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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구조적 변천사(29)/ 한국교회 안의 에큐메니컬적 경향성

작성자항상 새롭게(김종신선교사)|작성시간15.01.17|조회수40 목록 댓글 0

 

이어서 계속

 

 

한국교회 안의 에큐메니컬적 경향성

 

 

 

1996년 한국 개혁신학회(회장: 김영한교수)에서 주최한 제1회 정기 학술 심포지엄에서 장로회신학대학(예장 통합측)의 이형기 교수는 한국 개신교의 나아갈 방향: 선교 신학의 입장에서라는 제목하의 강연에서 이렇게 주장하고 있다. 

 

 

이러한 세계교회 협의회의 결정은 비판적인 요소가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 본래적 위치로서의 선교개념과 시대적 요청에 의한 넓혀진 선교개념 모두가 폭넓게 수용되어야 하는 측면을 이제는 진지하게 검토해야 하는 시점이다라고 주장하였다라고 김효성목사는 자신의 저서에서 밝혀주고 있다.

 

 

이 교수의 주장은 매우 설득력이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듣는 모두를 납득하게 하는 매우 효과적인 언어처럼 다가온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시대적 대세라는 변천의 유희(遊戱)에 따른 수용력이지 기독교 본질에 충실하게 임하는 인간의 도리가 아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써 신실하게 하나님의 뜻을 고집해야 하는 자세에서 비롯되는 것은 아니다.

 

 

대세의 물결에 편승하는 것으로 우리 한국 기독교 사회를 겨냥해서 던져진 문제 해결를 위한 수용력에 지나지 않을 뿐이다. 이러한 차원에서 노력일 뿐이지 오히려 본래적 교회사명을 그대로 실천하겠다는 의지와는 더욱 멀어지는 매우 위험한 주장이라고 평할 수 있다.

 

 

이러한 신앙의 의지는 교회가 현실에 적응하고자 하는 의지에서 비롯되는 수용하기 좋은 견해이다. 세상의 물결에 편승하는 포용적일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좁은 길로 나아가야 하는 성도의 자세는 아니다. 성도는 진리를 섬겨야 하는 문으로 들어가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화려한 넓은 길을 포기해야 한다.

 

 

헌데 세속의 물결에 매력을 느껴서 타협점을 찾는 행위는 가장 교활함이 숨겨져 있는 교만의 소치(所致)라 할 수 있다교회 본연의 사명을 고수하겠다는 고백과는 거리가 먼 것이다. 진리의 골절이나 왜곡은 바로 이 같은 부드러운 수용에 의해서 이루어질 때가 무섭다. 그래서 진리의 왜곡은 직접적인 부정들에 의해서 저질러지는 것이 아니다.

 

 

바로 이러한 인간적 포용의 태도들에 의해서 더욱 괴리가 발생하는 것이다. 철저히 하나님 중심이 아닌 인간적인 합의점에서 진행되는 교회 기반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래서 본인은 이러한 점을 가리켜서 포용적 파괴라고 설명하고자 한다.

 

 

오늘 현대 시대의 특징이 그렇게 작용되고 있다. 그래서 현대를 불규칙적 변화가 주도하는 혼돈의 시대로 들어가고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포스트모더니즘 시대와 뉴에이지 등의 운동들은 이를 잘 대변해 주고 있다. 이러한 운동들은 기존 구조를 통해서 확산해 가는 것이다.

 

 

기존 기반들이 가지고 있는 조직력과 장악력을 활용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기존 사회가 여전히 움직이는 사회지만 자존적이지 못한 것이 이 같은 이유 때문이다. 그 중심적인 힘이 다른 방향으로 향하고 진행되기 때문에 정작 자기 기반은 점점 힘이 빠지고 무기력해져 가는 것이다.

 

 

, 합리적 방법이나 기존의 기반을 이용하여 이 같은 배경들을 추구해 가면서 자기 기반을 배제(排除)하는 성질이 되고 있다. 이러한 지구적 배경에서 교회적 배경도 영향을 받는 것이다. 가장 위험하게 하는 영향은 진리에 대한 인간들의 감성놀음이다. 애매모호한 환경을 조성하고 인간성의 문제를 부각해서 진리와 혼돈의 환경을 조성하는 것이다.

