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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서 보시는 악인의 유형/ 사26:10

작성자항상 새롭게(김종신선교사)|작성시간17.03.28|조회수135 목록 댓글 1





하나님께서 보시는 악인의 유형

26:10

 



성경은 악에 대해서 정의를 이렇게 내린다. , 악한, 사악, 나쁜, 파괴, 남을 괴롭히고 비참하게 하는 것, 불경건, 불의, 악을 행함, 죄 있는, 악한 계획(고안), 우상, 타락하다. 나빠지다. 범법, 해독, 추잡한, 유해한, 음모, 무법한, 등으로 나타낸다.

 

구약에서는 대부분 가 주로 사용되었고, “라솨가 좀 사용되었다. 신약에서는 포네로스”가 거의 대부분 사용되었고, “카코스가 그 뒤를 이어서 사용되었다. 이것들 모두는 그 뿌리가 마귀로부터 시작되었음을 의미한다.

 

오늘 본문은 하나님께서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서 악인을 어떻게 규정하고 있는가를 보여주는 독특한 말씀이라고 할 수 있다. 본문에서 악인은 라솨로 사용되었다. 이 때의 악인은 죄를 범하는 자를 의미한다. 악을 행하고 있고, 그것이 죄인으로 정죄되고, 불경건한 자로 판명되는 자를 말한다.

 

본문에서는 이 같은 악인의 특징을 3 가지로 말하고 있다.


 

1. 은총을 입을지라도 의를 배우지 아니한다.



여기서는 두 가지 의미가 다가온다. 그 하나는 은총을 입을지라도와 다른 하나는 의를 배우지 아니한다라는 의미이다.

 

은총을 입을지라도이는 높은 사람이 아랫사람에게 호의를 베풀 때, 의미에서 오는 것이다. 높은 사람이 아랫사람에게 허리를 굽히고 머리를 숙여서 섬기는 것과 같은 차원에서 베푼 호의를 의미하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자비, 호혜, 은총을 베푸셨다는 의미이다. 하나님의 호혜나 은총은 자신의 아들을 우리에게 주시는 사랑의 호의가 아니었는가? 이는 하나님께서 친히 낮추셔서 우리에게 다가오셔서 우리에게 자비를 베푸신 그리스도의 사랑을 말하는 것이다.

 

왜인가?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의를 가르쳐 주시기 위함이라고 표현을 하고 있다.  이는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의가 무엇인지를 자신의 독생자를 통해서 우리에게 친히 보여주셨다는 의미이다. 그리스도의 의는 하나님을 만족시키신 의였다. 하나님의 진노를 얼마든지 누그러 트리신 의였다.


하지만 우리가 의를 배우지 아니하며라고 표현하고 있다. 이것은 인간의 영적 무지와 교만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호혜에 대한 거부이다. 그래서 반역하고 대립하는 사단적 경향성으로 나아가는 악인의 길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누가복음에서는 3번 씩이나 초청을 했다고 했지만 모두 거절 했다고 표현하고 있다. 심지어 주님께서 성도들의 억울한 눈물을 닦아 주려고 내려와서 보니 믿음을 찾아 보기가 힘들다고 말하고 있지 않는가? 이것이 악인의 전형적인 특징이다.


악한 성품이다. 하나님의 은총을 거부하는 타락한 악한 성품이다. 우리에게 의를 덧입혀 주시려고 스스로 몸을 구푸려서 겸손하게 죽음의 자리로 들어가셨는데 거부하고 눈을 감아 버리는 것이다.

 

은총을 입을지라도 의를 배우지 아니하는 것이다. 이는 교회 안에 들어 왔어도,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매 주일 들으면서도 의의 옷을 입고, 그 옷으로 매일 매일 새로워지려고 하지 않고 거부하는 인간의 간사와 사악함을 의미하는 것이다.

 

여전히 교회 다니는 횟수는 늘어나고 불어나는데 도무지 그리스도인으로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 것이다. 이것이 영적으로 교만하여 아직도 하나님께 굴복되지 않는 강팍한 육의 마음을 그대로 하고 있는 자들을 의미하는 것이다.

 

무언가 목적이 있고, 이유가 있어서 교회로 나왔기 때문에 세월만 흐르는 것이다. 도무지 은혜의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 현상을 말하는 것이다. 이러한 성도는 하나님의 은혜를 거부하는 가장 교만한 자이다.

