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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 짐을 져야 하는 교회적 사명/ 갈6:2~5

작성자항상 새롭게(김종신선교사)|작성시간15.01.16|조회수85 목록 댓글 0

 

 

서로 짐을 져야 하는 교회적 사명

6:2~5

 

 

지난 해 104일 날 아시아대회가 끝났다. 한국은 금메달 79개로 종합 2, 연속 5회 째의 영광을 앉고서 잘 마쳤다. 헌데 안타까운 부분이 있었다. 메달 7곱 개를 내리 따면서도 안타깝게도 금메달을 하나도 따지 못한 우리의 영웅 박태완군과 관계해서이다. 수영이 진행되는 내내 우리는 내심 금메달을 기대하였다.

 

 

허지만 은 2, 5섯 개로 결과가 끝났다. 솔직히 박태완이 금메달을 땄느냐 따지 못했느냐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수영이 진행 될 때마다 금메달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태완군이 짠하고 안타까워 졌다. 여기서 우리는 우리 사회의 자화상을 볼 수 있었다는 점이다. 그 이유가 무엇인가? 태완군이 혼자서 다 짐을 지는 것이었다.

 

 

가장 가까운 라이벌들인 중국, 일본 선수는 다른 선수들이 각각 수영 경기마다 뛰어주니 자신들의 주 종목에만 참여하여 온 힘을 쏟아내니 성적이 좋을 수밖에 없었다. 허지만 태완군은 모든 수영 경기를 거의 다 감당하는 것이었다. 혼자서 한국의 수영 경기의 짐을 다 지는 것이었다. 특1500m 직후에 다시 100m를 이어서 참여를 하는데 마음이 매여졌다.

 

 

자서 다 짐을 지고서 충분한 휴식을 취하지를 못하는 것을 보여주었다. 오직 혼자서 다 뛰니 얼마나 힘들었겠는가! 어떤 이들은 나라가 그만큼 키워주었으니 그 정도는 각오해야 한다고 쉽게 말할 것이다. 허지만 이것은 운영에 문제가 있는 것이다. 중국이나 일본처럼 다른 많은 후보군을 발군해서 이런 불균형 현상이 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 오로지 자신의 종목에 올인 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즉, 역할이 분담 되도록 하여 한 선수가 다 감당을 하도록 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교회생활이라고 별단 다르지 않다. 더했으면 더하다. 은혜를 나누는 거룩한 곳이어서 문제가 없을 것처럼 느껴진다. 허지만 실상은 전혀 다르다. 더욱이 교회는 현실적으로 강제성이 없다. 국가나 군대사회처럼 강제성이 없고 상업적 배경과 같이 월급이란 돈이 걸린 문제도 아니다. 오직 은혜로 하는 곳이다. 물론 요즘은 돈으로 사람들을 섬기도록 하고 있다. 그래서 성경은 자원하는 심령을 강조한다.

 

 

아직 천국에 들어가지 않은 문제 많은 사람들이 모이다 보니 교회 안에 짐의 문제는 심각할 수밖에 없다. 강제성이 없고, 돈이 걸리지 않는 순수한 성경의 원리에 따라 자원하는 것이 교회적 환경이다 보니 짐을 안 지려 하는 사람들이 많다. 오히려 관망하는 사람들과 약삭빠른 사람들이 많을 수 있다. 실제로 그러한 교회적 환경이 되어 있다. 

 

 

허지만 성경은, 교회가 서로 짐을 질 때 불만을 잠재우고, 서로 섬기는 분위기가 사는 교회, 게다가 교회 생활이 역동적으로 움직인다고 말해 주고 있다. 이러한 교회는 교회 생활이 즐거워지고 교회가 가고 싶어지는 것이다. 허지만 현대화가 깊어지고 최첨단 시대로 나아 갈수록 교회 안에서조차 서로 짐을 지지 않으려 한다. 교회마다 냉랭하고 썰렁한 분위기로 몰아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본문은 서로 짐 지는 문제를 매우 중요시 다루면서 강조를 하고 있다. 오늘 본문 말씀을 크게 셋으로 나눌 수 있다. 1.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 2. 되지 못하고 된 줄로 생각지 말라!/ 3. 각각 자기의 짐을 지라!

