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위로와 변화로 부르시는 은혜의 해/ 사51:1~3

작성자항상 새롭게(김종신선교사)|작성시간15.01.15|조회수63 목록 댓글 0

 

 

위로와 변화로 부르시는 은혜의 해

51:1~3

 

 

주님께서 축복하시는 새 해가 되시기 바랍니다.’ 서로 인사합시다.

 

 

정말 주님의 은혜로 살아 온 줄 믿습니다. 다시 새 해를 맞았습니다. 여러분들은 지난해를 어떻게 마무리 했습니까? 그리고 새 해를 어떻게 맞이했습니까? 우리는 매 년 년 말과 새 해를 맞을 때 만감이 교차됩니다. 세상 사람들은 술 한 잔으로 묵은해를 보내고, 떠오르는 해를 스마트 폰으로 찍습니다. 자신의 지인들에게 보내서 의미를 나누며 새해를 맞이합니다. 그런데 연례행사처럼 되고 있습니다.

 

 

저는 우리 아이들에게 A4 3장으로 2014년에 대해 어떻게 반성을 하면서 잘 정리를 할 것인지? 2015년 새해를 어떻게 잘 맞이하고 실천해 갈 것인지? 잘 기록해서 아빠에게 제출하라고 시켰습니다. 아이들이 어려서부터 생각과 행동이 일치 되지 못하는 것을 방치하고자 하는 노력이었습니다. 어려서부터 무의미한 순간들을 지나치지 않도록 훈련하는 차원에서 그렇게 해 보았습니다.

 

 

인생 문제는 해답이 없습니다. 더욱이 지금 세상은 지구적으로 혼란한 세상으로 들어가는 일들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상한 일들이 계속 꼬리를 물고 일어나는데 원인과 결과는 도저히 알 수 없습니다. 사건 사고들이 계속 불안한 사회를 조성합니다. 지금 또 의정부 아파트 화재 사건으로 4명 사망, 124명 부상, 이 중에서 중상이 11명으로 집계되었는데 77%20~30대 라고 합니다. 이는 우리 사회를 근본적으로 노리는 세력들이 집요하게 공략하는 배경이라고 밖에는 달리 다른 생각이 들지 않습니다. 작년부터 계속 이렇게 우리 사회를 불안으로 몰아가고 있습니다. 바로 이 같은 이해가 안 되는 일들이 일어나는 사회를 가리켜서 복잡성의 세상이라 합니다.

 

 

이런 세상 가운데서 주님께서 우리에게 무엇이라 말씀하십니까? 오늘 본문 말씀은 광야 같은 세상살이가 하나님의 은혜의 동산으로, 답답한 우리의 심령이 회복되고 살아나 즐거움으로 가득 차, 즉 주님께서 축복하시는 은혜의 날들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은혜의 해가 시작될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첫째로 위로와 변화로 부르시는 은혜의 해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의를 따르고 여호와를 찾으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의를 따르며 여호와를 찾아 구하는 너희는 내게 들을지어다라고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2015년 새해를 맞아 의를 따르며 여호와를 찾는 교회, 성도들이 되시기를 원합니다. 왜 의를 따르고 여호와를 찾아야 합니까? 그래야 진정한 회복이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은 본래 돌덩이와 흙구덩이 같은 민족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돌에서 언약의 말씀을 주셨고, 구덩이와 같이 더럽고 위급한 상황 가운데서 구해내셨던 것입니다.

 

 

반석에서 하나님께서 직접 불로 글을 새겨 넣으시고 파내서 이스라엘에게 언약의 말씀을 주셨지 않습니까형들의 시기와 미움을 사서 구덩이에 빠졌던 요셉을 건져내어 이스라엘을 구하는 도구로 사용하셨습니다. 솔직히 우리 자신들을 돌아 볼 때 돌 같고 삶의 구렁텅이에 빠져서 어찌해야 할 바를 알지 못하는 자들입니다. 삶의 구렁텅이를 아세요? 삶의 지옥 같은 인생입니다. 예수님의 은혜가 아니면 우리 인생살이가 그렇습니다. 매일 우리 삶을 볼 때 그렇습니다. 정말 예수님이 아니면 우리에게서 선한 모습이 그 어느 한 구석이라도 찾아 볼 수 있습니까?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 신명기 7:12~13, “너희가 이 모든 법도를 지켜 행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언약을 지켜 네게 인애를 베푸실 것이라, 곧 너를 사랑하시고 복을 주사 너를 번성하게 하시되 네게 주리라고 네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땅에서 네 소생에게 은혜를 베푸시며 네 토지소산과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을 풍성하게 하시고 네 소와 기름을 풍성하게 하시고, 네 소와 양을 번식하게 하시리니