 

 

2. 정직한 땅에서 불의를 행한다.


  

두 번째 악의 모습은, “정직한 땅에서 불의를 행한다”. 무서운 말이다. 첫 번째도 무서운 의미지만 이 두 번째도 가슴을 철렁하게 하는 의미이다.

 

여기서 정직이란 진리, 똑바름, 옳음, 참됨을 의미하는 정직이다. 그런데 정직한 땅이라고 한 것이다. 여기서 땅은 토지의 의미로써 확고하다라는 의미를 내포한다. 땅이 움직임 없이 언제나 그 자리에 요동침이 없이 그대로 있기 때문에 진리나 참 됨에 대한 상징성으로 확고함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몇 가지로 그 의미를 생각해 볼 수 있다. 먼저는 진리가 되시고 참 되신 그리스도 예수와 관련해서 복음의 땅이라 할 수 있다.

 

이를 구약에 대칭해서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함께 하셔서 다스리는 거룩한 땅으로써 시온을 의미했고, 그곳에 아브라함이 이삭을 드림으로써 구약의 성전과 이스라엘이 됨으로써 임마누엘의 땅을 의미하는 곳이다.

 

그러니까 복음 안으로 들어 온 땅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의 생명의 주가 되시고 왕이 되시는 그리스도의 마음을 받은 성도들이 모인 공동체, 즉 교회라고 말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신약에서 정직한 땅은 바로 참되신 그리스도를 믿는 구원받은 자들이 모인 공동체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곳에서 불의를 행한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왜곡하게 하는 차원에서 멍에를 메우는 것과 관계 된 불의이다. 선한 장소에서 악을 행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무겁게 하는 멍에와 관련이 있고, 왜곡하는 행위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왜곡 된 신앙으로 마음들을 무겁게하고 고통을 가중시키는 거짓 선지자들의 전형물이다. 이러한 거짓의 특징은 구원으로 인도해서는 고통으로 내모는 미혹의 신앙이라고 성경은 말해주고 있다. 그래서 삯군 목자를 성경은 말하고 있다.

 

이사야 선지자는 서두에서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너희가......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1:13)”에서 밝혔고, 15절에서는 이는 너희의 손에 피가 가득함이라”, 그 뿐인가? 16절에서 내 목전에서 너희 악한 행실을 버리며, 행악을 그치고...”라고 했다.


홉니와 비느하스는 구약 성도들이 하나님께 바칠 제사물을 가지고 오면 좋은 것은 갈쿠리로 찍어서 내빼서 감추었고, 성전에서 섬기는 여인들과 불의를 행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신약 고린도 교회 또한 어떻게 기록하고 있는가? 교회에서 음행이 성행했다고 고후 5장에서 밝히고 있다는 사실이다. 주님을 위한 교회 조직이 사탄의 회라고 기록까지 하고 있는 것을 볼 때, 거룩한 땅에서 악이 행해진다는 사실이다.

 

만에 하나 내가 그러한 현실에 놓이고, 그러한 현장을 만들고는 있지 않는지, 하나님의 진노의 잔이 부어지기 전에 돌이켜야 할 것이다. 우리는 주님의 거룩한 땅인 교회가 이러한 장소로 전락 되지 않도록 두렵고 떨림으로 주님 앞에 서야 할 것이다.

 

 

3. 여호와의 위엄을 돌아보지 아니한다.



마지막 세 번 째이다. 여기서도 두 가지 의미가 다가온다. 첫 번 째는 여호와의 위엄이다. 다음은 돌아보지 아니하며라는 부분이다.

 

첫째는 신앙의 유산이고 두 번째는 우리의 책무를 의미한다. 본문에서 강조하는 신앙의 유산은 하나님과 관계 된 부분이다. 이것을 여호와의 위엄이라고 말하고 있다.

 

33:21, “여호와는 거기서 위엄 중에 우리와 함께 계시리니이 때 위엄은 장엄한, 영광스러운, 존귀한 등의 의미로 사용되었다. 그런데 위엄이 나님과 관계해서 두려움, 경외심과 관계되고, 가장 높고 넓고 깊은 분이심을 의미한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두 가지 의미를 우리에게 주고 있다. 그 첫 번 째가 올라가는 것이다. 우리의 마음이 계속 하나님을 향해서 올라가는 것이다. 오르다 보니 그곳에 하나님의 장엄하심이 계신 것이다. 이는 우리 인생의 뿌리가 하나님으로부터 나왔다는 최상의 꼭대기를 향해서 올라가는 마음의 자세를 일컫는 것이다.

