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비의 꿈

작성자선머슴아|작성시간24.05.04|조회수117 목록 댓글 1

 

나비의 꿈 

 

 

 

 

 

 

 

 

 

너의 목소리를 듣고도 일어날 수가 없구나. 눈을 뜰 수가 없어. 마음 같아서는 벌떡 일어나 네 손을 잡고 싶지만 누워서 꼼짝할 수 없으니 어쩌면 좋으냐. 얘야, 눈물 흘리지 마라. 내 앞에서 자꾸 눈물 보이면 이런 몸을 하고도 더 살고 싶은 욕심이 생길지도 모른다. 아흔이 되도록 살았으면 오래 살았지. 네 아버지에 비하면 십 년 하고도 더 살았으니 축복이다마는 병든 몸으로 자식들 애먹이고 있으니, 참으로 미안하다.

 

어제보다 오늘, 오늘보다 내일은 더 좋아질 거라는 내 생각은 큰 착오였다. 요양원으로 올 때 다시 집으로 돌아갈 수 있으리라는 희망은 어리석은 생각이었어. 세포들은 하나씩 죽어가고 나는 깊은 잠에 빠져서 허우적대느라 정신을 차릴 수가 없구나. 오래 누워만 있어서 몸뚱이는 나무둥치처럼 뻣뻣해졌는데도 여전히 숨은 쉬고 있다.

 

이승도 저승도 아닌 모호한 경계에서도 목숨은 연명하고 있으니 아직 살아있음은 분명하구나. 눈을 떠 보려고 해도 눈꺼풀이 무거워, 너무 무거워 꿈쩍하지 않는다. 눈을 뜰 수 없으니 세상천지가 어둠이고 어둠속은 불안꽃으로 가득하다. 내 몸에 핀 불안도 꽃이라서 군집으로 피어나니 꽃무리처럼 환해지더라. 너무 환해서 꼭 보고 싶은 얼굴이 있으니 한 번만 눈 좀 뜰 수 있게 해달라고 애걸하지 않았다.

 

얘야, 내 귀에 대고 노래를 부르고 있는 거냐? 휠체어를 타고 면회실에서 너를 만났을 때, 가끔 혼자 부른다며 몇 소절 들려줬더니 그걸 기억하고 있었구나. 너의 목소리는 여전히 꾀꼬리 같다. 어릴 때 새침데기였던 네가 학교에서 돌아와 뱅긋이 웃으며 대문을 들어서는 날이 있었다.

 

기분 좋은 일이 있었다는 신호였지. 음악 시간에 노래를 잘 불러서 합창단에 뽑혔다며 자랑을 하더구나. 어떻게 불렀냐고, 또 딱새소리로 불렀냐고 농 섞인 말투로 물었더니 고개를 가로저으며 “아니, 은은하게 불렀다.”며 볼그스름해지던 네 얼굴이 생각난다. 지금 그 노래, 네 아버지가 좋아했지. 유일하게 할 줄 아는 노래가 그것뿐이었어. 요즘 네 아버지가 자주 꿈에 보이는 걸 보니 머잖아 내가 떠날 그날이 올 것 같구나.

 

잠결에 두런거리는 소리가 나면 깨어나곤 한단다. 걸음발이 빠르고 목소리가 큰 걸 보면 눈을 감고 있어도 단번에 간병인이라는 걸 알 수 있지. 몸을 다 맡긴 채 누웠다가도 그녀가 기저귀를 갈기 위해 아랫도리로 손이 내려오면 미동 없던 내 몸이 움찔하는 것 같다. 골 깊은 사타구니 사이를 물휴지로 닦아낼 때면 이불을 끌어당겨 슬쩍 가리고 싶단다. 목욕탕에 가서도 남에게 등 한번 밀어달라고 한 적 없는데 치부를 다 드러내고 누워 있으니 오죽할까. 누군가 내 몸을 핀으로 고정시켜놓은 것 같다. 누가 그 핀 좀 빼준다면 자유롭게 훨훨 날아갈 수 있을 것 같구나.

 

네가 어릴 때 여름방학 숙제로 곤충채집을 했지. 습기 많은 날 날갯짓이 힘든 나비를 잡아와서 채집통 안에다 핀으로 몸통을 고정시키고 나프탈렌을 넣어 두었단다. 죽음 앞에서 바르르 떨며 경련을 일으키던 나비의 날갯짓을 못 본 척 했어. 볕 바른 날 찬란한 날갯짓을 맘껏 해보지도 못하고 붙잡혀 온, 외면당한 나비의 최후는 슬펐단다. 내가 바로 그 나비가 된 것 같다. 골반을 움직일 수 없으니 부끄럽고 미안해도 담담하게 받아들일 수밖에.