 

 

하나님의 말씀을 잘 지키고 순종해야 합니다. 이것이 진정한 회복입니다. 진정한 부흥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이것이 잘 되는 길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서 이 같은 우리를 어떤 사람들로 말하고 있습니까? 의를 따르며 여호와를 찾아 구하는 너희는 의를 따르며 여호와를 찾아 구하는 이것은 동의적 표현입니다. 강조어법입니다. 같은 말을 두 번~세 번 반복한다거나, 같은 의미의 단어를 다르게 사용하며 반복한다거나 모두 강조구문입니다.

 

 

여호와를 찾아 구하는 일은 곧 의를 따르는 것입니다. 바르고 옳은 길입니다. 이것은 선 한가 악한 가의 문제입니다. 악한 길은 죽음의 길이요, 어둠의 길입니다. 선한 길생명의 길이요, 빛의 길입니다. 선한 길은 여호와를 찾는 길입니다. 순종하고 복종하여 구하는 길입니다. 전적으로 하나님을 의존하는 길입니다.

 

 

여기에 쉼이 있고, 안식이 있으며, 만족이 있습니다. 그래서 사55장에서 오호라 너희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의의 길이고 옳은 길입니다. 왜 입니까? 예수님을 믿고 죄 사함을 받는 나아오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성령의 역사와 인도함을 잘 따르는 길입니다. 교회 역사는 성령과 함께 시작 되었습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신 그리스도의 남은 사역을 성령께서 담당하여 진행해 가십니다. 이를 위해서 능력을 주시고 성도로 하여금 죄와 이기게 하시며, 주님 재림의 날까지 성도들을 보존하시고, 구원받은 성도들의 인격이 그리스도를 닮아 가도록 성숙되게 하십니다. 이것이 말씀과 성령으로 세움을 입어간다는 의미입니다. 이것이 바로 선한 길입니다.

 

 

이러한 길을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에게 요구하시는 차원의 길입니다.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오직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라고 미가서 6:8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같은 것이 여호와를 찾아 구하는 의를 따르는 길입니다. 이것이 성도의 경건입니다.

 

 

오늘 본문은 돌덩이 같고 진흙탕 구덩이 같은 이스라엘 민족을 불어내어 경건한 족속으로 삼았습니다. 그것을 회상시키시면서 위로의 말씀을 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을 들으라는 것입니다. 이처럼 귀 있는 성도는 들을지어다!”라고 지금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2015년 바로 이와 같은 축복이 임하시는 해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다음, 우리에게 위로와 변화로 부르시는 은혜의 해가 무엇을 말해 주고 있습니까?

하나님 앞에 서는 단독자로 창성해지는 부름이 있는 해를 말합니다.

 

단독자!

 

이것은 좀 심오(深奧)한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주님과 일대일 관계를 위해서 방해 되는 모든 다른 것들이나 관계들을 차단해야 한다는 차원입니다. 주님의 음성을 듣는데 오직 홀로 서 있는 현장을 의미합니다. 다른 모든 정신을 빼버리는 것들을 다 차단하고 주님께 집중하는 자세를 말합니다. 기도 골방도 바로 이 같은 의미에서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 예배를 드리면서도 예수님과 로그 인 되어 진 순간으로써 드려지는 예배가 되어야 합니다. 이름과 비밀번호를 넣고 들어가면 자기 싸이트 공간으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문을 열고 방으로 들어가듯이 이름과 비밀번호가 여러분 컴퓨터 방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연결되어 있는 상태로 들어 간 것입니다. 주님과 관통 되는 예배, 연결 되는 예배를 말합니다.

