에도 가보았다. 그가 지나는

길목에서는  모든 사물이 술렁이고 있었다. 하지만 가만히 숨죽이고 있으면 아무런 움직임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래서

이번에는 일부러  천천히 움직이다가 갑자기 빨리 달려 보았다. 그러자 나뭇가지가 부러지고 하늘의 구름이 떼로

쫓겨 갔다. 바다의 파도는 높이 높이 춤을 추었다. 가슴이 뛰었다. 그는 자신이 그렇게 막강한 힘을 가진 존재인지

그때까지 모르고 있었다.

 

 이렇게 바람이 탄생하는 모습을 상상해보던 나는 방향을 바꾸어 시인들은 과연 바람에 대해서 뭐라고 했는지

알아보기로 했다. 그랬더니 놀랍게도 시인들은 바람이 먼 하늘의 별에서 온다고 했다지 뭔가. 참으로 멋진 말이었다. 

시인들이 이렇게 멋진 말을  하니까 독일의 철학자 하이데거(Martin Heidegger)도 시(詩)를 ‘신들의 눈짓’이라고

극찬했나 보다.  시인들은 또 보리밭에 부는 바람을 보고 부드럽다고 했고, 바람이 갈대를 흔드는 모습을 보고는

쓸쓸하다고 했다. 그리고 마침내바람의 이름을 하나, 둘 짓기 시작하였다.

 

 바람이 부는 방향에 따라서 샛바람(동풍), 하늬바람(서풍), 마파람(남풍), 된바람(북풍) 등으로, 바람의 속도에 따라서는

실바람, 남실바람, 산들바람, 건들바람, 센바람 등으로 이름을 붙였다. 또 바람 부는 모양이나 느낌에 따라서는 소슬바람,

 회오리바람, 돌개바람, 칼바람, 황소바람 등과 같이 짓는 등 자꾸 이름을 만들다 보니까 나중에는 끝도 없이 많은 바람의

이름이 생기게 되었다.

 

 바람에 관련된 단어가 하도 많아서 과연 얼마나 되나 궁금해진 한 호사가(好事家)가 국어사전을 검색해 봤더니

무려 353개나 나왔다고 한다. 놀라운 일이다. 바람이 이렇게 우리의 상상력을 많이 자극하고 있을 줄 미처 몰랐다. 

이를 보면 바람은 산과 들과  바다만 지나가는 것이 아니고 사람의 마음속에도 깊숙이 들어왔다 가는 모양이다.

 

 그렇다면 바람의 실체는 무엇인가? 그냥 지나가기만 하는 그 무엇일까? 잘 모르겠다. 그저 바람은 머물지 않는다는

사실 하나만  똑똑히 알 뿐이다. 머물러 있으면 이미 바람이 아니다.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있으면 자기 정체성을

잃고 곧 소멸(消滅)될 것이 분명하므로.  여기까지 생각하다가 다시 언덕 위에 있는 소나무를 쳐다본다. 방금 바람이

슬슬 지나가는가 싶더니 나뭇가지가 조금씩 흔들리고 있다. 하지만 이 정도의 바람으로 소나무가 춤추는 모습을

보기는 어려울 것 같다. 하는 수 없이 그냥 바람이 나무를  부드럽게 어르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자니 나도 모르게

다시 바람에 관한 깊은 명상에 빠지게 된다.  아, 바람 너는 도대체 누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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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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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동트는아침 작성시간 24.04.25 좋은글 감사 합니다
  • 작성자핑크하트 작성시간 24.04.25 안녕 하세요..아목동아님
    오늘도 좋은 글 담아 주셔서 고맙습니다
    오늘도 수고 많으셨어요
  • 작성자정 읍 ↑ 신 사 작성시간 24.04.25 어느 날 문득 돌아다보니
    할배가 되어가는구나
    난, 깜짝 놀라 일어납니다.
    지나온 모든 게 다 아픔이었고,
    그 아픔이 나를 성장시켜 주었고,
    그 경험으로 힘들어하는 자에게
    해답을 줍니다.

    풍전등화(風前燈火)
    바람 앞에 등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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