 

 

짐이란 무겁게 하는 것, 부담스럽게 하는 것, 고통과 근심을 가중시키는 것을 말한다. 이것을 크게 둘로 나누면 하나는 물리적 측면이고, 다른 하나는 정신적 측면으로 책무와 관계해서 거대한 부담감이라 할 수 있다

 

 

먼저 물리적으로 무거운 것에 대한 문제. 수학적으로 10, 20, 30, 40, 50, 60kg의 짐을 혼자서 드는 것 보다 둘이 들면 그 무게감이 감소되어 버리는 것을 말한다. 이것은 짐을 혼자 들 때보다 둘이 들 때 한층 가벼워진다는 의미다이것은 다른 말로 근심, 걱정, 문제 등의 소지가 감소되고 그로 인해서 행복지수가 그만큼 높아져 간다는 의미이다.

 

 

, 육체적으로 감당해야 하는 짐의 모든 문제들이 여럿이 함께 함으로 무게감을 나누어지게 하여 축소 시켜 버리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다른 하나는 정신적인 측면으로 책무’, 혹은 의무와 관계 된 문제이다. 이것은 거대한 무게감 앞에 서있는 인간의 존재감이라 할 수 있다. 왜 여러분들이 열심히 사는가? 가정을 책임져야 한다는 의무감 때문이다. 이것은 현실적인 문제이다.

 

 

대통령이 나라를 보존하고 번영을 도모하고 국민의 안녕에 대한 책무, 얼마나 거대한 무게감인가? 이순신 장군은 바로 이러한 거대한 무게감 앞에서 전쟁을 수행하고, 풍전등화와 같은 국가의 위기 앞에서 이기는 전쟁 수행을 위해서 왕의 명령조차도 실전 현장과 맞지 않을 때 거절해야 할 정도의 무게감, 바로 이러한 무게감을 말하는 것이다.

 

 

목사의 무게감, 특히 담임 목사의 무게감, 이 거대한 부담감은 단순하지 않다. 이 죄악 된 세상 가운데서 세상으로부터 교회를 지키면서 오직 하나님의 영광이 드리워지는 거룩한 장소로 만들어 가야 하는 무게다. 진리의 수용에 있어서 잘 알아듣지 못하는 성도들을 독려하는 일은 너무 무겁다. 더욱이 지금처럼 교회를 사방팔방에서 둘러싸고서 공격해오는 현실 앞에서 목사가 흔들리지 않고 중심을 지키며 무너지지 않고 교회를 지키려 하는 그 고독감은 이루 말할 수 없다.

 

 

이루 말 할 수 없는 오해, 지금처럼 세상이 목사들을 함부로 판단할 때 성도들이 그 영향을 받아서 오히려 목사들을 공격하는 형태, 이런 때에 사단은 교회를 무너트리기 위해서 목사와 장로들 사이에 오해가 발생토록 조작을 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목사에 대한 평가를 세상 기준에 의해서 따라가다가 시험 들지 않아야 할 것이다. 

 

   

그럼 짐이란 무엇인가? 몇 가지 차원에서 말씀 드리기를 원한다.

먼저 짐을 진다는 것, 교회의 근본 머리가 되시는 그리스도께서 지신 십자가에 그 뿌리를 두는 것이다.

 

 

십자가를 지시고 가신 주님의 길을 따르는 무게를 말한다. 여러분! 세상에서 가장 무거운 짐이 있다면 무엇인가? 십자가는 짐이었다.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짐이었다. 자신 백성들의 죄 값을 담당하고 지시고 가신 짐이었다. 단 번에 제물이 되셔서, 산제물이 되셔서 피와 물을 다 쏟으신 짐이었다.

 

 

자신이 죽음으로 영혼이 죽어 생명의 빛이 없는 영혼들을 구하시는 짐이었다. 자신이 낮아지심으로 택함 받은 백성들을 부유케 하시는 짐이었다. 이 짐을 주님이 지신 것이다. 도저히 질 수 없는 고통의 짐이었는데 그 누구에게 떠넘기시지도 않고 아버지께 순종하신 짐이었다. 오직 주님께서 지시고 가신 짐이었다. 주님께서 이렇게 지고가신 짐 때문에 교회가 이 지상에 세워진 것이다.