 

 

이것은 고독한 존재를 말합니다. 허무주의자로써, 친구나 애인이 없어서, 돈이 없고 능력자가 안 되어서 갖는 고독자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수많은 대중과 군중들 사이에서 오직 주님 때문에 만나게 된 고독의 순간을 말합니다. 이 때는 가장 가까운 사람들로 부터도 고독자로 남습니다. 또한 우리를 바쁘게 몰아가는 현실 삶 속에서 하나님 앞에 서야 하는 문제로 단독자로 서는 것입니다. 어느 정도냐 하면, 모든 사람들이 미워하고 싫어하는 자리까지 들어간다 할지라도, 모든 삶이 주님 때문에 막힌다 할지라도 주님 앞에 서느냐? 라는 차원입니다.

 

 

참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자는 할 수 있습니다. 분명하게 고독한 길이지만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도, 바울도, 주의 제자들이 걸어간 고독의 현장입니다. 지금도 이러한 신앙의 고독자들은 주님의 선하신 인도를 받습니다. 우리 모두가 그러한 한 해로 승리할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니까 아브라함과 사라의 예를 들어서 생각해 보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중요한 포인트가 아브라함이 혼자 있을 때에 하나님께서 부르셨다 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실 때, 그 때는 누구도 관계해서는 안 됩니다. 만일 그 길이 하나님이 부르시는 길인데 누군가 그 길을 막으면 반드시 그 댓가를 치르게 되어 있습니다. , 사라와 함께 이름을 거명하면서, 사라와 함께 부르시지 않고 혼자 있을 때 불렀다고 강조를 하는 것입니까? 정말 하나님의 일에는 혼자 깊은 고뇌에 차서 진지하게 임해야 합니다. 헌데 옆에 누가 있으면, 특히 부인이 방해가 더 될 수 있습니다.

 

 

아담을 무너지게 한 이가 하와였습니다. 우리가 사라를 통해서 태어났다고 할 때는 사라도 함께 거명되고 있는데,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을 때는 오로지 홀로 부르심을 받았다고 점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아무리 함께 살며 자식을 낳은 가장 가까운 처()라 할지라도 하나님 앞에 단독자로 서야 할 때는 오로지 홀로 서라는 것입니다. 가정(家庭)사는 처가 다 알아서 한다 할지라도 주님 앞에 서는 하나님의 부름의 명은 홀로 받으라는 것입니다.

 

 

지금 교회마다 영적으로 문제가 되는 것은, 목회자 자신이 아니라 처가 이러고저러고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받은 사명의 문제가 처의 잔머리에서 결정이 되는 것입니다. 당회에서 결정 된 주님의 공적인 일들이 처의 간섭에 의해서 다시 번복되기가 일수입니다. 교회가 사고팔고 하는 환경들은 이와 같은 배경이 주도 된 한국적 상황이 되고 말았습니다.

 

 

교회의 부흥의 길이 막히고 교회 안 환경이 인간적인 경향성이 교회를 주도하는 현실 교회 환경은 목회자 사모가 야당이 되어서 목사의 목회를 협력해야 한다고 하는 정치적인 경향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목회자는 오직 하나님 앞에서 무릎 꿇고, 직접 응답 받는 목회적 믿음에 의해서 교회가 운용되어야 합니다. 허지만 목회자의 목회가 아니라 처가 이러고저러고 하는 가정사 차원에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이를 잘 보여주는 대목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이 지상에서 살아가는 동안 모든 것을 끊고 오로지 혼자 하나님 앞에 서야 할 때가 있습니다. 오직 하나님 앞에서 어떤 방법으로든 하나님께서 어떻게 말씀하고 요구하시는지에 집중을 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오직 하나님께 아뢰고, 의논하고, 명령을 받아야 하는 고독의 순간이 있습니다.

 

 

주님께서도 그렇게 했습니다. 오직 아버지의 명을 따르기 위해서 집중하셨고 결정적인 순간마다 고독의 기도하는 시간을 가졌지 않습니까? 이것이 하나님 면전 앞에서의 사는 삶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갖는 인간의 실존의식입니다. 우리가 그를 힘입어 살며, 기동하며, 존재하느니라 그를 힘입어는 어원상으로 의존하여입니다. 전적으로 하나님을 의존하는 생애입니다.

