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집을 찾아서

작성자선머슴아|작성시간24.04.26|조회수120 목록 댓글 4

 

아버지의 집을 찾아서 

 

 

 

 

 

 

 

 

기차가 서서히 속도를 줄였다. 이제 곧 김천역에 도착한다는 안내방송이 흘러나왔다. 순간 아버지의 창백한 얼굴이 떠올랐다. 부산행 KTX를 타고 가다 대전역에서 충동적으로 내렸을 때 이미 여정은 꼬인 셈이었다. 대전에서 환승을 해 김천에 오기까지 한 시간 반이 더 걸렸다. 차창 밖으로 ‘김천’이라 써진 표지판이 지나갔다. 나는 가방 손잡이를 잡았다. 덜컥이며 기차가 멈추고 나는 기차에서 내렸다. 애초 예정에는 없던 김천행이었다.

 

하늘은 잔뜩 흐려있었다. 역 앞 광장에서 군밤을 구워 파는 아주머니 옆으로 택시 몇 대가 늘어서서 손님을 기다리고 있었다. 광장 앞으로 큰길이 있고 그 건너편은 시장이었다. 골목 앞 여인숙 간판 너머로 큰 모텔 건물들도 보였다. 아버지는 당신의 인생에서 감당할 수 없었던 격랑의 한 시기를 이곳에서 겪은 뒤 고향을 떠났고, 다시는 이곳을 찾지 않았다.

 

나는 버스 정류장으로 가서 직지사 행 버스를 기다렸다. 시간도 여유가 있었지만 곧바로 아버지의 집을 찾아가고 싶지 않았다. 육십 년의 세월이 지났다. 그 동네나 집이 그대로 있을지도 의문이었다. 버스를 타고 창가에 앉았다. 회색빛 하늘 탓인지 버스가 마치 시간을 거슬러 과거로 가는 느낌이 들었다. 시내를 벗어나자 창밖으로 논밭과 시골 마을들이 스쳐 갔다. 버스가 멈추자 흰 머리를 한 노인 한 분이 탔다. 나는 다시금 아버지를 떠올렸다.

 

병원에 입원한 후로 염색을 못 한 아버지의 머리는 하얬다. 틀니까지 빼놓자 주름이 온 얼굴을 덮었다. 이 년째 매일이다시피 병원 찾았지만 나는 그런 아버지가 가끔 낯설었다. 그 낯선 아버지가 어느 날부터인가 병상 머리맡을 지키고 앉은 큰딸에게 낯선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내가 알지 못했던 젊은 날의 아버지 이야기였다.

 

이야기는 물레에서 잣는 실처럼 기억의 덩어리에서 돌돌 풀려나왔다. 그 이야기에는 어떤 기쁨도 슬픔도 묻어있지 않았다. 구십이라는 나이는 자신의 서사에서 감정을 휘발시킬 만큼의 충분한 세월인지도 몰랐다. 첫사랑과 이별하며 찢어졌던 가슴에도, 외도로 가산을 탕진하고 끝내 작은댁에 눌러앉은 아버지에 대한 증오에도, 뇌전증으로 수시로 발작을 일으키던 어머니에 대한 연민에도, 현실에 좌절하며 들끓던 젊은 피가 남긴 돌이킬 수 없는 후회에도 아버지의 감정은 남아있지 않았다. 모든 살을 바르고 남은 생선뼈처럼 아버지의 이야기는 단출했다.

 

그러나 김천시 용두동의 한 집에서 보낸 어린 시절을 이야기할 때만큼은 아버지의 눈빛이 달라졌다. 담장에 너울대던 감나무 그림자, 기와지붕 위를 떠돌던 구름, 용식이와 재철이와 다이빙을 하던 감천의 바위를 이야기하는 아버지의 입가에는 미소가 머물렀다. 고향을 떠난 후로 허물어지고 부서지기만 했던 아버지는 이제야 비로소 자신이 완전했던 한때를 기억해낸 것 같았다. 나는 아버지가 움직이실 수 있을 때 함께 김천을 찾아보지 않은 것을 후회했다.

 

직지사에 내리자 비가 오기 시작했다. 아버지는 친구들과 직지사에 올라와 스님들과 놀기도 했다고 했다. 절 마당을 쓸기도 하고 계곡에서 물놀이도 하면서 말이다. 나는 가게에서 우산을 하나 샀다. 경내를 둘러보는데 빗발이 거세지기 시작했다. 갑자기 돌풍도 불었다. 그 바람을 타고 장엄한 독경 소리가 들려왔다.