 

 

성도인 우리를 무엇이라 하는가? 그리스도의 몸이라 한다. 몸은 머리에 연결 되어서 머리의 지시를 받는다. 몸은 머리가 지시하는 대로 행동을 해야 한다. 그래서 몸은 머리가 가는 길을 그대로 따라가야 한다. 주님은 교회의 머리이시다. 바로 우리의 머리가 되시는 주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짐을 지라고 말씀하신다.

 

 

주님께서 세우신 교회에는 짐이 많다. 이것을 우리는 다른 말로 십자가라고 말한다. 주님의 지상명령은 짐이다. 공 예배는 몸과 정성, 시간을 드려야 하는 짐이다. 기도의 자리 섬김의 자리는 기독인의 삶의 짐이다왜냐하면 기도해야 할 시간에 세상에 즐거운 자리가 얼마나 많은가? 그 유혹과 시험을 뿌리치고 나와야 하는 자리니 짐이다. 우리는 이를 거룩한 부담감이라 한다. 그런데 2~ 본문에서 너희가 서로 지라는 것이다.

 

 

짐을 진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서로 짐을 진다는 것, 교회 성도가 200백 명이면 200, 만 명이면 만 명 모두가 짐을 져야 한다는 뜻이다. 누구는 지고 누구는 안지고 그런 뜻이 아니다. 이것은 참여를 의미하는 말이기도 하다. 무슨 일을 한다하면 거기에 모두 참여하는 것이다. 그런데 방임자, 관망파, 핑계파, 불만파 등, 다 빠져나가고 맨 하는 사람이 도맡다시피 해서 일을 하는 것이다.

 

 

선교를 하는 한국교회가 20%, 자립교회 중심으로 약 1만 교회라 할 수 있는데 그 중에서도 다 빠지고 약 5천 교회만이 선교에 동참을 하고 있다고 한다. 그런데 교회 안에서도 참여율이 낮다는 것이다. 숫자가 많은 교회인 대형교회들은 일군들이 넘쳐나는데 소형교회들은 일군들이 부족하여 맡는 사람이 두 개, 세 개 씩 맡는 것이다.

 

 

만일 200명이 되는 성도들이 예배 참여를 하는 짐을 지지 않는다면 예배당이 얼마나 썰렁하겠는가? 그래서 200백 명 전원이 짐을 지라는 것이다이것을 5~에서 더 구체적으로 확대하여 강조를 하는 것이다. 자기 짐을 자신이 지라는 것이다. 이것은 구체적으로 자기 맡은 일을 최선을 다해서 다하라는 것이다. 각자가 맡은 일들을 알아서 처리하고, 담당을 하고, 성실하게 임하라는 것이다.

 

 

작은 교회라 일군이 너무 필요하다. 그런데 요즘은 그나마 있는 사람들도 교회 일을 하지 않으려고 뒤로 빼기만 한다. 더구나 괜히 쓸데없이 안 가도 되고 관여 하지 않아도 되는데 다른 이유들 때문에 자기 부서의 일들에 차질이 생기게 하는 것이다. 이것이 자기 짐을 안 지는 것이다.

 

 

짐을 진다는 것주님의 십자가를 지심에서부터 왔다. 결코 피하지 않으시고, 자신이 친히 죽음의 자리로 들어가셔서 모든 고통을 담당하시고 모든 짐을 지신 것이다. 피와 물을 다 쏟으시면서 지신 짐이다. 그로 인하여 우리가 나음을 입었고, 고침을 받아 생명을 소유하고 하나님 아버지를 아바 아버지라 부를 수 있는 하나님의 친백성이 되신 것이다.

 

 

주님께서 친히 심자가를 지심으로 우리를 살리셨듯이 주님의 몸 된 교회인 우리가 서로 짐을 짐으로 많은 사람들을 죄로부터 해방 시키는 역사가     교회 우에 충만히 나타날 수 있기를 축원한다.

 

 

다음으로 짐을 진다는 것은, 지속의 의미를 말한다.

버티고, 가고, 지속되고, 보존되는 영구성을 의미한다.