 

 

그러한 경향에서 본류가 잘못이 아니면 작은 주변의 왜곡들은 무시해야 한다는 주장들이 성립된다. , 마음 좋은 인자한 인간들의 성품을 통해서 진리의 왜곡현상이 갈수록 강해져 가고 있는 현실이 된 것이다. 만약에 이것이 진리를 지키고 섬기는 인간의 참 된 모습이라고 하자. 그렇다면 성경에 소개 된 수많은 선진들의 단호한 세상거부와 불협화음에 대해서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

 

 

주님을 적극적으로 따르고 섬겼던 선진들의 발자취를 보라! 매사에 적극적 하나님 옹호하는 행위들로 지상에서 가장 답답한 고집자(固執者)들이 되지 않았던가! 그 이유 때문에 세상과 조금도 타협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러한 처세들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 조금도 물러나지 않고 철저히 거부했다.

 

 

심지어 어떠한 상황이나 현실적 이유들 앞에서 모호한 태도들도 취하지 않았다. 심지어 과감하게 목숨까지 걸면서 걸어간 선진들의 처세들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가오늘의 기독인들과 비교해 보자! 배척 받을 수밖에 없는 지혜롭지 못한 자들로 치부 될 수밖에 없다. 즉 세상을 사는데 지혜롭지 못한 덜떨어진 사람들이었다는 사실이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런데 이러한 이유들이 성립되어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교회 현실이 세상 식으로 성공해가는 사람들이 주도하는 구조가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교회는 온통 정치적 성향이 주도하고 있다. ‘본질이 아니면 행정적 이유로 문제를 삼지 말자!’라는 슬로건이 합법적인 교회 물타기의 기술이 되어 교회를 오히려 유린하고 있다.

 

 

언제나 진리는 인간들이 조금씩 열어가는 합리적 이유들에 의해서 가장 많은 왜곡이 일어나는 것이다. 크고 작은 인간적 이유들, 인간들이 세우는 높고 낮은 직위들의 권위에 의해서 진리가 왜곡되는 힘이 되고 있다진리의 왜곡은 언제나 이러한 화려하고 달콤한 언어의 기술을 등에 업고서 확대되어져 온 것이 변질의 역사이다.

 

 

더욱이 거기에다 학술적인 방법까지 동원해서는 하나님의 역사와 말씀에 대해서 부정하고 배척하는 운동을 전개하는 것이다. 이러한 개념 채택은 당시대의 교회가 시대적 상황에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자유주의적 경향성이었다. 열국의 생활 습관을 그리워하여 하나님의 뜻을 언제나 변개 시켰던 이스라엘의 불법의 행위의 답습일 뿐이다.

 

 

왜냐하면 교회의 본질적 복음은 결코 사회 참여와 같은 동의 개념에서 풀어야 하는 영역이 아니다. 이 같은 영역으로 보고자 하는 노력들은 종교를 이용하여 사회 건설을 추구하는 어리석은 인간들의 선택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결코 하나님의 뜻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이 점을 깊이 유념해야 한다. 교회가 이러한 본연의 선교적 의무를 다하고자하는 힘을 잃어버릴 때가 하나님의 심판이 본격적으로 시작 되는 것이다. 우리 한국교회의 에큐메니컬적인 운동은 이미 교회의 본연의 선교 패러다임을 버린 지가 오래전의 왜곡 현상으로 나아오고 있다.

 

 

세계 에큐메니컬적인 운동의 영향도 우리 한국교회에 왜곡의 영향이 되었다. 허지만 우리 교회 내부적으로 일어난 에큐메니컬적 변질은 바로 교회 안에서 인간들의 종교적 탐욕과 맞물려서 일어난 면을 간과할 수 없다. 게다가 개인적인 명예로운 이유들이 인간의 종교 경향의 포용적이라는 이유들을 가지고 온 것이다. 기독교 안에서 그렇게 수종들면서 유명세를 얻고 싶은 욕망 말이다.

 

 

이러한 배경에서 사상적 유희(遊戱)에 의거(依據)해서 저질러 진 현실적 문제라 할 수 있다. 우리 한국교회가 이러한 현실에서 다시 각성하여 교회 본연의 선교개념으로 돌아갈 때, 비로써 회복되며 다시 영적 부흥이 일어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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