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루

작성자선머슴아|작성시간24.05.02|조회수107 목록 댓글 6

 

블루 

 

 

 

 

 

 

 

 

커다란 드럼통이 돌고 있다. 거인이 나란히 서서 엇박자로 카사바를 연주하는 것 같다. 칙칙칙칙. 연주가 끝나자 서서히 회전이 멈추면서 푸르스름한 가죽을 쏟아낸다. 블루다. 블루는 염색이나 도장하기 전의 가죽을 말한다. 동물에서 벗겨낸 껍질이 부패하지 않도록 손질하는 무두질의 하나이다. 원피에서 가죽으로 탄생하기까지는 수십 번의 공정을 거친다. 그 과정에서 원피는 물을 품었다 마르고 오그라들었다 늘어남을 반복한다.

 

여섯 살 때 옆집에 살던 언니는 초등학교 일학년이었다. 숙제할 때 나도 방바닥에 엎드려 서툴게 ‘가, 나, 다, 라’를 따라 썼다. 그녀가 중학교에 들어가면서 어깨 너머로 알파벳을 익혔지만 쉽지 않았다. 공부가 힘들었던 것만큼 가까운 사람들에게 적절하게 내 생각을 표현하는 것도 늘 어려운 일이었다. 성격이 까탈스러워 친구를 넓게 사귀지 못하고 몇몇과만 가깝게 지냈다. 그럴 때의 나는 투박하고 뻣뻣한 생피였다.

 

온전한 가죽을 얻기 위해서는 크게 세 단계를 거친다. 첫 번째 과정은 염장된 원피를 세척하여 불순물을 제거하는 데서부터 시작된다. 이때 삐죽삐죽 튀어나온 테두리도 함께 잘라준다. 물기를 제거할 때 빠져나간 수분이 다시 스며들도록 통 안에 물과 함께 넣어 하루 동안 돌린다. 아직 혈흔이나 찌꺼기가 붙어 있으므로 기계에 통과시켜 잔여물을 제거하는 작업도 병행한다.

 

두 번째 과정은 무두질이다. 털과 기름을 뽑고 본격적으로 가죽을 부드럽게 만든다. 약품과 물을 통에 넣고 빼고를 며칠 동안 반복한다. 흐물흐물하던 원피는 이제 어느 정도 빳빳해지고 형태가 갖추어지기 시작한다. 그렇게 건조된 가죽을 기계 사이로 통과시켜 울퉁불퉁한 표면을 깎아내고 두께를 고른다. 여러 번 무두질을 되풀이하는 것은 더 나은 제품을 만들기 위해서이다.

 

직설적이고 강한 성격은 좀체 고쳐지지 않았다. 사회에 나와서도 마찬가지였다. 동료와 어울리기보단 외톨이를 고집했다. 언제든 칭찬보다는 질책이 앞서 상대를 아프게 했다. 여러 번 부딪히다 보니 나도 상처 입는 일이 많았다. 그 후론 행동하기 전에 먼저 생각했고 꼭 해야 할 껄끄러운 말은 부드럽게 하려고 애썼다. 그때부터 내 안의 블루도 조금씩 부드러워졌는지 모르겠다.

 

청색은 성모마리아가 입음으로써 거룩한 지위를 얻기 시작했다. 그러다 차츰 왕의 위엄을 상징하는 색으로 자리매김했다. 페르메이르의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 그림 속 소녀는 푸른색 터번을 두르고 있어 더 순수하고 신비롭게 느껴진다. 롯데를 처음 만났을 때 노란색 짧은 바지와 청색 연미복을 입은 베르테르를 보며 유럽의 젊은이들은 청(靑)과의 사랑에 빠지게 되었다.

 

블루는 파랑과 쪽빛을 아우른다. ‘블루’라고 발음하면 입안에 부드럽고 기분 좋은 울림이 생긴다. 블루스 음악이 금방이라도 귓가에 들려올 것 같다. 파랑이라 부르면 공작이 광택 흐르는 견고한 깃털을 펼친다. 쪽빛이라 말하는 순간 눈앞에는 금세 바다가 펼쳐지고 언덕에서 수레국화가 피어난다. 블루가 진지함이나 신비로움을 담고 있는 것은 제 안에 회색이나 보랏빛을 품고 있기 때문이리라.

