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져 가는 것들

작성자선머슴아|작성시간24.05.01|조회수114 목록 댓글 4

 

잃어져 가는 것들 

 

 

 

 

 

 

 

 

세월과 함께 내게서 소실(消失)되어가는 감관感官의 능력은 나를 외롭게 하고 슬프게 한다. 젊었을 때 이야기인데, 하늘이 맑아지고 바람이 가벼워지기 시작하는 가을이 올 무렵이면 나는 때때로 춘뢰(春雷)와 같은 가슴의 동계(動悸)를 느끼곤 했었다. 그건 내게 있어서 가을이 온다는 신호랄까 혹은 계절의 전령(傳令)과 같은 것이었다.

 

그게 나만의 버릇이었는지 혹은 딴 사람도 경험하는 일이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나는 이 말을 딴 사람에게 해본 적도 물어본 적도 없다. 그런데 언제부터 서라고 말할 순 없지만 내 나이 노년으로 접어들면서부터 그런 가슴의 울렁거림을 한 번도 느껴보지 못했다.

 

생각건대 가슴과 관계가 있는 건 희망이라거나 분노라거나 정열이라거나 그런 것이어서 이젠 그런 게 없어졌으니 조용해질 수밖에 없다는 것인지 모를 일이다. 금년에도 가을이 깊어지도록 그런 느낌을 경험하지 못함이 못내 섭섭하고 쓸쓸하다. 감관(感官)의 노쇠에서 오는 갖가지 변화에 대한 고요한 슬픔과 아쉬움을 말로야 어찌 다 표현할 수 있겠는가.

 

눈이 갑자기 어두워져서 장님이 되었다면, 하루아침 자고 나니 귀머거리가 되어 있기라도 했다면, 그야 당연히 소란한 슬픔일 수도, 떠들썩한 경악(驚愕)일 수도 있겠지만 온 줄도 모르다가 만나고 보면 그저 조용히 슬프기도 하고 애달픈 일이기도 할 뿐이다.

 

늙어가면서 날로 달라지는 육체의 여러 현상이 그저 엇비슷하게 노쇠해가는 과정을 겪자면 만감이 가슴에 일렁인다고나 할밖에 없다. 이렇게 해서 나는 늙음을 얻고 가슴의 동계를 잃은 셈이다.

 

노안(老眼)에 안경쯤이야 국민 네 사람 앞에 한 사람 꼴이라는 안경쟁이이고 보면 새삼 비관할 일도 아니지만 30미터 앞에서 오는 사람도 얼굴로가 아니라 동작으로나 알아볼 수 있고 겨울에도 끼는 아지랑이라 눈만은 아직도 이팔청춘이란 것인지 모를 일이다. 하긴 지금 이 꼴로 눈빛만 형형(炯炯)해선 또 무엇하겠는가. 때가 오면 눈도 적당히 어두워지는 게 청승맞지 않아 좋다고 위안할 수밖에 없다. 볼 것 못 볼 것 70년 이상 혹사해 온 시력이 아직 이 정도나마 유지되는 것이 대견키는 하나 내 젊은 날 1.2의 시력이 이젠 전설과 같이 아련하다.

 

창밖에 바람이 소슬하면 하늘이 높고 푸르며 달이 밝고 단풍이 고운거야 눈에 뜨이는 가을이지만, 그 밖에 귀로 듣는 가을도 있어서 그거야 기나긴 밤다듬이 소리라거나 심추(深秋)의 뜰아래 낙엽 구르는 소리라거나 혹은 밤새워 우는 귀뚜라미 소리겠는데 다듬이 소리야 이제는 이미 가을밤에 기대할 수 있는 정취는 아니라 치더라도 귀뚜라미야 아직도 애처로운 계절의 악공(樂工)임에 변함이 없으련만, 나는 귀뚜라미 소리를 들은 자기가 아득히 멀다.

 

세상이 많이 달라진 지금이라고 풀뿌리 밑에서고 벽 틈에서고 귀뚜라미가 울지 않을 리 없을 터인데 나는 그 소리를 듣지 못해 몸과 마음에 느껴지는 정감이 한결 무디어진 한이 없지 않다. 내겐 어렸을 때 귀뚜라미 우는소리를 들으면서 나를 낳고 얼마 안 지나서 돌아가셨다는, 얼굴도 모르는 어머니를 그리며 억지로라도 슬퍼야 되겠다고 생각했던 기억이 있다. 외로움을 느끼지 않은 바는 아니었지만 내가 알지 못하는 사람을 생각하므로 슬픔까진 느끼지 못했기 때문이다.

 

하늘에 별은 빛만 있고 소리는 없는데 귀뚜라미는 소리만 있고 보이지 않아 혹시는 그 소리가 별이 우는소리일지도 모른다고 환상해 보는 추야장(秋夜長)이기도 했는데 그 귀뚜라미 소리를 들을 수 없음이 못내 아쉽다.