 

 

이러한 차원의 하나님 면전의식, 우리 성도의 최고의 경건 의식입니다. 우리가 지적으로, 감성적으로 우리의 인격 전체적으로 양식이 높아져 가야 하는데 성도의 양식바로 하나님 앞에 서는 단독자의 순간입니다. 아브라함이 이렇게 단독자로 부름을 받아서 갈 바를 알지 못하고 출발한 길인데 복을 받고 창성한 길이 되었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부르시고 인도하시는 길이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육적으로 물질 차원에서 창성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적으로, 육적으로, 만족이나 잘 되는 것은 일시적입니다. 그것이 이루어지거나 돈이 많아지면 그때부터 마음이 식어버리고 또 다른 문제로 이어집니다. 이것이 세상 사람들을 통해서 볼 수 있는 물질 개념입니다.

 

 

혹시 우리가 그와 똑같은 수준에 머무르고 있지는 않습니까? 자신이 무언가 꼭! 하려고 기를 쓰고 성취하고자 합니다. 허지만 막상 이루고 나면 바로 마음이 식어집니다. 또 다시 다른 것을 찾습니다. 인간을 밑도 끝도 없이 불만족스럽게 하는 근원적인 문제입니다. 무언가 이루면 한편으로 허무해지는 인생의 고질적 병 말입니다. 죄로 말미암아 근본적으로 허무해진 인간에게 나타나는 고질적인 병입니다. 이 문제는 주님을 만나야 해결 되고 자유로워집니다. 결코 인생의 문제로 해결되지 않습니다. 개인적으로, 사회적으로, 국가적으로 해결 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 성도들은 열심히 살아야 합니다. 불신자들보다 몇 배로 더 열심히 살아야 합니다. 열심히 물질을 경영 하고, 번창 하려고 부지런해야 합니다. 허지만 이런 것에 지배되고 노예가 되어 영적 생활을 등한히 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더군다나 성도로써 해서는 안 되는 것을 하면 안 됩니다. 주님을 배반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공 예배 생활을 이런 것들 핑계되고 빠지는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 이런 것에 마음을 빼앗겨 주의 일에 방임하는 자들이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성도가 허무해 지고, 신앙생활이 영적으로 잠자는 상태로 빠지는 것입니다.

 

 

허지만 하나님께서 창성케 해 주시는 일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입니다. 돈이 들어와도, 나가도 우리에게 해가 되지 않습니다. 후회도, 염려도, 건강을 해롭게 하지도 않습니다. 우리가 어려움을 만나고, 슬픔을 당하고 때론 병들 수 있고, 사업에 망할 수도 있지만 전혀 그것이 우리를 해롭게 할 수 없습니다. 우리를 지배 할 수가 없습니다.

 

 

허지만 우리 영혼은 부유해져 갑니다. 늘 새로워지는 은혜를 입습니다. 이루 말로 표현 할 길이 없는 그 놀라운 은혜의 인도함을 받습니다. 오직 자신 만이 아는 은혜의 위로가 있습니다. 또 어떤 분은 영육 간에 잘 되는 축복을 받습니다. 해를 입어도 눌리는 자가 아니라 자유의 승리로 나아가는 삶이 됩니다. 아무리 막고 눌려도 믿음은 이기게 됩니다. 이것이 범사가 잘 되고 강건한 삶입니다.

 

 

이것이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사람의 길입니다. 시가서는 이러한 사람을 가리켜서 여호와가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라고 고백합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삶을 우리 앞에 펼쳐주십니다. 그러므로 2015년은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시는 축복 된 한 해가 되십시오. 매일 하나님의 부르심을 느끼며 사시길 바랍니다. 그러자면 새로운 마음으로 새벽기도부터 참여하시고, 공 예배, 공적행사에 잘 참여 하시는 복 된 한 해가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끝으로 위로와 변화로 부르시는 은혜의 해가 되면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우리의 인격과 삶이 회복되고 행복해지는 환경으로 들어갑니다.

 

 

여호와의 길은 황폐한 사막이 물댄 동산 같은 에덴으로 변합니다. 이스라엘의 예루살렘 성전과 도성이 황폐화 되었습니다. 전쟁으로 인하여 초토화 되어 까마귀 떼승랑이, 그리고 늑대들이 우굴거리는 곳이 되었습니다. 시온은 본래 어떤 곳입니까? 여호와께서 함께 계시는 거룩한 산이었습니다. “여호와께서 영원히 이스라엘과 함께 계셔서 보호하시고, 인도하심으로 다스려 주신다라고 하신 거룩한 산을 가리키는 곳입니다. 성별되고 구별 된 장소로써 통칭되었습니다.