 

그러고 보면 이 병실에 있는 사람들은 그 여름날 채집된 나비들과 다를 바 없구나. 여기는 슬픈 화석들이 누워있는 나비 상자야. 서늘한 기운을 드러내고 있는 저들을 무연히 바라본단다. 한때는 밀물이 차오르면 달거리를 하고, 사랑을 하고, 아이를 낳고, 여자로 태어난 게 행복했을 거야. 그땐 몸속에 자유로운 나비 한 마리 숨어있는지도 몰랐을 테니까. 봄이 되면 창문으로 날아드는 꽃향기가 누워있는 저들을 흔들어 깨울 수 있을까? 오늘이라도 심장이 멈춰져 몸에 흰 천이 덮어씌워져야만 자유로워질 수 있는 저들이 제비꽃, 유채꽃, 복사꽃 위로 다시 날아오를 수 있을까?

 

사람들은 면회 올 때마다 더 이상 감출 것도 없다는 듯 얼른, 빨리, 하루라도, 라는 말을 내세워 고통을 덜어주고 싶다고들 하지. 손수 기저귀 한번 갈아주지도 않으면서 자기들끼리 그렇게 수군대다가 돌아가곤 해. 아직은, 잠시라도, 조금만 더, 라고 말 하는 사람 그 누구도 없더라. 어쩌면 당연한 소리인 줄 알면서도 그 말이 가슴에서 젖 돌 듯 빙그르르 도는데 왜 그렇게 씁쓸한지 몰라. 누군들 이렇게까지 목숨을 부지하고 싶을까. 때가 되면 갈 텐데 서두르지 말았으면 싶더라. 식물인간처럼 누워있다고 고통이 없을까. 아픔이 없을까. 너라도 그렇게 생각하지 마라. 없는 게 아니라 다만 표현할 수 없을 뿐이란다.

 

자식들 다 짝지어 보내고 혼자 남아 있으니 스치는 바람결에도 가슴이 덜커덩덜커덩 거리는 게 나뭇잎보다 더 가볍게 흔들리더라. 혹한 바람에도 끄덕 않던 내 몸이 그렇게 가벼울 줄 몰랐다. 몸에 물기라고는 다 빠져버리고 거죽만 남았는데도 날아오르려니 왜 이렇게 힘이 드는지 모르겠다. 몇 번인가 날개를 퍼덕였지만 몸은 움직이지 않고 잠잠하던 목에서 컥컥 소리만 나더라.

덕분에 바쁜 자식들 얼굴 한 번 더 볼 수 있어 좋았지만 또 그러거든 나를 잡으려고 하지 마라.

 

사는 동안 늘 잠이 부족했다. 새벽부터 늦은 밤까지 식구들 수발로 잠다운 잠 한 번 자본적 없단다. 죽기 전에 이승에서 못다한 잠 다 자고 간다더니 그럴 모양이다. 자도, 자도 끝이 없구나. 얘야, 또 잠이 온다. 잠들기 전에 너를 한번 안아보고 싶다. 팔만 뻗으면 네가 내 품에 들어올 것 같은데도 움직여지지가 않아. 마음은 천 번, 만 번 안고도 남는데 어쩌면 좋으냐. 이별 참 잔인하다.

 

돌아보니 나 자신을 위해 아무것도 한 게 없더라. 생이 긴 것 같아도 나중으로 미루어 때를 놓치니 그것도 늙고 말더라. 내게 내일이란 오로지 자식들뿐이었지만 너의 내일은 너 자신을 위한 것이었으면 좋겠구나. 삶은 작은 생선을 굽듯 하라는 말이 있지. 조급해하지 말고 그렇다고 너무 느긋하지도 말고, 기회가 오면 자신을 위해 살아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그래도 난 자식들이 이루어 놓은 울울창창한 숲에서 분홍 수의 곱게 차려입고 떠날 수 있으니 얼마나 행복한 일이냐.

 

저녁별이 창문을 두드리는 것 같다. 별이 지면 꽃이 핀다지. 내일 아침엔 두런거리는 소리가 들리지 않았으면 싶다. 내 몸이 고요한 아침에 훨훨 날아갈 수 있었으면, 꽃가루 흩날리며 날아오를 때 너의 웃음소리가 환하게 들렸으면 좋겠구나.

 

 

 

- 황미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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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동트는아침 | 작성시간 24.05.05 좋은글 감사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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