 

독경은 커다란 이 층 건물에서 났는데, 그 건물 전체를 울긋불긋한 금줄이 두 겹으로 둘러싸고 있었다. 아마도 범어(梵語)일 글자 한 자씩이 써진 오방색의 비닐들이 금줄에 꿰인 채 비바람에 사정없이 흔들리고 있었다. 안에서 비구계가 진행되고 있다는 안내문이 보였다. 독경과 금줄은 이제 막 비구가 되는 이들의 초발심이 흔들리지 않도록 보호하고 있는 셈이었다. 묘한 기분이 들었다. 과연 저 금줄은 무엇을 막고자 하는 것일까.

 

사 대째 장손인 아버지가 태어나자 대문에는 금줄이 걸렸을 터였다. 부디 이 금줄이 귀한 장손의 인생에 생길 불행을 막아주기를 바라면서 말이다. 그러나 아버지의 인생을 돌이켜보면 금줄이 큰 위력을 발휘한 것 같지는 않다. 아버지는 불행한 기억을 안고 고향을 떠났고 급변하는 시대의 흐름에 풍화되었다. 어쩌면 저 금줄은 기어코 모든 것을 흩어버리고야 마는 세월이 두려워 저렇듯 필사적으로 펄럭이는 것은 아닌지.

 

택시를 타고 용두동을 찾은 것은 해가 질 무렵이었다. 겨우 비가 그친 하늘에는 노을도 없이 해가 지고 골목은 어둑해졌다. 퇴색한 담벼락과 지붕이 기운 집들이 비를 맞아 우중충했다. 골목 한쪽으로 흐르는 빗물이 내 구두코를 적시며 흘렀다. 녹슨 대문에 붙은 번지수가 보였다. 이 골목 어디쯤 아버지의 집이 있을 거였다. 그러나 어디에도 아버지가 말한 아버지의 집은 보이지 않았다. 다만 아버지처럼 세월에 낡아버린 누추한 집들이 짙어지는 어둠에 물들며 과거로 가라앉고 있을 뿐이었다.

 

아버지가 다이빙했다던 감천 기슭도 준설을 하는지 파헤쳐져 있었다. 강기슭에 일하다 멈춘 포클레인 한 대가 보였다. 아버지와 용식이와 재철이가 뛰어내렸던 바위도 보이지 않았다. 강 건너 저만치 고층 아파트가 지어지고 있었으나 이곳은 그저 앉은 채로 세월을 고스란히 받아낸 것 같았다. 어디에서도 아버지의 어린 시절 발자국을 발견하지 못했다. 나는 아버지와 함께 이곳을 찾지 않은 것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강변 가로등이 하나둘 켜졌다. 다시 택시를 불러 타고 역으로 향했다.

 

나는 왠지 이 모든 것을 이미 알고 있었던 것 같기도 했다. 한 번 흘러간 시간은 돌아오지 않고, 모든 순간은 오직 그 순간에만 완전할 뿐이지 않은가. 그러나 또한 나는 알고 있었다. 내일이면 나는 아버지의 손을 잡고 아버지의 집을 찾아간 이야기를 하리라는 것을. 감나무 잎은 무성하고 강물은 맑았으며 감천의 다이빙 바위도 건재하더라고. 아버지의 집 기와지붕에는 여전히 윤기가 흐르고 용식이 아저씨와 재철이 아저씨가 아버지를 부르는 소리가 골목에서 들리는 것 같더라고. 마치 내 이야기가 금줄이 되어 아버지의 마지막 남은 기억을 지켜주기라도 할 것처럼 말이다.

 

다시 가는 비가 오는 역에 도착했다. 기차 시간은 삼십 분이 남았고, 뿌연 는개 속에서 ‘김천역’ 세 글자 불빛이 아버지처럼 맑은 눈으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버지의 집을 찾아가는 갑작스러운 여정이 끝나는 순간이었다.

 

 

 

- 김응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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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동트는아침 작성시간 24.04.27 좋은글 감사 합니다
  • 답댓글 작성자선머슴아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24.04.27 감사합니다
  • 작성자여시정 작성시간 24.04.27 안녕하세요
    아버지의집을 찾아서
    좋은글 주셔서
    즐독했습니다
    한주동안 수고하셨습니다
    행복한 시간 되시고
    수고하셨습니다^^
  • 답댓글 작성자선머슴아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24.04.27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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