 

 

이곳에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쳤고, 예루살렘 성전이 되었습니다. 이곳이 회복되고 회복 된 그 곳에 여호와의 삼마, 여호와께서 거기에 계시도다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정말 임마누엘 축복입니다. 하나님께서 위로하시면, 선하게 변합니다. 모든 황폐한 곳들, 즉 황폐하고 사막 같은 곳들이 길이 나고 생명력이 넘치는 에덴과 같은 여호와의 동산으로 변합니다. 이것을 우리는 회복의 변화라 합니다.

 

 

다시 회복케 해주시는 은혜의 법칙입니다. 우리에게 하나님의 은혜는 항상 새롭게 해주시는 은혜입니다. 시편에서는 주의 영을 보내사 지면을 새롭게 하시는도다.”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오신 것은 바로 우리에게 다시 새롭게 하시는 회복의 은혜를 주신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을 살면서 이처럼 날마다 새롭게 해주시는 주님의 은혜가 없으면 우리는 정말 살지 못합니다. 얼마나 문제가 많습니까? 아무리 겉으로 아무렇지 않는 척 한다 할지라도 너무 문제가 많습니다. 조금도 스스로 선해 질 수 없고, 선하게 될 수도 없습니다. 늘 실패하고, 거짓되고, 속이고, 미워하고, 질투하고, 남을 무너트려서라도 올라서려 하고 정말 형편없는 자들입니다. 주님께서 매일 새롭게 해 주시는 은혜가 있기 때문에 사는 자들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은혜를 입어야 합니다. 소생케 하는 은혜입니다. 다시 부어주셔서 살아나게 하시는, 일으켜 세우시는 은혜입니다. 이는 신약시대의 성령 충만의 은혜입니다. 성령 충만예수님을 향한 열정 상태, 교회에서 섬기고자 하는 충성심 등이 역동적으로 살아 있도록 하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는 날마다 성령 충만을 위해서 구해야 합니다. 이것은 반복적으로 주시는 은혜입니다. 왜입니까? 우리는 매일 넘어질 수밖에 없는 연약한 존재들입니다. 성령님께서 매일 우리를 새롭게 하는 다시 부어주시는 은혜가 없으면 안 됩니다.

 

 

그럼 우리의 인격과 삶이 변화면, 이러한 은혜를 입으면 어떻게 된다고 했습니까? 기뻐함과 즐거워함과 감사함과 창화하는 소리가 있으리라라고 말합니다.

 

 

기뻐함은 잔치할 때 일어나는 기쁨입니다. 초대장을 보내고 초대를 하고, 잔치판을 벌리고, 왁자지껄 한 분위기와 함께 일어나는 기쁨입니다. 주님께서 초대하시는 은혜의 잔치 집을 말합니다. 우리를 구원하시고 구원받은 우리를 날마다 새롭게 하시는 은혜의 잔치집입니다. 이러한 기쁨은 물질적인 차원의 기쁨이 아닙니다. 우리의 영이 새로워지고 변해가는 기쁨입니다. 주님 때문에 성숙으로 나아가는 기쁨입니다.

 

 

교회가 이 같은 분위기가 살아 있을 때 부흥합니다. 그렇게 되면 싸우고 지지고 볶는 왁자지껄 혼란한 장소가 아니라 서로 섬기고 은혜가 넘치는 진짜 교회적 환경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황폐한 곳이 에덴동산과 같이 된다는 의미입니다. 기쁨으로 가득 찬 장소가 된다는 의미입니다. 여러분 가정에, 우리 교회 우에 이러한 즐거움이 넘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즐거워함은, 유쾌(愉快)해진 기분, 감정상태를 의미합니다. 마음 속 깊이 즐거워는 만족의 상태입니다. 몸과 마음이 쾌활해지는 기분상태에 놓이는 것입니다. 너무 즐거워 좋아죽을 지경입니다. 이러한 즐거움을 갖게 되면 마음이 온유해지고, 편안해지면서 성품이 누그러트려집니다.