 

하긴 청력(聽力)도 시력(視力)만큼은 노쇠했음이 분명한 일이긴 하다. 거기다 나는 젊었을 때 이래 모진 병을 앓아 무차별한 항생제의 남용으로 귀뚜라미 소리를 듣기 어렵도록 총명하지 못하다. 덕택으로 남이 웃는 입만 보고 따라 웃어야 될 슬픈 경우가 없지도 않다.

 

여담이지만 어려서 귀뚜라미를 잡아 본 기억이 있는데 그 맑고 아름다운, 그리고 더없이 외로운 목소리의 주인공이 그처럼 못생긴데 실망한 적이 있다. 지금 생각하면 얼마간의 예외는 있지만 사람도 그가 자랑하는 경륜(經綸)만큼은, 그가 부르는 노래만큼은, 그가 쓰는 글만큼은 잘나지 못한 얼굴들이 월등 많은 것 같아서 유추(類推)해 볼 때 귀뚜라미의 못났음을 결코 탓할 바 아닐까 싶어진다. 지난날 귀뚜라미 우는 가을은 외로운 계절이었는데 내게 있어서 귀뚜라미 소리가 아예 없어진 가을에 더욱 외로움을 느낀다.

 

얼마 전 난(蘭)을 기르는 친구에게서 난 한 분(盆)을 선사해 왔는데 그걸 계기로 나 역시 난을 한번 길러보기로 했다. 같이 꽃을 만지는 처지이면서 양란(養蘭)하는 선비는 나 같은 선인장 마니아에 대해선 우월감을 갖기 일쑤여서 난에 대한 거부감이 없는 것도 아니었지만, 우선 거리의 꽃 가게에서 몇 개의 난분을 사다 들여놓고 바라다보고 앉았으니 과연 듣던 대로 나쁘지 않다.

 

적당히 햇볕도 쪼이고 알맞게 물도 주고 하는 동안 관음소심(觀音素心)이란 라벨이 붙은 것의 포기 밑에서 연약한 꽃대가 하나 올라오고 있어서 내게 난향(蘭香)에의 기대를 한 아름 안겨주었다. 오랜 기다림 속에 차차 꽃망울이 커지는가 싶더니 하루아침 난꽃이 피었다는 손주 아이의 보고다. 황망히 달려가 보니 과연 그림에서 본 것 같은 연약한 흰 꽃 두 개가 피었는데 그 청초함이 또한 마음에 들었다.

 

난은 그 날카롭고 힘 있는 잎새와 향기가 생명일진대 의당 주위가 난향에 젖어 있으리란 나의 생각과는 달리 아직은 향기 같은 건 느껴지지 않았다. 엄지손톱 크기의 작은 꽃에서 청향(淸香)을 떨군들 얼마나 대단하랴만 나로선 무슨 샤넬 병이라도 엎지른 것 같은 강렬함을 기대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따라서 약간을 실망한 느낌으로 손주애에게 향기가 나느냐고 물으니까 코를 꽃으로 가져가서 맡아보고는 향기가 난다는 대답이다. 딴 가족들도 모두 맡아보고는 향기가 좋다는 것이다. 나도 그들처럼 해보았지만 나만은 향기를 느낄 수가 없었다.

 

그러고 보니 난의 향기를 받아들일 감관(感官)의 능력에 한계가 온 걸 깨닫고 다시 쓸쓸함을 느낀다. 지난날 내가 가졌던 것을 이제 내 손주애에게 유산으로 넘기고 나는 감각을 잃은 미라가 되어가고 있음이리라.

 

내게서 잃어져가고 잊혀져가는 것들이 어찌 이런 것뿐이겠는가. 식탁 앞에 선 제구실 못하는 치아가 짜증스럽고 어제 만났던 얼굴인데도 오늘은 알아보지 못하여, 책을 읽어서 무엇인가 남는 것이 있어야 될 터인데 뒷줄을 읽는 동안 앞줄은 이미 잊어 먹으니 노인의 독서는 순간을 메우는 철저한 소모(消耗)에 불과하다.

 

이미 「파뿌리」가 된 꼴의 머리에서 발끝까지 늦가을에 잦아든 호수처럼 날로 메말라가는 과정이 어찌 여기 몇 가지 현상에 그치랴마는 모든 기능이 함께 시들긴 마찬가지다. 육체적인 변화와 함께 희망도 기다림도 새처럼 날아가 버리고 이제 남은 가을이 몇 번일는지 알 수 없지만 가을이 겹칠 때마다 모든 기능이 한 겹씩 무디어질 것에 생각이 미쳐서는 또다시 쓸쓸하다.

 

뜰아래 낙엽 어지러이 구르는 늦가을의 황혼에 앉아 낙엽처럼 내 몸에서 잃어져간 것들을 생각한다.

 

 

 

- 박규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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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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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동트는아침 | 작성시간 24.05.01 좋은글 감사 합니다
  • 답댓글 작성자선머슴아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24.05.01 감사합니다
  • 작성자이헌 조 미경 | 작성시간 24.05.01 바규환님의 수필 잘 봅니다
  • 답댓글 작성자선머슴아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24.05.02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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