 

 

짐을 지라는 어원적 의미들어 올리다’, ‘참다’, ‘지탱하다 등의 의미로 사용 되었다. 그런데 이 개념이 담고 있는 의미는 제거를 의미를 내포한다. 200백 명의 성도들이 함께 들어 올리고, 참고, 끝까지 감으로 문제의 소지들을 제거하면서 천성을 향해서 함께 걸어가는 것이다. 신앙생활에 방해가 되는 요소들, 교회가 연합하여 함께 의를 이루어가는 앞에 방해가 되는 문제의 소지를 없애는 짐을 함께 지고 가는 것이다. 그것이 지속이다. 오래 참고, 지탱하여 앞으로 행진하는 일을 지속하는 것은 은혜가 아니면 안 되는 일이다.

 

 

우리의 한옥을 보면 아름다리 소나무 기둥들이 건물을 버티고 서 있다. 기둥이 떡 버티고 있는 한 그 건물은 건재하다. 든든히 그 웅장한 모습을 하고 사람들의 보금자리로써 부족함이 없다. 그런데 기둥이 빨리 부패하여 건물이 무너지는 경우가 있다. 그것은 세월이 가면서 나무 안에 벌레가 갉아먹을 때 나무는 썩고 그 수명이 짧아진다.

 

 

여러분 무화가가 얼마나 맛있는가? 그런데 왜 그렇게 빨리 썩어 녹아내리는가? 가만히 보니까 날 파리가 익어서 벌어지는 구멍으로 들어가서 빨대 짓을 해대는 것이다. 이 날 파리가 빨면 생물은 금방 썩는다. 하루살이지만 그것이 입에 대는 과일이나 생물들이 얼마나 별 볼일 없이 녹아내리는지?

 

 

기둥이 모든 건물의 무게를 받치고 지탱하듯이 성도들이 각각 자기의 짐들을 지고 지속하는 것이다. 이것은 교회가 지상에서 성도들의 헌신 된 삶을 통해서 영원한 그리스도의 영속성을 나타내는 것이다작은 미생물 하나가 모든 과일의 신선함을 빨리 파괴하듯이 우리의 교회를 지속성을 갉아먹는 작은 이유가 무엇인지 바로 직시하고 제거해 가야 한다.

 

 

다음으로 짐을 진다는 것은, 고통 분담으로 마음의 근심을 더는 것을 의미한다.

 

 

4H 청년회 운동/ 중학교 때 선배님이 고향을 떠났다가 고향으로 돌아오시더니 우리 부락에 4H 청년회를 조직해서 각자의 집에 일들을 돌아가며 해 주었고, 그 외 부락민들이 요구를 해오면 소정의 금액을 받고 일을 해 주었다혼자서 짐을 나르려면 하루 종일 다해도 못했다. 며칠 동안이 걸린다. 그런데 아침 한 번 4H 청년회원들이 달려들었다 하면 없어져 버리는 것이다.

 

 

그러면 재미도 나고 마음이 얼마나 시원해지는지? 한 번 달려들었다 하면 아무리 멀고 많아도 한 두 번이면 끝나버렸다. 얼마나 기분을 좋게 해 주던지? 서로 짐을 진다는 것은 이런 것이다. 혼자 하려고 하면 눈이 먼저 게을러진다고 언제 이놈의 것을 다 하노? 혼자서 푸념을 하다가 한나절 가버린다. 그래서 몇 날 며칠 걸렸다.

 

 

그런데 여러 사람이 힘을 합쳐서 처리를 해 버리니 신바람이 나는 것이었다교회 일도 이와 같이 진행되어야 한다. 고통을 분담하면 무엇보다도 마음이 편안해 진다. 우리가 공부를 할 때 왜 독서실에서 하는가? 옆에 다른 사람이 공부를 열심히 하니까 그 열기가 나를 공부 방향으로 몰아가는 것이다.

 

 

사람은 대부분의 심리가 불특정한 장소에서 소리 없이 자신을 보이고자 하는 심리가 작용한다. 이것이 수많은 사람들이 있는 곳에서 능률이 나타나는 연쇄반응이라 한다. 사악한 자들은 이러한 대중심리를 잘 이용해서 사회 파괴를 일삼는 것이다그러나 잘못 되게 하는 연쇄 반응도 있다. 파괴로 몰아가는 힘이다. PC 방의 앉아서 하루 종일 몇날 며칠 동안 시간들을 죽이는 이들, 놀음판에서, 혹은 빠징고 판에서 전재산을 날리면서 눈이 튀어나오도록 몰입되는 열정들은 멸망의 짐을 지고 가는 자들이다.