 

 

예수님이 우리 마음을 어루만져 주실 때 이러한 즐거움이 일어납니다. 이러한 즐거움이 자신의 마음의 상처와 어려서 경험한 일들로 굳어져 있던 마음들을 녹이는 힘입니다. 이는 예수님으로부터 생명의 빛을 받은 중생한 사람들이 매일 영적 변화를 체험하면서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의 성화의 단계에서 나타나는 즐거움의 증세입니다.

 

 

감사함과,과 했습니다. 감사에 대한 고백적 삶을 말합니다. 그런데 이는 예배와 관계 된 고백을 말합니다. 추수감사절과 같은 특별한 예배에 감사도 이에 포함하지만 성도가 생활 속에서 감사에 대한 고백이 범사에 예배로 드려지는 것을 말합니다. 감사는 하나님의 영광을 찬양하는 마음가짐과 직결되는 자세를 말합니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높이고자 하는 중심에서 나오는 감사의 고백입니다. 하나님과 관계가 바로 되어 있는 성도에게서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의 중심을 보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배를 드리는데 이러한 중심이 없는 예배를 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신앙의 성숙으로 나아가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창조주 하나님을 예배하고, 리를 죄악에서 구속하여 주신 하나님을 높이고 감사가 예배 가운데 나타나는 이러한 행위는 성도의 가장 겸손한 태도입니다. 예배 때마다 이루어져야 합니다. 이것은 오직 회복 된 성도에게서 일어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어루만져 회복케 해 주시면 이와 같이 물댄 동산 같은 만족함의 상태로 들어갑니다.

 

 

이것이 바로 창화 하는 소리입니다. 이는 악기와 음성으로 노래하며 축하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이 예배 중의 찬양이요, 악기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성가대의 찬양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교회 안에서 일어나는 기쁜 잔치, 곧 복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찬양으로 하나님을 높이고 경배하는 예배가 살아 있는 교회적 환경, 가정적 환경들이 펼쳐질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오늘 본문은 무엇을 말해주는 것입니까? 바로 예수님께서 초림 하셔서 다시 회복하게 해 줄 때를 말하는 것입니다. 본문은 이스라엘에 이러한 역사가 일어날 것을 예고적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맨 처음 예수님께로 나오는 것이 의를 따르는 길이며, 여호와를 찾아 구하는 길이며, 진정한 복이며 창성하는 것입니다. 주님을 만남으로 최악이 최상으로 바뀌고, 그로 인하여 기쁘고, 즐거워하고, 감사하고, 악기로 찬양하는, 그래서 이스라엘에게 복음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이 복음을 거부한 것입니다. 참으로 불행하게 한 교만이었습니다. 만일 지금도 이와 같이 거부하는 민족이나 가정, 그 누구도 불행한 자들입니다. 우리는 거부하지 맙시다. 그럼 매일 회복의 축복이 반복적으로 주어집니다. 우리가 때로는 넘어지고, 시험에 들고, 오해 등으로 힘을 잃을 때가 있습니다. 그 때마다 부어주시는 회복의 은혜입니다. 지금 매일 이 같은 역사가 우리 가운데 일어나야 합니다.

 

 

우리의 교회 안에서 이 같은 잔치의 즐거움이 일어나야 합니다. 이러한 회복의 역사가 올 한 해 동안 여러분 개인적으로, 여러분 하시는 일 가운데, 여러분의 가정적으로, 교회적으로 충만하게 일어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정말 의를 따르며 여호와를 찾아 구하는 자들이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나님 면전 앞이라는 의식을 가지고 살아가는 경건한 성도들, 전적으로 하나님을 의존하고 사는 생애들이 되어야 합니다.

 

 

광야와 사막이 변화여 하나님의 동산처럼 되는 근본적인 변화와 위로가 넘치기를 원합니다. 그로 인하여 기쁨과 즐거움과 감사함과 창성함이 넘치는 가정적인 환경, 교회적인 환경, 여러분들이 서 있는 곳들의 환경들에 가득 차고 넘치는 한 해가 되시고 하나님의 영광이 가득 차고 넘칠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 북마크
  • 신고하기

댓글

댓글 리스트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