 

그래서 구약에서는 이스라엘의 기업 무를 자라는 배경을 통해서 신앙의 계승인 영적 질서, 하나님께로 이어지는 라인이 매우 중요했던 것이다. 이것이 신앙의 영적 자산으로써 산업체 곧 여호와의 기업이었던 것이다. 하나님을 섬기는 뿌리가 이어지는 그 최고봉에 하나님이 계신 것이다.

 

우리가 매순간, 매순간 주님을 생각하고 그 분께로 향하면 그곳에 하나님의 장엄하심과 영광의 모습을 뵈옵는 것이다. 이것이 두 번째로 엄위하신 하나님을 뵈옵는 예배의 순간이며 예배적 삶인 것이다.

 

이것은 우리의 신앙심이 성장하는 것과 관련이 있다. 여호와의 위엄을 돌아본다는 의미는 바로 영광의 하나님을 중심하는 신앙의 기원과 끝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래서 알파와 오메가의 신앙인 것이다. 그러한 배경 속에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우리의 신앙심이 자라고 성장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것을 돌아보지 않는다는 것이다. “돌아보다이것은 사역동사로 사용된 것이다. ‘주의해서 보다(주목하다)’ ‘올려다보다’ ‘만나다’ ‘준비하다’ ‘인지하다’ ‘존경하다등의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여기서 종합해서 살펴본다면, 어떤 무엇을 지향하는 것 같은가? 바로 하나님을 섬기는 그의 백성들의 삶의 자세와 관계가 있는 것이다. 파수꾼처럼, 제사장처럼, 선지자처럼 하나님을 어떻게 섬겨야 할 것인가?

 

이것을 요구하는 것이다. 바로 예배하는 자들의 삶이다. 하나님을 기다리고, 바라보며, 정성을 다하는 하나님을 섬기는 백성들의 예배적 삶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을 높이고, 경배와 찬양으로 영광을 돌리는 삶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께로 올라가는 삶이다. 신앙의 계보를 통해서 끊임없이 하나님께로 향하는 신앙의 질서인 것이다. 여기서 하나님의 영광의 보좌를 보고 그 앞에 서는 것이다.

 

거기에 하나님의 엄위하심이 계시고 그 떨림 앞에서 우리의 신앙이 성장하고 성숙해져 가는 현장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정말 그렇게 하는 자들이 없다는 것이다. ? 악인들이기 때문이다.

 

 

말씀을 맺자!


  

우리는 그렇게 하지 말자! 하나님께서 은총을 베풀어 주셨다. 자신의 독생자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의가 무엇인지를 알게 해 주셨다. 그런데도 의를 배우지 않고 행하지 않는 악인들이 되지 말자!

 

어떻게 거룩한 땅에서 악을 행하는 자들이 되고자 하는가? 어떻게 교회 안에 들어와서 입으로 찬송을 부르고, 말씀을 전하고 들으면서, 그 안에서 악을 행하고자 하는가? 하나님의 이름을 걸고서 가벼이 행동을 함으로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행하는 것인가?

 

우리의 삶은 매일 하나님을 향해서 올라가는 신앙이 되어야 한다. 이는 구약의 신앙의 계보를 의미하는 하나님으로부터 세상이 나왔다는 신앙의 질서를 의미함이요, 그것은 우리의 삶이 영광스런 하나님을 만나는 순간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이러한 삶이 매일 이루어져야 한다.

 

하나님을 만나는 매일의 삶이다. 그것이 내 신앙을 성장하게 하고 성숙되게 하는 하나님 중심 신앙의 삶이다. 이것이 돌아보는 예배자의 삶이 아닌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성도들은 오늘 본문과 같은 말씀을 통해서 겸비함이 있어야 할 것이다. 무조건 주님의 은혜라 하면서 자신을 돌아보지 않는다면 그 은혜가 자신의 마음에 갇히는 값싼 은혜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인들로 보시는 성도들로 오늘을 살아갈 수 있기를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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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백종관 | 작성시간 17.06.02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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