 

 

아무리 교회라 해도 아직 우리는 연약한 인간 몸 안에 영혼이 살고 있는 지상 생활이다. 하루에도 열두 번 마음이 왔다 갔다 할 정도로 흔들리고 조속변이다. 혼자 하다보면 지쳐서 시험 들 수 있다. 은혜를 다 쏟아버릴 수 있다무엇보다도 교회 생활이 효율성이 나타나지 않는다.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된다. 그러나 생활은 전투이고 침노해야 하는 생활이다.

 

 

혼자하기에 어렵다. 성도들이 함께 협력하여 진행할 때 마음의 짐이 일어나지 않는다. 오히려 있었던 근심까지 사그라드는 것이다고통분담은 가족 같은 구조에서 일어나는 현상이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피로 맺어진 형제자매관계이다. 서로가 짐을 짐으로 가족 같은 고통 분담이 이루어져서 교회 안에 근심이 사그라들도록 해야 한다. 이것이 주님께서 주시는 평안의 매를 힘써 지켜나가는 성도들의 참 된 모습이다.

 

 

다음으로 서로 짐을 지는 것은, 자신과 교회를 세우는 것이다.

 

 

고전에서는 교회의 덕을 세우라고 강조했다. 매사에 교회의 덕을 세우라고 한 것이다. 아무리 좋아도 교회의 덕을 헤치는 일이면 그만 두어야 하고 중심에서 내려놓아야 한다. 이것은 하나님의 법을 말한다. 교회 안에 들어와서 내 멋대로 하고, 세상 기준으로 일을 하려하면 안 된다. 예수님은 국가에 세금을 바쳐야 한가라는 질문을 계속 하는 자들의 강조를 받고 토론으로 맛 선 것이 아니라 제자에게 바다에 가면 고기 하나를 가져다가 입안을 벌려보아야 했다.

 

 

제자가 그대로 하니 그 안에 무엇이 있느냐? 엽돈 한 닢이 있습니다 하니 그것을 보아라 무슨 그림이 그려져 있느냐 하니까 가이사의 그림입니다. 그래서 예수님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대중을 쫙 흩어보면서 이렇게 답을 한다.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유명한 판결을 내리신 것이다.

 

 

교회를 세우는 것은 세상 것으로 세우면 안 된다. 하나님의 것으로 세워야 한다. 그런데 어떤 무리들은 세상의 이치로 교를 제단하려고 한다. 이성의 눈으로, 세상이 기준으로 정하는 법칙으로 판결하려하고, 세상의 계산법으로 하려고 하니 교회가 온통 문제투성이로 보이는 것이다.

 

 

허지만 목사를 비롯한 당회는 하나님의 법으로 일처리는 하는 것이다. 이것은 결코 세상과 맞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예수님이 3일 만에 살아나신 것, 나사로를 살리신 것, 물위로 걸으신 것, 과연 세상 위치대로 맞는가? 세상의 계산법으로 맞느냐? 이 말이다자기도 살고, 주변도 살고, 그런데 자기도 죽고 주변도 죽이는 이러한 양자 택일의 길이 있다.

 

 

우리는 사람을 살리는 자들이지 죽이는 자들이 아니다. 그런데 요즘 시대는 죽이는 경향성이 점점 강하게 주도되어 나타나고 있다. 실제적으로 사람 죽이기를 너무 쉽게 할 뿐만 아니라 말로, 행동으로, 시기심이나 질투심으로 사람 죽이는 일을 살리는 일보다 더 좋아하는 시대가 열린 것 같다는 사실이다.

 

 

세상은 세우는 것 같은데 무너트리는 이중성이 더욱 강하다. 갈수록 이러한 현상이 심화되어 나타나고 있다. 그래서 사회가 혼란스러워지고 정부조차도 어떻게 해보지 못할 정도로 무너져 내리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런 때에 우리 교회가 세우고 살려놓아야 한다. 교회만이 그 일을 감당할 수 있다. 왜인가? 주님께서 죽었던 우리의 영혼을 살려놓았지 않는가?

 

 

이것이 기독교의 근본적인 속성이다. 지금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영적으로 죽어가고 있는가? 이런 때에 전도를 통해서 많은 영혼들을 살려내고 세우는 짐을 지시는데 적극적으로 달려 들 수 있기를 축원한다.