 

힘들고 어렵지만 질 좋은 가죽을 얻기 위한 무두질은 반드시 통과해야 할 의례다. 이 과정을 거치고 나면 단백질 구조에 변형이 생기게 되고 원래의 뻣뻣한 성질로 돌아가지 않는다. 더욱 부드러워진 가죽은 용도에 따라 다른 공정을 거치게 된다. 다시 기계를 통과시키며 주름을 없애고, 늘리고, 반듯하게 펴준다. 이런 작업을 통해서 매끄러운 탄력과 부드러움을 갖게 된다.

 

고등학교 때 지역에서 열리는 백일장에서 좋은 성적을 얻은 후 문학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졸업 후 맡은 사보편집은 내가 원하는 순수문학과는 방향이 달랐다. 이상과 현실의 괴리에서 방황하다 결국 일을 그만두고 말았다. 평소 흥미를 느끼고 있던 영어 번역에 도전했다. 유학파도 아니고 전공한 것도 아니어서 단어를 씹어 먹을 정도로 사전을 파고드는 것 외엔 방법이 없었다. 모든 것을 제쳐놓고 몰입하는 시간이 필요했지만 결혼하고 아이 기르며 생활을 견디느라 또다시 묻어버리고 말았다.

 

영미권에서는 일과가 끝날 무렵 ‘파란 시간’을 가진다. 집으로 돌아가기 전에 잠깐 바(bar)에 들러 가볍게 한잔하며 하루의 근심을 떨쳐내는 시간이다. 쓸모없는 가죽처럼 잘려 나가지 않으려 아등바등 하루를 보냈던 청색의 얼굴들이 둘러앉아 서로를 위로하며 휴식을 취한다고 한다.

 

시경(詩經)에 절차탁마란 구절이 나온다. 군주들도 그처럼 엄격하게 자신을 갈고닦았단다. 천둥이나 번개가 치는 자연현상에도 자신의 부족함을 되돌아보며 자책했다. 성공한 운동선수나 어떤 방면의 일인자도 하나같이 그런 과정을 거치지 않은 이가 없다. 어디 사람만 그러하랴. 쇠는 무수한 담금질을 거쳐야 더욱더 단단해지고 방짜유기는 수백 번씩 망치로 두드려야 휘어지거나 깨지지 않는다.

 

가죽은 어떻게 가공하느냐에 따라 늘어나기도 하고 줄어들기도 한다. 세심한 주름도 허락지 않고 삐죽한 가장자리도 용납하지 않는다. 원피에서 가공까지 스무 번의 단계를 거치고 나서야 반짝반짝 윤기 도는 가죽으로 완성된다. 이렇듯 사람도 힘들고 어려운 과정을 거쳐야지만 제 몫을 다하는 재목으로 거듭나는 것이리라.

 

드디어 가죽이 색을 입는다. 마지막 단계인 염색을 거치고 나면 아름답고 우아한 모습을 얻게 된다. 색의 비율, 알맞은 온도와 적당한 시간을 들여 몇 번을 반복하면 마침내 가방이며 지갑, 그리고 신발로 그 쓰임을 얻는다.

 

지천명에 접어든 지금, 아직도 누군가를 대할 땐 여전히 서툴기만 하다. 어릴 적 가졌던 꿈은 이루지 못한 채 아쉬움 속에 묻혀 있다. 책장에 밀려나 있던 사전을 꺼내 먼지를 털고 원고지를 꺼내 든다. 이제라도 거풍하고 묻은 얼룩 잘 닦아낸다면 그럭저럭 쓸 만한 가죽으로 다시 만들어질 수 있을까. 힘들고 어렵다고 대충 끝내버린 내 삶을 새롭게 무두질해 봐야겠다.

 

멈추어선 드럼통이 다시 돌기 시작한다. 저 안에선 또 어떤 가죽이 만들어지고 있을까. 내 안에서도 푸른 소리가 들린다.

 

 

 

- 이상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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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답댓글 작성자선머슴아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24.05.04 감사합니다
  • 작성자沃溝서길순 | 작성시간 24.05.02 댓글 첨부 이미지 이미지 확대
  • 작성자沃溝서길순 | 작성시간 24.05.02 댓글 첨부 이미지 이미지 확대
  • 작성자동트는아침 | 작성시간 24.05.03 좋은글 감사 합니다
  • 답댓글 작성자선머슴아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24.05.04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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