 

 

끝으로 짐을 서로 지는 것은,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는 것이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원리, 즉 말씀을 이루는 삶을 말하는 것이다. 여기서 법은 율법이나 규정 된 원리를 말한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주신 율법과 같은 원리를 의미한다.

5:17, 완전하게 하러 왔다고 했다.

6:13, 스데반, 율법을 거슬러 말하기를 마지 아니하는도다.

3:19,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우리가 서로 짐을 지는 것은, 그리스도의 법을 이루는 일인데,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을 통해서 하신 말씀을 이루는 삶이다. 이것은 그리스도 안에 머무는 삶이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고 믿으면 내 말이 너희 안에 있다고 하셨다.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말씀으로 우리 안에 내주하신다는 내재를 말하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여전히 우리 안에 머물고 계신다는 것은 바로 성령과 더불어서 그리스도의 말씀의 원리를 수납하여 그 말씀 안에 머무를 때 바로 주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고 하신 것이다. 이것이 우리가 서로 짐을 지는 것이고, 그리스도의 원리인 말씀으로 이루는 삶이라는 사실이다. 이것을 믿는가?

 

 

결론적으로 , 서로 짐을 지지 못하는가?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의미심장한 지적을 하고 있다. 짐을 서로 지라는 부분을 중점으로 강조를 하다가 뜬금없이 중간에 엉뚱한 문제를 갖고 나오는 것이다. , 갑자기 이렇게 화두를 바꾼 것인가? 짐을 안 지려하는 이유를 이처럼 동문서답 형식으로 설명한 것이다.

 

 

된 줄로 여기는 자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왜 뜬금없이 서로 짐을 지라하면서 중간에 이 된 줄로 여기는 자의 문제를 끼워 놓은 것인가?

 

 

제가 7818세 신학교를 처음 들어가니까 지방 신학의 목사님들이 5년 내내 수업 시간마다 가장 많이 강조하는 내용이 있었다. 그것은 교만에 관한 지적이었다. 어떤 교만의 문제인가 설교와 관계해서 선줄로 생각하는 교만이었다.

 

 

신학생이 되고 사명자가 되면 학교에서 무조건 전도사님! 전도사님! 하고 부르기 시작하고 설교를 하기 시작하니까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자신이 다 된 것 같은 착각에 길들여 간다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1학년이 지나 2, 3, 4, 5년이 지날 때 그 누가 와서 설교를 해도 뒤에서 팔짱을 끼고서 평가하면서 은혜를 못 받는다는 것이었다. 그러시면서 평생 동안 이러한 교만한 마귀에 사로잡히지 않도록 먼저 말씀을 잘 듣는 겸손의 사람들이 되라는 것이었다. 어린아이가 서서 설교를 할지라도 잘 듣는 겸손을 먼저 갖추어라!

 

 

우리가 신앙생활에서 가장 무서운 적스스로 되었다고 생각하는 경우이다. 그런데 그 중에서 신앙 연조가 깊어져가면서 신앙적으로 된 줄로 생각하기에 이르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대부분이 습관적으로 익숙해지는 달관 된 신앙의 외관상의 모습이다. , 신앙의 길을 잘 알게 되는 것이다.

 

 

지상교회의 위험 요소는 교회마다 형성 된 일정한 규칙이 있다. 이것이 어떻게 보면 진리보다 더 무서운 힘으로 작용한다. 유대인들에게는 유대적 전통이었다. 이것은 방식이요 길이다. 거기에 편승해서 익숙해지면 잘 적응한다. 그런데 이것이 진정한 하나님의 은혜를 만나지 못하게 하는 가장 무서운 방해 요인으로 작용된다. 이것은 얼마든지 잘 할 수 있다. 이런 교만보다 더 무서운 영적 질병은 없다. 은근히 자신이 잘 났다고 생각하는 것이 그 배경이기 때문이다.

 

 

솔직히 정말 하나님을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의존하는 방법을 터득해서 그것을 말을 잘 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무서운 교만이다. 이러한 교만에 사로잡힐 때 스스로 된 줄로 여기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자기 스스로 자신이 무엇이 되었다고 간주하는 것을 말함이다. 사단이 자신을 스스로 거룩한 존재로 여기게 되면서부터 그 마음에 교만함이 올라 온 것이다. 입에서는 신앙원리를 잘 말하는데 중심 깊은 곳에서는 자신이 성공해 온 삶을 은근히 내세우는 것이다.

 

 

이것이 가장 무서운 교만이다. 이런 자들은 그 누구도 비켜 갈 수 없다. 이런 분들의 특징은 짐을 안 지려고 한다. 얼마나 합법적인 이유들을 잘 대면서 빠져 나가는데 능숙한 도사들이다. 그 배경에는 자신이 되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자신이 높은 곳에 서면 허드렛일은 안하려고 한다. 허지만 주님은 섬김으로 짐을 지신 것이다. 스스로 죽음의 자리로 들어가면서 짐을 지신 것이다. 능숙 능란하게 잘 처리하는 구렁이가 아니다.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않으신다고 하셨다.

 

 

오늘 본문은 스스로 된 줄로 여기는 자이기 때문에 그것이 짐을 지지 못하게 하는 방해 요인임을 분명하게 밝혀주는 말씀이다. 이에 대해서 또 다른 차원에서 짐을 지지 못하는 이유를 다루고 있다앞 장 마지막 부분에서 먼저 밝혀 주면서 본문을 시작하고 있는 대목에서 밝혀 주었다. 5:25~26, “만일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 또한 성령으로 행할지니, 헛된 영광을 구하여 서로 노엽게 하거나 서로 투기하지 말지니라.”

 

 

헛된 영광에 사로 잡혀 있을 때 짐을 지고 싶지 않게 된다.

 

 

뭐가 그렇게 급하고 바쁜 일이 있는지 예배가 끝나는 즉시 교회를 빠져나가기가 미사일보다 더 빠르다. 뭐가 그렇게 일이 많고 바빠서 말이다우리는 성령으로 사는 자들이다. 성령으로 하지 않고서는 주님을 주시라고 고백 못한다고 말했다. 우리가 주님을 나의 주님으로 고백할 수 있는 것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된 사건이다. 그렇다면 성령으로 행해야한다.

 

 

그런데 성령으로 시작을 한 생명의 삶인데 생활은 육적으로 하는 것이다. 본문은 헛된 영광을 구하는 일이고, 그것 때문에 서로 화를 돋우거나 투기를 한다는 것이다. 요즘 시대가 깊어질수록 서로가 화를 돋우고 투기로 인하여 전쟁이 극성을 부리는 시대가 되었다.

 

 

정말 왜 짐을 서로지지 못하는가?

 

 

요즘 이 헛된 영광에 사로 잡혀 있는 이들이 많다. 헛된 영광 도대체 무엇을 말하는가? 썩어질 것을 말하는데, 구약시대에는 주로 우상을 가리켜서 말했다. 우상은 형상과 물질주의를 말한다. 우상과 물질이 동의 선상인데 바로 신적인 대상으로 등극을 하는 것이다. 우상은 썩어질 영광이요, 부패한 영광으로 사람들을 허무하게 하는 것이었다.

 

 

요즘 우리 한국교회가 힘들어 지는 요인은 바로 이 헛된 욕망을 교회 안에 수용을 했기 때문이다. 암암리에 권력 투쟁이 진행되고 있다. 이것은 한국교회의 조직화를 도모하는 집단들이 교회 안에 사람들을 침투시켜서 교회를 어지럽히는 짓을 하기 때문이다. 이단들은 이단들대로, 문제는 전통교회라는 탈을 쓴 거짓 교사 집단들이 꼭 이단들과 똑같은 방식으로 기존 교회들을 유린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배경이 교회로 하여금 서로 짐을 지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그리고 교회를 무너지도록 방임이나 적극적으로 교회 환경을 유린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한국교회 안에 나타나는 헛된 영광이 주도되는 모습이라 할 수 있다.

 

 

이런 때에 우리는 교회의 짐을 져야 한다. 오늘 이렇게 혼탁한 시대에 주님께서 우리의 헌신을 요구하고 있다. 어렵고 힘든 짐, 바로 십자가를 질 것을 요구하고 있다. 피하는 것이 능사가 아니다. 담대하여 믿음으로 나에게 주어진 짐을 져야 한다. 믿음은 달려들지만 불신앙은 방임하거나 피한다. 믿음으로 행하여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성도들로 축복에 반열에 들어설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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